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지 백신 1 - 신천지의 실상을 알려주는 바른 계시록 신천지 백신 1
양형주 지음 / 두란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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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장신에서 신학학 Th.M.(석사)과 Th.D.(박사) 학위를 취득하시고, 현재는 대전도안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계시면서 장신대학교 객원교수 및 대전신학대학교 겸임교수와 바이블백신센터 원장을 맡고 계십니다.

본서는 1,2권으로 분리되어 출판되었습니다. 신천지 교주 이만희 씨가 주장하는 요한계시록 전 장 해설의 핵심을 요약하고, 이들의 해석과 실상계시가 타당한지를 점검한 후 바른 해석과 대안을 제시합니다.


저자는 저문에서 이 책의 3가지 효과를 기대합니다.
첫째는, 치료제로서, 신천지에 빠졌다가 나왔지만, 여전히 요한계시록은 신천지의 해석이 진짜가 아닐까 의구심을 갖는 이들을 위한 것
둘째는, 신천지에 빠진 가족이나 친구와 씨름하고 있는 이들에게 저항할 수 있는 무기로서.
셋째는, 기성교회 성도들의 신앙 예방 차원으로서.

혹시 신천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유튜브나 매체들에 떠다니는 정보들에 기웃기웃하고 계시다면, 이 책의 40페이지 내외 분량의 <부록> “신천지 요한계시록의 핵심”을 참고하시면 신천지가 태동하게 된 배경까지 정확한 정보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저자도 이 책을 더 효과적으로 읽기 위해 본서의 <부록>을 먼저 정독하길 추천합니다.

2000년의 역사 속에서 정경으로 만들어진 성경이 어떻게 21세기의 특정 개인 인물 한 명 한 명, 또는 특정 단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표현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신천지의 교리는 특히 비유풀이는 매우 허술하고 허접해서 웃음을 자아냅니다. 웃을 수 있다고 심각성을 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음식에만 길들여져 있고, (실제로 그렇지도 않지만) 딱딱하고, 건강한 음식을 피하다보면, 이단의 교리에 누구나 현혹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신학수업 특히 조직신학수업 시간에 교수님께서 역사속 이단에 대한 설명을 해주실 때 정신 못차리면 그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고 동의하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신천지 교리에서만이 아니라 부패한 인간은, 훈련받지 않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고, 성경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의 뇌와 마음에 만족과 안정을 주는 인간 편에 더 합리적으로 보이는 방향으로 치우칠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의 역사와 걸음을 같이해야 하고, 성령의 조명 아래 전성경과 오직 성경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일반성도님들께서 교회의 전도사님 목사님들을 좋은 의도(알고 싶고, 성장하고 싶은)를 갖고 성경 질문들로 괴롭히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책의 서문에 정리된 신천지의 요한계시록 이해를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참고해주시고, 더 궁금하면 책을 읽어봐주세요.

42p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결코 다 무너지고 흔적만 남지 않았다. 이들 중 아직 살아 있는 교회가 있다. 바로 서머나 교회다. 서머나 교회에 가면 1대 목자가 사도 요한, 2대 목자가 폴리캅, 그리고 현재가지 계속된 서머나 교회 목사들의 명단이 벽면에 기록되어 있다. 분명 서머나 교회는 요한계시록의 성취를 경험했고, 지금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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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낙심하는가? - 어떤 상황에도 은혜는 가까이 있다
조정민 지음 / 두란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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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파이퍼 목사님의 “영적 침체에 대처하는 법”이라는 설교영상이 있습니다.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영적침체>라는 책을 인용하시며 시편 42편의 내용을 언급하십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입니다. 본서도 시편 42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낙심”의 순간에 우리는 자기를 성찰해야 합니다. 이 낙심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말입니다.
그 깊은 이면에는 “나 중심”이 있습니다. “나”라는 우상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낙심을 했든 아무리 처음 시도가 선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기인하고 하나님으로부터라면 낙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잠깐 낙심할지라도 금방일어설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잠24:16).

