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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제전 - 세계대전과 현대의 탄생 ㅣ 걸작 논픽션 23
모드리스 엑스타인스 지음, 최파일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3월
평점 :
‘사상’ 또는 ‘이즘 (Ism)’이란 사고와 행동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신념의 체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즘은 역사적, 사회적 입장이 반영된 현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즘’은 현실 속 욕망들이 투영되어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이론과 현실의 괴리로 인해 ‘이즘’은 현실의 문제들을 온전히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조국독립, 경제성장, 민주화를 거쳐 발전해 온 우리의 역사 속에서 사회주의는 개인의 욕망을 대변하지 못하고 오히려 욕망실현을 억압하였고, 개인을 이상사회 건설이라는 이념에 종속시켰다. 또한 자유주의는 원칙과 기준을 잃고 표류하였다. 그것은 비정상적 과정을 통한 성장이었고 이는 결국 자유의 부재로 이어졌다. ‘이즘’의 존재 이유는 현실에서 살아 숨쉬는 가치를 지키며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것이지만 ‘삶’은 역설적으로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충돌 과정에서 빛을 잃어갔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즘이라는 것은 모순투성이고 부정확한 존재인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의 본질적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는 새로운 구속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인간이 이념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념의 실현을 위한 도구가 된, 이데올로기란 이름으로 인간이 희생되었던 사례를 많이 지켜봐 왔다. 인류 최고의 발명품으로 칭송 받는 민주주의도 이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현실적이지 않은 제도로 여겨져 주목 받지 못했고, 소크라테스도 민주주의의 핵심인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희생되었다. 그렇다면 인류는 왜 사상에 매혹되고, 우리는 왜 사상에 주목해야 하는 것일까?
앞서 언급한 대로 이념은 현실의 순수한 열망이 빚어낸 결정체다. 각각의 사상에는 열망의 실현을 약속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욕망을 꿰뚫고 있는 시대적 사상들에 인류가 매혹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사상의 발전사는 인류의 욕망과 희망의 변천사이기도 하다. 사상은 ‘인류를 위해서’, ‘인류에 의해’ 탄생하였지만, 사상 중에서는 ‘인류의 사상’이 되지 못하고 스러져간 것들이 많았다. 사상이 ‘현실’의 일면만을 반영하거나, ‘인간’을 담지 못하고 변질되고, 때론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상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인류를 사로잡았던 사상들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에 대한 냉철한 이해야말로 좋은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모드리스 엑스타인스는 모더니즘의 대표적 상징인 <봄의 제전>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과 모더니즘의 탄생을 폭넓게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역사는 예전 권위의 상당 부분을 허구에 내주었고, 20세기는 삶과 예술이 뒤섞인 존재가 미학화되는 시대라는 지론처럼 책의 구성도 막과 장으로 이루어진 드라마의 형식에 맞춰 전개하고 있다.
제1막에서는 제1차 세계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1년여 전, 파리에서 열린 <봄의 제전>의 초연을 언급하며, 공연이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던 당시 사회문화적 흐름과 공연에 제기된 수많은 논란과 의미에 대해 다루고 있다. 또한, <봄의 제전>이 공연된 후 전쟁이 발발하기까지의 유럽 각국의 세계관 형성에 대해 언급한다. 독일은 전쟁 직전에 혁신과 쇄신의 상징이자 넘치는 활력과 기술적 탁월성의 화신이었다. 독일은 다른 어느 나라 보다 더 광범위하게 민족적 아방가르드의 열망, 즉 자유시장경제와 자유주의 윤리의 옹호자를 자처했던 영국의 팍스 브리타니카와 문화적 헤게모니를 구축한 프랑스 문명에 의해 부과된 세계질서, 정치적으로는 ‘부르주아 자유주의’로 명문화된 질서를 깨트리고 나오려는 욕망을 대변했다. 즉, 독일인에게 1차 대전은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전쟁이었다면, 영국인에게 이것은 세계를 보존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독일인은 세계 패권의 재정립이라는 비전에 의해, 영국인은 질서와 진보적 윤리라는 물려받은 유산에 의해 추동되었다.
