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날아 차 - 작심삼일 다이어터에서 중년의 핵주먹으로! 20년 차 심리학자의 태권도 수련기
고선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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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권도에 얽힌 기억이다. 어릴 적 엄마는 나를 태권도 대신 피아노 학원에 보냈다. 내가 딱히 태권도를 배우고 싶었던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란색에 까만 피아노가 그려진 가방은 무언가 남자 아이입장에서 수치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숨어 지내던 어느 날, 태권도복을 입은 친구와 노란 가방을 든 나는 길에서 만나고 말았다. 위아래로 나를 스캔하다 내가 들고 있던 노란색 피아노 가방에 눈이 멎은 녀석은 (들으라고) '칫 ㅋㅋ'하며 노란 가방과 나를 비웃었다. 그날 그 가방을 집 바닥에 내팽겨치며 나도 태권도 보내달라고 얼마나 울었던지.


2. 선배가 태권도 사범이어서 도장에 들른 적이 있다. 동네 어귀에 위치한 태권도장은 (한 번도 가보진 않았지만) 딱 내가 생각했던 그곳이었다.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와글와글 모여있고, 간식을 먹고, 한두 시간 태권도를 배우다 집으로 돌아가는 곳. 그런데 뒤에서 들은 선배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달랐다. 요즘은 태권도를 배우기 위해 오는 아이들보다 하교 후 안전한 곳에서 시간을 때워야 하는 아이들이 더 많다고. 맞벌이 부부의 경우 하교 후 아이들을 학원에 돌리는 데 그 중에서도 배워두면 뭔가 자기를 지킬 수 있고, 하굣길 봉고차 운전 확실하고, 가끔 주말에 아이들 데리고 놀이동산도 가주는 태권도장이 1번이란다. 어쩐지 그 옛날 들기 싫은 피아노 가방 든 내 모습에 저 아이에게 보인다더니.


3. 그 와중에 가끔 그 중간에 끼여있는 어른들이 보였다. 당연히 검은띠 혹은 사범님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수강생이란다. 선배는 가끔 배우러 오시는 성인들도 있다며 대단하신 분들이라고 추켜세웠다. 태권도? 나도 운동하지 않으면 큰일 날 나이가 되면서 꽤 여러 운동을 머릿속에 떠올렸는데(골프, 테니스, 러닝, 쇠질...) 태권도는 한 번도 후보로 꼽은 적이 없다. 애들이 하는 스포츠라는 이미지가 강해서일까. 군대에서의 PSTD가 찾아온 것일까. 선배는 어른들이 배우는 경우가 더 오래 다니고 제대로 즐겁게 배우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리고 가끔은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가 아니라 같이 늙어가는 친구 처지에서 본인이 배우는 게 더 많다고.


4. 책은 그런 수강생, 50대에 태권도를 시작한 동네 아줌마의 이야기다. 특별히 운동을 해본 적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고, 움직일 일도 없다고 생각한 아줌마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태권도, 태권도를 하는 나, 그리고 태권도가 주게 되는 것들 관한 이야기. 다이어트가 목적이 아니라 꽤 포괄적인 '건강한 삶'을 목표로 두고 하는 태권도 이야기는 꽤 깊고, 묵직하다. 품새, 겨루기, 격파 등 어디서 들어본 태권도 용어들이 어떤 의미인지 이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아줌마의 시선은 생각보다 따뜻하고 정겹다.

그 눈으로 태권도장에서 만나게 되는 소소한 풍경들, 태권도인이 됨으로 일어나는 생활의 변화들. 이 소소한 작은 움직임들도 그렇다. 태권도장에 등록하고 태권도라는 운동을 시작했을 뿐이지만 이 작은 행동은 삶에 꽤 큰 파도를 가져온다. 저자의 말처럼 신체적 고통이 있을 때나 인식했던 신체감각들을 조금 더 자주 예민하게 발견하는 경험. 나도 제법 궁금해졌다.


