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숨
김혜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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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편의 단편에는 불안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성소수자의 모습으로, 외국을 홀로 던져진 불안한 여행자로, 입양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7개의 단편을 차례로 읽어내고는 나 또한 깊은 숨을 쉬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세상을 향한 한숨인지, 그래도 살아남은 이들을 위한 안도의 숨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왜 제목이 '깊은 숨'일까 싶었는데 내가 그 의도를 다 알지는 못하겠지만 나 또한 깊은 숨을 쉬고 말았으니 제대로 찾은 소설집의 제목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며 슬쩍 올려다본 TV에는 마침 신당역에서 일어난 끔찍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스토킹에 이어..) 이런 범죄가 뉴스에서 쏟아진 것이 10년 정도 되었나. 어쩌면 그 이전부터 이런 범죄는 흔했지만 이것이 공론화된 지 10년 밖에 안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스토킹 사건을 두고 '남자가 좋아하는데 여자가 안 받아줘서 이리 되었다'라는 시의원의 개소리에 작은 욕지기를 내뱉었다. 사건이 커지자 정부와 경찰은 이제야 대책을 마련하겠단다. 도대체 몇 명이 죽어나가야 시스템이 막아서는 대책이 마련될까. 여성이라는 이유로, 약자라는 이유로 눈치 봐야 하고 조심해야 하고, 피해자임에도 '니가 처신을 똑바로 했어야지' 따위의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올까.


얼마나 그렇게 내달렸을까. 움직임이 잠잠해졌다. 나는 어느새 잠의 품속에 고스란히 안겨 있었다. 잠? 잠이 누구지? 지금 나를 끌어안고 있는 것은 오로지 존재뿐이었다. 아주 오래전, 태초부터 나를 품고 있던 그는 존재 그 자체였다. 그가 나의 오른쪽 귀를 자신의 왼쪽 가슴에 갖다 댔다. 쿵, 쿵, 쿵. 움직이는 심장 소리. 우리는 태초부터 존재했고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그 존재를 끌어안았고, 그는 나를 보듬어 안았다. 우리는 오래, 아주 오래 그곳에서 흐르고 있었다. (p.96 <가만히 바라보면 中>)


답답한 가운데서도 희망적이었던 것은 7개의 단편의 주인공들은 자신을 옭아매는 불합리와 환멸의 순간에서 누구도 도망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들은 맞선다. 물론 그 끝이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아마도 그들은 지지 않을 것 같다. 바라기는 어디도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그들의 존재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갈 때에 나도 그들과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런 유의 책을 읽자면, 참 마음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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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터의 글쓰기 - 초보 마케터를 위한 지금 바로 써먹는 글쓰기 필살기
이선미 지음 / 앤의서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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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장님한테 메일 쓰는 법 좀 배우고 싶어요”


응?? 엑셀을 배우고 싶다, 영상 제작을 배우고 싶다, 미팅을 성사시키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메일 쓰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후배님은 내가 쓴 메일이 가장 읽기 쉽다고 했다. 쓸데 없는 서론이 없고, 요점만 간단히, 거기다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들여 쓰기와 볼드, 화려하지 않는 색 처리까지. 

오? 생각해 보니 하루에 10통이 넘는 메일을 받지만 한눈에 들어오는 메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흰 바탕에 까만 글씨가 정신없이 우두두두 박혀있거나, 날씨에 계절 얘기가 재미없게 쓰인 인사말 읽다 닫아버린 메일도 꽤 된다. 물론 나중에 ‘메일로 보냈잖아?’란 보낸 이의 면박에 ‘그래? 하하하’라고 웃어넘기지만 난 정말로 그 메일을 읽은 적이 없다. 그건 뭐 신경 써서 읽지 않은 내 잘못인 걸로.

뭐 간단한 일이야 이렇게 넘어 간다지만 읽어야 하는 메일임에도 읽히지 못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러고 보니 메일 쓰는 법을이라는 건 생각보다 중요한 그리고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마케터는 생각보다 글쓰기가 꽤 많이 필요한 직업이다. 캠페인 카피 라이팅부터, 콘텐츠 기획서, 카드 뉴스 콘티 등 심지어 최근에는 텍스트 로 된 콘텐츠가 다시 뜰 거라는 세간의 예측에 글쓰기 능력은 더더욱 강조돼있다. 영상이나 사진에 밀려 등한시 되었던 글쓰기 관련 강의도 요즘은 늘 풀 부킹이라고 한다. 이런 세상에서 마케터로, 또 글로 먹고 살고싶은 한 사람으로 ‘마케터의 글쓰기’라는 제목의 콘텐츠는 피해 가기 힘들다. 비단 이 책이 나오기 전에도 비슷한 제목의 책은 세상에 꽤 많이 존재했고 그 많은 책을 찾아 읽었더랬다. 

