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힙합과 한국 - 랩 스타로 추앙하거나 힙찔이로 경멸하거나
김봉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평점 :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바야흐로 고딩2학년 나의 99년은 폭풍 같은 시기였다. 서태지를 대장으로 모셨고, 듀스에 심취했으나 또 한쪽에 크리스천으로 '가지마라 보지마라 듣지마라 하지마라'는 메세지에 방황하던 나의 고딩 시절. 드렁큰 타이거의 등장은 뭔가 '이제 진짜가 나타났다'라는 선언이었다. MC스나이퍼, 조PD, 김진표 소위 랩으로 먹고사는 뮤지션들이 등장했고 여기 DJ.DOC 같은 댄스그룹인 줄 알았던 이들까지 힙합에 가세하며 2000년대 초반 내 플리는 거의 이들로 채워졌었다.
그리고 2000년대 후반부터 거짓말 같이 나는 힙합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책에도 나오지만 아마 <쇼미 더 머니>가 등장하던 시즌 혹은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글쎄 이전에 내가 알던 헝그리로 가득했던 모두 함께 으쌰하던 홍대 힙합 신은 이미 없었다. 나는 처음 듣는 래퍼의 이름을 모른다 하면 그 길로 '힙찔이' 취급 당했고, 남들에게는 힙합을 가지고 장난치지 마라면서도 자기들은 모든 것에 성을 내고, 모든 것을 깠다. 쇼미 더 머니. 맞다 그때부터였다. 예전에는 힙합바지에 길어 늘어뜨린 체인 목걸이가 그들의 상징이었다면, 이제 그들을 대표하는 건 고급 시계 외제차 예쁜 여자들을 잔뜩 옆에 끼고 있는 마초의 모습이었다.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할지언정, 나 같은 일반인에게 힙합이란 일단 잘 모르겠는데 자기들끼리 세상에 없던 음악을 하는 멋쟁이 코스프레에 세상으로부터 전향적이고 열린 태도를 기대하면서도 본인들 스스로는 한없이 닫혀있고 폐쇄적인 이들로 각인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때 즈음이었나? 타이거JK의 마지막 앨범을 끝으로 나는 더 이상 힙합이 궁금하지 않았다.
이런 내게 한국 힙합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 찾아왔다. 책을 읽으며 나는 서태지에 열광하던 나의 고딩시절로, 스나이퍼를 흉내 내던 나의 대학시절로, 아직도 내 옷장에 곱게 자리하고 있는 20년 전 내 힙합바지를 떠올렸다. 'Why not?' 트레이드 마크처럼 늘상 내가 입에 붙이고 살던 질문들과 한때 무겁게 걸고 다니던 FUBU 체인 목걸이, 그리고 모두가 쫄쫄이 바지를 입을 때 나 홀로 입던 힙합바지와 야구 저지를 떠올렸다.
힙합은 무함마드 알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알리가 전성기일 때 힙합은 태어나지 않았지만 알리는 흔히 힙합의 선구자로 불린다. 태도에 관한 것이다. 애송이 시절에도 어떤 거물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는 용기, 지금은 이룬 것 하나 없지만 앞으로 거대한 무언가가 되겠다는 포부와 호언장담, 호전적이고 자존감 충만한 그의 태도가 힙합 문화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정설이다. 힙합을 만든 흑인 래퍼들은 '흑인 영웅' 알리를 보고 자랐으니까.(p.118)
힙합이 뭐예요? 라는 질문에 우스개로 대답하지만 힙합은 '애송이 시절에도 어떤 거물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는 용기, 지금은 이룬 것 하나 없지만 앞으로 거대한 무언가가 되겠다는 포부와 호언장담'이었다.
나는 애송이 시절 이 힙합을 사랑했고, 책을 덮으며 어린 날의 내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서류더미에 머리를 파묻고 '그건 내 책임이 아니에요'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오늘의 내가 심하게 짜쳐 보이면서 말이다.
힙합을 좋아한다면, 힙합이 궁금하자면, 언젠가는 힙합을 해야지 생각한다면 무조건 추천이다. 나와 함께 90년대 중고딩을 보낸 이라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