5.'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마음'이라는 닳고 닳은 구호가 헛소리가 아니었다는 걸 날마다 경험하는 요즘이다. 나이를 들어가며 배가 나오고, 점점 더 움직이는 게 어려워진다. 러닝을 즐겨 했던 편인데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10km가 이젠 죽을 것 같이 힘들다. 하면 할수록 느는 게 운동이라던데 어느 순간 꾸준하지 않으면 달릴 때마다 자꾸 아파오는 몸뚱아리를 매일 만나고 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않고 앉아만 있을 순 없다. 누구처럼 성난 근육을 갖고 싶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매일 늘어나는 뱃살을 마주하고 싶지는 않다. 무거운 몸만큼이나 무거워진 마음을 갖고 살고 싶지도 않다. 결국 다시 러닝화 끈을 고쳐멘다. 태권도는 못하겠지만 하던 운동은 마저 해야지. 운동하기 좋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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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은 안전을 배달하지 않는다 - 배달 사고로 읽는 한국형 플랫폼노동
박정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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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배달음식을 시켜 먹지 않는다. 치킨이 먹고 싶어도 포장으로 주문하고는 직접 가지러 가는 편이다. 옛날부터 그랬다. 일단 집에 모르는 사람이 찾아 오는 것이 달갑지 않다. 예전에는 현금으로만 라이더에게 결제를 했어야 했는데 그것도 싫었다. 최근 하늘 모르는 줄 모르고 치솟은 배달료는 내 이런 결정을 더 강화시키는 강화제가 되었다.


2. 여의도가 직장이고 그 근처에서 자취를 하는 처지라 배달 플랫폼에 관심이 있었던 적이 있다. 요즘은 단건 배달이라는 것도 있다던데 퇴근하고 치킨 한 마리 한강공원에 걸어서 배달하면 나름 아르바이트로 훌륭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한 번도 실행에 옮긴 적은 없다. 사전 교육이 생각보다 많았고 무엇보다 배달 후기들을 몇 건 검색했을 때, 나는 라이더가 아니라 뚜벅이 혹은 따릉이일진대 식은 음식 가져온다고 타박 받거나 시간에 쫓기거나 하고 싶지 않았다.


3. 배달 알바를 해볼까 찾아보며 알게 된 몇 가지 사실이 있었다. 배민, 쿠팡, 요기요 외에도 배달 중계 에이전시가 생각보다 많다는 거. 그리고 거리, 시간 요즘은 아주 실시간으로 달라지는 배달료가 가늠할 수 조차 없게 복잡하다는 거.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때론 감정노동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이런 이들을 꽤 멋진 단어. 플랫폼 노동자라도 부르고 있다는 것도.


4. 라이더 유니언의 초대 위원장 박정훈 씨가 7년간의 라이더 생활, 그리고 지금의 라이더들의 사정에 대해 쓴 책이다. 예전에는 중국집 혹은 치킨집에 고용되던 배달원들이 건 바이 건 방식의 에이전시 시스템으로 바뀌며 그리고 코로나 시절 이 배달업이 꽤 흥행하고 진입장벽이 낮아지며,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라이더가 되었다. 오토바이 운전은 난이도가 꽤 높은 운전임에도 자전거 수준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덤벼들었고 높은 확률로 이들은 크고 작은 사고에 노출되었다.

오토바이가 가져오는 하드웨어적 문제 뿐 아니라 늘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어야 하는 배달 시스템 역시 안전에 큰 위협이 되었다. 휴대폰으로 조금이라도 고퀄의(가깝고 수수료가 큰) 배달을 빨리 낚아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졌으므로 한 손에는 핸들을 한 손엔 휴대폰을 잡고 운전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며 이는 라이더 본인 뿐 아니라 거리의 무법자로 낙인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고 만다. 거기다 고도화 된 시스템은 네비로 이들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며 잠시 잠깐 쉬어갈 시간도 허락하지 않는다.


