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어른
김소영 지음 / 사계절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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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제주행 비행기 안에서 한 남성이 갓 돌 지난 아이가 한 시간 동안 울어대는 것에 분노하며 부모에게 삿대질을 하며 화를 내는 장면이 화제가 되었다. 비행기를 자주(는 아니지만 오래) 타는 직업이기에 그 고충을 나 또한 누구보다 잘 안다. (두바이 가는 비행기에서 5시간 동안 우는 아이 덕에 한동안 귀가 윙윙거려서 혼났다.) 나뿐 아니라 누구라도 그 아이를 한 번쯤은 쳐다봤겠지만 사실 그 상황에서 가장 어려운 건 아이고 그 담은 그 부모다. 외항사의 특성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상황에서 스튜어디스도 옆자리에 앉은 모르는 사람도 우는 아이를 도와주려 뭐라도 하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울기 직전인 부모의 얼굴을 보자면 별 도움이 안 될게 뻔한 총각은 그저 이어폰의 볼륨을 높이는 수밖에. 여하튼 그 게시물 아래 달린 수많은 댓글에서 아이를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하게 했다. 사실 아이를 키우기 전엔 나도 '노키즈존'이 불가피한 공간이라 생각했다. 나는 조용한 공간에서 차를 마실 권리가 있다. 그런데 이 단순한 생각마저 '어린이=시끄러운 사람'이라는 편견에 꽁꽁 갇혀 있었다는 걸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아니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생기고 막상 유아차를 밀고 거리를 나서야 알게 되는 세상이 있었다.

턱이 높고 경사로가 없는 인도, 한참을 기다려야 겨우 탈 수 있는 엘리베이터, 그마저도 '물건 운반 중'이라는 팻말이 붙어 사납게 아이를 몰아내는 곳들.

백화점의 수유실은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지하철이나 작은 도서관의 수유실은 대개 어르신들의 휴식 공간이 되어 버려 그냥 굳게 잠겨있는 곳도 많다. 그제야 알게 됐다. 세상이 아이에게 불편한 것이 아니라 어른이 아이를 불편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며 불편함에 대해 조금 생각이 많아졌다.(아 사회고발 책은 아니고 책은 그냥 에세이입니다 ^^;)


첫째, 어린이는 배운 대로 한다.

어린이는 알고 있다. 나쁜 말을 쓰면 안 되고, 쓰레기를 줄여야 하며, 서로 달라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어른들이 어지럽히는 세상 속에서도 아이들은 여전히 스스로 생각하고, 책임지려 애쓴다.

그런데 그 '배운 대로'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건 정작 어른들이다. 질서를 말하면서 불평등을 만들고 존중을 가르치면서 차별을 합리화한다.

집에서의 말과 밖에서의 행동이 다른 부모들 때문에 상처받은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둘째. "나는 '노키즈존'이라는 쉬운 말이 없어지면 좋겠다"는 저자의 이야기에 동의한다.

책은 "노키즈존"이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쉽게 차별을 선택하는지를 지적한다.

'아이'라는 이유로 출입을 막는 일은, 결국 '노 휠체어 존', '노 시니어 존'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사고이기도 할뿐더러 사실 문제 상황을 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배제라는 그 쉬운 방법을 무턱대고 이 사회가 선택할 때 우리도 언제든 그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걸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평등을 찾아가는 길은 언제나 어렵고 번거롭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는 스스로 그 번거로운 길을 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쉬운 해결책 대신 서로의 사정을 헤아리고 조율해가는 불편한 방법이 더 합리적이라고.


셋째. 어린이를 '꿈나무'가 아니다.

어린이를 '꿈나무'가 아니다. 그들은 사회가 준비하는 미래의 준비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한 사람이다. 아이를 통해 미래를 상상하는 대신, 그들의 '현재'를 지켜주는 것. 그것이 어른의 역할이다. 어린이는 그 자체로의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넷째. 나는 어른이니까 어린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

이 선언이 참 좋았다. 어른이라는 건 대단한 지혜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가 기댈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것은 책임의 무게이자, 동시에 관계의 따뜻함이다. 좋은 어른은 조언이 아니라 태도로 가르치고 통제 대신 모범으로 이끈다.

서로의 사정을 헤아리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함께 살아가려는 사람.

그런 어른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덜 차갑고, 조금 더 인간다운 얼굴을 되찾게 될 것이다.


