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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에 갇힌 인간, 선 밖의 예수
스캇 솔즈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0년 2월
평점 :
책 제목을 대충 봤을 때는 “선”이 line 인지 Goodness인지 의문이 들어 영문제목을 다시금 찾아보았다. 책에 대해 기대할 만한 뚜렷한 동기가 없었다. 저자도 생소했고, 제목도 썩 와닿진 않았다. 나를 사로 잡은 것은 목차였다. 팀켈러를 비롯해 두란노에서 요즘 번역하여 출판하는 책들을 읽을 때마다 part 또는 chapter 구성에 신선함을 느꼈다. 이번에는 목차가 사로잡았다. 연표를 연상시키는 디자인은 자연스럽게 내용(content)을 주목하게 했다.
저자가 미국인이기 때문에 외국 이야기이다. 익숙한 번역가의 번역투에서 근래 읽었던 두란노 번역서들의 익숙한 내음이 풍긴다. 작가가 다를지라도 번역자가 같으면 문체가 비슷하다. 다른 책을 읽어도 마치 같은 저자의 책을 읽는 것 같아 원서를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지엽적인 이야기는 그만하고 책의 중심부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편의상 H라 칭한다. H는 내게 오용이 유용을 제거하지 못한다라는 말을 마음에 이마에 새겨준 사람이다. 위험한 말이지만 H을 통해 나는 성경 속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실제같은 그리스도를 보았다. 내가 숨쉬는 이 곳에서 피조물로써 경험한 그리스도가 실제라면, 대체 성경이 말하는 더 분명한 실제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매료시킨 것은 그리스도와 같은 포용력이다.
언젠가 나는 “도대체 사람을 왜 미워하지? 어떻게 미워할 수가 있지?”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이런 생각은 스스로에 대한 속임, 기만이었고 긍정적으로 표현하자면 주께서 잠시 덮어주셔서 보이지 않았던 것 뿐이었다. 비교적 (의외로) 신념이나 생각 가치관 따위가 뚜렷하다. 아닌 것 같지만 호불호도 분명하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나의 뚜렷함들이 타인을 배제하고 조금더 나아가 포용하지 못하는 부정적 뿌리들로 퍼져감을 보았다. 이런 나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H였다. 나와 그를 비교할 때 “포용력”의 차이의 근본적 원인 “진리”에 있었다. H는 진리와 벗하여 진리안에 있었고 나는 그 반대였다.
이렇게 장황하게 내 이야기를 한 것은 바로 이 책이 담고 있는 중심 주제 “Line”과 되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선에 갇힌 인간”이 바로 나임을 알 수 있었다. 저서는 선에 갇힌 인간 바깥 액자를 비기독교인, 불신자가 있는 세상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지만, 이것은 비신자와 신자 사이, 세계 모두 적용되는 원리를 담은 책이다. 저서는 독자에게 질문한다. 둘중 어디에 설 것인지, 진보인지 보수인지, 낙태 찬성인지 낙태 반대인지, 나홀로 신앙인지 공동체 신앙인지, 돈인지 거룩한 낭비인지, 인종차별인지 존중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말이다. 그리고 그 선 밖의 예수를 소개한다. “선 밖”보다 “선 위”가 옳은 표현이지 않을까 제언한다. 이 책을 읽게되면 왜 “선 위”인지 어렴풋하게 알게 될 것 같다
인상 깊었던 내용이 많았다. 두 가지를 소개한다. 먼저, 남자와 여자의 문제를 바라보는 평등주의와 상호보완주의 관점을 최대한 치우침 없이 기술하려고 노력한 내용 큰 유익이 되었다. 저자는 남녀에 대해 두 가지 입장을 제시하고, 교회와 가정에서 리더 역할에 대한 질문을 정리한다. 첫째는 교회 안에서 설교자와 공식 리더 역할에 대해서 여성들을 배제시켜야 하는가 둘째는 가정 안에서 남편과 아내를 가정의 공동 머리로 봐야하는가?
평등주의자는 이야기한다. 성경이 제시하는 딤전2:12, 엡5:22-23을 환원주의식으로 잘못해석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들은 첫째는 여성이 부수적 존재로 남아 있어야 노예제도도 똑같이 적용돼야 하고, 둘째는 정경 완성 이후 성경은 더 크고 더 정의롭고 더 해방된 이상을 향한 발전을 지향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의견을 품고 저자는 자신을 상호보완주의자라고 밝힌다. 그러나 이 뜨거운 감자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들끼리 분열하거나 서로를 정죄하는 요인이 되어선 안 된다고 선을 긋는다.
다음으로 우리 내면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이다. 저자는 우리 안에 여전히 인정을 갈망하는 마음을 건드린다. 혹자는 인정의 욕구를 우리의 빈곤한 상태로 부르지만 다른 이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름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을 닮게 창조되어 칭찬의 욕구가 우리에게 깊이 내재해 있다는 논리로, 인정의 욕구를 존재론적으로나 성경적으로 당연한 일로 본다. 결론적으로 이것을 크리스천들이 인정의 말을 세상에서 가장 많이 하는 사람들이어야 하는 이유로 뽑는다.
덜 이기적이고 더 사랑이 많은 사람, 덜 탐욕스럽고 더 많이 나누어 주는 사람, 덜 욕심을 부리고 더 만족하는 사람, 덜 게으르고 더 절제하는 사람, 덜 충동적이고 더 책임감 있는 사람, 덜 공격적이고 더 온유한 사람 그래서 사랑, 희랑,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같은 성령의 열매(갈5:22-23)이 우리 안에 충만해서 사람들이 예수님과 나의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할 수준(210p)에 이르고 싶은 크리스천에게 일독을 권한다.
24p 누군가와 의견이 깊이 다르면서도 그를 깊이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신념을 고수하면서도, 그 신념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포용하는 것이 가능한가? 예수님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신다. 나아가, 예수님은 그것이 가능함을 보여 주셨다.
87p 개인주의자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겠지만 하나님과 교회는 묶여져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부르시지만, 각 개인으로 부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 속으로 부르신다. 궁극적으로 가족을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누가 그 공동체에 있는지를 선택할 수 없다.
211p 하나님이나 사람들에게 진저리가 난 것이 아니었다. 바로 ‘나 자신’에게 진저리가 났다. ‘지금도 예수님보다 내 “옛 자아”를 닮은 점이 더 많다면 과연 목회를 할 자격이 잇는가? 이토록 오래 크리스천으로 살아오고서도 여전히 이런 문제를 안고 있다면 하나님 나라의 일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 아닌가? 나 같은 자가 목사 노릇을 계속해야 할까?’
288p ‘자존감’의 문제에 대한 성경의 답은 바로 겸손의 미덕이다. 성경은 두 가지 사실을 이야기한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다. (...) 둘째,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용서를 받을 뿐 아니라 영원한 ‘총애’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