제2막에서는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제1차 세계대전을 대표하는 전투방식인 ‘참호전’을 통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1차 대전은 현대의 무기와 19세기 전술, 기사도와 같은 낭만적 가치, 귀족과 신분제가 공존한 전쟁이었다. 그 괴리가 ‘진흙 속의 아마겟돈’을 낳았다. 이전의 전쟁들이 왕조 간의 전쟁, 봉건적, 귀족적 이해관계의 전쟁, 군주간 대립에 기인한 전쟁이었다면, 제1차 세계대전은 역사상 최초의 중간계급 전쟁이자 대규모 부르주아 전쟁이었다. 봉사와 의무 관념으로 충만한 중간계급들이 각국을 대표하여 참전하였고, 피츠제랄드가 <밤은 부드러워라>에서 언급한 것처럼 중간계급의 사랑은 소진되었고 그들의 세계는 고성능 폭탄 같은 한바탕 폭발과 함께 사라졌다. 이러한 반복되는 소모적 전쟁을 4년 동안이나 지속시킨 것은 당시 유럽에 불어 닥친 광기였다. 전쟁 초기 플랑드르 벌판에서 벌어진 ‘크리스마스 휴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전쟁 이전부터 이어져 온 가치들이 전쟁으로 인해 어떻게 파괴되고 추상적 관념으로 변해 가는지, 새롭게 들어선 규칙으로 인해 유럽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서술한다.
제3막은 표면적인 전쟁은 종결되었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의 여파에 대해 다룬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은 1927년 대서양 횡단에 성공한 미국 조종사 린드버그에 대한 대중의 열광이다. 린드버그는 몰락의 고통을 겪는 세계와 새롭게 부상하는 세계 모두에게 추앙받았다. 린드버그는 개인적인 열정을 실현한, 저무는 해가 아니라 동트는 하늘을 향해 날아간 니체적 ‘비행가’가 됐다. 전쟁이 없었다면 린드버그 현상은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전쟁은 사회 문화적 현상의 판단에 맥락을 제공했다. 전쟁은 죽음의 한복판에서 삶의 확인이라는 린드버그의 성취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고, 그의 행위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다. 린드버그는 가치를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의 상징이자, 사람들이 현 생활에 깊은 불만을 품고 있음을 가리키는 상징이 됐다. 삶의 의미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어지면서 대중들은 의미를 삶 자체에, 순간의 생생함 속에서 찾았다. 그 결과 1920년대는 향락주의와 나르시시즘이 성행했고 대중들은 감각과 본능의 충족에 탐닉했다. 이는 서부전선이라는 도살장을 바삐 돌아가게 만든 도덕주의적 이상주의에 대한 냉소주의에 기인했다, 전쟁의 이미지와 어휘는 1920년대 모든 형태의 문화에 스며들어 있었다. 전선에서 병사들이 적의 포화에 희생되었다면, 전쟁 후 대중들은 점점 커져가는 허무감에 의해 삶이 찢겨져나갔다. 독일에 남아있던 혁명의 열망은 히틀러와 나치즘을 낳았다.
역사는 반복되고,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2022년의 봄, 또 다시 봄의 제전이 시작되고 있다. 그야 말로 끝없는 봄이다. 봄은 생식과 부활(復活)의 계절이다. 인류가 경험했던 대부분의 전쟁은 허무주의와 황페함만은 남겼다. 경제학자 폴 크루그만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 지든 이기든, 러시아는 더 가난해질 것이라고 말하면서 온전히 경제적 측면에서 전쟁이 왜 쓸모없는지, 왜 돈이 되지 않는지 설명한다.(“Conquest doesn’t pay.“) 현대 이전 로마의 고대 그리스 정복과 스페인의 아즈텍, 잉카 문명 정복의 경우는 분명히 전쟁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하지만 현대 이후 적어도 지난 1.5세기 동안의 사례를 보면 전쟁은 승전국에게도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T.S. 엘리엇은 황무지 (The waste Land)를 통해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하였다. 진정한 생식과 재생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봄은 그 불가능함을 재환기시키기고 또 공허한 추억과 덧없는 욕망을 일깨워 치명적 상처만 덧나게 하기에 잔인한 계절이다. 절망적 상황에서 잃어버린 가치들을 불러오기에 잔인하다. 전쟁 이후 참혹함과 황폐함을 이겨내는 인간의 강인한 의지와 끈기, 그리고 살기 위해 벌이는 처절한 투쟁은 한마디로 잔인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 세상을 휩쓸고 기존 가치가 허물어진 시대에 봄이 온들 진정한 재생이 가능할 것인가? 어리석은 전쟁이 속히 종결되고 다시 평화 도래하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