책 내용과 직접적인 연결은 아니지만, 저는 시편84편 5절의 앞부분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개역개정으로는 “주께 힘을 얻고” 이지만, 히브리 원어로는 “그의 힘이 당신(주님) 안에 있고”입니다. 히브리 표현을 잘 살려서 번역한 NRSV는 “How blessed is the man whose strength is in You,” 이라고 표현합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의 힘이 주님안에 있을 때 복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는다’는 표현도 좋지만, ‘우리의 힘이 주님 안에 있다’는 표현이 하나님과 우리의 하나됨 연합을 더욱 깊이있게 표현하는 것 같고 말씀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누리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이 사실을 알 때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을 수 있고, 낙심하다가도 빨리 회복하여 다시금 전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어디에 있기 때문입니까? 바로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5월 오후 예배때 시편84편을 연구해서 설교할 예정입니다. ㅎㅎ 느낌이 나죠.?)

다시 본론으로, 189페이지에서 권능이라는 헬라어 ‘뒤나미스’를 설명하실 때 ‘다이너마이트’의 어원으로 언급하시는데, 그렇다고 다이너마이트를 ‘뒤나미스’와 연결시키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다이너마이트는 헬라어 단어보다 더 나중에 발명되었습니다. 즉 ‘뒤나미스’라는 단어를 설명 할 때 ‘다이너마이트’ 이미지를 가져와서 이야기하는 것은 시간순서상 논리에 맞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중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함께 나누고자 몇 자 적었습니다.

짧은 책이지만, 매우 쉽게 신앙의 중요한 부분을 잘 만져줍니다.
일반 성도님들께서 읽으시면 생각을 교정하고, 위로와 평안을 얻기에 좋은 책이라 느꼈습니다.
쉽게 낙심하고, 실망하고, 주저앉아서 일어날 힘이 없으신 분들,
허무하게 핸드폰만 바라보는 분들게 일독을 권합니다.
⠀ ⠀ ⠀
본 글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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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p 신앙인이란 하나님 앞에 홀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단독자로 서 있을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마음과 영이 참으로 건강한 법입니다. 그러므로 자문(自問)할 줄 알고, 대화보다 깊은 독백을 할 줄 알며, 자기 자신과 은밀한 시간을 누릴 줄 아는가는 신앙의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180p 신앙은 내가 원하는 것을 쉽게 얻기 위해 고안해 낸 어떤 장치가 아닙니다. 내 믿음이 하나님 안에 있는지(Faith in God) 아니면 하나의 신념 체계(belief system)안에 둥지를 틀고 있는지를 스스로 돌아봐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가장 큰 책무 중 하나입니다.

195p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기억하면, 자기 생각이 이끄는 삶(Idea-Driven-Life)가 아닌 말씀이 이끄는 삶(The Word-Driven Life)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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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에 갇힌 인간, 선 밖의 예수
스캇 솔즈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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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을 대충 봤을 때는 “선”이 line 인지 Goodness인지 의문이 들어 영문제목을 다시금 찾아보았다. 책에 대해 기대할 만한 뚜렷한 동기가 없었다. 저자도 생소했고, 제목도 썩 와닿진 않았다. 나를 사로 잡은 것은 목차였다. 팀켈러를 비롯해 두란노에서 요즘 번역하여 출판하는 책들을 읽을 때마다 part 또는 chapter 구성에 신선함을 느꼈다. 이번에는 목차가 사로잡았다. 연표를 연상시키는 디자인은 자연스럽게 내용(content)을 주목하게 했다.

