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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확인 홀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평점 :
누구나 각자의 사정이 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윤리나 도덕, 규범 같은 것들이 있지만 각자의 사정이라는 건 꽤 복잡다단해서 사회가 요구하는 것들에 꼭 들어 맞지 않기도 한다. 어떤 이는 이를 깊숙이 감추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이 알아왔던 모든 것들과 등지면서까지 그 사정을 지켜내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윤리적이나 도덕 같은 것들도 사람이 만들어낸 제도가 아니었던가.
경남의 작은 시골마을, 은수리에서 나고 자란 희영의 곁에 어느 날 서울에서 필희가 전학을 온다. 희영은 동네 친구 은정, 전학 온 필희까지 삼총사가 되어 우정을 쌓아가지만, 어느 날 필희 엄마와 은정 아빠가 함께 사라지며 마을의 모든 것이 바뀌고 만다(이후 둘은 본인의 이름으로 자신의 에피소드를 가지고 등장한다).
죽고 싶다. 한 번 정도는 누구나 했던 생각일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실패에 의해서든, 타인의 의도에 의해서든 혹은 어떤 이벤트이거나, 이도 저도 아닌 일에 떠밀려서 그렇게 되었든 간에 누구나 한 번 정도는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 해보았을 것이다. 만약 가장 손쉽게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장소. 심지어 아픔이나 두려움도 없이 순식간에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 시체도 남지 않고 그냥 내가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곳을 우리가 알고 있다면 어떨까? 우리는 아마 평생 그곳을 누구에게도 일러주지 않은 채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마다 그 장소를 꺼내볼지도 모른다.
희영과 필희는 필희 엄마가 사라진 그 사건 이후, 우연히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는 이 미확인 홀을 발견한다. 그리고 희영은 이 곳에서 필희를 잃고(사실 이건 확실치 않다) 평생을 그 미확인홀 근처에서 머뭇거린다. 희영은 서울로 떠났고 이미 그 사건은 한참 전의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희영은 단 한순간도 이 날을 잊은 적이 없다.
희영의 주위에는 그때의 필희처럼 이 미확인 홀을 찾아 헤매는 이들이 도처에 있었으니까. 엄마를 잃고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미정도, 쇼핑몰 사기 이후 죽기만을 기다리던 혜윤도, 도망가 잘 살 줄 알았지만 돌아오지 않는 남자를 기다리며 평생을 남겨진 아들과 살게 된 순옥도, 그 순옥의 집에서 오백 원짜리를 훔쳐내며 수학여행비를 모으던 이든도 심지어 이런 희영과 살며 마음의 구멍이 더 커져버린 남편 찬영도. 아니 심지어 희영마저도 언젠가는 그곳에 자신을 던져야겠다고 마음 먹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희영은 그 곳을 다시 찾지 않는다. 그녀는 이 미확인홀을 찾는 이들을 필사적으로 만난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손길을 내밀며 그날의 필희를 구해내려 노력한다. 이후 그녀는 30년 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 은정을 만나 묻는다.
"내가 살고 싶어 해도 될까?"
"... 그럼"
희영은 평생을 가져온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은정을 통해 듣는다. 평생 아빠가 부끄러웠던 은정은 이 대답을 통해 필희 엄마를 찾아갔던 그날의 아빠의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각자의 사정들이 다른 이에게는 위태로워 보였을 지언정 어쩌면 그 순간만큼 스스로는 가장 아름다웠음을 알게 된다.
그랬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사정을 가지고 '살아'낸다. 이 사정 때문에 때론 끊어버리고 싶은 지긋지긋한 삶의 굴레에 갇혀서도, 우리는 살아낸다. 그리고 우린 때론 완벽하진 않더라도 서로의 손을 잡기도 하고, 가끔 말동무가 되어주기도 하며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아낸다. 그 아름다웠던 기억 때문에.
작가님은 소매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단추처럼 삶과의 연결이 위태로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다행이었다. 이런 우리들도 함께 손잡아 주고 살자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렇게 살자. 살아내자. 당신이 어떤 사정을 가지고 있던, 우리 어느 공간에서 서있던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