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이혼 시키기
이화열 지음 / 앤의서재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재 결혼시키기>라는 앤 패디먼의 책을 보며 두 세계가 결합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는데, 저자가 이를 빗대 쓴 <서재 이혼시키기>라는 책은 반대로 ‘닮음’에 대한 열망 따문에 ‘다름’을 간과하고 살았던 25년차 부부의 결혼에 대하여, 양육에 대하여 그리고 비로소 온전한 독립을 이루어 가는 이의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만약 자신을 제대로 소유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면, 타인을 통해서 행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혼에서 독립은 상대와 연결되었다는 것을 알면서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고 스스로의 욕망과 행복을 타인이 결정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_여는 글 중


결혼을 열망하는 이들을 가끔 만난다. '왜 결혼하고 싶냐'는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대부분 '안정을 찾기 위해서'라고 한다. 간절히 연애를 원하는 이들을 만나기도 한다. '왜 연애가 하고 싶냐'는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외로워서'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연애를 하면 외롭지 않고, 결혼을 하면 안정이 찾아올까? 내 경험이 무조건 맞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 대답은 '아니'다. 연애와 결혼, 아니 관계는 인간의 외로움과 안정의 욕구를 채워줄 수 없을 뿐 더러 행복의 충분조건도 아니다. 물론 관계에서 주어지는 행복은 존재하지만 독립된 개인이 뿌리내리지 않은 이들에게 연애나 결혼이 되려 독이 되어 버리는 경우도 우리는 종종 만난다. 저자의 말처럼 '닮음'에 대한 열망이 '다름'을 간과하게 될 때 우리는 어쩌면 상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지도 모른다.


책의 1부는 이런 다름에 따른 결혼에 관한 이야기, 2부는 자녀의 성장에 따라 종속되는 부모가 자녀로 부터 독립하는 이야기, 3부는 저자가 말하는 일상 속에서 온전히 자신과 만나는 일에 대한 짧은 이야기다. 짧은 문단의 호흡, 툭툭 던지는 듯한 글의 리듬 그리고 모든 문장 속에 담긴 독립과 의존에 대한 물음. 솔직히 말하면 쉽게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후 글을 쓰려 앉으니 꽤 복잡다단한 감정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터져 나오는 느낌이다. 나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게 얽매이지 않고 살고 싶어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생활은 온전히 나를 나타내고 있는가? 숫자에, 돈에 그깟 타이틀에 목숨 걸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2023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독립적이지만, 또 어느 시대보다 외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삶에 간섭하는 건 싫지만 보여주고 싶은 시대,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가 내 삶을 일일이 들여다보지는 않았으면 하는 시대. 느슨한 연대라는 조금은 생소한 언어가 시대정신이 되어버린 시대에 온전한 나의 모습으로 제대로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니 그런 방법이 있기는 할까. 그 주체적 삶에 대한 질문에 이 책이 조금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따라 쓰기만 해도 글이 좋아진다 -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필사 문장 30 좋은 습관 시리즈 34
김선영 지음 / 좋은습관연구소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민학교 때였다.(국민학교 졸업생 소리 질러) 주말에 백일장이 있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고, 관심 있는 사람 있냐는 말에 별 생각 없이 손을 들었다. 혼자 뭐가 그리 심각했는지 한 구석에 앉아 원고지에 뭐라고 끄적끄적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더라고 당시 엄마는 회상했다. 그리고 몇 주 후. 내 글이 동상인지 뭔지 꽤 큰 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 주 월요일 난생 처음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조회대 위에 올라 교장선생님이 대신 전해주는 상장과 트로피를 전해 받았다. 나도 어쩌면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첫 기억이다.


물론 그 이후 학창 시절 동안 나는 그 어떤 대회에서도 입상하지 못했다.(심지어 고등학교 문학 동아리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 상은 단지 운이었을까? 고딩 이후 누군가에게 한동안 글을 쓴다는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다.


꽤 시간이 흘러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어쩌다 서울로 발령이 나고, 혼자인 텅 빈 서울에서 그냥 시작한 것이 인스타에 쓰는 짧은 서평이었고, 그 소소한 일이 지금의 이 채널이 되었다. 팔로워가 늘어나며 사람들이 서평을 써달라 요청했고, 그 요청이 많아지자 어느 순간 또 글을 놓아버렸다.


글 쓰는 법을 자주 잃어버리는데 딱 그 시기에 글밥 님의 책이 내게로 왔다. 사실 이 리뷰도 거절하려다 글밥 님이 딱 나를 지목하셨다고 해서 받아본 건데 뭐랄까. 어쩌면 이렇게 책들은 생각지 않은 순간에 적절하게 나를 찾아오는 걸까.


