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의 집
파코 로카 지음, 강미란 옮김 / 우리나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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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생각난 사람


아들이 생기고 나서부터 이상하게 아버지가 자꾸 떠오른다.

은우를 안고 있으면 문득 언젠가 나를 안고 있었을 그 사람의 팔을 생각하게 된다.

그땐 몰랐다. 그가 왜 그렇게 말이 없었는지, 왜 그렇게 고집스러워야만 했는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한다고 착각했지만 사실은 이해하려 한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 아버지는 거대한 존재였다. 무엇이든 고칠 수 있었고, 무엇이든 참을 수 있었던 사람.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된다. 그 강해 보이던 사람도 결국은 한 인간이었다는걸.

어느 날 문득 보이는 좁은 어깨, 축 처진 등. 그 장면이 늦게 도착한 이해처럼 마음에 걸린다.



2. 아버지의 집, 그곳에서의 기억


파코 로카의 그래픽 노블 『내 아버지의 집』은 아버지가 남긴 집을 정리하는 세 남매의 이야기다.

만화책, 그러니까 그래픽 노블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글보다 그림이 많다는 것이 더 좋을 때가 있는데 아마 이런 경우를 보고 말하는 것일 거다.

창문을 통과하는 햇빛, 비어 있는 의자, 한때는 소란스러웠을 식탁.

그 장면들이 긴 설명 그대로 보이는데 나는 이 장면들이 참 좋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형제자매는 집을 팔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집을 정리하는 일은 단순한 부동산 문제가 아니다.

서랍을 열면 어린 시절이 나오고, 고장 난 수도꼭지를 보면 아버지의 손이 떠오른다.

집을 처분하는 것이 곧 추억을 버리는 일처럼 느껴지는 순간 그들은 그들의 손을 멈추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 자녀와 아버지의 친구,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에 각자의 추억을 가진 인물들이 하는 추억들은 꽤나 섬세하다.

그리고 이들은 죽음이라는 사건을 다룸에도 슬픔이라는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각자의 이야기를 전한다.

천천히 천천히. 그렇게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전해진다.



3. 이해는 언제나 늦게 온다


서두에도 이야기했듯 책을 읽는 내내 자꾸만 내 아버지가 겹쳐졌다.

그가 왜 그렇게 집의 이곳저곳을 고치고, 필요 이상으로 꼼꼼하게 굴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에게 집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가족을 지키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말로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사람이 선택한 방법.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아들을 안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어느새 그와 닮은 나를 보게 된다.

말수는 적고, 표현은 서툴고, 대신 다른 방식으로 책임을 지려한다.

그걸 깨닫는 순간, 괜히 가슴이 먹먹해진다.



4. 내 아버지의 집


<내 아버지의 집>을 덮고 내가 자란 집을 떠올려 보았다.

벽의 얼룩, 오래된 가구, 낡은 문고리. 모든 것이 누군가의 시간을 품고 있다.

그저 숙식을 해결하는 장소인 것 같았던 집은 기억이 눌어붙은 자리였고 차마 표현하지 못한 사랑이 말없이 남아 있는 공간이었다.


어쩌면 자식에게 아버지는 집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늘 거기 있는 줄 알았고,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라 믿었던 사람.


아들이 생기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감정들이 있다.

늦게 도착한 이해, 뒤늦은 연민, 그리고 조금은 아픈 감사.


다음 주에 집에 가게 되면 괜히 집 안을 한 번 더 둘러볼 것 같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의 어깨를 한 번쯤 주물러 드려야겠다.


* 이 작품은 바르셀로나 그래픽 노블상, 이탈리아 루카 그래픽 노블상, 일본 우수작품상 등을 수상하며 해외에서도 큰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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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의 기록
존 버거.장 모르 지음, 민지현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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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는 눈


<급류>의 작가 정대건은 창작자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매일 보던 것을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눈,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계 앞에서 다시 멈춰 설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능력을 위해 이 책 <세상 끝의 기록>을 권한다.

