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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동남아 - 30개의 주제로 읽는 동남아시아의 역사, 문화, 정치
강희정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평점 :
1. 나의 첫 해외여행, 내 여권에 찍힌 첫 출입국 도장의 주인은 태국이었다. 파타야가 태국의 도시인지도 몰랐던 내가 내린 낯선 땅. 방콕 수완나품 국제공항의 큰 유리 문을 밀고 나서자마자 나를 맞은 뜨겁고 습한 바람과 외국 사람들, 아니 내가 외국인이 되어버린 낯선 공간의 뒤바뀜은 꽤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아있다.
방콕을 걸으며 알게 된 태국과 미얀마 간의 300년간의 전쟁, 이 전쟁 탓에 태국 남자들은 태어나자마자 군대로 끌려가 죽을 운명이었다. 사람들은 남자아이를 여장을 시켜 여자아이처럼 키웠고 그렇게 자란 아이는 정말로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곤 했다. 전 세계에서 LGBT에 가장 열린 나라 태국은 이런 문화적 환경에서 만들어졌다.
말로만 듣던 카오산 로드에 선 순간도 꽤 잊기 힘든 순간이다. 지금이야 한국 땅 어느 곳에서 나 열리지만 그때만 해도 생소했던 버스킹이 카오산 로드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서서 춤을 추고, 각 나라의 동전들을 기타박스에 던져 넣었다.
즐거운 사람들, 설렘이 가득한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문득 나의 20대가 아쉬워졌다. 내 20대의 대부분의 기억은 도서관이다. 토익공부 열심히 하고 뭐 그러면 자연스럽게 좋은 직장 가지고, 좋은 직장 가지면 여행도 많이 가고 그렇게 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곳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이들은 나와 생각이 많이 달랐다. 직장, 취업, 안정. 누군가가 정해놓은 틀안에 억지로 나를 맞추고 나 좀 괜찮다고 말하는 모지리가 얼마나 답답이인지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 내 청춘이 아까워서 울었다.
2. 베트남 출장을 가라길래 아프리카와 달리 음식에 대해 어떠한 대비도 하지 않았다. 베트남 쌀국수는 한국에서도 자주 먹는 음식이고 뭐, 나 동남아 음식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태국에서도 그랬고.
그런데 베트남 사업장에서 맛 보여준 쌀국수는 내가 처음 만나보는 녀석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쌀국수와 이것 중 과연 어떤 녀석이 가짜일까. 내가 아는 녀석 같은데 왜 난 이걸 먹지 못할까. 일주일 동안 내가 먹을 수 있는 거라곤 호텔 햄버거와 커피가 전부였고 늘 그렇지만 생각보다 더 살이 쪽 빠져서 귀국했다.
먹을 것만큼 기억에 남는 건 베트남 어디에나 있는 호치민의 동상이었다. 호치민 시가 있을 정도로 호치민에 진심인 나라인 건 알고 있지만 이 정도라고? 국부로 대접받는 그가 궁금해서 돌아오는 하노이 공항에서 호치민 평전을 한 권 샀고, 한국에 도착해서도 한동안 호치민에 빠져 살았다. 체 게바라나 알았지 호치민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었던 나는 뭘 안다고 함부로 사회주의에 대해 떠들고 다녔을까.
G7 커피와 커피핀으로 커피 내리는 법을 배워왔고 베트남에서 공수한 커피핀으로 제법 오래도록 커피를 내려 먹었다. 그러고 보니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아저씨가 베트남에서 왔었다. 베트남은 생각보다 꽤 가까이 있던 나라였다.
3. 싱가폴은 크지 않은 도시국가이고, 영어를 사용하는 도시라 꽤 힘들이지 않고 이곳저곳을 다닐 수 있었다. 다니면서 느끼는 건 도시 곳곳이 너무 깨끗하다는 점이었다. 쓰레기는 커녕 녹슨 간판도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깨끗함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도시는 껌도 의료용을 제외하곤 팔지 않는다고 한다. 벌금이 어마 무시하고 사복경찰이 곳곳에 감시하고 있어서 거리에서 함부로 담배를 필수도 없다. 사치품에 대한 세금이 어마 무시해서 웬만한 부자가 아니고서야 술, 담배, 차를 함부로 가질 수 없다. 그랬다. 이 나라 사회주의 국가다.
하지만 지킬 걸 지키면 누구에게나 관대한 나라라, 머라이어 공원에서 먹은 킹크랩은 꼭 다시 찾아가고 싶을 정도로 맛있었고, 공원에 앉아 싱가폴의 야경을 바라던 내게 불어오던 바람은 시원했다. 싱가폴 곳곳에서 F1대회가 펼쳐진다며 이곳저곳 도로에서 대회를 준비하던 모습에 서울 시내에서 그랑프리가 펼쳐진다면 어떨까 상상하기도 했다.
싱가폴은 원주민과 식민지였던 영국과 일본 그리고 주변 국가 말레이시아의 문화가 혼재된 꽤 특이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물론 겉보기에 다른 속성들이 성공적으로 섞인 것 같아 보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문화 뿐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국가의 제도들이 꽤 성공적으로 사회 곳곳에 자리 잡은 것 같아 보여 꽤 부럽기도 했다.
4. 인도네시아 발리섬은 싱가폴을 여행하던 중 하루 정도를 시간 내어 다녀왔다. 분명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인데도, 아이들이 '기브 미 원 달러'를 외치며 우리를 따라다녔고, 직업상 그런 아이들을 돕는 일을 하는 입장에서 아이들을 보며 꽤 마음이 복잡했다.
싱가폴 바로 인접국이지만 물가 차이가 꽤 나서 싱가폴에서는 작은 호텔에 머물렀었는데 같은 금액임에도 발리섬에서는 스위트룸이 나왔다. 불과 한 시간 정도 배를 타고 들어온 곳에서는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동남아시아라 불리는 11개의 국가가 있다. 코로나 이전 해외여행 붐이 불어닥치던 시기에 큰 부담 없이 떠날 수 있던 나라들이기 때문에 동남아에 대한 여행의 단편은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있을 것 같다.
책의 여섯 명의 저자는 이렇듯 가깝고도 또 먼 동남아시아의 역사, 문화, 정치 세 꼭지를 무대로 우리가 알지 못했던 동남아시아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동남아시아 각국은 그 이전의 역사를 제국주의 국가들에 부정당했다. 2차 대전 이후 유럽과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국가가 합쳐지기도, 나뉘기도 했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의 역사가 이 작은 땅에도 피바람을 불러오기도 했다. 물론 이것이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국가도 있다.
여행을 하며 한 번은 만났을 동남아의 날림 쌀과 음식들 그리고 우리와 조금 다른 불교 사원들, 그리고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과 국가의 이야기. 30개의 키워드로 읽는 동남아시아 이야기가 글쎄 나는 꽤 즐겁고 마음에 들었다.
죽었다 싶으면 되살아나는 코로나가 원망스럽지만 아마 이 모든 게 지나면 가장 먼저 떠날 나라는 아마 태국일 것이다. 푸껫의 바다, 수완나품 공항의 수많은 불상들 그리고 권하던 악마의 과일 두리안까지. 여행하며 가이드의 이야기에 빠져있는 것도 좋아하는데 두 시간 동안 꽤 괜찮은 가이드의 설명에 푹 빠져있다 나온 느낌이다. 이제 2년 전 만료되어 버린 여권 사진을 다시 찍으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