5. 예로부터 내려오는 배달업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아직도 유효하다. 아직도 이들을 '배달'이라 부르며 반말이나 욕지기를 내뱉는 경우는 허다하고, 업주들조차 이들에게 화장실 한 칸 내어주지 않는다. 책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고급 아파트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 사람이 택배 노동자에 배달노동자도 있다는 사실은 꽤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치킨을 사들고 가는 아빠는 주민용 엘리베이터, 치킨을 배달하는 노동자는 화물 엘리베이터. 거의 모든 직장인들이 출근할 때 자존심 같은 거 냉장고에 넣어두고 출근하다지만 배달까지 그럴 일인가.


6. 저자는 배달 공장을 멈추고 어떠한 위험요소가 있는지 함께 들어가서 살펴보자 권한다. 그의 말처럼 사실 이런 외주화에 따른 비인간화의 문제는 배달업만의 문제는 아니다. 무한 경쟁이라는, 플랫폼 어쩌고 하는 허울좋은 타이틀에 묻혀 노동 현장에서 사람의 자리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물론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거의 모든 산업이 AI로 대체되고 유연화 되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 땅에는 사람이 산다. 나와 우리,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이 살아간다. 사람 되기 어렵다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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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운
티파니 D. 잭슨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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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두껍다고 생각했는데 몰입감이 어마 무시했다. 추천사의 누가 쓴 것처럼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마치 스크린 앞에 앉아있는 것처럼 장면 장면이 생생하게 넘어갔다. 나는 이미 미국의 어느 녹음 스튜디오였고, 소녀가 갇힌 거대한 저택이었으며, 딸을 찾기 위해 그 저택의 문을 하염없이 두드리는 아버지와 함께였다. 정말 오랜만이다. 외국소설임에도 이렇게 나를 몰입하게 만드는 소설은.


꿈이 있었던 소녀가 자신의 꿈을 저당잡힌 채 말라가는 이야기는 꽤 많은 이슈를 다룬다. 재능 있는 흑인 소녀의 아메리칸 드림, 백인 권력자 남성이 흑인 소녀를 착취하는 그루밍 성범죄, 그리고 이를 고발하는 미투까지. 그리고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어른의 탈을 쓴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만난다.


이 책의 내용은 R. 켈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차이를 아는 어른들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문제에 어 면 입장을 취하든 간에... 그 일이 옳지 않다는 걸 '그'가 더 잘 알았을 테니까요.(p.437)


살면서 만난 어른들이 아이를 대하는 태도는 참으로 다양하다. 거의 모든 나라의 아동보호법에는 아동은 모든 사회가 함께 보호해야 하고 보호받아 마땅한 존재로 명시하고 있지만 또 많은 경우,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어리다는 이유로, 미숙하다는 이유로. 아이들은 정말 최선을 다해 자신을 표현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 표현에 관심이 없다. 우쭈쭈 어린데도 잘하네. 어머 귀여워라.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지만 수영부 활동을 했고, 몸에 달라붙는 수영복이 아닌 한 치수 큰 수영복을 입어야 했던 보수적인 학교의 인첸티브를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도 그랬다. 그녀는 누구보다 노래하고 싶었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았다. 그 꿈을 이루어 준 것은 되려 그녀를 착취하기 위해 준비된 어른들이었고, 이들은 아이의 꿈과 사랑을 담보로 집요하게 아이의 영혼을 망가뜨렸다. 

이들도 최악이었지만 잠시 인첸티브가 유명해졌을 때 그렇게 아이를 부러워 마지 않던 이들도 아이가 뜻밖의 성추문에 휘말리자 아이를 자신의 공동체에서 손절하기 바빴다.(개인적으로 이 인간들이 더 최악이다.) 최악에서 최악으로 치닫는 어른들의 악다구니에 모골이 송연해지려는 찰나, 우리는 이야기 곳곳에서 진짜 어른들을 만나게 된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달라며 슈퍼스타 앞에서 아이를 감싸고 한 발도 물러서지 않은 스튜어디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딸을 놓지 않은 부모, 누군가는 우습게 여겼지만 18세 미만의 아이와 성인을 철저히 구분하여 보호하는 사회 시스템까지. 인첸티브는 그녀의 영혼이 망가져 가는 와중에서도 순간순간 용기를 내어 이런 진짜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고 그 때 마다 이 진짜 어른들은 구렁텅이에서 아이를 보호한다. 차마 그곳에서 아이를 꺼내지는 못할 망정, 더 빠져들어가지는 않게. 최선을 다해 그들은 아이의 손을 잡는다. 아마도 이것이 희망의 증거라면 증거일 것이다. 옳지 않은 걸 옳지 않다고 말하고, 그곳에서 아이들을 지키고 서 있는 진짜 어른들이 아직은 이곳에 있기 때문에.


