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미술관에 <향수, 고향을 그리다> 한국 근현대 미술전에 다녀왔다. ‘1부 향토-빼앗긴 땅, 2부 애향-되찾은 땅, 3부 실향-폐허의 땅, 4부 망향-그리움의 땅‘으로 구성된 전시였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창전 이상범 선생의 커다란 병풍에 담긴 수묵화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내 고향 산천을 담은 붓과 색, 그 어떤 서양화에서도 느낄 수 없던 강렬한 친근감과 그리움을 느꼈다. 전시회는 우리 근대 회화에 나타난 그 느낌을 ‘향토색‘이라 표현했다. 참 좋다. 향토색이란 말도, 그 느낌도, 오롯이 담긴 그림들도.

하지만 4부까지 다 보고 나서 슬펐다. 우리의 미술은 참 아픈 시대를 지나왔구나, 싶었다. 서양의 인상주의처럼 일상과 감정의 풍요를 느끼고 표현할 시절이 없었다. 나라를 잃었고, 되찾았으나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고, 그리움을 짊어진 분단의 아픔이 남았다. ‘고향‘이란 주제는 우리나라가 겪어온 시절의 아픔을 그대로 관통했다. 그럼에도 그림에 담긴 따듯한 기억, 가족의 사랑, 애잔한 그리움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4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시화집을 보고 나온 느낌이다. 책장마다 애잔하고 따듯하고 그리운 향토 내음이 진해서 손끝에 잔뜩 물들이고 나왔다. 여운이 길어서 집으로 돌아와 책장에 꽂혀 있던 <방구석 미술관 2-한국 미술> 을 읽기 시작했다. 조금 더 알아야겠다. 그 그림들이 겪었던 마음들을, 그들이 남기고자 했던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고 싶다. 마음에 와 닿은 그림에 내가 할 수 있는 화답이다.


*연결해서 읽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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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오랑주리-오르세 미술관 특별전: 세잔, 르누아르>를 관람했다. 형태와 구조의 관점으로 그림을 그린 세잔과 빛과 색으로 그림을 그린 르느와르를 비교한 전시가 몹시 흥미로웠다.


난 예술의 전당 전시회를 꼭 챙겨보는 편이다. 그들만의 전시 기획이 몹시 흥미롭기 때문이다. 예술의 전당 전시회는 자료를 풍부하게 가지고 마음껏 보여줄 수 있는 전시가 아니다. 대중적인 화가를 선택해서 늘 인기가 많지만, 보여줄 수 있는 그림도 한정적이고, 화가는 유명하지만 대표작이 없는 경우도 있다. 그 제약 속에서 그들은 미처 몰랐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도록 그림을 새롭게 배치한다. 적절한 설명도 그림을 돋보이는 장치가 된다. 그들이 제시하는 방식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이해의 눈이 열리고 영혼이 차오르는 감동을 느끼곤 한다. 매번 감동 받는 포인트가 달라져서 볼 때마다 기대가 된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챙겨보는 것처럼, 기다리는 설렘이 있다. 읽고 나선 이번에도 역시 좋았다는 느낌이 이어지는 것도 좋다.

이번 전시회에선 르느와르와 세잔의 대비가 좋았다. 특히 세잔을 내가 참 띄엄띄엄 보았다는 생각이 든다. 르느와르가 걸어간 길과 대비해 세잔이 추구한 그림 세계를 보니, 그가 얼마나 진지하게 형태와 구조를 향해 나아갔는지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전시회의 마지막은 르느와르와 세잔이 추구한 그림 세계가 어떻게 현대 미술에도 이어졌는지를 보여준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매달려 그릴 수 밖에 없던 마음들, 추구함, 그들은 자기 표현을 넘어 영원을 향해 가는 흔적을 남겼다. 영혼의 지문이 남은 그림을 보며 그 울림에 공감하고 감동하는 건, 인간이란 존재의 의미가 강렬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특히 당시 둘의 그림을 모았다는 갤러리스트 폴 기욤의 집을 보며, 그리지는 않았으나 이 사람이 모으고 전하고 남기고자 했던 건 뭐였을까, 궁금했다. 문득, 가치가 남았구나. 싶었다. 영원의 흔적을 담은 가치, 또렷하게 계산되지 않는 가치를 보고 간직하고 전달하겠다는 생각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숭고한 특성이란 생각이 들었다. 난 어떤 가치를 모으고 있지? 내가 남길 가치는 무엇일까? 가치를 품는 순간, 인생은 찰나가 아닌 영원에 속하는 생명력을 얻는 것 아닐까?

