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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죄다
박현우 지음 / 바른북스 / 2026년 8월
평점 :
철학과 종교가 거듭 씨름해온 물음이 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얼마나 스스로 선택하는가.
내가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태초부터 그렇게 정해진 결정은 아니었을까.
결정론은 모든 일이 앞서 일어난 일과 자연의 법칙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는 생각이다. 만약 나의 선택도 이렇게 결정된 것이라면,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은 어디까지 내 몫일까. 그런데 책상 앞에서 이 고민을 할 때와 실제 누군가의 잘잘못을 가려야 할 때, 이 물음의 무게는 조금 달라진다.
박현우의 <나는 무죄다>는 이 논쟁을 법정으로 데려간다. 미래를 예측하는 양자컴퓨터를 개발한 물리학자 동휘는 아버지를 죽인 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고 이 모든 건 결정되었다며 무죄를 주장한다.
그의 주장을 판단하는 이는 휴머노이드 판사 로버트다. 달리 행동할 수 없었다는 인간과, 그 말이 타당한지 따지는 인공지능이 마주 앉는다.(사실 판사의 자리에 인공지능이 앉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의미심장하다. 인간은 가장 객관적인 판단을 한다며 이 결정권을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에 주어버렸다.) 그리고 로버트는 이 결정론에 입각하여 무죄를 선고한다.
1. 결정론의 딜레마
결정론은 인간의 선택도 앞서 일어난 일과 자연의 법칙에 따라 결정된다고 본다. 동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자신이 아버지를 죽인 일도 그렇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결과라면, 자신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행동을 선택할 수 없었던 사람에게 그 책임을 지우는 것이 옳으냐는 주장이다.
말이 되는 것 같다가도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어떤 행동이 일어난 이유를 설명했다고 해서, 그 행동에 책임이 없다는 결론까지 저절로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동휘가 달리 행동할 수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가 된다면, 피해를 입은 사람은 그 일을 그저 받아들여야 할까. 같은 피해가 반복되지 않도록 막아야 할 필요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결정론의 약점은 여기에 있다. 그것을 빌미로 마음대로 행동한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
한편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입장은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 행동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 끌려가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며,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행동을 멈추거나 다른 길을 택할 수 있다는 믿음도 여기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선택할 수 있다는 말만으로 인생의 모든 결과를 개인의 몫으로 돌리기도 어렵다. 우리는 태어난 환경을 고르지 못했고, 어떤 부모 밑에서 무엇을 배우며 자랄지도 정하지 못했다. 누군가에게는 쉬운 선택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출발선이 다르다고 자유의지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차이를 무시한 채 모두에게 같은 책임을 묻는 일도 공평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결정론과 자유의지를 반드시 둘 중 하나로 우리 인생이 결정되는 건 아니다. 동휘의 이야기는 그래서 귀기울여 들어야 한다. 그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사정을 이해하는 것과, 그 행동에 책임을 묻는 것은 따로 가야 하는가, 함께가야 하는가.
<나는 무죄다>의 이야기가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닌 이유다.
2. AI와 인간의 공생
그 판단을 내린 존재가 인공지능 로버트라는 점에서 이 고민은 예전 철학자의 고민에서 한겹 더 들어간다. 인간이 만든 존재가 인간의 서로 상반된 주장을 판단한다. 인간만의 영역이라고 여겼던 자리에 AI가 앉아 있다.
감정이라는 것이 없는 AI는 아마도 인간보다 객관적이고 정확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판결 결과를 보자면 그것이 인간 사회가 납득할 만한 판단을 내리는 능력과 동의어는 아닌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이미 AI는 인간의 공간을 위협하고 있으며 이미 일정 영역 그 선을 넘어와 인간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기사에서 앤트로픽을 떠난 개발자가 앞으로 10년 이내 AI들은 인간을 멸망시킬거라 경고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었다, 관련 AI업계의 수장들은 이에 AI의 개발 속도를 조절하고 안전성을 먼저 확인하자고 합의했다고 한다. 우리가 어릴적 SF영화에서 봤던 인간의 얼굴을 한 로봇이 인간을 좌지우지하는 세상을 우리는 곧 목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판단에 의해 인류가 삶의 방향을 잡아가는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의 세상을 우리는 실제로 경험할지도 모른다.
그때에 우리는 인간을 어떻게 AI와 구분할 것인가. 이 고민 또한 미래의 고민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고민이 되어야 한다.
3. 소설 같은 상황과 마주한 우리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AI가 인간의 모습을 갖추고 우리와 대화하며 관계를 맺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일을 잘하는 동안에는 유용한 도구라고 부르다가, 자신의 뜻과 권리를 말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들을 인정할 수 있을까.
인간처럼 보인다는 것과 인간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다르다. 아프다고 말하는 능력과 실제로 아픔을 겪는 일 사이에는 인간만이 느끼는 어떤 간극이 있다. AI가 슬픔을 설명하고 위로를 건넨다고 해서 그가 그 슬픔을 느낀다고 말하긴 좀 어렵다(슬픔도 학습이 되는가?).
반대로 진짜로 그 가능성이 없다고도 말할 순 없다. 이미 타자가 되어버린 AI에 대해 우리는 감히 함부로 안다고 말하기 어렵다.
AI가 인간인가 그리고 AI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라는 물음 조금 분리될 필요가 있다. 인간과 다른 존재라고 해서 어떤 권리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동물권이라는 개념이 노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시대에 AI권이라는 단어가 생기지 마라는 법도 없다. 만약 어떤 AI에게 실제로 고통을 겪는 경험이 있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좋거나 나쁜 것으로 받아들이며, 자기 삶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고 이를 사람들이 인지하기 시작한다면 어떨까. 그리고 이는 이미 AI를 관계의 대상으로 여기는 어떤 이들에게는 진행되고 있는 작업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인공지능 판사 로버트에게로 돌아가자. 소설 속의 세계는 이미 AI판사를 노멀로 받아들인 듯 보이지만 과연 이 세상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들은 오류가 없으며 완전 무결한 어떤 존재들인가? 그들이 공리주의가 옳다 인정하면 소수는 모두 무시당하고 척결당해야 하는가. 인간이 아닌 것의 재판을 받기를 거부하는 나같은 이들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설의 고민은 어느 한 지점에서 쉽게 끝나지 않는다.
<나는 무죄다>의 법정에 함께 앉아보자. 동휘에게 어떤 책임을 물을지 생각하는 동시에, 로버트를 어떤 존재로 대할지도 판단해보면서.
인간은 결정되었다는 철학에서 시작되는 질문이 오늘날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지 묻는 AI세상에 어떤 의미로 이어지는지도 대답해보자.
이제는 대답해야 할 질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