저자가 미국인이기 때문에 외국 이야기이다. 익숙한 번역가의 번역투에서 근래 읽었던 두란노 번역서들의 익숙한 내음이 풍긴다. 작가가 다를지라도 번역자가 같으면 문체가 비슷하다. 다른 책을 읽어도 마치 같은 저자의 책을 읽는 것 같아 원서를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지엽적인 이야기는 그만하고 책의 중심부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편의상 H라 칭한다. H는 내게 오용이 유용을 제거하지 못한다라는 말을 마음에 이마에 새겨준 사람이다. 위험한 말이지만 H을 통해 나는 성경 속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실제같은 그리스도를 보았다. 내가 숨쉬는 이 곳에서 피조물로써 경험한 그리스도가 실제라면, 대체 성경이 말하는 더 분명한 실제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매료시킨 것은 그리스도와 같은 포용력이다.

언젠가 나는 “도대체 사람을 왜 미워하지? 어떻게 미워할 수가 있지?”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이런 생각은 스스로에 대한 속임, 기만이었고 긍정적으로 표현하자면 주께서 잠시 덮어주셔서 보이지 않았던 것 뿐이었다. 비교적 (의외로) 신념이나 생각 가치관 따위가 뚜렷하다. 아닌 것 같지만 호불호도 분명하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나의 뚜렷함들이 타인을 배제하고 조금더 나아가 포용하지 못하는 부정적 뿌리들로 퍼져감을 보았다. 이런 나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H였다. 나와 그를 비교할 때 “포용력”의 차이의 근본적 원인 “진리”에 있었다. H는 진리와 벗하여 진리안에 있었고 나는 그 반대였다.

이렇게 장황하게 내 이야기를 한 것은 바로 이 책이 담고 있는 중심 주제 “Line”과 되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선에 갇힌 인간”이 바로 나임을 알 수 있었다. 저서는 선에 갇힌 인간 바깥 액자를 비기독교인, 불신자가 있는 세상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지만, 이것은 비신자와 신자 사이, 세계 모두 적용되는 원리를 담은 책이다. 저서는 독자에게 질문한다. 둘중 어디에 설 것인지, 진보인지 보수인지, 낙태 찬성인지 낙태 반대인지, 나홀로 신앙인지 공동체 신앙인지, 돈인지 거룩한 낭비인지, 인종차별인지 존중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말이다. 그리고 그 선 밖의 예수를 소개한다. “선 밖”보다 “선 위”가 옳은 표현이지 않을까 제언한다. 이 책을 읽게되면 왜 “선 위”인지 어렴풋하게 알게 될 것 같다

인상 깊었던 내용이 많았다. 두 가지를 소개한다. 먼저, 남자와 여자의 문제를 바라보는 평등주의와 상호보완주의 관점을 최대한 치우침 없이 기술하려고 노력한 내용 큰 유익이 되었다. 저자는 남녀에 대해 두 가지 입장을 제시하고, 교회와 가정에서 리더 역할에 대한 질문을 정리한다. 첫째는 교회 안에서 설교자와 공식 리더 역할에 대해서 여성들을 배제시켜야 하는가 둘째는 가정 안에서 남편과 아내를 가정의 공동 머리로 봐야하는가?


평등주의자는 이야기한다. 성경이 제시하는 딤전2:12, 엡5:22-23을 환원주의식으로 잘못해석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들은 첫째는 여성이 부수적 존재로 남아 있어야 노예제도도 똑같이 적용돼야 하고, 둘째는 정경 완성 이후 성경은 더 크고 더 정의롭고 더 해방된 이상을 향한 발전을 지향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의견을 품고 저자는 자신을 상호보완주의자라고 밝힌다. 그러나 이 뜨거운 감자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들끼리 분열하거나 서로를 정죄하는 요인이 되어선 안 된다고 선을 긋는다.

다음으로 우리 내면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이다. 저자는 우리 안에 여전히 인정을 갈망하는 마음을 건드린다. 혹자는 인정의 욕구를 우리의 빈곤한 상태로 부르지만 다른 이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름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을 닮게 창조되어 칭찬의 욕구가 우리에게 깊이 내재해 있다는 논리로, 인정의 욕구를 존재론적으로나 성경적으로 당연한 일로 본다. 결론적으로 이것을 크리스천들이 인정의 말을 세상에서 가장 많이 하는 사람들이어야 하는 이유로 뽑는다.

