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미술관 -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이야기
이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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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필연적으로 자신이 살던 시대의 공기를 작품 안에 담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략) 마찬가지로 그림은 자신을 잉태한 시대를 스스로 고발하기도 한다.(p.9)


한겨레의 책은 재미있다. 그러고 보니 나의 대학시절은 늘 이런 유의 책으로 가득 했었다. 맑스, 니체, 존 롤스, 헨리 조지, 홍세화, 박노자, 김규항, 박원순의 책들을 접하며 내 사고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는 않은지 늘 점검했고, 모두를 위한 모두의 자본에서 소외된 이들을 기억하려 했다. 그들의 편에서 살고 싶었고, 돈에 버림받은 이들의 편에서 함께 울고 웃고 싶었다. 내 청춘은 그랬다.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고 사회복지와 철학을 공부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군은 꽤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런 나와 달리 대기업이나 공사, 공단, 금융, 외국계 기업 뭐 하여튼 꽤 잘나가는 회사에 취업한 친구들이 실제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들과 내 직업은 비교되기 시작했다. 부러웠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차이 나는 월급에서 오는 현타에 나는 대학원으로 도망을 갔고 그때부터 나는 내 청춘의 이상향을 최대한 지켜내면서 사회, 경제적으로 나쁘지 않은 직업을 찾아 헤맸다. 교수나 연구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직업은 한정적이었을 뿐더러 경쟁도 치열했다. 교수님들은 유학을 권했고 나는 돈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의 최대치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지금, 내가 꿈꾸던 이상들은 이제 추억 속에 예쁘게 박제되었다.


<기울어진 미술관> 제목부터 설마 했는데 역시나 책은 아래쪽으로 기울어진 세상의 끝에서 미술을 통해 사람을 바라본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책이라면 '이 그림은 어떤 상황에서 그려졌고 그래서 이 그림이 뜻하는 바는 무엇이다'로 끝나겠지만, 저자는 거기서 한걸음 더 들어가 그림 속의 시대와 그 안에서 소외되어 있는 사람을 발견해 불러낸다. 


여성, 아이, 성소수자, 장애인, 유색인종, 원주민, 성소수자 등 지금도 세상 끝자락에 있는 이들은 거장의 그림 속에서도 여전히 차별받고 있었고 고통받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그림을 그린, 그리고 소비하는 우리에게 그들은 있으나 마나 한 배경에 불과했고 사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24장의 그림을 통해 이런 우리를 고발한다. 처음에 꽤 빠르게 읽어내려가고 싶었는데 책장을 넘길수록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되고 결국에는 울컥하고야 말았다. 그곳에는 20대의 내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과 함께 살겠노라 다짐하던 어제의 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림은 소위 가진 자의 예술이다. 유명세를 탄 화가도 그림을 의뢰한 이들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부자라 불리며 권력의 이야기를 돌려 하곤 한다. 이 커넥션을 예리하게 뚫어낸 이 작업이 새삼 고마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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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울수록 풍요로워진다 - 삶을 회복하는 힘, 팬데믹 이후 우리에게 필요한 세상
목수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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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의 혹독한 경험이 인간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일깨운 것이다. 신속 정확 배달보다 절실한 삶의 요소는 ‘건강한 삶의 온기’라는 사실을(p.45)


영화 <어바웃 타임>은 쿨타임 차면 꼭 다시 보고야 마는 몇 안 되는 영화 중 한편이다. 시간 여행을 테마로 하지만 결국 영화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다 좋고 사랑스럽지만 보면 볼수록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오랜 주택, 아마 몇 대가 살아왔을 것 같은 시골의 작은(사실 작진 않다) 집이다.

영화를 볼 때마다 그 집이 부러웠다. 그 가족은 대대로 그 집에 살아왔을 것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가 자라고 그 윗세대가 떠나는. 오롯이 그 공동체만 아는 아주 오래된 공간에는 할아버지의 아버지의 그리고 주인공의 추억과 기억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이들은 이 집을 부수고 새로 짓지 않았다. 대를 이어오며 손때 묻은 공간을 보존하고 이어왔다. 이 기억은 아마도 아들의 또 아들에게까지도 이어질 것이며, 이러한 기억들이 쌓여 가족이 되고 마을이 되며 공동체의 역사 즉 삶이 될 것이다.