책은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모르는 이들에게 혹은 나처럼 어느 순간 쓰는 법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길잡이가 되어준다. 30개의 문장은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 조곤조곤 일러주는데 글태기를 극복할, 아니 글을 쓰게 해줄 힘이 되어주는 문장이 30개나 된다니 한번 읽어볼 만하지 않은가? 다음은 개인적 메모.


1. 중꺽마(5장) : 매일 쓰는 것, 함께 쓰는 것. 그리고 계속 쓰는 것.

2. 지금만 쓸 수 있는 글이 있다(10장) : 글을 읽다 보면 예전에 이 글을 쓰던 순간의 감정, 공기, 습도까지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 어떤 단어든 좋다. 그 단어를 놓쳐선 안된다.

3. 묘사 잘하는 법(15,16,17장) : 오호라.. 이건 좀 두고두고 읽어야 할 듯.

4. 글을 쓰는 이유를 의심하라(27장) : 왜 쓰는가, 글을 통해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5. 회복탄력성을 키우는 글쓰기(에필로그) :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갑갑할 때 그 마음을 종이 위에 혹은 키보드 위에 쏟아 놓고 나면 후련하다. 누가 읽든 그렇지 않던 관계없다. 단지 쓰는 것만으로 충분한 시간.


쓰기에 관심이 있다면 추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편한 연금책 - 놀랍도록 허술한 연금 제도 고쳐쓰기
김태일 지음, 고려대학교 고령사회연구원 기획 / 한겨레출판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며칠 전 국민연금 개혁안이 발표됐다. 1안은 보험료율을 높이고 소득대체율을 올리는 방안, 2안은 소득대체율은 그대로 두고 보험료율만 높이는 방안 두 가지인데, 어쨌건 간에 보험료율이 높아져야 하는 건 불변의 사실인 것 같다. 맞다. 당신 앞으로 국민연금 더 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국민연금 왜 내야해요? 라는 질문을 생각보다 많이 받는다. 그럴 법도 하다. 산재, 고용, 건강보험의 효용성과 이 보험들로부터 보호받은 경험은 아무래도 연금에 비해 크다. 최근에야 우리네 부모님들이 국민연금을 수령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의 연금은 그간 뜯어간 것에 비해 겨우 많아야 매월 200만 원 남짓일 테니(현재 평균 지급액은 56만 원이다)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아직 수령할 날이 한참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연금 고갈에 대한 흉흉한 이야기들이 자꾸 들려오고, 커뮤니티에는 국민연금 안내는 법에 대한 꿀팁들이 돌기도 하니 뭔가 상대적 박탈감은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사실 이런 국민연금에 대한 오해들은 좀 풀고 좀 더 객관적으로 우리의 연금제도를 바라볼 필요는 있다. 국민연금도 있어야 할 이유, 모든 나라들이 운영하는 까닭이 있을 테니 말이다.


1. 국민연금은 사회보험과 연금의 중간적 위치를 지닌다. 즉 경제활동을 할 나이에 일부를 적립해두었다가 나중에 돌려받는 연금과 퇴직 후 일정 수익을 보장하며 빈곤의 위험을 줄이는 사회보험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2. 우리나라의 국민연금은 1988년 완성되었다. 다시 말해 다른 사회보험에 비교해 그 역사가 짧을 뿐더러, 제도 자체도 전두환 정권 시 주먹구구식으로 시행되는 바람에 보험료율이 낮고, 받게 되는 금액이 높게 세팅 되었다(느낌은 그렇지 않아도 타 국가들에 비해 유리하게-반대로 빨리 바닥나게 세팅된 건 사실). 또 특수직역연금과의 교통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했기에, 30년이 훌쩍 지난 이제 이를 효과적으로 통합하기도 쉽지 않다. 국민연금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3. 대한민국의 노인 빈곤율은 심각한 수준이다. 자녀들에게 많은 것들을 주고 돌려받지 못하는 사회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일진대, 예전과 다른 점은 이전 세대가 어떻게든 부모 부양을 자녀의 의무로 생각했다면 지금 이 세대는 받았지만 돌려줄 것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송길영 박사는 이를 미정 산세 대라 부른다.

4. 물론 현재의 노인 인구는 거의 국민연금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곧 100%의 연급 수급자가 등장한다손 치더라도 노인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자녀가 해결하지 못하는 월 1-2백의 수입을 국가에서 보장한다는 건 결코 가벼이 볼 지점이 아니다. 연금은 우리 생각과 달리 젊은이들에게도 노인세대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사회보험으로 자리할 것이다.

5. 그런데 곧 바닥을 보인다는 국민연금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저자는 다음과 같은 OECD의 해결책과 비슷한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이 지면에 풀어쓰기는 좀 복잡하고 길다.


