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왕 형제의 모험 -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장편동화 재미있다! 세계명작 4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김경희 옮김, 일론 비클란드 그림 / 창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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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는 "평범한 동화책이 아니다. 내 방의 벽에 기대앉아 오래 울었던 것을 기억한다."는 서평을 남겼다. 책을 읽기전에는 왜 한강 작가는 이 책을 평범한 동화책이 아니고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지만 책을 읽고나서 한강작가의 서평에 격하게 공감하는 나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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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왕 형제의 모험 -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장편동화 재미있다! 세계명작 4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김경희 옮김, 일론 비클란드 그림 / 창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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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 삐삐를 기억하는가? 삐삐 롱 스타킹은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캐릭터이다. 야무지게 두 갈래로 땋은 빨간 머리, 주근깨투성이 얼굴에 짝짝이 긴 양말. 뒤죽박죽 별장에 새로 이사 온 삐삐 롱스타킹은 새로 사귄 단짝 친구 토미, 아니카와 함께 우당탕탕 즐겁게 생활하는 말괄량이이자 귀엽고 순수한 소녀이다.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과 <사자왕 형제의 모험>으로 대표되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작품들은 아동문학의 고전으로 일컬어지고 있고, ‘어린이책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 스웨덴 아카데미 대상 등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린드그렌의 작품들은 원작 동화에서 그치지 않고, 영화와 연극, TV 드라마 등으로 수많은 국가에 번역되었고 재구성되어 널리 활용되고 있다.



어린시절 삐삐에게 빠져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린드그렌이 써낸  34권의 읽기책과 41권의 그림책, 이를 통해 쌓아간 그녀의 명성에는 인지를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수상하며 그녀가 동화책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추천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 책을 쓴 작가가 어린 시절의 추억을 선물한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의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라는 걸 알고 정말 놀랍고 반가웠다. 그리고 그녀가 동화책 작가 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위해 목소리를 높인 활동가였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린드그렌은 어린이와 여성, 동물과 같이 약하고 억압받는 존재들을 위해 목소리를 낸 활동가였다고 한다. 특히 어린이와 동물의 권리를 지지하고 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는데, 그녀 자신이 여성으로서 또 미혼모로서 사회적 폭력에 부딪친 젊은 시절을 보냈고, 이를 통해 얻은 경험들을 통해 외롭고 약한 존재들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언어로 승화시켰다.



린드그렌은 1980년대 후반 수의사 크리스티나 포르슬룬드(Kristina Forslund)와 함께 스웨덴의 여러 일간지에 공장식 축산을 비판하는 기고문을 실었고, 동물에 대한 더 나은 대우를 요구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결국 이들의 활동은 후에 ‘린드그렌 법(Lex Lindgren)’이라고도 불리게 된 법의 제정으로 이어졌다. 린드그렌의 80세 생일에 발표된 이 법은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동물 복지 관련 법이었다고 한다. 1994년 린드그렌은 “자연에 대한 사랑과 배려, 정의와 비폭력, 소수에 대한 헌신”이라는 공로로 ‘올바른삶재단(The Right Livelihood Foundation)’으로부터 대안 노벨상을 수상했다. 2002년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스웨덴 정부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기념 문학상(Astrid Lindgren Memorial Award)’을 제정해 그 업적을 기리고 있으며, 2005년에는 린드그렌의 필사본을 비롯한 관련 기록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다시 <사자왕 형제의 모험>으로 돌아오면 앞서 언급한 한강 작가의 이 책에 대한 추천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강 작가는 한 강연에서 이 책에 대해 "평범한 동화책이 아니다. 어느새 해가 져서 캄캄해진 내 방의 서늘한 벽에 기대앉아 오래 울었던 것을 기억한다."는 서평을 남겼다. 왜 한강 작가는 이 책을 평범한 동화책이 아니고 가슴을 치는 울림이 있다고 언급했을까? <사자왕 형제의 모험>은 책의 제목에 언급된 것처럼 용감하고 멋진 외모를 가진 형과 못생긴 외모와 연약한 육체를 가진 한 형제가 겪은 모험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상실과 결핍을 가진, 또 상처를 받은 어린 영혼들이 모험을 거치며 스스로의 상처와 결핍들을 치유해가는 과정은 독자들에게도 그러할 용기와 힘을 불어넣는다. 또한 끊임없이 밀어닥치는 절망과 두려움에 맞서면서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는 꿈과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은 아이들에게는 물론 성인들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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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시간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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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내에서 적대적으로 공존하는 하나의 민족, 두 개의 한국, 이 민족적 비극의 기원은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국독립과 남북분단이라는 우리 민족이 겪은 고통스러운 기억과 그 이후의 역사적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이는 민족적 비극의 근원인 동시에 올바른 현실인식을 기반으로 한 통일 민주국가 수립 이라는 민족사적 과제 달성의 단초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비극적 시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 시기가 현재 우리사회의 지형을 형성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소설 <유령의 시간>은 이 엄혹한 시기를 겪으며 역사의 주변인으로서 삶의 기반과 정체성의 혼돈을 겪으며 항상 막연한 불안과 긴장을 강요당해온 우리 사회의 소외된 자들과 국가의 안전과 사회의 안녕 유지라는 명목으로 행해졌던 국가의 폭력과 부조리를 조명하고 있다. 한 국가의 국민이라는 것의 의미는 국민국가의 틀 안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삶의 기반이 있으며, 고유의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조국이자 고국이며 모국인 곳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조국과 가족 구성원에 대한 분열로 국가를 넘어선 저 어딘가에서 자신의 근원을 찾아야 하는 자에게는 삶의 의미는 전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들에게 이상적인 조국은 모든 형태의 부조리가 일어나지 않는 곳이지만,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기 때문이다.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줄기 속에서도 인간은 자신이 믿는 사상과 신념에 따라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걸음을 내딪는다.