책은 프랑스와 한국 사회를 비교하며 우리에게 없는 것과 프랑스에 있는 것, 혹은 프랑스에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있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국의 좌와 우는 거의 만날 수 없는 어떤 사이가 되어버린 듯하지만 유럽에서는 아주 가끔 더 큰 것을 위해 좌와 우가 만나기도 한다.


좌파란 무엇보다 예리한 비판의식을 가진 사람을 뜻합니다.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현상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눈(후략) (p.28)


저자는 이러한 시각에서 세상을 톱아본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것이라 넘어가기에 우리 사회에는 좋지 않은 것이 너무 많고 목소리 큰 이들은 그것을 좋은 것이라 말하기를 강요한다. 선거하라고 만든 다수결의 원칙은 이 모든 것에 적용되어 우리 사회의 소수는 늘 자기 목소리를 숨기거나 감추고 살아야 했다. 이것을 불편하다고 말하기 시작할 때 변화는 시작된다. 지금은 프로불편러라는 단어까지 생기며 불편한 이들을 또 불편해하는 모양이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불편하다고 말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잘못된 자리를 돌아보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프랑스 사회의 변화는 이것을 이야기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이를테면 우리나라가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펴는 여러 가지 정책 중 정작 여성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을 별로 없다. 거꾸로 프랑스는 출산율이 낮은 이유 즉 여성들이 어떤 이유로 출산을 거부하는지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결혼부터 이야기하자면 '여성의 선택권이 확보될 때, 더 많이 출산한다'라는 것이었고 프랑스는 다른 국가들과 달리 출산율의 반전을 이루어 냈다. 이런 예들이 책에는 수없이 나온다. 그 다른 나라의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면 부러움과 동시에 ‘왜 우리는!!’이라는 질문이 용솟음친다. 세계관의 확장은 마블 영화에서 쓰기보다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물론 우리는 계속해서 발전해 왔다. 기술의 발달로 갈수록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다지만 환경, 인권, 복지 등 기술을 넘어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다. 이는 부수고 새로 지을 수 있는 카테고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자꾸 우리의 것을 버리고 새로 만들자고 말한다. 마을을 버리고 아파트를 짓자고 하고, 우리가 아니라 내가 먼저라고 말한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세태에 날개를 달아주었고 그렇게 우리의 삶은 매일 퍽퍽해져갔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은, 책의 저자는 묻는다. 왜? 그들은 끊임없이 묻고 논쟁한다. 그들은 스스로 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물론 저자의 이야기 중 몇몇은 개인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있다.(이럴 때 우리는 논쟁을 하고 머리를 맞댄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우리 모두가 공동체의 주인으로 함께 살아갈 용기를 내자고 하는, 우리 공동체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유산들을, 그 인간다움을 지켜내고자 하는 그의 목소리에 동참하길 원하고 그렇게 더 나은 세상으로 나갈 준비는 된 것 같다.


이제 당신에게 권한다. 저자는 분명한 소리로 말한다. 시끄러울수록 풍요로워진다고. 당신도 이 풍요로운 세상에 함께 하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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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동남아 - 30개의 주제로 읽는 동남아시아의 역사, 문화, 정치
강희정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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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첫 해외여행, 내 여권에 찍힌 첫 출입국 도장의 주인은 태국이었다. 파타야가 태국의 도시인지도 몰랐던 내가 내린 낯선 땅. 방콕 수완나품 국제공항의 큰 유리 문을 밀고 나서자마자 나를 맞은 뜨겁고 습한 바람과 외국 사람들, 아니 내가 외국인이 되어버린 낯선 공간의 뒤바뀜은 꽤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아있다.


방콕을 걸으며 알게 된 태국과 미얀마 간의 300년간의 전쟁, 이 전쟁 탓에 태국 남자들은 태어나자마자 군대로 끌려가 죽을 운명이었다. 사람들은 남자아이를 여장을 시켜 여자아이처럼 키웠고 그렇게 자란 아이는 정말로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곤 했다. 전 세계에서 LGBT에 가장 열린 나라 태국은 이런 문화적 환경에서 만들어졌다.

말로만 듣던 카오산 로드에 선 순간도 꽤 잊기 힘든 순간이다. 지금이야 한국 땅 어느 곳에서 나 열리지만 그때만 해도 생소했던 버스킹이 카오산 로드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서서 춤을 추고, 각 나라의 동전들을 기타박스에 던져 넣었다.