덜 이기적이고 더 사랑이 많은 사람, 덜 탐욕스럽고 더 많이 나누어 주는 사람, 덜 욕심을 부리고 더 만족하는 사람, 덜 게으르고 더 절제하는 사람, 덜 충동적이고 더 책임감 있는 사람, 덜 공격적이고 더 온유한 사람 그래서 사랑, 희랑,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같은 성령의 열매(갈5:22-23)이 우리 안에 충만해서 사람들이 예수님과 나의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할 수준(210p)에 이르고 싶은 크리스천에게 일독을 권한다.

24p 누군가와 의견이 깊이 다르면서도 그를 깊이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신념을 고수하면서도, 그 신념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포용하는 것이 가능한가? 예수님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신다. 나아가, 예수님은 그것이 가능함을 보여 주셨다.

87p 개인주의자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겠지만 하나님과 교회는 묶여져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부르시지만, 각 개인으로 부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 속으로 부르신다. 궁극적으로 가족을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누가 그 공동체에 있는지를 선택할 수 없다.

211p 하나님이나 사람들에게 진저리가 난 것이 아니었다. 바로 ‘나 자신’에게 진저리가 났다. ‘지금도 예수님보다 내 “옛 자아”를 닮은 점이 더 많다면 과연 목회를 할 자격이 잇는가? 이토록 오래 크리스천으로 살아오고서도 여전히 이런 문제를 안고 있다면 하나님 나라의 일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 아닌가? 나 같은 자가 목사 노릇을 계속해야 할까?’

288p ‘자존감’의 문제에 대한 성경의 답은 바로 겸손의 미덕이다. 성경은 두 가지 사실을 이야기한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다. (...) 둘째,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용서를 받을 뿐 아니라 영원한 ‘총애’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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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마음에 하나님을 새기라 - 교회와 부모가 함께하는 신앙 교육 매뉴얼
신형섭 지음 / 두란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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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특수한 상황을 통해 예상치 못한 훈련의 기회를 주시고 계십니다. 지금껏 물에 잠겨 있던 가정에서의 예배 회복입니다.

교육부서 사역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절실한 마음으로 이 책을 읽은 것 같습니다. 반면, 사실 크게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책의 초반부터 읽을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가 멈추지 않았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매우 유익했습니다.

저자는 2004년 유니온 신학교에서 수학했고, 박사 논문 주제는 <주일 교회에서의 공적 예배가 주중 가정에서의 삶의 예배로 연계되기 위하여 교회는 교인들에게 어떤 목회를 제공해야 하는가>입니다. 그리고 ‘자녀 세대가 회복하려면 먼저 우리 교회는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가?’ 고민 속에서 본서를 정리했습니다.

초반부 리포트에서는 부인할 수 없는 여러 통계적 수치를 제시하며 주장의 타당성과 신뢰성을 높임입니다. 철저한 근거와 분석 자료들을 제시한 후 본서의 본론인 “가정-교회 연계로 교육목회”를 매핑하기 위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소개합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실천 현장 매뉴얼, 연령별 신앙양육 로드맵, 그리고 매뉴얼 리포트까지 담고 있습니다.

저자가 제시하는 “가정-교회 연계” 교육목회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었고, 성경은 단 한번도 가정과 교회를, 일터와 교회를, 일상과 교회를 분리시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세상의 것은 육적이고, 신앙과 관련된 것만 영적인 것이라는 헛된 종교들이 껴 있었을 뿐입니다.

언제부터일까요. 일터와 가정, 우리의 일상이 신앙의 사각지대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교회가 세상으로 지탄 받게된, 롤러코스터의 하향곡선의 시작이었을까요. 저자가 책에서 제시하는 바는 단지 교육부서, 다음 세대를 회복하기 위한 방법론이 아닌, 한 명 한 명의 교회, 그리고 우주적 교회로서 보편교회가 다시 회복되는 방법 중 핵심이라 생각합니다.

