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이 나왔다. 밤 늦게까지 읽다가 아내에게 우리 내일 선암사 놀러 가자고 했다. 이런 제안이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다. 멀지 않지만 그리 가깝지도 않은 절을 연애시절 서너 번 찾았다. 집 근처에 있는 절도 즐겨 가지 않는 우리 부부에게 별난 경우다. 그 특별함이 별다른 추억이 있거나 불심佛心이 깊어서가 아니다. 절이 이뻐서다.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지나친 수식어가 들어가는 것 같고, 그래 선암사는 '이쁜'절이다. 그렇게 아끼는 절을 2년째 못 가보고 있다. 아내는 잊을 만하면 선암사 한 번 가자 노래를 불렀고 나도 매번 그러자고 답했지만 그렇게 2년이 흘렀다.
▲ 사월초파일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렇게 등을 배경으로 책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묵직한 카메라 가방 뒤쪽에 책을 넣었다. 절의 가장 이쁜 장소를 골라 책사진을 찍어 오리라 다짐했건만 절 구경에 깜빡 잊고 절을 나와 사하촌에 다 와서 찍은 사진이다. 초파일이 얼마 지나지 않아 등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초파일이라 이런 멋스러운 사진을 찍었구나 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사월초파일이 우리의 절구경을 망쳤다고 한다면 지극한 이기심의 발로이겠지만 철거되지 않은 행사 시설물과 연등은 우리가 늘 보아오던 선암사가 아니었다. 연등을 피해 꽃 구경하기 힘들 정도였다.
절구경의 시작은 사하촌에서 절까지 걷는 산길이다. 책에서 유홍준 교수는 건축가 김수근의 글을 빌려 "좋은 길을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 수록 좋다"라고 했는데, 선암사를 향하는 길은 이렇게 넓어질 대로 넓어졌다. 이 길이 오솔길이었다면 산길을 걷는 사람과 자연의 간격이 더 가까워졌을 것이다. 좋은 길이란 것이 이렇게 산길이나 고향으로 향하는 길이라면 '나쁜 길'이 뭔지를 한참 고민을 했다. 로마시대의 도로가 생각났다. 로마가 그렇게 넓은 영토를 정복하고 통치할 수 있었던 배경에 잘 닦여진 '도로'가 한 몫 했는데, 그것은 역으로 생각하면 침략받을 때도 마찬가지다.
▲ 放出曺磎 一派 방출조계 일파 放出曺磎 一派淸 방출조계 일파청
p189. 요즘 학생들은 한문은 고사하고 한자도 못 읽어 큰 문제인데 어느 해인가 제법 한문에 관심이 많아 한문강습소도 다니는 기특한 녀석이 여기에 이르자 먼저 달려가 읽어보고는 내게 자랑삼아 해석해 보이는 것이다. "선생님, 조계 일파를 방출하자, 데모 구호를 써 놓은 건가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도 기가 막혀 제대로 해석해주려고 원문을 읽어보니 마지막 한 글자가 돌무더기에 파묻혀 "방출조계 일파(放出曺磎 一派)"라고만 되어 있는 것이었다. 학생의 번역이 틀렸다고 말할 수가 없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불교의 선맥을 말한 이 멋진 법구가 '맑을 청(淸)자가 빠져버리니 태고종의 데모 구호로 바뀌고 말다니. '맑을 청'자 하나.
그래도 열심히 읽어 석주를 보자마자 셔터를 눌렀다. 처음 찍은 사진은 오른쪽의 '맑을 청淸'자가 보이는 것이다. 장난기가 발동해서 옆에 있던 큰 돌 하나를 주워 '청淸'자를 가렸다. 그것이 학생이 해석한 '조계 일파를 방출하자'이다. 사진을 찍은 후 '청淸'자를 가린 돌을 다시 치웠다. 책에 있는 것은 다 찾아 보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이런 엉뚱함까지.