비행기 속 아이의 울음이 불편했던 사람들처럼 어쩌면 나 역시 나도 모르는 새 누군가의 불편이었던 순간이 많았을 것이다.

아이를 손가락질하는 누군가도 아이였을 것이고 그도 성장해서 지금은 안 울게 되었을 텐데 그 순간을 기다려준 이들 덕에 우리는 이렇게 자랐다. 그렇게 서로의 속도를 기다려주는 일이 우리 모두의 약속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내가 먼저 좋은 어른이 된다면, 아이들이 좋아하는 좋은 어른을 하나씩 만들어간다면 우리 아이가 자라 만날 세상은 조금 더 다정해지지 않을까.


#어떤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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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지능 시대 - 차가운 AI보다 따뜻한 당신이 이긴다
김희연 지음 / 이든하우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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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미국, 한 식품회사는 세상을 뒤흔들 제품을 내놓았다. "물만 부으면 케이크 완성!" 광고 문구처럼 간단했다. 밀가루, 설탕, 계란 가루까지 모두 들어있으니 그저 물만 부어 반죽을 굽기만 하면 됐다. 사람들은 환호하며 돈방석에 앉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 제품을 사지 않았다.

완벽한 효율, 완벽한 편리함, 완벽한 실패였다.


그 이유를 알기까지 20년이 걸렸다. 소비자들은 기술의 혁신보다 '정성의 결핍'을 느꼈던 것이다.

"물만 부어 만든 케이크를 대접하다니, 당신은 나를 위해 시간과 정성을 들이지 않는군요!"

그 한마디가 모든 걸 설명했다.


회사는 결국 제품의 일부를 거꾸로 되돌렸다. 분말 달걀을 빼고 만드는 이가 직접 계란을 깨 넣게 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케이크 믹스는 드디어 팔리기 시작했고 그토록 외면받던 제품이 시장의 주인공이 되었다. 기술의 승리가 아니라 '공감'의 승리였다.


이 사례는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축약판이다. 데이터는 정확하지만 마음은 다르다. 효율이 늘 옳은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때로는 '불편함 속의 의미'를 원한다. 이 인간의 마음을 읽는 능력, 바로 그것이 공감 지능이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평균을 읽는 데이터가 아니라, 극단을 읽는 감정에 있다. 까탈스러운 고객의 항의, 작은 불만, 비주류의 목소리 속에는 언제나 혁신의 인사이트 씨앗이 숨어 있다. 숫자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읽어내는 능력 그건 오직 인간만이, 그리고 현장에 깊이 개입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다.


AI가 찾아오며 이제 기술의 혁신은 대부분 실리콘밸리와 그들의 리그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오늘날 우리의 혁신은 어쩌면 어설픈 기술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아날로그 감성의 회복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 LP의 부활, 독립서점의 성장. 모두 '직접 경험하고 느끼는 것'의 가치에서 비롯됐다. 완벽한 디지털보다 불완전한 진심이 더 큰 울림을 준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공감은 또한 브랜드의 의미를 확장시킨다.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의미 있는 경험을 주는 브랜드는 가격 경쟁에서 벗어나 '팬'을 만든다.

한 잔의 커피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하루의 위로' 혹은 '새 아침을 시작하는 에너지'가 되는 이유다. 의미를 파는 곳은 언제나 마음이 소비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인사이트. 타이밍과 구조의 공존.

좋은 아이디어라도 '때'가 오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 LG 스타일러가 그랬다. 황사와 미세먼지, 코로나라는 환경이 시장을 열었지만 그 기회를 붙잡을 수 있었던 건 꾸준히 시도하고 기다릴 수 있는 구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일찍 저런 제품을 누가 사용하느냐고 했지만 스타일러는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가전이 되어버렸다. 실패라 생각한 순간이 사실은 변곡점일 수 있고, 그 방향이 맞다면 조금은 참고 인내하는 우직함이 필요하다.


이러한 공감은 시간의 언어다. 과거를 검색하고, 현재를 사색하고, 미래를 탐색하기 위한 기초 체력.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때 비로소 시대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꽤 밑줄이 많은데 대충 내가 꽂힌 책의 5가지 인사이트는 아래와 같다.


1. 감정의 가치를 읽는 능력

효율보다 정성을, 편리함보다 의미를 읽는 것이 진짜 혁신이다.


