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창석 작가의 초기 소설집 슬픈 열대비늘 천장만큼 강렬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소설집에는 총 8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슬픈 熱帶1·2><화살과 구도><體罰法><파리情事><하이스쿨맨><머리가 둘인 사내><滿船歌>이다. <화살과 구도>는 중편으로 작가의 등단작이고, <체벌법>은 이전에 읽었던 작품이었다.

  ≪슬픈 열대책이 절판이라 인터넷 중고서점에도 없어 구하지 못하고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남의 책을 읽지 못한 성향이라 결국 알라딘 중고 서점에 딱 한권 올라있는 책을 구해 이어서 읽었다. 표제작 <슬픈 열대>는 학생운동을 하던 남자들이 성인이 되어 만나 벌이는 일이었는데, 이야기의 흐름이 느슨하게 읽혀졌다. <화살과 구도>는 노동현장에서의 초창기 노동쟁의에 대한 이야기였다. 제목이 아리송해서 읽는 내내 제목을 왜 그렇게 지었을까를 생각하게 했다. 개인적으로 재미는 <파리정사>였다. 선거에 미치다시피 한 한 노인(전우치)이 파리정사 장면에 빠져드는 장면이 특히 좋았다.

  “이따금 부는 바람에 실려 마당을 가득 메운 만개한 코스모스가 마루 위로 향기를 뿌리는 것 같았다. 물 펌프 뒤 죽은 대추나무 가지 사이로 빠져나온 햇볕은 파리에게 환상 같은 명암을 그려 넣었다. 저녁놀빛이 스며든 꽃잎 같은 두 날개 쪽에는 작은 영혼이 깃든 듯하고, 수 시간을 버텨온 여섯 개의 다리는 찬란한 노동의 축제를 열며……아아, 외설은 없고 경건만 남은, 탐욕은 없고 사랑만 남은, 원시의 몰두여, 긴긴 행려여…….”

 

 노인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말이 인상적이었다.

감히 예전엔 이렇듯 아름다운 광경에 취한 적은 없었소. 속눈썹처럼 가늘고 짧은 털로 싸여진 다리가 마루를 완강하게 짚고 있었던 거요. 그 위로 비스듬히 돌을 포갠 듯한 두 마리의 모습이 빼어난 건축물처럼 정교했소. 가끔 부는 바람에 화환처럼 둘리운 코스모스가 향기를 뿌려주고 죽은 대추나무 틈새로 빠져나온 햇빛은 환상 같은 명암을 그려 넣었소. 저녁놀빛이 스며든 꽃잎 같은 날개에서 작은 영혼을 만날 수 있었소.”

  글 속에 따로 ( ) 처리한 부분은 편집상 이유가 무언지 궁금했다.

  책 주문할 때 슬픈 열대라는 검색어를 넣으니까 고갱의 <슬픈 열대> 책이 있어 같이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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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동 2018-01-16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로 쓸려고 했는데, 상품 등록이 안돼 있어서 페이퍼에 등록하게 되었다.
 
타란툴라 - 밥 딜런 소설
밥 딜런 지음, 공진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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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전에 나와있기를, ‘타란둘라는 원실젖거미아목 대형열대거미과에 속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거미류로 독성을 가지고 있다. ‘타란툴라라는 이름은 이탈리아와 에스파냐 등의 남유럽에 서식하는 유럽늑대거미로부터 유래하는데, 이탈리아 남부 도시 타란토의 사람들이 유럽늑대거미를 타란툴라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유럽늑대거미와 타란툴라는 서로 다른 종의 거미이다. 이탈리아에서는 1370년부터 타란툴라와 비슷하게 몸이 털이 나 있는 유럽늑대거미에 물리면 걸린다고 여겨지는 병을 타란티즘이라 하고, 병에 걸린 사람을 타란타티라고 불렀다. 증세는 물린 곳이 통증과 함께 붓고 심장이 울렁거리며, 심하면 정신착란 상태에 빠지고 토하다가 우울증처럼 되어 죽는다고 생각하였다. 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고, 오직 타란텔라라는 춤을 추면서 땀을 많이 흘러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은 500년이나 계속되었고, 나중에 에스파냐에서도 유행하였다고 한다.