▲ 조계사 승탑밭
일주문 지나 절 가는 길 또는 절간 뒤에서 만날 수 있는 승탑을 모아 놓은 곳이다. 선종 계열이 선승이 많고 사리를 보관하는 승탑이 많다. 승탑밭의 많은 기물들은 선암사의 내력을 보여주는 증거다. 승탑전(田 또는 展)이라 쓰는데 유홍준 교수는 부러 승탑밭이라 쓰는 것이 더 선적(禪的) 여운을 느낀다고 했다.
p181. 고려 때까지만 해도 고승들에 국한해 승탑을 모셨던 것 같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조선불교가 다시 일어나면서 승탑이 크게 유행해 절집마다 내세우는 스님은 거의 모두 승탑을 모시면서 형식도 팔각당에서 종, 연꽃봉오리, 달걀 모양 등 여러 형태로 간소화되고 변형됐다. 이것은 분명 조형성의 쇠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데, 그 대신 승탑들을 한곳에 모심으로써 집체적 조형성, 요즘 현대미술로 말하자면 설치미술 같은 조형효과를 갖게 되었다.
▲ 선암사 승선교.
선암사하면 첫 이미지는 '승선교' 일면 무지개다리다. 선암사 제1경도 승선교 너머로 강선루를 바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아래에 보는 바와 같이 '강선루'는 보수 공사중이다. 다리 너머 '강선루'가 없어도 승선교는 선암사 제일이다. 실제로 보았을 때보다 이렇게 사진으로 보니 더 이쁘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책에서 말하는 좁은 길로 굽이 가는 것은 상상속 이야기다. 돌아가면 되지 않으냐고 반문할 지 모르나 큰 길을 옆에 두고 좁을 길을 가는 것과 좁을 길을 따라 가다가 승선교가 살짝 보이는 것은 다르다. 이런 생각을 하니 "좋은 길을 좁을수록 좋다"는 말이 실감난다.
벌교 홍교(무지개 다리), 사진출처 - 네이버백과사전
선암사 스님들은 승선교 만드는 실력으로 벌교의 무지개다리(보물 제304호)까지 놓았단다. 아치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두 다리라고 하지만 속세의 다리와 깊은 산중의 다리는 뒷 배경만큼 느낌이 다르다.
강선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널리 퍼뜨린 말이 조선 정조 때 문장가 유한준(兪漢雋, 1732 - 1811)이 당대의 수장가였던 김광국의 화첩 <<석농화원>>에 바친 발문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이다. "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 나는 강선루 앞에서 이 말을 새삼스레 떠올린다. 내가 선암사를 좋아하는 이유 중에 '강선루'는 없었다. 오직 '승선교', '해우소', '삼인당', '야생차밭', '꽃나무 많은이쁜 절' 이게 전부다. 몇 번을 왔어도 내 기억에 승선교 뒤에 강선루는 없었다. 이번에도 강선루는 없다. 보수작업중이라 하니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삼인당 연못.
절 앞의 연못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선암사 입구의 삼인당 연못은 종교적, 토목공학적, 미학적 뜻이 모두 담겨 있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종교적이라 함은 '삼인당' 이름에서 연유하는데, 제행무상, 제법무상, 열반적정 등 세가지 새김(印)이다. 마음속에 불법의 원리를 각인한다는 뜻이다. 토목공학적 의미는 삼인당의 구조가 타원이고 그 안에 섬이 있다는 점이다. 비스듬한 경사를 두고 있는 지형 탓도 있지만 원이 아닌 타원은 다양성을 위한 것이다. 책에서는 달걀처럼 생긴 섬이라 했는데 물이 없으니 봉분처럼 솟은 모양이다. 가운데 섬 덕분에 왼쪽도 물의 흐름이 생겨 썩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못 가운데 섬의 미학적 배려를, "하나의 공간에 나타난 물체는 또다른 공간을 창출해낸다"는 예술심리학자 루돌프 아른하임의 '무대지도(state geography)로 설명한다.
삼인당을 지나가는데 아내가 갑자기 나를 세운데. "서~" "왜?" "서~~어!" "아니 왜?" "서어!" "아니 왜 서라고 하는데?"라고 퉁명스럽게 대답을 하고 고개를 돌리니.....