오래간만에 몰입감 있는 제대로 된 소설이었다. 소설 곳곳에 묻어있는 선득한 피의 질감이 꽤 오래도록 남았다. 아직도 마음이 쿵쾅거린다. 그리고 이 소설 왠지 머지 않아 영화로 만들어질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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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오후 4시 반 - 당신의 성장은 계속되어야 한다
양윤정.이승우 지음 / 더퀘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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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공부를 썩 잘했거나 잘하는 편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하버드나 아이비리그에 대한 이상한 로망이 있다. 한 때 유행처럼 돌았던 하버드의 새벽 4시 도서관 풍경 짤에는 또 얼마나 설렜는지.(내가 왜..) 세상에 늦은 건 없다지만 그래도 이미 한참 늦어버린 나이에 또 난 하버드라는 제목에 설레버렸다. 그런데 새벽 4시는 알겠는데 오후 4시 반은 또 무슨 소리람?


책은 하버드에서 유학하게 된 아내와 우연찮게 그 유학 생활에 가정주부로 동행하게 된 남편의 이야기다. 하버드로 유학 가는 여자친구를 보낼 수 없어 결혼을 했고, 또 혼자 만리타국에 있는 아내가 안타까워 급하게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떠나버린 젊은 부부의 이야기. 얼핏 사랑꾼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정확히는 이 부부가 하버드 안팎에서 경험한 그리고 관찰한 하버드 사람들의 이야기다. 


1. 오후 4시 반이 제목이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갓생, 마라클모닝으로 대표되는 열심인 삶은 주로 아침형 인간을 강조한다. 아침형 인간이 되려면 높은 확률로 일찍 잠들진 대 그렇게 되면 실제 깨어있는 시간은 아침형 인간이나 저녁형 인간이나 사실 거기서 거기다. 그리고 실제로 저녁형 인간이 성공할 확률도 만만찮게 높다. 하버드 사람들은 그러니까. 저자는 하버드에서 만난 이들의 이 ‘다양성’을 이야기한다. 

또 오후 4시 반은 수업이 어느 정도 마치고 난 여유로운 시간이다. 실제로 이들은 수업시간 뿐 아니라 강의실 밖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오후 햇살이 따사로이 비치는 캠퍼스에서의 대화, 네트워킹, 독서, 명상 그들은 다양하게 자신들의 시간을 보내고 또 쉰다. 그리고 이 배움이 진짜 배움이 되는 경우가 더 많으니 어쩌면 이 제목 꽤 적확하다.


2. 하버드라는 공간에서 공부하는 아내는 하버드 사람들이 결코 놓치지 않는 4가지를 저자는 멘탈 관리, 관계 관리, 시간관리, 커리어 관리의 네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물론 이들의 '기본기'로 도전, 통찰력, 실행력, 인내, 회복탄력성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건 좀 익히 들어온 이야기니 이 정도로 갈무리 하고) 관계나 커리어 관리야 대외활동, 네트워크 모임 등으로 대체되며 우리도 꽤 관심 있어 하는 것들이지만 멘탈과 시간관리는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한국인에게는 늘 부족하고 또 부족하다.

