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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1 - 떠돌이 을불
김진명 지음 / 이타북스 / 2021년 6월
평점 :
내가 올해 가장 기대했던 드라마였으며 응원하며 시청한 <달이 뜨는 강>은 내게 두 가지를 남겼다.
하나는 평강(염가진)이라는 여성 주인공의 활약이고, 다른 하나는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다.
<달이 뜨는 강>은 그 유명한 <평강 공주와 바보 온달>이야기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고구려가 시간적/공간적 배경이 되었는데, 고위 귀족 앞에서 맥을 못추는 왕 때문에 고생하는 평강을 보며 고구려는 도대체 어떤 나라였기에 왕권이 이 모양인가! 하고 분노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드라마를 보면 볼수록 고구려가 궁금해졌던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 고구려를 향한 관심은 드라마가 종영된 지 몇 개월이 지난 지금 김진명 작가의 역사 소설 <고구려>를 읽는 것으로 이어졌다.

소설은 고구려의 위기를 알리면서 시작된다.
서천왕이 서거하고 장자 상부가 봉상왕으로서 그 뒤를 이었지만 상부는 왕의 그릇은커녕 겁도 많고 의심도 많은 소인배 중 소인배였는데, 자신도 그것을 아는지 역모를 크게 두려워하여 충신도 다른 왕족도 역모죄를 뒤집어 씌워 죽여버렸다.
그 희생자 중 한 명이 바로 안국군 달가였다.
안국군 달가는 서천왕의 동생이며 나라 최고의 영웅으로 존경을 받았는데 그게 상부의 열등감을 자극했는지 역모죄인으로 몰린 것이다.
그러자 안국군 달가는 신뢰하는 심복인 지략가 창조리의 조언을 받아들여 의로운 후사를 살리기 위해 순순히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독초즙을 받는다.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씀을 드려야 했기에 먼저 제 손가락을 잘라 용서를 구합니다.”
“말하게.”
(...)
“상부는 그 누구보다도 돌고 공을 우선 제거하기로 마음먹었을 것입니다. 선왕께서는 학문을 좋아하고 성정이 온순한 돌고 공이 차자(次子)인 것을 늘 안타까워하셨기에 옹졸한 상부는 깊은 질투를 키워왔습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을 반대했던 신하들이 돌고 공의 왕위 계승을 주장했던 걸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진의 사신으로 인해 돌고 공으로 향하던 칼끝이 대장군에게 먼저 겨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으음!”
“이것은 운명입니다.”
선언하듯 내뱉는 창조리의 말에 고구는 깊은숨을 토해냈다.
“하지만 대장군께서는 죽음으로써 후사(後嗣)를 살리는 것입니다. 의로운 후사가 이어진다는 건 바로 상부의 날이 줄어드는 이치입니다.”
“으하하하하!”
갑자기 안국군이 대소했다.
“으하하하, 하하하하!”
거침없이 웃어젖히던 안국군이 웃음을 뚝 그치고는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창조리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눈에서는 어느덧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형님께 이렇게 떳떳할 수가 있나!”
“고구려의 밀알이 되시는 겁니다.”
“내 기꺼이 웃으며 죽음을 맞으리라!”
안국군의 쉰 목소리는 고구와 창조리의 흐느끼는 소리에 묻혀갔다.
p.35-36
안국군 달가가 돌고를 지키기 위하여 자신에게 겨누어진 칼끝을 그대로 받은 한편, 돌고는 자신의 견제하는 형 상부 앞에서 넙죽 엎드리며 목숨를 보전하고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명민하고 의협심이 강하며 결기가 있던 을불은 그런 아버지 돌고가 영 못마땅했으며 자신이 따랐던 종조부 안국군 달가의 죽음에 분노했다.
어린 을불은 결국 상부 앞에서도 순간 분노를 숨기지 못했고, 그 때문에 돌고는 죽고 을불은 다루라는 이름으로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을불은 그제서야 아버지가 상부에게 비굴하게 군 것이 모두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수 년이 지나 을불은 소년에서 청년이 되어 떠돌아 다니던 중 적국 낙랑의 무예총위 양운거와 그의 딸 소청과 인연이 닿아 무예를 더욱 익히게 되는데, 양 부녀와 사이가 좋은 을불을 질투한 방정균이 을불을 첩자로 몰아 그들을 떠나게 된다.
이때 조용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 양운거와 소청이 자신을 쉬이 잊도록 방정균의 계략대로 자신이 첩자라는 근거가 되는 편지까지 남기는 것을 보고 을불의 그릇이 크고 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을불은 그제야 방정균이 지금까지 자신으로 인해 무척 괴로워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는 눈앞에서 소리도 없이 사랑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을불은 한참을 고심하다 말했다.