이 책은 대중 서적이지만 결국 논문임이 여기서 드러나는데 이 문제 해결에 관심이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그리고 이 짧은 글이 국민연금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면 한 번쯤은 다른 측면에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OECD가 제시하는 국민연금 개혁방안

1) 보험료율을 높일 것

2) 가입 기간을 늘릴 것

3) 국민연금과 특수직역연금을 통합할 것

4) 소득 상한을 높일 것

5) 사각지대를 해소할 것

6) 일반재정 투입을 확대할 것

7) 퇴직연령과 기대수명 연계를 강화할 것

8) 연금 수급이 근로 유인을 저해하는 것을 방지할 것

9) 출산 및 실업 크레디트를 확대할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시 시작한 공부 - 두려움과 용기 그 사이에서
이동찬 지음 / 휴앤스토리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생 공부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어른들의 거짓말 혹은 저주 같은 건 줄 알았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게 공부인데, 그걸 평생 하라니. 마치 평생 산 정상을 향해 바위를 굴려야 했던 시지포스처럼 살라니. 이 무슨 끔찍한 소리란 말인가. 그리고 어른이 되고 알았다. 그 말, 진짜였다는 걸.


처음에는 이 사실이 싫어 졸업한 이후에는 지독하게도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만 다녔던 것 같다. 그렇게 했던 일, 아는 일 중심으로 열심히 다니다 어느 순간 알아버렸다. 이렇게 산다는 건 결국 내 삶을 그 정도로 밖에 만들지 못한다는 걸. 문득 서서 바라본 풍경엔 내가 멈춰있는 동안 다른 이들이 열심히 달리는 모습이 보였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상대적으로 나보다 못하다 느꼈던 이들도 매일 노력하며 나보다 훨씬 멋진 삶을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그리고 다시 책을 폈다. 좀 늦었지만 나도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썩 엉터리는 아니었던 터라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거라는 어린 시절 격언을 철석같이 믿었다. 내 공부법은 그렇게 무식했다. 엉덩이를 책상에 붙인지 며칠이 지났는데 남는 건 하나도 없고 왜 그렇게 나는 피곤하고 지치는 건지. 그때 알았다. 10대의 공부법과 30대의 공부법은 달라야 했다. 멘붕이 왔고 그렇게 길을 잃은 중에 이 책을 만났다. 예전부터 '잘 외우는 법'에 대한 수많은 이론이 있었지만 그냥 무시하던 나였다. 공부에 요행이 어디 있나. 그런데 저자는 말한다. 요행이 아니라 '쉽게 공부하는 방법' 아니 정확히 배우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물론 모든 사람이 암기하는 법, 공부하는 법은 다르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그의 말마따나 그의 이야기는 한 사람이 지나온 여러 항로에 대한 기록일 따름이고, 그 길을 갈 것인지 새로운 항로를 개척할 것인지는 오롯이 읽는 이의 몫이다. 그런데 나는 그의 말을 신뢰해 보기로 했다.

그는 처음으로 '거꾸로 독서법'을 설명하는데, 이 방법이 내가 책을 읽는 방법과 똑같았다. 나는 책을 읽기 전 그 책에 대한 사전 조사, 간단하게라도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고 어떤 저자가 썼으며 목차는 무엇인지 확인하고 첫 장을 시작한다. 물론 사전 지식 없이 읽어간 책에서 만나게 되는 깨우침도 있지만, 최소한의 가이드를 두고 읽어야 책 속에서 헤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책을 TV 보듯이 읽는 편인데(이래야 쉽게 지치지 않는다), 분초를 다투며 쏟아지는 스마트폰 알람, 놀아달라 바둥대는 고양이 덕에 눈과 머리가 따로 노는 경우가 꽤 자주 발생한다. (집중력이 30분 언저리인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아닌가). 이러한 환경에서 책이 의도하는 바를 정확하게 파악하는데 사전 지식은 꽤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저자는 '거꾸로 독서법'이라는 독서법을 통해 이 메커니즘을 정확히 그대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는 비단 독서 뿐 아니라 공부에도 도움이 된다. 오늘 들을 강의를 먼저 읽어보고 수업에 들어가는 것과, 텅 빈 상태에서 앉아있는 것의 정보의 강도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는 계속해서 피라미드식 요약법(잊어버리지 않고 요약하는 법), 랜덤 논리게임(가상의 논박을 통해 사고를 날카롭게 하는 법), 상상으로 설명하기(가르칠 때가 가장 많이 배운다) 등 효과적으로 공부하는 실제적인 방법론을 설명하고 나아가 시험 합격을 위한 암기법과 공부 전략을 풀어서 설명한다.

*동기부여, 슬럼프 대처법, 공부 계획 짜는 법 등 유튜브 썸네일에서나 볼법한 꽤 실제적인 방법들이 같이 설명되어 있다.