"가난허고 무식헌 것들이 믿고 의지헐 디 웁는 판에 빨갱이 시상 되먼 지주 다 처웁애고 그 전답 노나준다는디 공산당 안헐 사람 워디 있겄는가요. 못헐 말로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들이 빨갱이 맹근당께요." (소설 태백산맥 中)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은 사상의 생몰(生沒)을 잘 표현하고 있다. 태백산맥의 무대인 벌교는 당시 오만의 읍민들 중 팔할이 농민이었고, 그 농민들 중에서 구할이 소작인이었다. 벌교뿐만이 아니라 해방 당시 한국은 전 농가의 86%가 소작농이었고, 전농지의 64%가 소작지였을 정도로 농업은 핵심적 경제기반이었고 인구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갑오농민혁명, 일제하의 소작쟁의에 이어 토지제도의 모순이 당시 주요 사회갈등의 원인으로 등장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민중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농민들은 지식을 통해 현실의 모순구조를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삶을 통해, 체험을 통해 그 문제상황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고, 시대 상황 속에서 이데올로기 대립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개인적 동기는 사회갈등으로 구체화되었고 이는 다시 집단적 이념으로 확장되었다. 소설 속 문서방의 한 맺힌 외침은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 - <위대한 개츠비> 中에서 –


김이정 작가의 <유령의 시간>을 읽으며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상실과 결핍, 몰이해라는 인간의 한계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한 조각의 진실과 삶의 의미를 구하려 애쓰는 '인간'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조망하는 시선이 서로 닮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설 속 화자는 아버지의 삶을 한 마리 새우로 표현한다. 그 새우는 양식장의 바람 부는 호지 밑에서 온몸으로 물결을 버텨내던 한 마리 등 굽은 새우였고, 세상 누구보다 뜨겁고 격렬했지만 오랫동안 차갑고 어두운 곳에 갇혀버린 새우였다. 이 소설을 통해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줄기 속에서 차갑고 어두운 현실을 견뎌내며 자신이 믿는 지향점을 따라 뜨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던 삶들이 다시 조명 받고 위로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를 통째로 집어삼킨 사상이란 것도 결국 인간에 대한 지극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작가의 말에 동의한다. 냉정한 과학의 시선은 감정과 열정, 자유, 해방감 등 이 모든 것을 절제하고 억눌러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람이 가장 사람다운 순간은 사랑과 감정, 열정과 자유를 한껏 꽃피웠을 때가 아니던가?

"솔직히 난 어떤 사상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생각은 안드네. 다만 어떤 게 더 인간적인 제도냐의 문제겠지." (p. 134)