  밥 딜런이 왜 소설 제목을 타란툴라라고 지었는지, 책장을 넘기면서 알 것 같았다.

  이 책을 출판한 <맥밀런 출판사> 편집자 로버트 마첼의 서문에 의하면, 이 소설은 1966년에 출판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밥 딜런의 오토바이 사고러 미루어져 1971년에야 출판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그 사이 사람들의 출판 독촉에도 밥 딜런의 의사를 존중해 출판을 미루게 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시인과 작가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느꼈는지를 말함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대변한다. 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할 방법을 찾는다. 그들은 진실을 말하기도 하지만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거짓을 말할 때도 있다.”고 자신의 생각을 보여주었다.

  책을 읽으면서 웃음이 나왔다. 문장은 기존의 방식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끝나지 않은 문장들이 로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어떤 글은 자리에 이 대신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이상 시를 읽는 , 딱 그 느낌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비트박스에 맞춰 랩을 하듯이 읽혀진다는 것이었다. 내 성격상 책을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읽어나가야 직성이 풀리지만, 따로 줄거리나 이야기가 있어 보이지 않아 앞부분의 작은 제목 네 개 정도는 인내력을 가지고 읽었지만, 뒷부분은 작은 제목 있는 부분을 찾아 그 아래 몇 줄을 읽는 식으로 책을 훑어보았다. 혹시라도 보편적인 문장과 이야기 형태의 글이 나오면 제대로 읽어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만 웃음이 나왔다. 글 대부분이 난해시 같은데, 따로 ‘<사슬고리 40>()’로 표시된 글이 나와서이다. 그는 시와 소설의 차이를 어떻게 구분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타란툴라의 독침에 물려 타란텔라 춤을 추면서 땀을 흘릴 때 어쩌면 이 책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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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아침
파스칼 키냐르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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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호회 모임에서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을 봤다. 영상 감독 일을 직업으로 하는 그는 자신의 애장품 중 하나라며 같이 보기를 원했고, 덕분에 처음 그 영화를 봤다. 영화라는 장르로서 줄거리는 크게 의미 없는, 시종일관 음악이 흐르는 영화였다. 그러나 아주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세상의 모든 아침’ OST를 들을 때마다 전율했다. 드디어 세상의 모든 아침을 책으로 읽게 되었다.

파스칼 기냐르. 1948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베르뇌유쉬르아브르(외르)에서 태어나 1969, 말 더듬는 존재로 문단에 데뷔했다. 나만의 우스운 습관 중에 하나는 어떤 인물 이야기를 접할 때, 내 나이와 비교해보는 것이다. 17살이 차이, 현재 80. 현존하는 작가 중에 가장 많이 연구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 뒤쪽 연표는 꽤 자세하게 작가의 생을 보여준다. 대대로 언어학자와 음악가를 배출한 집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5개 국어를 습득하고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면서 자랐다니,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리라. 옮긴이는 류재화로 현재 고려대학교에 출강하고 있으며, 파리 3대학 소르본누벨에서 파스칼 키야르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소개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연표 앞쪽에 <옮긴이의 말>이 이 책을 읽는 재미를 한층 더해 주었다.

  요즘 소설을 읽으면, 독자의 입장에서 읽긴 하지만, 작가적 입장에서 글의 구성이나 문체 등을 살펴보게 된다. 이 책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소설로서의 줄거리나 재미를 추구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다만 실존했던 한 음악인의 삶을 소설적 장치를 빌어 보여주고 있다. 영화가 그 영상이 주는 미학적 감동이 컸다면, 소설은 작가의 비올라 다 감바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이 일품이다. 글을 쓰고자 하는 입장에서 매혹적인 글쓰기의 모범이 돼 주었다. 장편소설치고는 짧다. 얇은 한권의 소설책이어서 가뿐하게 읽어낼 수 있었던 책속의 몇몇 구절을 다시 음미해본다.

