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캐노피에 매달린 말들 - 톨게이트 투쟁 그 후, 불안정노동의 실제
기선 외 지음, 치명타 그림, 전주희 해제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평점 :
몇 년 전 노량진을 지나가다 꽤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젊은 친구들이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들의 정규직화를 반대한다는 서명을 받고 있었는데, 비정규직, 청년, 여성을 동의어로 생각해온 내게 이 또 다른 청년들의 목소리는 새로웠고 조금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이후 청년들을 대상으로 FGI를 실시했었는데 이때 이들의 입을 통해 들은 메세지는 내가 이들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공평'한 시합에서 '탈락'한 이들은 '다른' 처우를 받아야 한다고. 그들이 청년을 대표하는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많은 이들은 정말이지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본인의 처우는 온당하냐는 물음에 지금은 좀 모자라지만 스스로 더 노력해서 '성공' 할 것이라고. 그들은 답했고, 실제로 그렇게 믿는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지는 모르겠지만 소위 사회적 약자로, 이슈들에 맞서 연대했던 그들은 그렇게 조금씩 갈라지고 있었다. 맞다. 사실 모든 비정규직, 모든 청년, 모든 여성을 사회적 약자라고 부를 순 없다. 일부 괜찮은 환경을 가지고 태어난 이들도 있고 그들의 목소리가 SNS를 통해 더 크게 울려 퍼지긴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기득권의 반대편에서 함께 살기 위해 뭉쳤던 이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연대는 이제 추억 속의 이야기일 뿐 거의 대부분의 이들은 이제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다.
책은 그 중에서도 톨게이트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2019년 1,500여 명의 대량 해고 사태에 도로공사에 맞서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경부고속도로 서울요금소 톨게이트 지붕 위로 오른 이들의 이야기다. 책은 이들을 직접적으로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대법원은 당시 이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들 중 다수가 불법파견을 받은 것으로 인정하면서, 이들도 도로공사 직원임을. 도로공사는 함부로 해고했던 직원들을 해고 철회하고 직접 고용할 것을 명령했다.
언뜻 해피엔딩 같지만 책은, 회사로 돌아간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복직 후 이들에게 돌아온 일은 원래 하던 업무가 아닌 담배꽁초 줍기, 풀 뽑기, 화장실 청소였다. 차별과 왜곡, 모욕과 보복으로 이들의 새로운 일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사실 이 대목은 도로공사의 입장도 들어볼 필요가 있다. 하이패스는 톨게이트의 지형, 구조를 바꾸어 버렸다. 사람들은 더 이상 줄을 서서 통행료를 수납하는 걸 원치 않을 뿐 더러 더 넓고 빠른 하이패스의 설치를 요구한다. 많은 고속도로가 하이패스 도입 초기 30km, 1차선으로 들어갔던 것과 달리 요즘은 많은 고속도로가 톨게이트를 철거해 버린 채 하이패스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달릴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급격한 변화 앞에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잃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이제 와 톨게이트를 다시 설치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면 남은 건 이들에게 어떤 임무를 다시 부여할 것인가다. 도로공사가 지탄받아야 할 부분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이러한 변화를 충분히 예측했음에도 잉여인력을 너무 쉽게 해고로 마무리하려 했다. 그리고 이것이 불발되자 남은 노동자들에게 줄 수 있는 모든 모욕을 선사하며 스스로 그만두기를 바랐다. 슬픈 일은 사실 이건 도로공사 뿐 아니라 지금도 여느 회사에서 자행되는 해고의 기술이기도 하다.
효율성 강화라는 미명 아래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우려는 사실 하루 이틀에 걸친 일이 아니다. 꾸준히 경고해왔고, 대책을 요구받았다. 4차 산업혁명. 더 많은 일자리는 AI가 대체할 것이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어쩌면 대량 해고 사태를 경험할지도 모른다. 지금은 톨게이트 노동자들이지만 내일은 나 그리고 당신의 일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어른이 될수록 열심히 사는 것과 잘 사는 것이 꼭 비례하지 않다는 걸 자연스레 알게 되는데, 열심히 살면 내가 더 열심히 하면 잘 될 거라는 환상을 좇는 이들이 21세기에 더 많이 생겨나는 기현상 앞에 딱히 할 말은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당신의 일자리도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이고 이것이 현실이 될 가능성은 꽤 높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