이 채널의 이전 피드를 훑어보자면 비슷한 유의 책에 대한 리뷰들이 꽤 있는 편인데 그렇게 좋게 읽었던 책은 몇 권 떠오르지 않는다.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유혹하는 글쓰기>이외에는 <대통령의 글쓰기>,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도가 그나마 읽어볼법한 글쓰기 책으로 기억되는데 거기다 이 책을 한 권 더해도 좋을 것 같다. 저자의 전작 <영포티, X세대가 돌아온다>에서 그저 글 잘 쓰는 사람인 줄만 알았던 저자는 글쓰기를 알려주는 데 있어서도 그 재능을 아끼지 않는다. 정말로 이 책 괜찮다.


글을 평소에 곧잘 쓰는 사람들도 마케팅을 위한 글쓰기를 시작하려면 막막해지곤 한다. 어디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나, 관련된 자료는 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나, 아니 요즘 사람들은 대체 어떤 글을 읽을까?(글 좀 쓴다는 사람치고 남의 글을 성의 있게 읽는 사람 잘 없다) 저자는 친절하게도 이런 모든 경우에 대한 마케터의 글쓰기 방법을 알려준다.


마케터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설득이다. 소비자를 설득해야 하고 일이 되게 하기 위해 상사를 설득해야 하며, 파트너십과 에이전시를 설득해야 한다. 이 모든 일에 글쓰기가 필요할진대 저자는 책에서 정확하게 이 지점을 짚어낸다. 어떻게 상대를 배려하는지, 독지에 따라 읽고 싶은 글은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해 꽤 많은 예를 들어가며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글의 구성 즉 주제를 앞에 둘지 뒤에 둘지를 상황과 환경에 따라 구분한 뒤 보도자료, SNS, 카피 라이팅 등 우리가 꼭 필요한 글쓰기 스킬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 준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장에 드디어 이메일쓰기 까지 마케터를 위한 글쓰기의 거의 모든 것을 알려준다. 여기까지도 좋았는데 저자는 부록으로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어떤 글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까지 세세히 알려준다. 다독 다작 다상량, 결국 글쓰기란 많이 읽고 생각하고 써보는 것일진대 이 단순한 길에 이 책은 꽤 괜찮은 가이드가 될 것 같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거나, 왜 내가 쓴 글은 설득이 되지 않을까 고민하거나, 더 좋은 마케터가 되고 싶은 이들이라면 반드시 책상 위에 꽂아두고 글이 막힐 때마다 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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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미술관 -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이야기
이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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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필연적으로 자신이 살던 시대의 공기를 작품 안에 담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략) 마찬가지로 그림은 자신을 잉태한 시대를 스스로 고발하기도 한다.(p.9)


한겨레의 책은 재미있다. 그러고 보니 나의 대학시절은 늘 이런 유의 책으로 가득 했었다. 맑스, 니체, 존 롤스, 헨리 조지, 홍세화, 박노자, 김규항, 박원순의 책들을 접하며 내 사고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는 않은지 늘 점검했고, 모두를 위한 모두의 자본에서 소외된 이들을 기억하려 했다. 그들의 편에서 살고 싶었고, 돈에 버림받은 이들의 편에서 함께 울고 웃고 싶었다. 내 청춘은 그랬다.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고 사회복지와 철학을 공부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군은 꽤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런 나와 달리 대기업이나 공사, 공단, 금융, 외국계 기업 뭐 하여튼 꽤 잘나가는 회사에 취업한 친구들이 실제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들과 내 직업은 비교되기 시작했다. 부러웠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차이 나는 월급에서 오는 현타에 나는 대학원으로 도망을 갔고 그때부터 나는 내 청춘의 이상향을 최대한 지켜내면서 사회, 경제적으로 나쁘지 않은 직업을 찾아 헤맸다. 교수나 연구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직업은 한정적이었을 뿐더러 경쟁도 치열했다. 교수님들은 유학을 권했고 나는 돈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의 최대치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지금, 내가 꿈꾸던 이상들은 이제 추억 속에 예쁘게 박제되었다.