11 그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콤르 블랑은 그가 인간 목소리의 모든 굴곡을 모방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가령 젊은 여인의 탄식에서부터 중년 남성의 오열까지. 앙리 드 나바르의 전장에서의 외침부터 그림 그리는 데 열중하는 아이들의 부드러운 숨소리까지.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거친 헐떡임부터, 기도에 몰입한 한 남자의 장식음 거의 없는, 무음에 가까운 저음까지.

15 그는 언어에 대한 애착이 거의 없었다. (여기서 공감이 되면서, 작가의 이런 표현에 웃음이 나왔다.)

74-75(마랭 마레가 열정적인 삶을 산다는 스승 생트 콜롱브한테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 왜 연주하는 작품을 출판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작곡을 하지 않네. 난 절대 악보를 쓰지 않아. 내가 가끔 하나의 이름과 기쁨을 추억하며 지어내는 것은 물, 물풀, , 살아 있는 작은 송충이 같은 헌물일세.”

(마레가 다시 묻는다.)

선생님의 물풀, 송충이 안에 음악이 어디 있는데요?”

활을 켤 때 내가 찢는 것은 살아 있는 내 심장 조각이네. 내가 하는 건 어떤 공휴일도 없이 그저 내 할 일을 하는 거네. 그렇게 내 운명을 완성하는 거지.”

118 (생트 콜롱브가 홀로 오두막에서 중얼거릴 때, 오두막 벽 그늘에 숨어있던 마레가 듣고 스승과 제자가 마지막 연주를 하는 장면이 시작되기 전에 나누는 대화다.)

콜롱브 : , 누구요? 고요한 이 밤에 한숨을 쉬는 건가?

마레 : 궁을 도망쳐서 음악을 찾는 이요.

콜롱브 : 음악에서 무엇을 찾으시오?

마레 ; 회한과 눈물을 찾습니다.

……

마레 : 선생님, 마지막 수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콜롱브 : 내가 첫 수업을 해도 되겠소?

……그것은 어려운 일일세. 음악은 말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저 거기 있는 거라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반드시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지.

……

마레 : 그럼 침묵입니까?

콜롱브 : 그건 언어의 반대말에 불과하네.

……

콜롱브 : 자네 자신을 태우게나.

언어가 버린 자들이 물 마시는 곳. 아이들의 그림자. 갖바치의 망치질. 유아기 이전의 상태. 호흡없이 있었을 때. 빛이 없었을 때.

 

<옮긴이의 말>

 

 (이 책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파스칼 키냐르에 대해 옮긴이인 류재화는 키냐르가 현재진행형의 상실에 매료당해 있다고 했다. 덧붙여서 쓴 글이 인상적이다.)

127 음악이 시간이라는 길게 누워 흐르는 강을 껴안고 함께 가는 것이라면, 언어는 강물 위로 튀어 오르는 잉어처럼 시간을 이따금 박차고 나온다. 음악이 현재진행형의 상실이라면, 언어는 완료형의 상실이다. 음악이 진행 중인 사랑이라면, 언어는 끝나버린 사랑이다. 인간의 언어에 늘 되말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과 오기가 배여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아침≫ 소설은 첫 문장부터 상실로 시작한다. “1650년 봄, 생트 콜롤브 부인이 죽었다.” 생트 콜롱브는 비올라 다 감바의 현을, 저 낮은 제7현을 뜯는다. 망자를 불러내기 위해서는 산 자의 온몸이 숙여져야 한다. 양다리 사이에 악기를 놓고 온몸을 악기에 밀착하는 비올라 다 감바의 고안은 분리된 두 개체의 완전한 합일을 위한 몸짓이다. 그것은 사랑하기의 형상이다.