즐거운 사람들, 설렘이 가득한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문득 나의 20대가 아쉬워졌다. 내 20대의 대부분의 기억은 도서관이다. 토익공부 열심히 하고 뭐 그러면 자연스럽게 좋은 직장 가지고, 좋은 직장 가지면 여행도 많이 가고 그렇게 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곳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이들은 나와 생각이 많이 달랐다. 직장, 취업, 안정. 누군가가 정해놓은 틀안에 억지로 나를 맞추고 나 좀 괜찮다고 말하는 모지리가 얼마나 답답이인지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 내 청춘이 아까워서 울었다.



2. 베트남 출장을 가라길래 아프리카와 달리 음식에 대해 어떠한 대비도 하지 않았다. 베트남 쌀국수는 한국에서도 자주 먹는 음식이고 뭐, 나 동남아 음식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태국에서도 그랬고.


그런데 베트남 사업장에서 맛 보여준 쌀국수는 내가 처음 만나보는 녀석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쌀국수와 이것 중 과연 어떤 녀석이 가짜일까. 내가 아는 녀석 같은데 왜 난 이걸 먹지 못할까. 일주일 동안 내가 먹을 수 있는 거라곤 호텔 햄버거와 커피가 전부였고 늘 그렇지만 생각보다 더 살이 쪽 빠져서 귀국했다.


먹을 것만큼 기억에 남는 건 베트남 어디에나 있는 호치민의 동상이었다. 호치민 시가 있을 정도로 호치민에 진심인 나라인 건 알고 있지만 이 정도라고? 국부로 대접받는 그가 궁금해서 돌아오는 하노이 공항에서 호치민 평전을 한 권 샀고, 한국에 도착해서도 한동안 호치민에 빠져 살았다. 체 게바라나 알았지 호치민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었던 나는 뭘 안다고 함부로 사회주의에 대해 떠들고 다녔을까.


G7 커피와 커피핀으로 커피 내리는 법을 배워왔고 베트남에서 공수한 커피핀으로 제법 오래도록 커피를 내려 먹었다. 그러고 보니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아저씨가 베트남에서 왔었다. 베트남은 생각보다 꽤 가까이 있던 나라였다.



3. 싱가폴은 크지 않은 도시국가이고, 영어를 사용하는 도시라 꽤 힘들이지 않고 이곳저곳을 다닐 수 있었다. 다니면서 느끼는 건 도시 곳곳이 너무 깨끗하다는 점이었다. 쓰레기는 커녕 녹슨 간판도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깨끗함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도시는 껌도 의료용을 제외하곤 팔지 않는다고 한다. 벌금이 어마 무시하고 사복경찰이 곳곳에 감시하고 있어서 거리에서 함부로 담배를 필수도 없다. 사치품에 대한 세금이 어마 무시해서 웬만한 부자가 아니고서야 술, 담배, 차를 함부로 가질 수 없다. 그랬다. 이 나라 사회주의 국가다.


하지만 지킬 걸 지키면 누구에게나 관대한 나라라, 머라이어 공원에서 먹은 킹크랩은 꼭 다시 찾아가고 싶을 정도로 맛있었고, 공원에 앉아 싱가폴의 야경을 바라던 내게 불어오던 바람은 시원했다. 싱가폴 곳곳에서 F1대회가 펼쳐진다며 이곳저곳 도로에서 대회를 준비하던 모습에 서울 시내에서 그랑프리가 펼쳐진다면 어떨까 상상하기도 했다.


싱가폴은 원주민과 식민지였던 영국과 일본 그리고 주변 국가 말레이시아의 문화가 혼재된 꽤 특이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물론 겉보기에 다른 속성들이 성공적으로 섞인 것 같아 보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문화 뿐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국가의 제도들이 꽤 성공적으로 사회 곳곳에 자리 잡은 것 같아 보여 꽤 부럽기도 했다.



4. 인도네시아 발리섬은 싱가폴을 여행하던 중 하루 정도를 시간 내어 다녀왔다. 분명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인데도, 아이들이 '기브 미 원 달러'를 외치며 우리를 따라다녔고, 직업상 그런 아이들을 돕는 일을 하는 입장에서 아이들을 보며 꽤 마음이 복잡했다.