"뭐든지 뜨거운 마음으로 해야 돼. 공부를 해도 뜨겁게 하고 연애를 해도 마음을 다 바쳐야 돼. 그렇지 않으면 의무감만 남고 사는 게 재미없어." (p.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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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들의 수프 - 셰프의 독서일기
정상원 지음 / 사계절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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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프 정상원 작가의 신작 <글자들의 수프>를 읽었다. 그의 전작 <탐식수필>'쉐프가 빚어낸 파인 워딩의 세계'라는 추천사처럼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이란 주제를 가지고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그만의 새로운 세계를 빚어낸 정상원 작가의 '미식 탐험기'였다. 책의 부제 '미식 탐험을 위한 안내서'가 말해주는 것처럼 그는 맛을 창조해내는 쉐프로서, 또 맛을 탐미하는 미식가로서 그동안 쌓아올린 빛나는 체험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기적과도 같은 경험들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펜을 들었다. 고백하건대 책에 소개된 탁재형 PD의 예언(?) 처럼 나도 책을 읽은 후 참지 못하고 <르꼬숑>을 방문한 경험이 있다. 정상원 작가의 신작 출간 소식이 반가울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정상원 셰프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베테랑 셰프이면서도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탐구하는 사람이라는 걸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 문학에 관심이 많은 그는 기억의 도서관', '셰프의 아뜰리에' 등의 코스요리를 만들어내었고,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마들렌과 홍차를 모티브로 하는 메뉴도 개발하였다. 사실 본 작의 제목인 <글자들의 수프>도 그가 소설가 로맹가리를 오마주하여 만들어낸 요리의 이름이기도 하다. 요리재료인 오렌지와 단호박은 같은 노란색이지만 전혀 다른 맛과 무게감을 가진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를 상징한다.

 


"저자는 셰프로서 미학과 세계관, 인문주의를 관통해내는 최고의 도슨트다" - 변상욱 전 CBS 대기자 -

 


맛에 대해 탐구한 인류의 역사처럼 시대를 관통하는 고전 속에는 수많은 음식 이야기가 등장한다. <글자들의 수프>는 정상원 작가가 고전들에서 직접 길어올린 작가들의 음식에 대한 철학을 정상원 작가의 개인적 체험과 버무려서 독자들에게 감칠맛 나게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음식과 미학, 인문학을 집대성한 최고의 도슨트라는 변상욱 전 CBS 대기자의 평가에 고개가 끄떡여진다. 놀라웠던 건 문학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깊이였다. 토박이말에 대한 지식 뿐만 아니라 국내외 고전을 탐독한 세월의 깊이가 느껴졌다. 또한, 이를 토대로 한 문학적 표현들이 에세이에 잘 스며들어 있었다. 나름 문학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자부했던 나였지만, 김승옥 작가가 SF 소설을 썼다는 건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궁금해 하는 분들을 위해 잠시 소개하면, 소설의 제목은 <50년 후 디 파이 나인(D.π.9) 기자의 어느 날>이고, 자율주행 자동차 귀요미 19가 등장한다.)  정상원 작가의 차기작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그리고 작가와 음식과 문학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꼭 있었으면 좋겠다. ‘미칠 설렘과 못 미친 아쉬움은 오롯이 시작한 자의 몫이라는 정성원 작가의 말처럼 최고의 도슨트와 함께 맛에 대해 탐미하는 여행을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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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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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키건의 글은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색채가 선명한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맡겨진 소녀> p. 103, 옮긴이의 말 중에서)

 


허진 번역가는 국내 초역되는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 옮긴이의 말에서 그녀의 작품을 접한 소회를 밝혔다. 이는 인물들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 보다는 배경과 사물 등을 활용한 은유적 표현으로 간접적으로 전달하면서 독자들이 전반적인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도록 하는 그녀만의 문체가 잘 표현된 말이다. 번역가의 말이 인상 깊게 남아서 <맡겨진 소녀>를 읽고 내가 남긴 리뷰의 제목도 '사랑은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색채가 선명한 수채화와 같다.' 였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옮긴이의 글도 인상적이다. 여기에서 클레어 키건은 소설가 맥가헌의 '좋은 글은 전부 암시이고, 나쁜 글을 전부 진술'이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번역가에게 남긴 조언이 언급되고 있다.


"저는 좋은 이야기의 기준 가운데 하나는 독자가 이야기를 다 읽고 첫장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도입 부분이 전체 서사의 일부로 느껴지고 이 부분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그 뒤에 이어질 내용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p. 128, 옮긴이의 글 중에서)


클레어 키건은 '단 하나의 단어도 낭비하지 않는 작가'라는 수식어처럼 그리고자 하는 이미지를 표현하는 단어를 수없이 정제하고, 그렇게 함축적으로 표현한 시적인 표현들로 독자들과 대화하는 작가다. 클레어 키건은 국내에 소개된 지 불과 1년 만에 국내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가 되었다. 그녀의 소설은 2023년 출간된 지 열흘만에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고 소설가 50인이 꼽은 올해의 소설로 선정되었다. 국내 독자들에게 처음으로 선보인 <맡겨진 소녀>와 대표작 <이처럼 사소한 것들>, 국내에 소개된 것은 단 두 작품에 불과하지만 24년 상반기 서점가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소설이 되었다. (알라딘·YES24 소설 1위, 교보문고 소설 2위) 클레어 키건의 신간 <푸른 들판을 걷다>은 국내에 소개되는 그녀의 세번째 작품이자 처음으로 선보이는 소설집이다.