어떤 콘텐츠를 분석하거나 해석하기 이전의 시선, 무언갈 알아서 설명보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경탄이 먼저 터져나오는 상태 말이다.

이 책은 여행을 통해 독자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 보다, 잊고 있던 어떤 것을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러고 보면 여행이라는 건 새로운 장소로의 이동이 아니라 익숙한 세계를 다시 바라보는 나의 시선의 변화를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여행으로 저자들은 우리를 안내한다.



2. 이방인의 시선, 그러나 그리움이 스며드는 풍경


책은 다큐작가 장 모르가 세상의 변방을 여행하며 찍은 사진과 존 버거의 글을 함께 엮은 책이다.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장 모르의 사진은 그 대상으로부터 늘 한 걸음 물러나 있다. 그는 지나치게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멀찍이 도망치지도 않는다. 이 미묘한 거리는 사진 속 인물과 풍경을 그냥 스쳐가는 소비의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나와 다른 지구 어느 곳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삶으로 남겨둔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는 늘 이방인의 시선이 담겨 있으면서도 따뜻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설명하기 힘든 그리움 같은 감정마저 은근히 배어 나온다.


그의 사진을 설명하는 존 버거의 글은 그 감정을 확대하지 않는다. 그저 독자가 그 사진 속에 가만히 서 있을 공간을 만들어준다.

흥미로웠던 건 그의 여행지 중에는 평양도 있다. 잘지내고 떠나기 전 사진을 많이 빼앗겼다고도 기록되어있는데 그래서 몇 장 남아있지 않지만 그가 북한에서 찍은 사진들에는 괜히 마음이 찡해지기도 했다. 가까이 두고도 가지 못하는 나라. 이 사진에 담겨 있는 이들은 지금쯤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3. 여행은 장소가 아닌 기억으로 완성된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각자의 기억으로 미끄러진다. 낯선 도시의 골목을 통해 문득 오래전 내가 살던 골목의 공기와 냄새, 함께 뛰놀던 이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그 얼굴들을 떠올리다 보면 이제 이 사진들이 정작 어디서 찍혔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게 된다.

작가의 카메라가 머물던 그 시간과 장소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계속 되짚어 보게 된다.

그래서 <세상 끝의 기록>은 여행기나 사진집으로 퉁치기는 꽤 많은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존버거도 장모르도. 대가의 이야기는 확실히 다르다.

좋은 책이 늘 그렇지만 이 책도 한번의 호흡에 다 읽기에는 생각할게 꽤 많다.

그리고 우리가 다녀올 기억 속의 그 장소도 꽤 많다.



4. 책을 덮은 뒤에 시작되는 또 하나의 여정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아주 먼 곳까지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매일 보던 풍경인데도 무언가 낯설게 느껴졌는데 그 낯섦이 이상하게 반가웠다.

세상 끝의 풍경. 이 책의 제목이다. 낯설지만 반가운 공간.


당신에게 세상 끝의 풍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구 반대편의 황량한 풍경일 수도, 이미 지나온 삶의 어느 평범한 하루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면. 그래서 오늘 당신의 삶을 좀 더 새롭게 보고 싶다면,

그리고 천천히 읽을 책을 원한다면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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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난 세계 - 우리 세계에 뚫린 구멍에 관한 이야기
김지웅 지음 / 책과나무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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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남아 있는 구멍에 대하여


<구멍 난 세계>

제목이 너무 직접적이어서 제법 두께 있는 책을 한참이나 째려보았다.

제목이 말하는 구멍이 무얼 뜻하는지 그때는 알 수 없었지만 문득 그때 내 마음에 덩그러니 난 구멍을 들켜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랬다. 우리는 대개 괜찮은 척 살아가지만 사실 누구나 하나쯤은 설명하지 못할 결핍을 안고 있다.

애써 이름 붙이지 않거나 지금도 최선을 다해 외면하고 있을 뿐 마음 어딘가에는 크든 작든 구멍 하나쯤은 존재한다.


책은 그 구멍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처음부터 자신의 삶을 가장 크게 생채기 낸 그 구멍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상실, 패배, 단절, 이별. 피하고 싶지만 결국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것들.