 

***********

 

  영화 시나리오를 작가인 키냐르 자신이 직접 각색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레의 비올라 다 감바의 연주를 이 영화의 음악 감독이자 연주자인 조르디 사발이 직접 연주했다고도. 젊은 마레는 늙은 마레를 연기한 제라르 드빠르디유의 아들 기욤 드빠르디유인데,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잠시 멍해졌다. 갈래턱이 인상적인 제라르 드빠르디유는 프랑스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었는데, 마레역을 부자가 같이 연기했다니,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

  그리고 고악기인 비올라 다 감바를 연주할 수 있었던 인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루소가 있었다는 사실도 재미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참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구나 하는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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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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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읽은 소설 중에 가장 좋았던 소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소설속의 서사도 좋았지만 그의 문장도 딱 마음에 들었다. 35년 째 폐지 압축하는 일을 하는 주인공이라니, 설정이 신선했다. 옮긴이의 말에서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두고 흐라발 자신은 자신의 삶과 작품 전체를 상징하는, 그가 쓴 책들 가운데 가장 사랑하는 책이라고 고백했다. 그가 세상에 온 건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쓰기 위해서였다고."

 

밝히고 있다. 짙은 초록의 책 표지부터, 두께 등 책 자체도 사랑스러웠다. 책을 읽고 난 뒤 주위 사람들에게 권했더니, 반응이 의외로 시큰둥한 이도 있어 의아했다. 두 번째 페이지

 

 "...그런 식으로 나는 단 한 달 만에 2톤의 책을 압축한다. 하지만 이 일을, 신께서 축복하신 이 작업을 완수할 힘을 얻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맥주를 마셨다."

 

부분에 ^^표시를 따로 했다. 나 역시 내 삶에 충실하기 위해 반주를 즐기기에. 그리고 그 아래

 

 "...진정한 생각들은 바깥에서 오기 때문이다...진정한 책이라면 어김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를 가리킬 것이다."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내 삶에 있어서 책이 그랬던 것 같다. 책의 가리킴이 있어 오늘의 나도 있을 수 있다는.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다음 장면이다. 주인공의 외삼촌은 철도원으로 사십 년을 일하며 건널목 차단기를 오리거나 내리며 선로 변경을 책임졌던 사람이다. 외삼촌은 은퇴 후에 국경 지대의 한 폐쇄된 역에서 낡은 선로 변경 장치를 사들여 자기 집 정원에 설치하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아이들과 노인들이 기관차를 타고 정원을 돌았는데. 어느 날 주인공이 그 곳을 찾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언젠가 나와 내 압축기가 머무를 장소를 찾기 위해 외삼촌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밤이 되자 환하게 불을 밝힌 기관차가 오래 된 과일나무들 사이로 방향을 틀며 질주했다. 선로 변경 통제실에 앉은 외삼촌 역시 자신의 기관차 못지않게 몸이 달아올라 부지런히 레버를 움직였고, 큼직한 알루미늄 컵이 사방에서 빛을 발했다. 나는 아이들과 은퇴한 노인들의 고함소리와 환호성을 들으며 걸어갔다. 그러나 와서 합류하라고 부르는 사람도, 한잔하고 싶은지 내게 묻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자신들의 놀이에 빠져 얼이 나가 있었다. 놀이라고 해봐야 그들이 평생토록 애정을 쏟았던 일의 반복에 불과했지만. 나는 카인처럼 이마에 표적을 지닌 채 걸어다녔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어슬렁거리다가 그곳을 떠나며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 나를 불러줄 수도 있었으련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문을 나서면서 나는 또 한번 뒤돌아보았다. 초롱과 선로 변경 통제실의 불빛 속에서 아이들과 노인들의 형상이 어렴풋이 흔들리고 있었다. 기관차가 타원형 선로 위에서 휘파람 속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할 판이었다! 크랭크 오르간에서 흐르는 변함없이 똑같은 노래 같았다. 너무 아름다워서 죽을 때까지 다른 것에는 귀기울일 수 없게 만드는 선율이랄까. 그래도 문가에 서 있으려니 외삼촌이 나를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외삼촌은 줄곧 나를 보고 있었고, 내가 나무들 사이에서 갈 곳 몰라할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종 조종 장치에서 손을 들어 , 한 몸짓으로, 그저 대기를 진동시키는 듯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나도 어둠 속에서 그의 인사에 답했다. 서로 엇갈리는 방향으로 떠나는 두 열차에 탄 두 사람이 서로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는 모습이랄까."

