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꼭두각시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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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언제나 강자의 기록이다.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네 개의 연방으로 구성된 영국을 처음에는 꽤 멋진 국가로 알았다. 하지만 언젠가 알게 된 영국 변방이자 허울뿐인 연방, 독립되지 못한 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인들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을 때 마음이 저릿했다. 만약 조선이 일본에 독립되지 못한 채 오늘날 일본의 연방 국가처럼 존재한다면 아마 우리 또한 이들과 비슷한 마음으로 오늘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독립운동을 하던 할아버지는 일제의 총칼에 죽고, 시간은 흐르고 경제발전을 거듭하며 100년 전 흘린 피는 잊힌 채 누군가는 적응하고, 누군가는 저항하며 또 누군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며 말이다.


이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아일랜드의 한 가문의 이야기. 독립을 원한 아일랜드에 숨어든 영국의 첩자가 혀가 잘리고 목이 달린 채로 발견되면서부터  삼대를 걸쳐 내려온 사랑과 증오에 관한 이야기다. 첩자의 죽음이 있었던 퀸턴가는 영국의 무장단체에 의해 피로 물든다. 학살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은 윌리는 유일하게 생존했지만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버린 어머니와 함께 근근이 살아간다. 그러던 중 찾아온 외사촌 메리엔과 사랑에 빠지지만,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 그 사랑을 지탱할 수 없었던 그는 떠나고 메리엔과 딸 이엘라만 남는다. 윌리가 떠난 이후 메리엔은 끊임없이 영국으로 되돌아 갈 것을 종용 받지만 그녀는 떠나지 못한다. 그렇게 삶은 계속되고 이야기는 메리엔을 거쳐 이엘라에게로 옮겨진다. 이들의 이야기는 다음 세대가, 또 다음 세대가 언제까지 이어나갈 것이다.


월리와 메리엔, 이멜다, 세 명의 시점으로 옮겨가며 진행되는 이야기는 묵직하다. 독립전쟁, 종교분쟁, 사랑 등 역사의 풍경이 담아내는 이야기의 풍경도 다양하다. 마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파친코> 같기도 했다. 


뭐랄까. 이런 긴 호흡의 책을 읽고 나면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다. 하고 싶은 말은 목까지 차오르는데 켜켜이 쌓인 시간 앞에 나의 존재가 보잘 것 없어지는 느낌이고, 내 할아버지, 내 아버지의 선택이 만든 나의 처지에 대한 생각과 함께 지금 나의 선택이 나의 자녀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두려워지기도 한다.

이런 저런 생각에 답답할 즈음 저어기 방문 너머 한잠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내 고양이가 기지개를 양껏 켜고는 자박자박 내게 걸어온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무릎 위로 뛰어올라와서는 이내 고개를 처박고 갸릉거리기 시작한다. 이 고양이는 나를 선택했다. 10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매일 매 순간 나를 선택했고, 내 무릎 위에서, 내 팔을 베고 누워 나를 필요로 했다. 물론 '아빠 바빠'하고 무릎의 고양이를 바닥에 살포시 내려놓으면 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쿨하게 제 길을 간다. 이 작은 하루하루, 진지하다기 보다 돌이켜보면 한없이 가볍고 한없이 즐거웠던 오늘이 모여 10년이 되었고 나는 이 녀석의 집사, 이 녀석은 나의 고양이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거대한 세월의 무게라도 괜스레 먼저 쫄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 이 사랑의 결국이야 어떻든 간에 나는 지금 이 곳에서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 결과야 어쨌건 간에 나의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 이 하루가 모여 삶이 되고 역사가 된다. 그리고 이 하루를 모아서 뒤돌아 볼 때 우리는 그것을 감히 운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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