2. AI 시대의 인간적 경쟁력, 스몰 데이터

데이터가 다루지 못하는 미묘한 정서, 즉 '노이즈 속 인사이트' 즉 스몰 데이터를 읽는 감각. 이것이 인간이 현장에서 가진 진짜 경쟁력이다.


3. 아날로그 감성의 재발견

만지고, 느끼고, 경험하는 아날로그적 진심이야말로 디지털 시대의 차별화 포인트다.


4. 의미의 경제로의 전환

기능보다 감정, 가격보다 의미를 주는 브랜드가 살아남는다. 공감은 고객을 팬으로 바꾸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다.


5. 변화의 타이밍을 읽는 감각

실패 속에서 기회를 감지하고, 작은 변화 속에서 미래의 단서를 읽는 능력. 공감은 결국 미래를 예측하는 또 하나의 감각이다.


나 또한 데이터를 수없이 이야기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생각이 조금은 바뀌었다. 숫자는 답을 알려주지만 마음은 이유를 알려준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읽는 힘 그것이 바로 AI가 창궐하는 공감 지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경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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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생공부 - 천하를 움직인 심리전략 인생공부 시리즈
김태현 지음, 나관중 원작 / PASCAL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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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삼국지를 열 번 읽지 않은 사람이랑은 친구 하지 말라던가, 대화하지 말라던가 하는 말이 있었다. 뭐 그래서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어릴 적 삼국지를 꽤 좋아했다. 아니 '삼국지'라는 단어에 자동반사로 살던 시절이었다. 집에 있던 상·중·하 3권 삼국지부터 시작해, 60권짜리 만화 삼국지, 황석영 삼국지, 이문열 삼국지까지. 세상에 삼국지라는 이름이 붙은 책이라면 일단 읽었다. 다 아는 얘기 뭐가 그렇게 재밌냐고 핀잔을 들어도 나는 재밌었다.


그런 나를 칭찬하며 어른들이 그랬다. "삼국지에는 인생의 지혜가 다 있다" 그 말의 뜻을 알 리 없던 나는 그저 관우의 청룡언월도와 적토마 제갈량의 부채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쌓인 나의 삼국지 지식은 주로 게임에 사용되곤 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반대였을지도 모른다. 게임 덕분에 내 안에 삼국지 세계관은 확장되고 단단해졌고 그렇게 하나의 별자리가 되었다. 수백 명의 장수가 능력치와 함께 머릿속에 줄줄이 늘어서 있었고 어지리만 어떤 상황에서도 삼국지의 일화를 가지고 올 수 있었다.(그러고 보니 삼국지를 마블 시리즈처럼 팔아도 꽤 팔릴 것 같은데?)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어른들이 했던 말을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삼국지는 결국 사람의 이야기였다. 유비의 우유부단함, 조조의 냉철함, 제갈량의 고독함, 관우의 자존심. 그들의 모습은 내 주변에도 그리고 내 안에도 있었다. 회사에서 상사 눈치 보며 이리저리 전략을 짜던 나에게서 제갈량의 기운이 느껴지기도 하고, 야근하다가 내적 쌍욕이 튀어나오며 나는 조조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이 책을 쉬 집어 든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책은 이렇게 일상을 배경으로 삼국지를 꺼내와 현대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 방대한 이야기의 에피소드를 이용해 영웅의 전쟁이 아닌, 인간의 마음과 관계, 선택과 후회의 이야기로 재해석하는 데 시대를 읽는 법, 리더십, 인간관계, 꿈과 의지, 인간의 본성 같은 주제들을 따라가다 보면 '그땐 몰랐던 삼국지'를 새롭게 만나게 된다. 삼국지를 좋아했던 이들이라면 무릎을 치며 읽을 문장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중에서도 나는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이라는 문장 앞에서 한참을 멈췄다.

"우리는 삶에서 목표를 세우고 최선을 다해 계획을 세우지만, 모든 것이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언젠가부터 나 역시 가장 꽂혀있는 말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노력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운칠기삼이 노력하지 않은 이들의 핑계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노력과 성공의 관계는 비례하지 않더라. 최선을 다해도 고꾸라지는 이들이 있는 반면, 노력한 것에 비해(사실은 그게 아니라 그렇게 보인 거겠지만) 너무 그럴싸하게 자신의 삶을 턱턱 살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그랬다. 계획은 내가 세우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온전히 나만의 몫이 아니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무언가 잘되지 않더라도 그것이 오롯이 나의 능력 없음도 아니다. 결국 우리는 노력할 뿐이지만 그것을 이루기까지는 누군가의 말처럼 온 우주가 나서주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일이 된다고 해서 자만해도 안되고 일이 안된다고 낙심해서도 안된다.