<기울어진 미술관> 제목부터 설마 했는데 역시나 책은 아래쪽으로 기울어진 세상의 끝에서 미술을 통해 사람을 바라본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책이라면 '이 그림은 어떤 상황에서 그려졌고 그래서 이 그림이 뜻하는 바는 무엇이다'로 끝나겠지만, 저자는 거기서 한걸음 더 들어가 그림 속의 시대와 그 안에서 소외되어 있는 사람을 발견해 불러낸다. 


여성, 아이, 성소수자, 장애인, 유색인종, 원주민, 성소수자 등 지금도 세상 끝자락에 있는 이들은 거장의 그림 속에서도 여전히 차별받고 있었고 고통받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그림을 그린, 그리고 소비하는 우리에게 그들은 있으나 마나 한 배경에 불과했고 사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24장의 그림을 통해 이런 우리를 고발한다. 처음에 꽤 빠르게 읽어내려가고 싶었는데 책장을 넘길수록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되고 결국에는 울컥하고야 말았다. 그곳에는 20대의 내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과 함께 살겠노라 다짐하던 어제의 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림은 소위 가진 자의 예술이다. 유명세를 탄 화가도 그림을 의뢰한 이들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부자라 불리며 권력의 이야기를 돌려 하곤 한다. 이 커넥션을 예리하게 뚫어낸 이 작업이 새삼 고마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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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울수록 풍요로워진다 - 삶을 회복하는 힘, 팬데믹 이후 우리에게 필요한 세상
목수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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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의 혹독한 경험이 인간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일깨운 것이다. 신속 정확 배달보다 절실한 삶의 요소는 ‘건강한 삶의 온기’라는 사실을(p.45)


영화 <어바웃 타임>은 쿨타임 차면 꼭 다시 보고야 마는 몇 안 되는 영화 중 한편이다. 시간 여행을 테마로 하지만 결국 영화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다 좋고 사랑스럽지만 보면 볼수록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오랜 주택, 아마 몇 대가 살아왔을 것 같은 시골의 작은(사실 작진 않다) 집이다.

영화를 볼 때마다 그 집이 부러웠다. 그 가족은 대대로 그 집에 살아왔을 것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가 자라고 그 윗세대가 떠나는. 오롯이 그 공동체만 아는 아주 오래된 공간에는 할아버지의 아버지의 그리고 주인공의 추억과 기억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이들은 이 집을 부수고 새로 짓지 않았다. 대를 이어오며 손때 묻은 공간을 보존하고 이어왔다. 이 기억은 아마도 아들의 또 아들에게까지도 이어질 것이며, 이러한 기억들이 쌓여 가족이 되고 마을이 되며 공동체의 역사 즉 삶이 될 것이다.


책은 프랑스와 한국 사회를 비교하며 우리에게 없는 것과 프랑스에 있는 것, 혹은 프랑스에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있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국의 좌와 우는 거의 만날 수 없는 어떤 사이가 되어버린 듯하지만 유럽에서는 아주 가끔 더 큰 것을 위해 좌와 우가 만나기도 한다.


좌파란 무엇보다 예리한 비판의식을 가진 사람을 뜻합니다.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현상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눈(후략) (p.28)


저자는 이러한 시각에서 세상을 톱아본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것이라 넘어가기에 우리 사회에는 좋지 않은 것이 너무 많고 목소리 큰 이들은 그것을 좋은 것이라 말하기를 강요한다. 선거하라고 만든 다수결의 원칙은 이 모든 것에 적용되어 우리 사회의 소수는 늘 자기 목소리를 숨기거나 감추고 살아야 했다. 이것을 불편하다고 말하기 시작할 때 변화는 시작된다. 지금은 프로불편러라는 단어까지 생기며 불편한 이들을 또 불편해하는 모양이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불편하다고 말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잘못된 자리를 돌아보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프랑스 사회의 변화는 이것을 이야기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이를테면 우리나라가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펴는 여러 가지 정책 중 정작 여성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을 별로 없다. 거꾸로 프랑스는 출산율이 낮은 이유 즉 여성들이 어떤 이유로 출산을 거부하는지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결혼부터 이야기하자면 '여성의 선택권이 확보될 때, 더 많이 출산한다'라는 것이었고 프랑스는 다른 국가들과 달리 출산율의 반전을 이루어 냈다. 이런 예들이 책에는 수없이 나온다. 그 다른 나라의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면 부러움과 동시에 ‘왜 우리는!!’이라는 질문이 용솟음친다. 세계관의 확장은 마블 영화에서 쓰기보다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물론 우리는 계속해서 발전해 왔다. 기술의 발달로 갈수록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다지만 환경, 인권, 복지 등 기술을 넘어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다. 이는 부수고 새로 지을 수 있는 카테고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자꾸 우리의 것을 버리고 새로 만들자고 말한다. 마을을 버리고 아파트를 짓자고 하고, 우리가 아니라 내가 먼저라고 말한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세태에 날개를 달아주었고 그렇게 우리의 삶은 매일 퍽퍽해져갔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은, 책의 저자는 묻는다. 왜? 그들은 끊임없이 묻고 논쟁한다. 그들은 스스로 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물론 저자의 이야기 중 몇몇은 개인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있다.(이럴 때 우리는 논쟁을 하고 머리를 맞댄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우리 모두가 공동체의 주인으로 함께 살아갈 용기를 내자고 하는, 우리 공동체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유산들을, 그 인간다움을 지켜내고자 하는 그의 목소리에 동참하길 원하고 그렇게 더 나은 세상으로 나갈 준비는 된 것 같다.