이 구멍은 특별한 이들에게 찾아오는 삶의 예외가 아니라 오늘 당신의 삶에도 찾아올지 모를 것들이다.



2.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상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시간


이야기는 대학 졸업 후 삶을 찾아 떠난 아프리카 여행 중 주인공이 함께 떠난 친구를 잃는 사건에서 시작된다.

예고도, 준비도 없이 찾아온 비극에 별생각 없이 책장을 넘기다 '헉'하고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랬다. 상실은 언제나 그렇게 예고도 없이 무례하게 찾아온다.


삶을 찾아 시작된 여행은 삶을 망가뜨리며 멈춘다.

그리고 이 사건은 개인의 불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사람의 죄책감, 그를 둘러싼 관계의 균열,

그리고 그곳에 살고 있던 선량한 사람들의 삶까지 함께 무너뜨리며 주인공의 삶을 끝까지 몰아붙인다.


숨쉬기조차 버거울 고난 앞에 성경의 욥이 떠올랐다.

마치 인간 이상의 존재들끼리의 내기 혹은 장난에 까불리고 죽어 나가는 사람들처럼 속수무책인 인생 앞에 그는 묻는다.


이 지옥 같은 풍경도 삶인가.

삶은 계속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3. 구멍의 의미


주인공 버든은 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 여행을 계속한다.

이 여정에서 ‘구멍’은 점점 의미를 바꾼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공허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게 만드는 틈이 된다.

주인공 버든과 친구 채트인의 관계 역시 그 구멍을 통해 다시 정의된다.

물론 이들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는다. 대신, 불완전한 상태로 서로를 이해하는 법을 배운다.


우리가 살면서 잃게 되는 것들이 있다. 관계, 꿈, 희망 같은 것들.

그리고 이렇게 잃어버린 대부분의 것들은 회복되기를 바랄 뿐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그것들을 져버린 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인지 그 상실을 안고 함께 살아갈 것인지.

주인공은 후자를 택한다. 그 상실을 안고 무겁게 남은 걸음을 걷는다.



4. 낯선 풍경이 우리 안의 공허를 비출 때


아프리카라는 배경은 단순한 이국적 장치가 아니다.

빈곤과 재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복잡한 얼굴들이 주인공이 지나가는 걸은 곳곳에 묻어있다.

그리고 책은 묻는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 땅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나의 삶을 그저 분리하고 그저 '저들과 다름에 감사하다'며 나의 삶을 채우고 있지는 않은지.


이 지점에서 <구멍 난 세계>는 개인 서사를 넘어서 우리 세계의 구멍을 응시한다.

세계의 균열과 개인의 상처가 겹쳐지는 순간 구멍 너머 타인의 삶이 보인다.

나의 고통과 다르지 않은 삶이, 나와 같이 고통 속에 있고 도움을 청하는 손길을 내밀고 있는 이들의 인생이 보인다.

그랬다. 우리는 모두 그 구멍으로 연결되어 있고, 누군가의 상실과 상처는 언제든 나의 질문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5. 구멍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기대치 않고 어느 정도까지 읽다 잠들어야지라는 마음으로 책을 펴들었는데 다 읽지 않고는 잠들 수 없었다.

그리고 한동안 생각했다.


나는 지금 내 안에 난 이 구멍을 얼마나 정직하게 바라보고 있는가.

자꾸 피하려 하거나 비웃음으로 이 시간이 지나기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외부의 누가 나를 이 구멍에서 꺼내주기를 바라며 자꾸 도움을 요청하고만 있지는 않은가.


어쩌면 나뿐 아니라 누구라도 이 질문 앞에서 멈칫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바라기는 이 책을 읽는 당신이 자기 안의 구멍을 천천히 그리고 깊게 들여다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처럼 그 순간을 두려움으로 비켜 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연결로 이어갔으면 좋겠다.


상실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완전해지지 않은 채로. 우리는 결코 이 구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이 구멍은 끝이 아니라 다시 사람에게로, 내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통로일 수도 있다.