싱가폴 바로 인접국이지만 물가 차이가 꽤 나서 싱가폴에서는 작은 호텔에 머물렀었는데 같은 금액임에도 발리섬에서는 스위트룸이 나왔다. 불과 한 시간 정도 배를 타고 들어온 곳에서는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동남아시아라 불리는 11개의 국가가 있다. 코로나 이전 해외여행 붐이 불어닥치던 시기에 큰 부담 없이 떠날 수 있던 나라들이기 때문에 동남아에 대한 여행의 단편은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있을 것 같다.


책의 여섯 명의 저자는 이렇듯 가깝고도 또 먼 동남아시아의 역사, 문화, 정치 세 꼭지를 무대로 우리가 알지 못했던 동남아시아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동남아시아 각국은 그 이전의 역사를 제국주의 국가들에 부정당했다. 2차 대전 이후 유럽과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국가가 합쳐지기도, 나뉘기도 했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의 역사가 이 작은 땅에도 피바람을 불러오기도 했다. 물론 이것이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국가도 있다.

여행을 하며 한 번은 만났을 동남아의 날림 쌀과 음식들 그리고 우리와 조금 다른 불교 사원들, 그리고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과 국가의 이야기. 30개의 키워드로 읽는 동남아시아 이야기가 글쎄 나는 꽤 즐겁고 마음에 들었다.


죽었다 싶으면 되살아나는 코로나가 원망스럽지만 아마 이 모든 게 지나면 가장 먼저 떠날 나라는 아마 태국일 것이다. 푸껫의 바다, 수완나품 공항의 수많은 불상들 그리고 권하던 악마의 과일 두리안까지. 여행하며 가이드의 이야기에 빠져있는 것도 좋아하는데 두 시간 동안 꽤 괜찮은 가이드의 설명에 푹 빠져있다 나온 느낌이다. 이제 2년 전 만료되어 버린 여권 사진을 다시 찍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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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2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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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자가 꿈에서 다시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젊음과 시작, 소망이었다. 선자는 그렇게 여자가 됐다. 한수와 이삭과 노아가 없었다면 이 땅으로 이어지는 순례의 길도 시작되지 않았으리라. 이 아줌마의 삶에도 평범한 일상 너머에 반짝이는 아름다움과 영광의 순간들이 있었다. 아무도 몰라준다고 해도 그것은 사실이었다.(p.363)


<파친코 1> 리뷰에서 밝혔듯이 윤여정 선생님 덕에 드라마로 <파친코>를 먼저 접한 나는 늘 이 이야기의 끝이 궁금했다. 물론 드라마는 소설을 재구성했고,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가며 젊은 선자의 삶과 노인 선자의 회한을 보여주지만 아무래도 부족한 점이 있었는데, 소설이 들려주는 선자의 마지막 이야기는 <파친코>가 어떻게 위대한 소설인지, 왜 애플TV가 이 이야기를 주목했는지 보여준다. 

<파친코>는 일제강점기와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조선인으로 일본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선자와 그 가족의 이야기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이 이야기는 이제는 늙고 한국말도 채 가물가물한 노인이 되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강했던 여인. 조선인으로, 여인으로 시대의 아픔을 홀로 감당해야 했던 선자의 청춘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한참을 먼저 떠난 남편 이삭의 묘 앞에서 선자는 자신의 일생을 돌아본다. 사랑했고 죽이고 싶도록 미웠던 남자 고한수, 미혼모로 버려진 자신을 구원했지만 끝내 지켜주지 못한 남편 백이삭 그리고 첫째 노아와 둘째 모자수,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까지. 선자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독자라면 그녀의 삶의 끝자락에서 내뱉는 그녀의 회한에 누구라도 마음이 먹먹해 질 것이다. 그녀라고 어디 평범한 삶을 살고 싶지 않았을까.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시답잖은 이야기들로 오늘 저녁밥상을 대하고, 이웃집 이야기를 하고, 아이들의 진학 문제를 의논하는 그런 평범하디 평범한 삶. 