그림도 좋았지만, 가치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 떠오르는 책 *
<방구석 미술관1>

그림은 마그마처럼 끓어오르는 자기 표현의 열망 같다. 너무 뜨거워서 자신마저 태워도 사그라들지 않는다. 아니,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막막함과 어려움을 버티면서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건 영혼의 숙명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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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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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에 이 책을 읽으라는 사람들의 말을 따라 읽은 적이 있다. 그땐 추천한 사람들이 그 나이에 읽고 깨닫길 바랐던 어떤 의미를 발견하진 못했다. 다만 가슴은 좀 뛰었던 것 같다. 데미안은 곧 내 안에서 사라졌고, 난 그저 살기에 바빴다. 

나이를 들어 보니 성장기 때가 아니어도 사람에겐 알을 깨야 하는 시기가 또 찾아온다. 내 세상을 깨뜨리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야 하는 때가 인생에 한 번은 아니었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찾듯 내게도 데미안이 필요했다. 짧은 소설이지만 온통 시적인 은유로 덮인 문장을 곱씹다 보면 하루에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어렸을 때도 이렇게 읽었을까? 

그땐 내 안의 분열과 고민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내 곁을 스쳐 가는 세상의 흐름에도 민감하지 못했다. 세상의 흐름과 내 안의 흐름이 일치하지 않아서 부대끼는 불안에 치열하게 맞서지도 못했다. 싱클레어처럼 자신을 찾아가기 위해 맞섰다면 나는 나만의 색을 찾은 예술가가 되었을까?

예술가가 단지 그림이나 글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할 줄 아는 예민한 능력자들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삶이 아름다워지려면 세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위로할 줄 아는 나만의 예술이 필요했다. 그 방법을 찾아나가는 길에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이야기가 도움이 된다. 조금 더 일찍 이 사실을 깨달았다면, 10대의 질풍노도를, 20대의 사랑의 열병을, 30대의 세상의 도전을, 40대의 삶의 풍파를, 50대의 세상의 변화를 겪을 때마다 이 책을 다시 읽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삶은 늘 날 가두는 세상을 깨뜨려야 살아남는 도전의 연속 같다. 

헤세는 나중에 자신의 글을 통해 ,그의 삶에는 데미안이 아닌 피스토리우스만 있었을 뿐이지만, 그를 통해 데미안을 만들어 냈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데미안 같은 고전들을 피스토리우스처럼 다시 통과하며, 나도 나만의 길을 만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세상은 여전히 깨뜨리기엔 견고하고, 새롭게 세우기엔 연약하다. 어쩌면 처음부터 깨뜨린 적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젠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 P110

나는 오로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 살아가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어째서 그리도 어려웠을까? - P7