꽤 재미났던 건 멘탈 관리란 ‘엄마나 친구와 얘기하기’, '오늘 한잔 콜' 정도가 전부인 우리 사회와 비교하여 다양하고 체계적인 자신만의 관리 방법을 만들고 학교와 사회가 이 마인드 셋을 지원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없지만 미국에는 있는 개인상담 같은 것부터 시작해서, 우리는 더 좋은 네트워킹의 도구(????)로 활용되는 MBTI나 에니어그램도 이들은 자기이해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다.(이 간극은 꽤 크다) 

또 중요하다고 말만 하지 사실 크게 중요하게 생각 않는 시간관리도 마찬가지다. 중요하고 긴급한 것을 먼저 하고 중요하지 않고 급하지 않은 것을 맨 뒤로 미루거나 폐기하라. 이거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다. 그런데 하버드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이 버릇을 들이려 노력하고 있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할 건 해야지. 24시간을 모든 것을 '할 것'으로 지정하고 3-4시간 자며(주말에 몰아 자기)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삶이라 이야기하는 우리와 비교해 이들은 자기가 정한 쉬는 시간은 그냥 쉰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꽤 긴 페이지를 할애하여 설명한다.


3. 공동저자인 가정주부인 남편이 만난 하버드 밖의 하버드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실 좀 더 흥미로웠는데, 남편은 끊임없이 하버드를 배회하며(수업은 못 들어가도) 그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그들은 주로 수업 이후 운동을 하고 책을 읽는다. 명상을 하기도 하고 네트워킹에 꽤 많은 시간을 쏟기도 한다는데 재미있는 건 우리나라처럼 취업을 위한 대외 활동은 ‘이래야 한다’는 규칙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 자신의 방법대로 자기의 시간을 보낸다. 

재미있는 건 이는 투자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데 그들은 철저히 공부하고 자신의 분야에 투자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든 그 투자에서 배움을 이끌어 낸다. 일희일비 하지 않고 자신만의 보폭으로 자신이 갈 수 있는 길을 간다. 이것이 수업이 끝난 하버드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4. 하루는 남편이 그렇게 알게 된 친구 노라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간 자리에서, 노라의 아버지가 한국의 남자들은 군대를 다녀오고 서른이 넘어서야 취업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이런 이야기를 했더란다.


자네 지금 나이가 몇인가? 그걸 3으로 나누게. 그렇게 해서 나오는 숫자를 시간으로 생각해 보게나. 나이가 30이면 오전 10시가 되겠지? 인생을 하루라고 생각해 보게, 어떤가. 뭔가를 시작하거나 이루기에 많이 늦은 때라고 생각하는가?"(p.233)


내 나이가 40이니 나누기 3이면 13 정도 될게다. 오후 1시를 조금 넘은 시간. 그렇다면 아직은 괜찮다. 내가 12시까지 늘어지게 잤더라도 오후 1시 정도면 오늘 내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기 충분한 시간이다. 좀 모자라면 야근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늦게 시작한 만큼의 페널티는 충분히 지불할 용의가 있다.


5.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묘한 도전, 오기 같은 게 솟아올랐다. 아직은 내 인생을 이렇게 마무리하기에 나는 못 해본 것도, 하고 싶은 일도 너무 많다. 조금씩 나를 그 일에 더할 생각이다. 앞으로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꽤 나은 모습일 것 같다. 혹시 아는가. 나도 언젠가 하버드에 가게 될런지도.


덧. 에니어그램은 내가 가장 잘 아는 툴이고(나 나름 에니어그램 강사), 시간관리는 후배들과의 멘토링 때 빼놓지 않고 강조하는 주제다. 하버드 사람들도 이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니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기도 했고, 조금 더 깊이 이 주제에 대해 들고 파야겠다는 묘한 오기나 다짐도 생겼다. 이 부분은 브런치에 따로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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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 게 뭐 어때서 - 씩씩한 실패를 넘어 새로운 길을 만드는 모험
김수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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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목만으로 위로가 된다. 그래. 도망치는 게 뭐 어때서.