간만에 삼국지의 인물들 사이를 유영하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다시 제갈량의 부채를 떠올렸다.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고, 세상을 내 뜻대로 돌릴 수 있다고 착각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인생은 모사재인, 성사재천. 사람의 일은 사람이 하지만, 이루어지는 건 하늘에 달렸다.

언젠가 때와 나의 노력이 만날 때 그것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게 참고 기다리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니 오늘은 조조처럼 천하를 발아래 둘 야망을 품되, 유비처럼 사람을 믿고, 적벽에서 패한 손권처럼 너무 괴로워하지 말자.

인생은 결국 삼국지 한 권이다. 주인공은 바뀌고 전장은 달라지지만 이야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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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메모의 묘미 - 시작은 언제나 메모였다
김중혁 지음 / 유유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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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자생존'

첫 직장에 입사하자마자 나를 카페로 불러낸 상사가 이것저것 알려주며 했던 이야기 중에 아직도 마음 판에 새기고 간직하며 나 또한 후배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다. 감히 너의 기억력 따위를 믿지 마라. 적어라. 일단 적고 보고 또 봐라. 말하거나 듣고 흘린 사람은 잊어버리기에 그 기억은 오롯이 적은 사람의 것이다. 그렇게 적어야 실수하지 않는다. 아니 실수를 넘어서라도 회사라는 곳은 쓴 사람의 기록이 역사가 된다.

혹 훗날 불리한 일이 생길지라도 적은 걸 바탕으로 우기면 니가 이긴다. 그러니 적어라. 회의록도, 직원들과의 짧은 미팅도, 순간순간 지나가는 인사이트도 다 적어라. 그렇게 나는 큰 다이어리를 늘 끼고 다니는 사람이 되었고, 아이패드로, 아이폰으로 그 메모의 방법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여전히 나는 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책은 이 메모에 관한 이야기다. 사실 읽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을 뿐 아니라 쓰지 않는 모든 이들에게(특히나 아직도 기억력을 운운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어졌다.


저자는 메모를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보게 만드는 행위"라고 말한다. '메모를 시작하는 순간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다.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알고 있던 게 새로워진다'라는 말은 그 자체로 메모의 정의이자 철학이다. 메모란 거창한 작업이 아니다. 그저 지나가는 생각, 흩어지는 감정, 잠깐의 깨달음을 붙잡아 두는 일이다. 하지만 그 단순한 행위가 우리를 조금 더 예민하고, 섬세하고, 집요한 사람으로 만든다.


그는 말한다. '메모는 부스러기이고 먼지이며 곧 증발하고 마는 물방울 같은 것이다.' 그렇다. 대부분의 메모는 사라지고 버려진다. 하지만 그중 일부는 싹이 트고, 또 어떤 것은 썩어 다른 생각의 거름이 된다. 이 생존율 10퍼센트 미만의 메모들이 모여 언젠가 우리의 언어와 생각 그리고 세계를 만든다. 우리는 그렇게 조각들을 모아 큰 그림을 완성해간다. 그래서 메모는 낭비가 아니다.


책을 덮고 나니 내 다이어리 속 수많은 낙서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다. 아무 의미 없이 끄적거린 문장들이 어떻게 보면 지금의 나를 만든 흔적이었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생각이 종이에 내려앉는 순간 그것은 형태를 가진다. 그리고 그 형태들이 모여 나라는 사람을 기록한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기록하는 동물이고, 기록을 통해 우리가 누군지 알아 나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가끔 스마트폰 메모 앱 대신 다시 종이를 꺼내 쓴다. 손끝의 힘으로 눌러쓴 글자에는 순간의 감정이 남아 있다.

삐뚤어진 글씨 하나에도 그날의 나를 읽을 수 있다. 기록은 그렇게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바쁘게 흘러가는 하루 속에서도 메모 한 줄은 잠시 숨을 고르게 한다. 그리고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를 기억하게 한다.