이제 무엇이 올까? 나는 다시 싸움을 계속하고, 그리움을 견디고, 꿈을 꾸고, 혼자일 것이다. - P189

헤세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이런 구절을 읽을 수 있다. "삶에서 내게 데미안은 없었고 피스토리우스만 있었어. 다만 나는 그것으로 데미안을 만들어냈지."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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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목 독서링 - 호두나무 독서링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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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링이 책 읽기에 편하다길래 샀다. 아크릴과 비교해보니 나무가 더 가벼워서 나무로 골랐다. 집에 와서 사용해보니 독서링 구멍이 내 엄지보다 많이 컸다. 손가락에서 너무 헛돌아서 고정하기 위해 신경을 써야 하는 점이 불편했다. 구멍이 작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든다. 그래도 한 손으로 책을 잡을 수 있는 건 정말 좋다. 다만 내 손가락 굵기와 맞는 걸 좀 더 알아봤어야 했나 보다. 그리고 가벼운 것보단 다소 무게가 있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책도 무거운데, 독서링도 무거우면 어깨가 아플 것 같아서 가벼운 걸 샀는데, 잡아주는 힘이 약하다. 익숙해지면 다 괜찮아지려나. 일단은 열심히 사용하면서 적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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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드 더 와이어(Outside the Wire, 2021, 미국, NETFLIX)



"감정이 인간의 결함이라고 생각해?"

극 중 리오 대위가 하프 중위에게 묻는 말이다. 허를 찌르는 질문. 새로웠다. 하프 중위는 인간이 감정 때문에 실수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38명을 구하기 위해 2명을 희생하는 판단을 내리고도 별로 자책하지 않는다. 감정을 배제한 냉철한 판단이 옳았다고 믿는 인물이다. 나도 감정에 흔들려서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때마다 감정 빼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한다. 마치 로봇처럼 말이다. 하지만 곧 이은 리오 대위에 말이 정말 마음에 와 닿았다. 

"감정이 부족해서 실수를 하는 거야."

감정은 결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기에, 충분히 느끼지 못했기에 인간은 후회할 결정을 내린다. 감정을 인간만의 전유물이라 생각하는 이유도, 감정이 인간다움의 결정체이기 때문 아닐까? 인간은 감정을 결함으로 여기고 배제하도록 훈련하는 게 아니라 좀 더 완전해지도록 성장시켜야 한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관점이었다. 


영화는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을 지닌 AI 로봇과 실수하지만 개선의 여지가 있는 인간을 대비해 끊임 없이 질문을 던진다. 

감정 없이 계산만으로 내린 결정이 과연 옳은가? 대의를 위한 소의 희생이 합리적인가? 영화에 나오는 부차적 피해를 어쩔 수 없다 여기며 외면하지 않았나? 38명을 살리기 위해 2명을 희생하는 판단이 수억을 살리기 위해 수백만을 희생하는 판단과 다르냐는 질문 앞에 순간 멈칫했다.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깨달음. 우리는 감정 없이 계산으로 이끌어낸 합리적 판단이 옳다고 여기는 속임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리오 대위가 보여주는 모습은 내가 믿고 좋다고 여기는 합리적 결정의 위험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다. 반면 실상을 모르고 오만한 데다 정작 자신에게 닥친 현실에 나약한 하프 중위는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인간이기에 나아가야 하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그냥 재미로 보기에도 괜찮은 영화였지만, 전하는 메시지가 신선해서 계속 마음에 남는다. 로봇 시대가 던지는 윤리적 문제를 좀 더 깊이 들여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흐르니까 그냥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살았는데, 이러다가 시대가 펼친 장막에 눈이 가리워 인간다움을 놓친 노예 상태로 살 지 모른다는 경각심이 들었다. 역사의 큰 흐름을 거슬를 순 없겠지만, 그래도 인간답게 조금은 나아가려고, 감정이 좀 더 나은 인격으로 성장하도록 고민하는 사람이고 싶다.  


*떠오르는 책*

   : 아들 녀석이 이 책을 읽으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류의 기술은 인간 윤리를 벗어난 발전이어선 안 된다고. 

     모든 것이 완벽한 멋진 신세계가 인간다움을 대가로 

     얻어지는 거라면, 그걸 생존이라 여길 수 있을까?

 

     이 책은 영화와 다른 결의 이야기이지만, 

     기술과 윤리라는 화두가 떠올라서 연결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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