2. 운전할 일이 많던 시절, 운전하며 SBS 라디오를 주로 듣곤 했는데 그러다 보니 SBS 아나운서 라인에 대해 내적 친밀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원래 S 본부 아나운서 라인이 뛰어나서인지 몰라도 박선영, 배성재, 장예원 등 꽤 쟁쟁한 아나운서 선배들 사이에서도 김수민 아나운서는 촉망받는 막내였다. 이 선배들과의 티키타카에서 얻은 수망구라는 별명도, 입사 3년차에 그녀는 아마 장예원의 바통을 이어받아 S 본부의 얼굴이 될 후보 1순위였을 것이다. 때마침 그 잘나가던 선배들이 모두 프리를 선언하고 생각보다 빨리 메인이 되겠구나 싶었는데 그런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퇴사를 선언했다. 프리도 아니고 말 그대로 퇴사였다. 왜??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김수민 아나운서의 대답이자, 그녀가 추구하는 삶의 기록이다.


3.

위태롭다. 위태롭다. / 땅에 금을 긋고 / 그 안에서 종종걸음. /

가시나무여 가시나무여 / 내 가는 길 막지 마라. 내 발길 구불구불 / 내 발을 해치마라. /

산 나무는 스스로를 자르고 등불은 스스로를 태운다. /

계수나무를 먹을 수 있어 잘리고 , 옻나무는 쓸모 있어 베인다. / 

사람들 모두 '쓸모 있음의 쓸모'는 알고 있어도 '쓸모 없음의 쓸모'는 모르고 있구나.

-<미친 사람 접여의 노래> 중에서(<장자>, 218쪽 p. 108)


퇴사할 즈음 그녀가 읽었다는 장자의 한 구절이다. 우리는 모두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살아간다. 그런데 이 '쓸모'에 집착하다 보니 결국 우리는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으로 서로를 나누게 되고, '쓸모 없는'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사사로운 것을 좇다 곧잘 나를 잃어버리곤 한다. 장자는 우리게 '쓸모 있는'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았다. 세상의 자질구레한 유용성에 목메지 말고 내게 맞는 시기를 기다리라고 한다. 

'쓸모 없음의 쓸모' 진짜 내가 세상에 필요한 곳을 찾아 가는 기다림의 시간. 

그녀는 이 시간을 되찾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의 인생을 받아 들이고 사랑하겠다고 한다. '쓸모 없음의 쓸모' 그녀가 찾겠다는 그 시간이, 이 이야기가 나는 참 좋았다. 


4. 책은 퇴사를 즈음 하여 그녀가 겪은 일들, 생각한 것들 그리고 앞으로 그녀가 살고 싶은 삶에 대해 잠잠하게 이야기한다. 누군가는 MZ라고 하고, 누군가는 치열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하고, 누군가는 또 다른 이유라고 했는데 그녀는 이런 세간의 이야기를 이렇게 쿨하게 넘긴다.


"학교로 돌아가 대졸자가 된 다음 대학원을 갈 생각이에요!" 라고 했더니 대학원생이 되려고 그만둔다는 말이 돌았고, 남자친구 있느냐는 질문에 "있어요!" 했더니 결혼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누군가는 이 모든 소문 중에 무엇이 진실이냐고 직접 묻기도 했는데 다 일정 부분 사실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다 맞 고 다 틀린 말이 있다. 소문이 원래 다 그렇지, 뭐.(p.41)


소문이 다 그렇지 뭐. 맞다. 사실 내가 결정했다면 누군가의 수군거림은 다 '그렇지 뭐'하고 넘겨버리면 그만인 것들이다. 아마 그 수군거림도 받아들이는 내게 나 큰 일이지 그들 입장에서는 하룻저녁 술안주로 떠들어제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지난해 내 결혼식에 오고서도 명절에 만나 '결혼은 했느냐' 묻는  먼 친척의 사사로운 질문과 비슷한 부류 아닐까. 알면서도 늘 기분 나쁜 이 수군거림에서도 좀 자유로워져야 할 텐데.


5. 너무 늦은 나이라는 없다지만 사실 이미 난 틀려버린 나이일는지도 모르겠다. 사표를 확 던져버리진 못해도 내 삶에서, 나를 찾아가려는 노력을 다시 경주해야겠다는 작은 용기가 생겼다. 그러다 안되면 도망치지 뭐. 그래 도망치는 게 어때서. 의미 없는 삶을 견디고 버티는 것보다 도망치는 게 더 낫다. 맞다. 나도 예전에 이렇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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