[서어나무]가 버티고 서~어^^ 있다. 아~~~! 3년전 우리 동네 식물원 기억이 난다. 꼭 3년이 되었다. 3년만에 아내의 복수다. 뒤끝있는여자다.
▶ 우리 동네 식물원 이야기
▶ 선암사 해우소
선암사 하면 '해우소'를 먼저 떠 올리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선암사 '명물(?)'이다. 목조 건물이 이뻐서 문화재로 지정이 되었지만 외양보다 의미가 있는 것이 뒤간의 매커니즘이다. 낙엽을 모아 깔아 놓으면 인분과 섞여 자연퇴비가 된다. 농사용 거름으로 사용했음은 당연지사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스님들의 인분은 좋은 퇴비가 되지만 세속인들의 인분은 먹은 것 만큼이나 뒤도 고약해 좋은 거름이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연에 순응하지 않는 삶은 배설물조차도 쓸모가 없구나.
p199. 시인 정호승은 「선암사」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비 1999).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정호승의 시를 어느 스님이 각刻을 해서 뒷간에 걸어 두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이제 이것도 예사롭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정호승의 시가 아니던가?
선암사가 아름다운 이유는 꽃과 나무다. 절집 건물들이 어느 것 하나 웅장함과는 거리가 멀어 작은 꽃나무들과 어울린다. 선암사를 처음 찾았을 때 느낌을 '꽃과 나무를 좋아하는 어느 부잣집 한옥에 온 느낌'이라고 했다. 절이 주는 종교의 엄숙함도 대웅전의 웅장한 위압감도 선암사에는 없다. 절 계단 올라가는 곳, 담장길 따라, 가람배치에 따라 꽃과 나무를 심었다. 선암사에 꽃이 없는 곳은 마당과 법당뿐이다.
이 책 p175에서 p180까지는 유홍준의 선암사 꽃과 나무에 대한 '헌사'다. 조선의 3대 '구라', 신흥구라 유홍준의 진가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봄,여름,가을,겨울 선암사에 피고지는 꽃나무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읊었다. 어느 랩퍼가 이리 신나게 떠들수 있을가 싶을 정도로 흥이 느껴진다.
선암사 무우전 매화나무.
사월 초파일이 지나 매화는 떨어졌지만 무성한 푸른 잎이 매화나무의 규모를 가늠케 한다. 육당 최남선의 글이 몇 편 인용되는데, 선암사를 다섯시간 넘게 산길을 걸어 찾아온 육당이 피곤해서 바로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아침에, 지난 밤 매화를 미쳐 알아보지 못한 억울함에 이런 글을 남겼다.
p201. 이럭저럭 '굴묵이' 넘어온 피곤을 잊어버리고, 무엇인지 코가 에어져나가는 듯한 향기를 맡으면서 청량한 꿈을 찾아들었다. 이튿날. 일뜨며 창을 밀치니 맑고도 진한 향기가 와짝을 들이밀어 코로부터 온몸, 온 방안을 둘러싸버린다. 새빨간 꽃을 퍼다 부은 춘매가 바로 지대 밑에 있는 것을 몰랐었다. (.....) 이러한 미인이 창전(窓前)에 대령한 줄을 모르고 아무 맛 없이 곱송그려 새우잠을 자고 났거니 하매, 아침나절에 입맛이 쩍쩍 다시어진다.
지나간 밤은 다시 오지 않는 법.....