그런데 선자는 우리의 안쓰러움과 달리 자신의 삶에도 그런 반짝이는 아름다움과 영광의 순간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여자가 되었고, 엄마가 되었으며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던 순간들이 있었다고, 그 영광의 순간이 그녀를 살게 했다고 담담히 이야기한다. 이런 그녀의 고백 앞에 우리는 삶이란, 인생이란 무엇인가 돌이켜 볼 수 밖에 없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삶이 있고, 어떤 이는 퍽퍽한 오늘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산다지만 결국 우리는 똑같은 하루라는, 오늘을 살아간다. 이 오늘을 영광의 순간을 바꿀 것인가, 멀찌감치 누군가의 삶을 뒤쫓는 삶으로 끝낼 것인가는 다름 아닌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 

드라마도 그랬는데 마지막 장을 덮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먹먹함이 꽤 오래 남는다. 오랜만에 길고 긴 하지만 반드시 들어야 할 이야기를 들은 것은 것 같다. 벅차 올랐다는 느낌이랑은 조금 다른데, 꽤 마음이 단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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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 왕자 - 내 안의 찬란한 빛, 내면아이를 만나다
정여울 지음 / CRETA(크레타)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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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네 안에 어쩔 수 없이 갇혀 있던 것이지 결코 사라진 게 아니야. (중략) 어린 왕자가 지구를 떠났지만 사하라 사막의 어느 모래언덕 위에서 반짝이는 별로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그 순간 나는 내면 아이가 ‘뭔가 모자란, 덜 자란, 가르침이 필요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면아이는 내가 언젠가는 되찾아야 할 내 안의 소중한 잠재력이며, 어린 왕자처럼 해맑고 여리면서도 당차고 사랑스러운 내 안의 가장 환한 빛이었다.(p.21)


몇 번 밝혔지만 나는 사회복지다.(심지어 석사) 사람을 만나 상담해야 하는 사회복지학과 심리학은 꽤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데(물론 심리학의 역사를 사회복지학이 끌어온 것이지만 하여튼) 학교 다닐 때 나도 한때 이 내면아이, 어릴 적 해결하지 못한 채 박제되어 버린 쓴 뿌리에 심취했던 적이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며 먹고 사는게 바빠 내면을 돌아보는 것보다 오늘 행복한 것이 더 큰 관심이 되어버렸고, 내면아이를 들여다 본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오늘 자신의 슬픔이 과거에 매여있다고만 믿는 이들에게 ‘적당히 하고 네 삶을 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책을 읽으며 그렇게 잊어버린 내면아이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이 흥미로운 점은 내 안의 울고 있는 내면아이를 내가 사랑하는 책 <어린 왕자>와 함께 데려온다는 점이다. 

10개의 챕터로 구성된 책은 챕터별로 성인이 된 나와 나의 내면 아이가 대화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화는 여러 가지 각도로 우리를 어린 시절의 어느 날로 데려간다. 아무것도 없어도 존재만으로 행복했던 관계들, 쉬 외부에 손을 내미는 것이 두려웠던 어린 시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인에 의해 규정지어진 존재의 기억, 여성이기에 감내해야 했던 폭력의 기억 등 존재만으로 사랑받아야 함에도 그러지 못했던, 그래서 우리 기억 어딘가에서 주저 앉아 울고 있는 내면 아이를 불러내고 이제 그 아이의 손을 잡아줄 것을 권한다.

남의 이야기처럼 읽어 내려갈 수도 있지만 챕터마다 남겨진 질문은 자꾸만 내 안의 내면 아이를 불러낸다. 그 질문에 하나하나 답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꺼내고 싶지 않았던 내면아이와 다시 조우하게 되고 책 속 화자처럼 그와 하나씩 기억들을 되짚어가다 보면 결국 어느 지점에서 만나 화해하게 되는 우리를 만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내면 아이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이 내면아이 즉 어릴 적 상처는 극복하고 일어나야 할 어떤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책 속의 어린 왕자는 이 내면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가자고 말한다. 우리의 어린 날은 덮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을 단단히 세워가야 할 기억이라고, 그 의미를 다시 정의할 것을 권한다. 이렇게 어린 나와 회복한 이후 왕자는 나아가 나 뿐 아니라 나와 관계된 이들의 내면 아이도 함께 돌아봐 줄 것을 권한다. 

결국 우리의 상처는 관계에서 기인하고, 여기에 따른 회복도 결국 이 관계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읽고 서로의 마음을 돌보아주는 계기가 되어도 좋을 것 같다.


“너희들은 내 장미와 전혀 같지 않아. 너희들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야.” 그가 꽃들에게 말했다. “아무도 너희들을 길들이지 않았고 너희도 아무도 길들이지 않았어. 너희들은 내가 길들이기 전의 여우와 같아. 다른 수많은 여우와 똑같은 여우였지. 하지만 이제 여우는 내 친구가 되었으니까 이제는 오직 세상에 하나 뿐인 여우가 된 거야”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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