얇은 책이지만 분석, 이론, 실천이 골고루 배양돼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들에게 일독을 추천합니다.


27p 그 책임이란 게 일주일의 총 168시간 중 1시간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신앙교육이 일주일 중 1시간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이뤄지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27p 교회는 부모 세대가 신앙교사로서 자녀를 제자화하도록 그 역량을 돕는 우선적인 기관(the primary equipper of parents)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며, 부모는 자녀의 제자화라는 사명을 감당하는 주체적인 교사(the primary discipliner in the home)가 되어야 합니다.

65p 30년 전 미전도 종족이 북위 4도에서 40도 사이(4/40 Windows)에 몰려 있다고 본 선교학자 루이스 부시(Luis Bush) 박사는 이제 미전도 종족의 개념을 지역이 아닌 연령의 개념으로, 즉 만 4세에서 14세(4/14 Window)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95p 기존의 ‘세대별 교회학교 위탁형’ 신앙교육 패러다임에서 ‘세대간 가정-교회 연계형’ 신앙교육 패러다임으로 변화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습니다.

142p 우리 아이들은 지적받아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감동받아서 변합니다. 세상의 지식과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도 없는 십자가의 사랑과 무차별적인 용서를 경험할 때 자녀들은 변합니다.

159p 기독교 교육학자 파커 파머(Parker Palmer)는 “아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여기서 앎은 사랑에서 기원하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지적 호기심이나 지배욕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확장된 사랑의 행위입니다. 파머는 이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와 경건을 실천하며,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살아갈 것을 제안합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우리의 지식은 본질적으로 시작되고, 그 시작은 끊임없는 분별과 실천의 여정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170p 교회학교 교사는 더 이상 주일날 한두 시간 가르치는 파트타임 교사로 만족해선 안 됩니다. 바빠서 하루에 한두 시간밖에 자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부모라도 파트타임 부모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사 역시 맡겨진 아이들의 일주일을 주목하며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는 풀타임(full-time)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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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에게 왜 인문학이 필요한가?
김형석 지음 / 두란노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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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교회와 기독교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중학교 1학년 성탄절을 계기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감리교의 김창준 원로목사와 장로교를 대표하는 윤인구 목사의 설교가 신앙의 길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163p). 일제 강점기의 시회적 시련을 치르면서 기독교의 사명에 대해 도산 안창호와 고당 조만식 장로로부터 배우고 깨닫기 시작했다(164p). 그리고 교회신학과 교의학보다는 ‘인간의학’으로서의 철학과 인문학 분야에 더 큰 관심과 기대를 갖었다고 한다(165p). 그래서 그는 신학을 공부해 목회자가 되기보다 철학도로서의 신앙인이 되었다(166p).

최근에 다시 펼쳐본 바빙크의 #개혁교의학개요 “1장 사람의 최고선” 의 마지막은 “인간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해결되는 수수께끼다.”라는 문장이다. 바빙크의 사유를 빌려 생각해본 바로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근원, 존재(이유), 목적 등 답을 알고 있다. 아니, 답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 다른 사람들이 답으로 생각하며 믿고 싶어하는 것들, 누가봐도 오답인 것들에 투자하는게 답을 알고 있는 자에겐 시간낭비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오답정리는 전교1등 뿐만 아니라 공부하는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과정이다. 책을 읽는 동안 성경의 전도서가 오버랩되었다.

이 책은 과거 두란노서원에서 ‘신앙인을 위한 인문학적 과제들’을 정리해서 출판된 책이다. 가독성이 좋았지만, 생소한 인문학적 기본 베이스에 익숙해지지 않아 초반에 매우 긴 인고의 시간이 필요했다.