내 생각에 '진짜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다. 직접 책을 읽고 고민 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지식이 축적되고 축적된 지식이 구조적인 지혜로 승화되는 것이다. (p.196)


어느덧 연말이다. 또 새해는 돌아올 것이고, 새해에도 아마 거의 모든 이들의 제1목표는 운동과 영어 공부가 될 것 같다. 사실 이는 나 또한 마찬가지다. 작심삼일을 120번 하면 1년이라는데 책 읽은 김에 나는 그 여정을 조금 일찍 시작하려 한다.

공부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동기부여가 필요하다면 혹은 진짜로 지금 당신이 공부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무조건 일독을 추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탈인간 선언 - 기후위기를 넘는 ‘새로운 우리’의 발명
김한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렇듯 인간이란 협소한 테두리를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다른 존재들, 타자이다. 고로, 자의식 과잉에서 벗어나 타자에 주목하는 것은 탈인간의 출발점이다. 타자를 알아간다는 건, 가령 "알고 보니 저 동식물이 무슨 희귀병을 치유하는 재료로 쓰인 다더라" 같은 사실을 발견해야 비로소 존재 가치가 보이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도구적·실용적인 관점을 떠나 우리에게 여하간의 쓸모가 없더라도, 오롯이 존재 그 자체로서 (타자의) 살아갈 이유를 긍정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을 존엄하게 대하라는 윤리적 명령이 각 인간의 쓸모와 무관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런 조건 없는 타자 긍정은 우리 지식체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탈인간는 인류가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다.(p.13)


책 너머 TV 속에 아이슬란드의 화산이 곧 폭발하고 주민들이 대피를 시작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란 자연 앞에 얼마나 나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인가. 몇십, 몇백 년이 사람이 보기엔 긴 시간이어도 대자연 앞에선 그저 찰나의 시간일진대 사람들은 이미 예고되어 있는 화산 폭발 지대에 집을 짓고 마을을 일구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 모두가 어쩌면 대를 이어 일군 집과 땅을 모두 두고 떠나야 한다. 누군가에게 하소연할 수 없다. 자연이 그러겠다면 그런 거니까.


어릴 적 장마철이면 꼭 지대가 낮은 마을은 물에 잠기고, 사람들이 학교 같은 곳으로 대피하곤 하는 일들이 매년 있었다. 어떤 해는 TV에서 또 어떤 해는 인근 마을이 그렇게 되기도 했다. 나이가 들고 이제 이런 일들은 상하수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던 나의 유년 시절의 이야기로 추억 속에 머물 줄 알았다. 그런데 몇 년 전 그 하도 많은 동네 중 강남, 서울 곳곳에서 갑자기 불어난 빗물에 반지하가 잠겨 버리고 누군가의 삶이 통째로 수몰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다름 아닌 21세기 전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도시 중 하나인 서울에서 말이다.


곧이어 정부가 일회용품 규제 계도 기간을 무기한 연장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환경에 관한 뉴스인데 이어지는 해설은 이것이 소상공인 표심을 의식한 총선용 정책이 아닐까라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환경에 관한 뉴스인데 계도 기간이 끝날 것에 대비해 종이 빨대를 열심히 만들어온 회사들이 우리는 이제 망했다며, 이 재고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정부가 대책을 세우라는 이야기만 들려온다. 환경문제인데… 정작 누구도 종이 빨대를 써야 할 이유에는 관심이 없다.


기후 위기. 2022년 구글에서 가장 많이 검색된 단어다. 우리는 비가 오면, 미세먼지가 들어차면, 날이 너무 추우면, 이런 단어들을 검색하고 곧 잊어버린다. <나의 문어 선생님>을 보고 잠깐 문어를 먹지 못하는 1인이 되었다가도, 금세 원래의 식단을 되찾는다. 플라스틱 빨대가 코에 꽂혀 죽어가던 거북을 보고 으악하다가도 콜라에 꽂을 빨대를 찾는다. 도대체가 나는 어찌 된 인간인가.


신은 인간을 창조하며 모든 생명을 다스리라 명했다고 한다. 이 다스림은 보살핌의 다른 말일 진대, 어떤 인간은 이를 오해해 자연을 파괴하고 정복하는 걸 당연시 여겼다. 오직 인간을 위해, 인간을 제외한 모든 것을 공격하고 정복해 왔다. '타자에 대한 이해'가 허용되는 범위는 오직 같은 인간(어떤 경우는 같은 인종) 일 따름이었다.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탈인간 선언이라고. 존재하는 그 자체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길.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는 인간이 가지 않는 유일한 길.

죽어가는, 아니 어쩌면 이미 죽어버린 지구 앞에 이제 정말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