이는 오롯이 그 구멍을 바라보는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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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의 기록
존 버거.장 모르 지음, 민지현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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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는 눈


<급류>의 작가 정대건은 창작자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결국 매일 보던 것을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눈,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계 앞에서 다시 멈춰 설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이 책<세상 끝의 기록>을 권한다. 세상을 분석하거나 해석하기 이전의 시선, 설명보다 경탄이 먼저 도착하는 상태 말이다. 이 책을 펼치면 독자는 무언가를 배우기보다, 잊고 있던 어떤 것을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여행이란 결국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는 일이 아니라, 익숙한 세계를 다시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라는 사실을 이 책은 상기시킨다.



2. 이방인의 시선, 그러나 그리움이 스며드는 풍경


다큐작가 장 모르가 세상의 변방을 여행하며 찍은 사진과 존 버거의 글을 함께 엮은 책이다. 장 모르의 사진은 늘 한 걸음 물러나 있다. 대상에 지나치게 다가가지도, 멀찍이 도망치지도 않는다. 그 미묘한 거리는 사진 속 인물과 풍경을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삶으로 남겨둔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는 늘 이방인의 시선이 담겨 있으면서도 따뜻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래 머물다 떠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리움 같은 감정마저 은근히 배어 나온다. 존 버거의 글은 그 감정을 확대하지 않는다. 읽는 이가 스스로 그 여백을 느끼도록 내버려 둔다.

떠나기 전 사진을 많이 빼앗겼다고도 기록되어있는데 그의 여행지 중에는 북한도 있다. 몇 장 되지 않지만 그가 평양에서 찍은 사진들에는 괜히 마음이 찡해지기도 한다. 가까이 두고도 가지 못하는 나라. 이 사진에 담겨 있는 이들은 지금쯤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3. 여행은 장소가 아니라 기억으로 완성된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독자는 어느새 자신의 기억으로 미끄러진다. 낯선 도시의 골목을 보다가, 문득 오래전의 여행의 공기와 냄새, 함께 걷던 사람의 얼굴이 겹쳐진다. 책을 읽다보면 이 사진들이 정작 어디서 찍혔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다. 다만 작가의 카메라가 머물던 그 시간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래서 <세상 끝의 기록>은 여행기라기보다는 어떤 기억의 기록에 가깝다.

좋은 사진집이 늘 그렇지만 이 책도 한번의 호흡에 다 읽히지는 않는다. 어쩌면 한 장을 보고 덮었다가, 며칠 뒤 다시 펼치게 되는 책이다.

그 느린 리듬 속에서 독자는 그의 발걸음과 겹쳐지는 자신만의 여행과 삶의 여정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4. 책을 덮은 뒤에 시작되는 또 하나의 여정


책을 덮으니 아주 먼 곳까지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매일 보던 풍경인데도 잠시 낯설게 느껴졌고, 그 낯섦이 이상하게 반가웠다.

세상의 끝의 풍경. 이 책의 제목이다. 당신에게 세상 끝의 풍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구 반대편의 황량한 풍경일 수도, 이미 지나온 삶의 어느 평범한 하루일 수도 있다.

지금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면. 그래서 오늘 당신의 삶을 좀 더 새롭게 보고 싶다면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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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독서 교양 100그램 1
김영란 지음 / 창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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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영란의 <인생 독서>


김영란 전 대법관이 쓴 <인생 독서>는 창비에서 나온 얇고 가벼운 ‘교양 100그램’ 시리즈 중 한 권이다. 두꺼운 책, 큰 책만 보다 일단 책을 집어 드는 것 자체가 부담이 없다. 하지만 이 작은 책에 담긴 내밀한 이야기들은 그가 왜 평생 ‘쓸모없는 공부’에 매달렸는지를 조근조근 우리에게 들려준다.

김 전 대법관은 법률을 다루며 살았지만, 판결문에는 도움이 안 되는 시와 소설을 주로 읽었다고 고백한다. 시나 소설의 아름다운 문장은 감동을 줄 뿐 판결문을 쓰는 데는 무용했고, “문학 작품을 판결문에 인용하는 ‘파격’은 허용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시력이 나빠질 때까지 독서를 멈추지 않았고 끝내 이를 포기하지 못했다고 회고한다.