“떠나지. 그런데 떠나기 전에 편지를 한 장 써야겠어.”
“무슨 편지를......? 음, 그렇게 하게.”
정균은 을불이 어떤 글을 남기든 그가 떠나고 난 후 그냥 없애버리리라 생각했다. 쓸데없는 감정이 담긴 편지를 보면 스승 부녀는 그를 잊기 어려울 것이었다.
잠시 후 글을 마친 을불이 정균을 돌려세워 편지를 건네주었다. 편지는 그가 볼 수 있도록 펼쳐진 채였다.
낙랑 간세 다루가 보고함. 낙랑의 진법은 팔괘진과 차륜진이 자유자재로 결합하는.......
을불이 쓴 글을 읽어 내려가던 방정균이 놀라 물었다.
“이건 뭐지? 왜 이런 이상한 글을 남기는 거지, 마치 진짜 간세처럼?
“소청의 마음이 아플 거야. 이런 거라도 있으면 잊기 쉬울 테지.”
을불의 속 깊은 배려에 방정균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찡해왔다.
“다루,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어차피 나는 소청과 무엇도 이룰 수 없는 사람이야. 하지만 소청은 분명 좋은 여자지. 정균, 자네가 행복하게 해주게.”
간세 아닌 간세가 되어 을불은 그렇게 낙랑을 떠났다.
p.111-112
이런 을불이 다양한 인연을 만나 성장하니, 그가 안국군 달가를 따르던 이들과 함께 일을 도모하여 종조부 안국군 달가와 아버지 돌고의 원수이자 사치와 폭정으로 고구려 백성들을 고달프게 만드는 폭군 상부를 끌어내리는 길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 소설 <고구려>를 읽는 것은 마치 사극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특히 안국군 달가와 창조리의 대화나 동맹제 비무 대회에서 함께 겨룬 것을 계기로 하루만에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된 을불과 여노 두 영웅의 맹약 장면은 벅찬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선견지명과 두둑한 배포를 가진 고구려 여인 주아영과 그에게 은혜를 입었으며 그때 지혜롭고 아름다운 주아영에게 빠져버린 북쪽 모용부의 젊은 족장 붉은 머리 모용외 등, 주인공 을불뿐만 아니라 다른 등장인물들 또한 뚜렷하게 각자의 매력이 있어서 영상을 보는 것마냥 그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절로 그려지고, 또 <고구려>는 그런 이들의 관계성 맛집이라 어느 하나 흥미롭지 않은 장면이 없었다.
“말은 내줄 수가 없습니다.”
“얘야, 우리한테 마필은 충분한데 어찌 그러는 것이냐?”
“우리는 장사꾼입니다. 뻔히 손해를 볼 일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게 무슨 소리냐?”
“오직 죽으려고만 발버둥 치는 멍청이들에게는 말 두 필도 아깝다는 말씀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모용외가 분기에 찬 외침을 터트렸다.
“이 모용외가 고작 말 두 필을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구나. 내 비록 은혜를 입었다고는 하나 이 수치를 어찌 견디겠는가!”
“은혜를 입어 살아난 목숨을 보중치 않고 내던지려는 마당에 어찌 또 수치를 걱정하시오?”
“이놈, 그 입을 다물라!”
(...)
칼이 긋고 지나가자 두건이 떨어짐과 동시에 말아 올렸던 긴 머리가 출렁 쏟아져 내리며 사내의 본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모용외의 누에 그간 눈여겨보지 않았던 사내의 얼굴이 자연스레 꽉 들어와 찼다.
“여인이었는가!”
p.207-208
“부디 나에게 가르침을 주시오. 다시 한번 모용부의 깃발이 휘날릴 수 있도록 말이오.”
모용외를 지켜보던 아영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우선 극성을 피하세요. 외곽에서 흩어진 부족민들을 모으며 도적들을 토벌하여 수하로 삼고 그들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우세요. 앞으로 당신이 다시 일어서기까지 필요한 식량과 철제 무기를 가져다드릴 거예요. 대가는 훗날 받도록 하지요.”
모용외는 무릎을 꿇은 채로 머리를 땅에 찧었다.
“은인의 이름은 무엇이오?”
“주아영이라 합니다.”
p.211-212
“나 모용외가 천하를 얻는다 한들 그녀를 얻지 못하면 결코 황제라 할 수 없을 것이다.”
p.200
그렇다보니 300여 페이지는 술술 넘어갔고, 드라마 한 편을 보고나면 다음 편을 방송하는 날만 기다리게 되는 것처럼 지금 나는 <고구려> 2권을 읽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고구려 #김진명 #이타북스
<이 리뷰는 서포터즈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