이제 당신에게 권한다. 저자는 분명한 소리로 말한다. 시끄러울수록 풍요로워진다고. 당신도 이 풍요로운 세상에 함께 하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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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동남아 - 30개의 주제로 읽는 동남아시아의 역사, 문화, 정치
강희정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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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첫 해외여행, 내 여권에 찍힌 첫 출입국 도장의 주인은 태국이었다. 파타야가 태국의 도시인지도 몰랐던 내가 내린 낯선 땅. 방콕 수완나품 국제공항의 큰 유리 문을 밀고 나서자마자 나를 맞은 뜨겁고 습한 바람과 외국 사람들, 아니 내가 외국인이 되어버린 낯선 공간의 뒤바뀜은 꽤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아있다.


방콕을 걸으며 알게 된 태국과 미얀마 간의 300년간의 전쟁, 이 전쟁 탓에 태국 남자들은 태어나자마자 군대로 끌려가 죽을 운명이었다. 사람들은 남자아이를 여장을 시켜 여자아이처럼 키웠고 그렇게 자란 아이는 정말로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곤 했다. 전 세계에서 LGBT에 가장 열린 나라 태국은 이런 문화적 환경에서 만들어졌다.

말로만 듣던 카오산 로드에 선 순간도 꽤 잊기 힘든 순간이다. 지금이야 한국 땅 어느 곳에서 나 열리지만 그때만 해도 생소했던 버스킹이 카오산 로드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서서 춤을 추고, 각 나라의 동전들을 기타박스에 던져 넣었다.


즐거운 사람들, 설렘이 가득한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문득 나의 20대가 아쉬워졌다. 내 20대의 대부분의 기억은 도서관이다. 토익공부 열심히 하고 뭐 그러면 자연스럽게 좋은 직장 가지고, 좋은 직장 가지면 여행도 많이 가고 그렇게 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곳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이들은 나와 생각이 많이 달랐다. 직장, 취업, 안정. 누군가가 정해놓은 틀안에 억지로 나를 맞추고 나 좀 괜찮다고 말하는 모지리가 얼마나 답답이인지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 내 청춘이 아까워서 울었다.



2. 베트남 출장을 가라길래 아프리카와 달리 음식에 대해 어떠한 대비도 하지 않았다. 베트남 쌀국수는 한국에서도 자주 먹는 음식이고 뭐, 나 동남아 음식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태국에서도 그랬고.


그런데 베트남 사업장에서 맛 보여준 쌀국수는 내가 처음 만나보는 녀석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쌀국수와 이것 중 과연 어떤 녀석이 가짜일까. 내가 아는 녀석 같은데 왜 난 이걸 먹지 못할까. 일주일 동안 내가 먹을 수 있는 거라곤 호텔 햄버거와 커피가 전부였고 늘 그렇지만 생각보다 더 살이 쪽 빠져서 귀국했다.


먹을 것만큼 기억에 남는 건 베트남 어디에나 있는 호치민의 동상이었다. 호치민 시가 있을 정도로 호치민에 진심인 나라인 건 알고 있지만 이 정도라고? 국부로 대접받는 그가 궁금해서 돌아오는 하노이 공항에서 호치민 평전을 한 권 샀고, 한국에 도착해서도 한동안 호치민에 빠져 살았다. 체 게바라나 알았지 호치민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었던 나는 뭘 안다고 함부로 사회주의에 대해 떠들고 다녔을까.


