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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만난 말들 - 프랑스어가 깨우는 생의 순간과 떨림
목수정 지음 / 생각정원 / 2023년 9월
평점 :
1. 프랑스 사람들은 영어를 할 줄 앎에도 영어로 말을 걸어오는 이에게 굳이 프랑스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불친절과 오만의 모습으로 비추어지기도 하는데, 한편으로는 프랑스인 특유의 자긍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렇게 프랑스라는 자존감으로 뭉친 강해 보이기만 한 프랑스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두스망'이라는 단어에서(정확하게는 그 발음에서) 느껴지는 어떤 뭉클함이 있다. 부드럽게라는 단어를 가진 이 단어는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가지마는) 자본주의와는 좀 다른 길을 걷고 싶어 하는 유럽의 풍경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것 같다. 빠르지 않아도 괜찮아. 달리지 않아도 괜찮아. 이기지 않아도 괜찮아. 부드럽게, 여유 있고, 천천히. 그래 그렇게 너의 길을 주시하고 그 길을 걸어.
2.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내려온 프랑스의 정신 자유, 평등, 박애는 프랑스인 특유의 단단한 개인주의의 근본이 되었다. 그들은 본인의 시간을 어떤 식으로든 방해하는 걸 참지 않는다. (물론 미국이 만든 드라마지만)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서 프랑스인들이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는 미국인들을 이해하지 않을 뿐더러, 자신에게 그것을 강요할 때는 가차 없이 손절해 버리는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재미있는 건 프랑스인들은 이렇게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프랑스 정신을 훼손하는 어떤 것에도 이들은 연대하여 대응한다.
3. 재미있는 사실은, 프랑스 대부분의 빵집엔 딱히 이름이 없다(드물게 있는 체인점에만 상호가 있다). 그저 블랑즈리라 써 있고, 제과를 하면 파티스리라는 단어가 더해져 있을 뿐. 프랑스의 약국에 딱히 상호가 없고, 그저 약국이라 써 있는 것과 비슷하다. 이는 마치 그 구역의 빵을 담당하는, 공적 의무를 행하는 곳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p.65)
빵집에 다른 이름이 아니라 그저 '빵집'이라고 쓰여있다는 점, 그리고 빵집이 단순히 빵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 사회의 공적 의무를 행하는 곳처럼 여겨진다는 이야기는 꽤 울림이 컸다. 누구도 굶게 하지 않겠다. 프랑스라는 공동체에 함께 속해있는 이라면 누구나 프랑스인처럼 살게 하겠다는 의지. 이는 치료를 담당하는 약국도 마찬가지다.
4. 나는 한 번도 프랑스에 가보지 못했다. 갈 기회는 몇 번 있었는데 번번이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파리의 모습이 그려진 영화를 좋아하고, 파리의 풍경을 담은 책을 어떤 영화나 책보다 선호한다. <비포 선셋>의 세느강의 풍경은 언제고 내가 앉아있을 풍경이라 믿고 지금도 살아가는 중이다. 그렇게 프랑스 앓이를 하던 중 이 책이 내게 왔다. 아는 프랑스어라곤 봉쥬르 밖에 없지만 낯선 34개의 언어는 마치 이것이 프랑스라는 듯 불쑥 나를 찾아왔다.
언어는 그 사회의 거울이다. 20년간 파리지앵으로 살아온 저자는 34개의 프랑스어를 꼽으며 언어에 투영된 프랑스 사회를 비추어 낸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데 괜히 마음이 벅찼다. 책 한 권으로 프랑스 여행을 다녀왔다고 말하기 민망하지만 책의 울림은 꽤 컸고 마음은 몽글해졌다. 프랑스로 떠나고 싶은가? 이 책은 어느 정도 그 여행의 대체재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