책은 '기록은 시간을 확장시키는 마법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도 옳다. 메모는 시간을 붙잡는 일이다. 흘러가는 하루의 한순간을 붙잡아 두는 일. 결국 우리가 메모를 하는 이유는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기억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적는다. 출근길에 떠오른 생각을, 회의 중 들었던 한 문장을, 은우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그렇게 적은 사소한 문장들이 내 삶의 이정표가 되고 언젠가 다시 돌아보았을 때 오늘의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이 되리라 믿는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기록은 남는다. 결국 쓰는 사람이 세상을 기억한다.


*책에서 알려주는 각종 메모도구들도 좋은 팁이다. 나는 주로 구글킵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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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미에르 피플 - 개정판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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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열자마자 특유의 기시감이 몰려왔다. 그렇지, 장강명은 원래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기괴하고 불편하며 어쩐지 꺼림칙한데 그래서 더 눈을 떼기 힘든 10편의 이야기들이 이어서 펼쳐진다. 책은 뤼미에르라고 이름하는 신촌의 한 빌딩 뤼미에르 빌딩 801호에서 810호까지에 거주하는 사람 혹은 동물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존재들에 관한 연작소설이다. 가출 청소년, 청각장애인, 무당, 여론조작팀 같은 주변부 인물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고양이나 쥐, 반인반서 같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존재들도 등장한다. 맞다. 처음엔 꽤 당혹스럽다.


대체 무얼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를 책을 읽다 보면 어쩌면 이 괴상한 이야기가 실제로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한 단면을 대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완전한 인간, 완전한 괴물도 없는 세계. 서울의 한복판에서 마치 실존하는 듯한 판타지적 설정은 왜곡된 거울처럼 우리의 얼굴을 비춘다. 고개를 돌리고 싶으면서도 정직하게 투영된 모습 앞에서 도망칠 수 없다. 이 책이 께름칙한 이유는 단순히 괴기소설 같은 설정이 그 괴물들의 얼굴이 지금의 우리와 너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직접 "제가 사랑하는 캐릭터는 한 줌인데 전부 <뤼미에르 피플>에 있다" 고 말하는데 기자 출신인 그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이게 소설이 아니라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치밀하게 취재하여 실제로 그들을 만나 관계한 것 같기도 하다. 그만큼 치밀하고 촘촘하다.


〈801호 박쥐 인간〉은 현재만을 살며 미래를 거부하는 소년의 이야기다. 그는 교통사고로 남자친구를 잃은 임신부를 만나고, 그 사건에 휘말리면서 자신의 공상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묻는다. 〈802호 모기〉에서는 성공만을 좇아 달려온 건설업체 임원이 어느 날 갑자기 전신마비가 되어 인생을 돌아보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803호 명견 패스〉에서는 저신장 여성과 청각장애인 재홍의 관계가 복잡한 삼각 구도로 흘러가며 인간관계의 불가해함을 보여주며 〈807호 피 흘리는 고양이 눈〉은 길고양이들의 세력 다툼을 통해 어느새 계급사회로 둔갑한 인간 사회의 갈등을 비춘다. 〈808호 쥐들의 지하 왕국〉은 주민등록번호도 호적도 없는 반인반서의 삶을 통해 사회적 배제와 계급 문제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분명히 소설인데 이런 이야기들은 왠지 익숙하다. 어쩌면 이 불편함은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정직한 질문일지 모른다. 누가 그랬던가. '사람되기 쉽지 않지만 우리 괴물이 되지는 말자고' 사회의 규범에서 벗어난 이들을 보며 우리는 혐오와 연민 사이를 오가지만 결국 그들이 우리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판타지적 장치 속에서 우리는 부와 가난, 젠더와 계급, 차별과 혐오 같은 현실의 첨예한 문제들을 목격하게 된다. 이 처연한 캐릭터들의 몰골이 이 괴상한 이야기를 꾸역꾸역 읽어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뤼미에르의 주민들의 이야기는 불행과 상실로만 귀결되지 않는다. 그들은 절망 속에서도 한 줄기 빛(lumière)을 찾으려 분투한다.

그리고 그 빛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 됨을 놓치지 않기 위해 끝내 붙잡아야 할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말한다.

자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니 당신은 무얼 할 거지? 이 책은 잔인하면서도 아름다운 방식으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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