G7 커피와 커피핀으로 커피 내리는 법을 배워왔고 베트남에서 공수한 커피핀으로 제법 오래도록 커피를 내려 먹었다. 그러고 보니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아저씨가 베트남에서 왔었다. 베트남은 생각보다 꽤 가까이 있던 나라였다.



3. 싱가폴은 크지 않은 도시국가이고, 영어를 사용하는 도시라 꽤 힘들이지 않고 이곳저곳을 다닐 수 있었다. 다니면서 느끼는 건 도시 곳곳이 너무 깨끗하다는 점이었다. 쓰레기는 커녕 녹슨 간판도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깨끗함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도시는 껌도 의료용을 제외하곤 팔지 않는다고 한다. 벌금이 어마 무시하고 사복경찰이 곳곳에 감시하고 있어서 거리에서 함부로 담배를 필수도 없다. 사치품에 대한 세금이 어마 무시해서 웬만한 부자가 아니고서야 술, 담배, 차를 함부로 가질 수 없다. 그랬다. 이 나라 사회주의 국가다.


하지만 지킬 걸 지키면 누구에게나 관대한 나라라, 머라이어 공원에서 먹은 킹크랩은 꼭 다시 찾아가고 싶을 정도로 맛있었고, 공원에 앉아 싱가폴의 야경을 바라던 내게 불어오던 바람은 시원했다. 싱가폴 곳곳에서 F1대회가 펼쳐진다며 이곳저곳 도로에서 대회를 준비하던 모습에 서울 시내에서 그랑프리가 펼쳐진다면 어떨까 상상하기도 했다.


싱가폴은 원주민과 식민지였던 영국과 일본 그리고 주변 국가 말레이시아의 문화가 혼재된 꽤 특이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물론 겉보기에 다른 속성들이 성공적으로 섞인 것 같아 보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문화 뿐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국가의 제도들이 꽤 성공적으로 사회 곳곳에 자리 잡은 것 같아 보여 꽤 부럽기도 했다.



4. 인도네시아 발리섬은 싱가폴을 여행하던 중 하루 정도를 시간 내어 다녀왔다. 분명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인데도, 아이들이 '기브 미 원 달러'를 외치며 우리를 따라다녔고, 직업상 그런 아이들을 돕는 일을 하는 입장에서 아이들을 보며 꽤 마음이 복잡했다.

싱가폴 바로 인접국이지만 물가 차이가 꽤 나서 싱가폴에서는 작은 호텔에 머물렀었는데 같은 금액임에도 발리섬에서는 스위트룸이 나왔다. 불과 한 시간 정도 배를 타고 들어온 곳에서는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동남아시아라 불리는 11개의 국가가 있다. 코로나 이전 해외여행 붐이 불어닥치던 시기에 큰 부담 없이 떠날 수 있던 나라들이기 때문에 동남아에 대한 여행의 단편은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있을 것 같다.


책의 여섯 명의 저자는 이렇듯 가깝고도 또 먼 동남아시아의 역사, 문화, 정치 세 꼭지를 무대로 우리가 알지 못했던 동남아시아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동남아시아 각국은 그 이전의 역사를 제국주의 국가들에 부정당했다. 2차 대전 이후 유럽과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국가가 합쳐지기도, 나뉘기도 했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의 역사가 이 작은 땅에도 피바람을 불러오기도 했다. 물론 이것이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국가도 있다.

여행을 하며 한 번은 만났을 동남아의 날림 쌀과 음식들 그리고 우리와 조금 다른 불교 사원들, 그리고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과 국가의 이야기. 30개의 키워드로 읽는 동남아시아 이야기가 글쎄 나는 꽤 즐겁고 마음에 들었다.


죽었다 싶으면 되살아나는 코로나가 원망스럽지만 아마 이 모든 게 지나면 가장 먼저 떠날 나라는 아마 태국일 것이다. 푸껫의 바다, 수완나품 공항의 수많은 불상들 그리고 권하던 악마의 과일 두리안까지. 여행하며 가이드의 이야기에 빠져있는 것도 좋아하는데 두 시간 동안 꽤 괜찮은 가이드의 설명에 푹 빠져있다 나온 느낌이다. 이제 2년 전 만료되어 버린 여권 사진을 다시 찍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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