1강은 인문학과 더불어 자연과학 사회과학과 비교하여 인문학이 무엇을 어떻게 연구하는 학문인지를 소개한다 2강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이다. 여기까지는 내용적으로도 갸우뚱하는 부분이 있어서 깊이 인내해야 했다. 3강은 종교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을 종교의 모순, 죽음, 신앙의 체험 등으로 살핀다. 그리고 4강에서는 앞에서 언급되었던 파스칼과 키르케고르의 관점들을 빌려와 기독교와 진리의 문제를 다룬다.

내게 3강과 4강은 매우 명확하고 동의가 되었지만 2강에서 3강으로 인문학에서 기독교로 넘어갈 때에 비신앙인들에게는 비약이 심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을 완벽히 극복할 수는 없다. 오직 신앙이 생길 때 모든게 풀어진다.

감사한점은 스스로 이 책을 읽진 않았을 것 같다. 읽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짐에 감사하다.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이해의 걸음”이라는 이 책의 부제가 책의 제목에 대한 적절한 답을 제시해준다.

18p 인문학은 인간과 역사에 나타나는 사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자연과학이 인간이 필요로 하는 자연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사회과학이 인간의 사회적 삶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인문학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인간 자체를 연구하며 인간의 삶을 이끌어가는 사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81p 인간을 이해함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간을 현실의 위치에서 바라보고, 인간의 전인적인 작용과 활동에서 그 본질과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118p 이런 죽음에 이르는 병은 과학이나 정신적 태도로 태결하지 못한다. 따라서 신의 말씀이라는 극약 처방과 신의 사랑이라는 수술을 받는 것 같은 자기부정의 원리가 필수 조건이 된다. 앞에서 거론한 파스칼의 말처럼 신앙은 내 생명과 전 인격을 건 도박이다. 잃게 되면 자아라는 전체가 무로 돌아간다. 그러나 얻게 되면 자아는 물론 영원과 삶의 실제를 차지한다. 이처럼 종교는 정신적 심각성, 생명의 고귀성, 인격의 절대성이 요구되며 그것으로부터 주어지는 문제이다. 그것이 다름 아닌 신의 참여인 것이다.

150p 그러므로 기독교가 요청하는 것은 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질서를 인정하며 그 질서를 통해 신의 뜻과 인간의 의의를 찾으라는 것이다. 이 질서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 질서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자연 법칙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 법칙은 알 수 있어도 그 의미와 가치와 목적은 제대로 모른다. 그것은 자연 법칙을 지배하고 있는 자연을 초월한 질서가 더 큰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83p 파스칼과 키르케고르의 종교적 특성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종교적 진리는 주체적인 것이라는 키르케고르의 견해에 이르게 된다. 키르케고를 실존철학의 선구자로 보는 이유는 그가 최초로 ‘주체성이 진리이다’라는 결정적 선언을 했기 때문이다.

218p 지혜로운 시인이었던 괴테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염세주의의 대표자인 쇼펜하우어도 의지의 무의미한 영속성을 믿었다. 모든 것을 긍정하려고 노력한 니체마저도 세계의 운명을 생각할 때는 영구회귀(永久回歸)의 사상을 넘어설 수 없었다.

223p 기독교의 사랑과 불교의 자비심 사이에는 커다란 질적 차이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불교의 자비는 범신론적인 넓은 사랑을 말한다. 생명계의 공감과 동일한 운명에 대한 동정심에서 기인한 사랑이다. 모든 동물에게도 똑같이 생명의 존엄성이 있으며, 이 생명에 대한 외경심과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의 근원은 넓은 자비심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랑은 생명계로 향하는 공감이나 동정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계의 적극적이며 건설적인 사랑을 초월적 실재이신 신으로부터 받아 완성시킨다는 데 본래 의미와 목적이 있다. 우리는 동정심을 넓히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신의 사랑에 의해 인간의 운명과 생명을 구출하려는 것이 목적이라는 의미다.

본 글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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