2.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 된 독서


김영란에게 독서는 “나 자신을 찾는 공부”였다. 그는 어린 시절 책 읽기가 사고의 틀을 형성해 주었고, 사춘기에는 자신의 한계를 일깨워 줬으며 성인이 된 뒤에는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그는 말한다. 독서가 직업적 성공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진 않았지만, 그 자체로 자기를 닦는 과정이었다고.

한 인터뷰에서 그는 책을 통해 세상을 납득하는 도구를 얻었고 상처를 치유했으며, 책을 통해 “경의를 배웠다”고 말했다. 이런 고백은 독서가 추상적인 교양이나 단순한 취마가 아니라 그의 삶에서 얼마나 구체적인 의미를 지녔는지 보여준다.



3. 쓸모없는 공부의 쓸모


<인생 독서>의 중심 키워드는 ‘쓸모없는 공부’다. 그는 일견 쓸모없어 보이는 독서가 실제로는 자신의 삶과 세계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을 줬는지 이야기한다. 그는 독서를 “돈을 버는 일이 아니기에 쓸모없다”고 표현하면서도, 그 무용한 공부가 오히려 자신을 치유하고 성찰하게 했다고 말한다. 책을 읽는 행위는 반복적인 명상이나 수행과도 같아 한 장 한 장 넘기며 마음을 가다듬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독서는 나에게 수행”이라는 그의 고백도 제법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작가는 3대에 걸친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를 따라가면서 루이자 메이 올컷과 브론테 자매, 버지니아 울프, 도리스 레싱, 마거릿 애트우드, 프란츠 카프카, 밀란 쿤데라, 커트 보네거트, 안데르센 등 다양한 작품을 읽으며 자신의 내면을 비춰 보인다.

그는 이들 책을 통해 세계의 불의를 발견하고, 상상력이 어떻게 한계를 뛰어넘는지를 체험한다.



4. 독서가 준 위안과 공감


책은 추억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서가 그의 인간적 품성과 공감 능력을 어떻게 길러주었는지를 담담히 보여준다.

TV가 없던 어린 시절 책만이 유일한 놀이터였던 그는 책을 늘 집안 곳곳에 놓아두고 틈만 나면 읽었고 여행에 가져갈 책을 옷보다 더 신중하게 고를 만큼 열혈 독서가였다고 한다.

그리고 책은 슬플 때마다 위로가 되었고, 글을 쓸 때 적확한 문장과 표현을 찾는 데 길잡이가 되었으며 책을 통해 공정함과 공감을 배우면서 어쩌면 판결에 더욱 균형 잡힌 시각을 갖게 되었다고도 말한다.

이런 개인적 기억과 독서 경험의 교차는 <인생 독서>를 단순한 독서 목록이 아니라 한 인간의 성장 기록으로 만든다.



5. 궁극적으로 나를 위한 독서


독서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는 결국 “독서는 궁극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라고 귀결된다. 그는 법률가로서, 사회적 인물로서, 그리고 독자로서 끝없는 기대와 압박 속에서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책을 읽으며 자신을 찾았다. 그는 믿었다. 독서는 세상 기준으로는 보상이 없는 일일지 모르지만 누구에게나 필요한 내적 근육을 키워준다고.


짧은 책이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인생 독서>는 무겁지 않게 읽히면서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짧아서 그런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작가의 생애가 포개져 있는 느낌이다. 책 속에는 삶의 기쁨과 상처, 성장과 후회가 스며 있고, 무엇보다도 “책을 읽는 것이 그 자체로 저를 닦는 것”이라는 진심 어린 고백이 있다. 책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그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독서 경험을 떠올릴 것이고 아직 독서를 시작하지 않은 이라면 “인생을 지탱하는 기둥”으로서 책을 만나보라는 따뜻한 권유를 듣게 될 것이다.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책린이라면 입문서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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