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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운
티파니 D. 잭슨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평점 :
꽤 두껍다고 생각했는데 몰입감이 어마 무시했다. 추천사의 누가 쓴 것처럼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마치 스크린 앞에 앉아있는 것처럼 장면 장면이 생생하게 넘어갔다. 나는 이미 미국의 어느 녹음 스튜디오였고, 소녀가 갇힌 거대한 저택이었으며, 딸을 찾기 위해 그 저택의 문을 하염없이 두드리는 아버지와 함께였다. 정말 오랜만이다. 외국소설임에도 이렇게 나를 몰입하게 만드는 소설은.
꿈이 있었던 소녀가 자신의 꿈을 저당잡힌 채 말라가는 이야기는 꽤 많은 이슈를 다룬다. 재능 있는 흑인 소녀의 아메리칸 드림, 백인 권력자 남성이 흑인 소녀를 착취하는 그루밍 성범죄, 그리고 이를 고발하는 미투까지. 그리고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어른의 탈을 쓴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만난다.
이 책의 내용은 R. 켈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차이를 아는 어른들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문제에 어 면 입장을 취하든 간에... 그 일이 옳지 않다는 걸 '그'가 더 잘 알았을 테니까요.(p.437)
살면서 만난 어른들이 아이를 대하는 태도는 참으로 다양하다. 거의 모든 나라의 아동보호법에는 아동은 모든 사회가 함께 보호해야 하고 보호받아 마땅한 존재로 명시하고 있지만 또 많은 경우,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어리다는 이유로, 미숙하다는 이유로. 아이들은 정말 최선을 다해 자신을 표현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 표현에 관심이 없다. 우쭈쭈 어린데도 잘하네. 어머 귀여워라.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지만 수영부 활동을 했고, 몸에 달라붙는 수영복이 아닌 한 치수 큰 수영복을 입어야 했던 보수적인 학교의 인첸티브를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도 그랬다. 그녀는 누구보다 노래하고 싶었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았다. 그 꿈을 이루어 준 것은 되려 그녀를 착취하기 위해 준비된 어른들이었고, 이들은 아이의 꿈과 사랑을 담보로 집요하게 아이의 영혼을 망가뜨렸다.
이들도 최악이었지만 잠시 인첸티브가 유명해졌을 때 그렇게 아이를 부러워 마지 않던 이들도 아이가 뜻밖의 성추문에 휘말리자 아이를 자신의 공동체에서 손절하기 바빴다.(개인적으로 이 인간들이 더 최악이다.) 최악에서 최악으로 치닫는 어른들의 악다구니에 모골이 송연해지려는 찰나, 우리는 이야기 곳곳에서 진짜 어른들을 만나게 된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달라며 슈퍼스타 앞에서 아이를 감싸고 한 발도 물러서지 않은 스튜어디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딸을 놓지 않은 부모, 누군가는 우습게 여겼지만 18세 미만의 아이와 성인을 철저히 구분하여 보호하는 사회 시스템까지. 인첸티브는 그녀의 영혼이 망가져 가는 와중에서도 순간순간 용기를 내어 이런 진짜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고 그 때 마다 이 진짜 어른들은 구렁텅이에서 아이를 보호한다. 차마 그곳에서 아이를 꺼내지는 못할 망정, 더 빠져들어가지는 않게. 최선을 다해 그들은 아이의 손을 잡는다. 아마도 이것이 희망의 증거라면 증거일 것이다. 옳지 않은 걸 옳지 않다고 말하고, 그곳에서 아이들을 지키고 서 있는 진짜 어른들이 아직은 이곳에 있기 때문에.
오래간만에 몰입감 있는 제대로 된 소설이었다. 소설 곳곳에 묻어있는 선득한 피의 질감이 꽤 오래도록 남았다. 아직도 마음이 쿵쾅거린다. 그리고 이 소설 왠지 머지 않아 영화로 만들어질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