 

 책을 읽고 꽤 오랫동안 가슴이 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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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누운 밤 창비세계문학 39
훌리오 코르타사르 지음, 박병규 옮김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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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리오 꼬르따사르는 지난 해 들은 소설수업 때 교수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빠리의 아가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수업 시간에 예로 들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작가의 중단편집 <드러누운 밤>(박병규 옮김, 창비 2017)을 구입했다. 지난 해 12월 11일이었다. 거의 한달 만에 다 읽었다. 소설책을 이렇게 오래도록 읽기도 참 드문 경우였다. 그만큼 저자의 문장를 따라가는 일이 힘들었다.

 이 책에는 모두 14편의 단편과 1편의 중편이 실려있다. 하나 같이 평범하지 않은 소설들이다. 특히 <빠리의 아가씨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편지를 쓰고 있는 주인공이  입에서 토끼를 토한다. 토끼를 토한다는 사건 자체도 비논리적이지만, 문장들도 그렇다.

 예를 들면

 

  "...습관이란 리듬이 구체화된 형식입니다. 리듬이 우리 삶을 도와주고 받는 요금입니다."

 

이런 식이다.

 

 그리고 또 <비밀 병기>편에서

 

 "그는 미셸의 손 위에 손을 얹는다. 미셸은 나머지 한 손을 삐에르의 손 위에 얹고, 삐에르도 나머지 한 손을 미셸의 손 위에 얹는다. 미셸은 밑에 있는 손을 빼내 위에 얹고, 삐에르도 밑에 있는 손을 빼내 위에 얹는다. 미셸은 밑에 있는 손을 빼내 삐에르 코에 손바닥을 대본다."

 

 의미있는 반복인지 아닌지, 작가의 의도는 잘 모르겠으나 소설들을 읽다보면 부분 부분에서 희곡을 읽고 있는 듯하기도 했다. 이야기는 하나도 재미없는데, 이상하게도 책을 덮어버릴 수 없는 묘한 매혹이 작가의 능력이라고 여겨졌다.

 책 날개 작가소개글에는 "빛나는 상상력으로 가르시아 마르께스, 바르가스 요사 등과 함께 라틴 아메리카 붐 소설을 주도했으며, 전세계를 통틀어 20세기 가장 뛰어난 단편소설 작가의 하나로 꼽힌다...이같은 독서경험은 다양성과 이질성의 세계, 우연성과 예회성을 포함하는 삶이라는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쓰여있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에 쓴 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내가 참 구시대인이구나 하고 반성하게 했다. 작가의 소설에서 '서사'는 이미 그 의미를 잃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단선적일 수 없듯이 소설 속의 주인공들 역시 복잡하고 설명하기 곤란한 삶을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마지막에 <작품 해설>에서 옮긴이도 말한다.

 

 "꼬르따사르 단편은 보르헤르 단편처럼 역자가 운신할 수 있는 폭이 매우 좁다. 재량을 발휘하여 맛깔스럽게 표현하고 싶은데도 다음 구절이 이를 용남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원문을 충실하게 옮긴 경우가 많다."

 

 어쩌면 그렇기에 의역이 아니고 직역일 수가 있고, 그래서 더 작가의 문장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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