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숨어 있는 세계 - 언어치료사가 쓴 말하기와 마음 쌓기의 기록
김지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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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앞선 글에서도 몇 번 밝혔듯이 나는 사회복지사다. 물론 지금은 복지관이 아니라 여의도 빌딩에 근무하지만 이전에 꽤 오랜 기간 아동청소년 복지를 담당하며 많은 아이들을 만났고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기획하고 운영했다. 복지관을 찾는 친구들은 대부분 경제적 사정이 있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나 개 중에는 장애나 경계선의 문제를 가진 친구들도 있다. 이 경우 사실 내가 직접적으로 만난 사람은 아이들보다는 이들의 부모님이었다.(치료는 치료사님의 영역이니) 이 부모님들을 만나며 세상에는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또 다른 백만 개의 사연과 백만 개의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감히 '힘내라'라고 말하는 입이 부끄러운 순간, 그저 티슈 통을 그 앞에 놓거나, 가만히 손을 잡아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순간들이 책을 읽으며 문득문득 떠올랐다.


2. 천재 동화 작가로 불리는 전이수 어머니와 '학부모와의 대화'라는 행사를 진행했었다. 엄마들의 여러 질문들이 있었는데 꽤 절박한 질문 중 '아이가 글을 못써요' , '아이가 말을 안 해요' 이런 질문이 있었다. 이수 엄마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는데 이수도 8살 때까지 글을 못썼다는 것이었다. 그 천재가? 어머니의 대답은 이랬다. '나도 이수가 첫 아이여서 너무 걱정이 됐다. 그런데 이수가 글은 못쓰는데 자신의 생각을 오히려 그림으로 표현하더라'라는 것이다. 그게 신기해서 아이의 그림을 몇 장 지켜봤는데 그제야 알겠더라는 것이다. 

아이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표현하기 어색하고 서툴 뿐이지 그 내면에 충분히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자신의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었다고. 그래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기다려줘야 한다고 이수 엄마는 말했다. 

그랬다. 아이의 세계를 어른의 언어로 재단하는 순간 아이는 어른의 언어에 갇히게 되고, 갇힌 그 경계까지만 자라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아니라 부모의 눈에 차기만 하면 그만인 아이로. 


3.'언어가 숨어 있는 세계'라는 책 제목이 참 멋졌다. 책은 언어치료사가 만난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세계에 관한 기록이다. 그 눈길이 따뜻해서, 아이들을 바라는 진심이 책장 너머의 내게도 느껴져서 참 고마웠다. 저자는 분명하고 또렷하게 세상이 장애라고 선 그어버린 아이 내면의 세계와 가능성을 보았던 것 같다. 

아이들은 마음의 문을 열었고, 천천히 우리들의 세계로 한 걸음씩 걸어 나왔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하나하나 다 알지는 못지만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좋은 어른의 따뜻한 손길, 눈길 그리고 마음을 담은 한마디는 아이들의 마음에 평생 남아 그 아이의 빛이 된다고.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아이들은, 그 상처를 언젠가 오롯이 자신을 안아줬던 이의 온기 하나로 치유하고 살아가기도 한다. 아마도 이 치료사님이 만났던 친구들은 모두가 그 온기를 가지고 있을 거다. 그리고 지금도 각자의 자리에서 다리에 힘을 주어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내고 있을 것이다.


4.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까만 여의도는 여전히 빌딩과 사람으로 가득하다.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며, 스마트폰을 보느라 옆에 누가 서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커다란 광고판과 네온 사인은 매일 같이 오늘의 최신 트렌드를 알려주며, 이것을 사야 힙한 사람이 된다고 유혹한다. 화려한 회색 빌딩 아래서 문득 복지관의 작은 내 책상이 그리워졌다. 쭈볏거리며 복지관 문을 열고 들어오던 아이들이 보고 싶어졌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음과 마음이 통하던 그 순간들이. 사무치게 아련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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