권력이 좋구나. 옳은 일, 해야 될 일이라 생각해도 깜냥이 안 되면 무엇이랴? 유홍준은 선암사를 드나들 때마다 이런 것이 천연기념물이 되지 않으면 무엇이 천연기념물이냐고 생각했다. 문화재청장 시절 박상진(농학박사), 이은복(이학박사), 안형재(매화연구원장) 전문가 세사람한테 전국의 노매老梅를 조사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는 용역을 의뢰했다. 그리하여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 장성 백양상의 고불매, 구례 화엄사 백매, 그리고 선암사 무우전매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선암사 뒤에 야생차밭이 있다. 길을 안내하는 것은 오솔깊 옆으로 도열한 키큰 전나무지만 전나무 사이 산속으로 시선을 돌리면 지천이 야생차밭이다. 야생차에 익숙하지 않고, 보성차밭처럼 계단식으로 정리된 것만 아는 이들에게는 익숙치 않을 것이다. 차배지에서 생산한 야생차는 화개가 으뜸이고, 순 자연 야생차는 선암사가 최고다. 선암사를 구경하거든 경내만 둘러보지 말고 절 뒤 야생차밭에 눈도장 한 번 찍고 오시기를....
선암사 절 뒤 야생차밭을 걸으면 나도 생각나는 시인이 있다. 2005년 봄 카메라 동호인들과 아침 일찍 광양매실마을 둘러 보고 선암사에 도착했다. 그 당시 여자친구이면서 지금은 아내인 여인과 야생차밭으로 걸어가다가 섬진강 시인을 만나게 되었다. 다음 날 카메라 동호회 게시판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섬진강에서 나고
섬진강에서 자라고
섬진강에서 살며
섬진강에서 시를 쓰고
섬진강에서 아이를 가르치는
김용택 시인을 어제 뵈었답니다.
선암사에서 절 뒤에 있는 야생차밭을 구경하고 나무 그늘에서 조금 쉬다가 내려오는데
작달막한 키에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으면서 걸어오시는 시인을 뵈었지요.
아이보다 더 순수한 얼굴은 사진으로 보나 실제로 보나 똑같았습니다.
제가 다가가서
'안녕하세요' 하고 꾸벅 인사를 했습니다.
김용택 시인이 조금 당황해 하시길래
'선생님! 저 팬입니다'
라고 말씀드리니 그제서야 웃으시면서 악수를 청하시더라구요.
악수를 하고
'다음에 뵙겠습니다'
라고 인사드렸는데 다음에 뵐 수 있을런지....
무슨 구실로 어떤 인연으로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런지....
아무튼 이래저래 기분좋은 하루였습니다.
그 다음날 조간에 '남도의 봄'을 주제로 한 섬진강 시인의 시와 매화사진을 볼 수 있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라고 인사드렸는데 다음에 뵐 수 있을런지....무슨 구실로 어떤 인연으로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런지.....
강수연이 묶었다는 선암장 208호실은......
선암사를 답사하면 반드시 들린다는 단골 여관 선암장이다. 계곡 가장 가까이 붙어 있고 동네 토박이가 운영하는 곳이어서 인심이 좋아 단골이 되었다는 선암장이다. 여관주인 아주머니가 답사 선생님 배려한다고 교도소 독방만큼 작은 208호실을 선심쓰듯 내어주는데, 유홍준은 주인아주머니께 "코딱지만한 방을 하나 주면서 웬 생색을 그렇게 내셨수" 라고 하니 아주머니가 "그래봬두 그 방은 「아제 아제 바라아제」영화 찍을 때 강수연이 보름간 자고 간 방이여. 뭘 줘도 몰라"
우리 부부도 사하촌에서 선암장을 찾았다. 그러나 강수연이 보름이나 자고 간 방은 둘째치고 유홍준이 팁까지 줘서 후하게 부탁한다는 산채비빔밥도 못 먹었다. 선암장은 장사 안 한지 1년이 넘었단다. 이제 강수연이 보름이나 자고 갔다던 208호실은 언감생심이다.
조만간에 선암사 한 번 더 간다. 다녀와서 다시 읽으니 놓친 곳이 한 두곳이 아니다. 다른 한 편으로 드는 생각은 책따라 선암사를 다녀왔고 또 다녀올 계획이지만 이 책을 벗어나야 나만의 선암사가 각인되지 않을까 싶다. 나의 선암사를 위해 많이 읽고 찾고 보고 느끼는 수 밖에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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