"난 사랑에 빠진 적이 없어요."

"내 마음이 아프려고 하네요."

"당신 마음은 이미 아프잖아요." (p. 226)


<푸른 들판을 걷다>는 저마다의 슬픔과 절망,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에 관한 7개의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성적으로 학대를 받던 소녀와 사랑이 결핍된 부부, 사랑 앞에 이기적인 연인, 아픈 과거를 딪고 새로운 삶을 찾는 이들이 등장한다.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인 만큼 7개 중 6개의 이야기가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녀의 초기 단편들로 현재가 아닌 20여년전에 쓰여진 이야기지만, '먼 훗날 고전으로 불리게 될 소설'이라는 소설가 최은영의 찬사처럼 클레어 키건의 단편들은 시공간에 구애 받지 않고 인간의 삶의 전형들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기만 하면 사제는 그녀의 손을 잡고 여기서 달아나리라. 적어도 사제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로 그것이 그녀가 한때 바라던 일이었지만 세상에서 두 사람이 같은 순간에 같은 것을 바라는 일은 거의 없다. 때로는 바로 그 점이 인간으로서 가장 힘든 부분이다." (p. 52)


일반화된 행복의 공식은 존재할 수 있을까?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읽으며 생각했다. 삶을 순간 단위로 미분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특정 시점에서 각자의 태도와 신념, 성향 등이 고려된 개인 마다 최적화된 행복의 공식은 존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특정 시점으로 한정한다고 하더라도 각자에게 주어진 수많은 특수한 상황과 변수들을 만족시키는 일반화된 행복의 공식은 존재할 수 없다. 더더군다나 미세한 순간적인 변화들이 누적된 삶의 적분값을 고려할 경우 즉, 순간순간의 경험들과 이러한 경험들로 인해 삶에 대한 가치관이 변하는 변곡점들을 모두 고려할 경우에는 일반화된 행복의 공식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저마다 행복을 바라보는 시각과 지향점이 다르고, 또 그 곳에 도달하기 위한 방안에 대한 선택도 다르기 때문이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행복을 바라보는 시각과 지향점, 선택도 상수가 아닌 변수로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행복은 혼자서 만들어갈 수 없다.


그렇다면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인생의 법칙이 존재할 수 있을까? 행복의 공식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인생의 법칙도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정답은 존재하지 않고,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른 상황에서 저마다의 인생의 답을 정의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일생을 단순하게 정의하자면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온 매 순간순간의 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일생은 생명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어 그 지난한 시간과 역사를 거치며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일상의 소소한 순간 순간들, 행복했던 추억과 고통스러운 기억 모두 현재 우리를 구성하는 일부가 된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어떤 일을 겪고 경험을 하든지 간에 그것을 현재 시점에서 어떻게 재생하고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행복한 기억 또는 뼈아픈 추억으로도 받아들 일수 있다.


“그녀 인생의 너무나 많은 부분이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p.. 126, '삼림 관리인의 딸')


기억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마법이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 고동치는 두번째 심장이기 때문이다. 과거 경험에 대한 기억은 사건의 잔상과 흔적, 진실의 파편 속에서 원형만이 남아 우리의 의식속에 누적된다. 그러한 기억의 원형들을 현재의 시점에서 되살려낼 때 우리 삶과 진실의 의미가 재구성된다. 우리가 어떤 일을 겪고 경험을 하든지 간에 그것을 현재의 시점에서 어떻게 재생하고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행복한 기억이 될수도, 뼈아픈 추억이 될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개인은 모더니스트 (Modernist)인 동시에 자기 자신의 역사가(His own historian)라고 할수 있다. 키건의 소설 속에서 완전한 사랑과 행복이라는 가치는 지나간 과거의 기억 속에서나 존재하거나, 잡히지 않는 미래의 이상향,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인생이란 채워도 채워도 부족한 것을 하염없이 채워가는 과정이 아닐까? 누구나 고통스럽고 불온했던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떠올리기 조차 힘겨운 그 순간을 겪어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 고통스럽고 불온했던 순간들을 사랑할 수는 없어도 그 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 자신이 있다는 걸 기억한다면 그 순간들에도 나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읽으며 깨닫고 위로를 받는다.


"그녀는 인간 혼자서는 스스로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랑을 나누는 행위 너머에 진짜 앎이 있다고 믿었다." (p. 61)


우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계획이나 구상을 ‘청사진 (Blue Print)’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미래를 그리는 행위는 특정 시점의 순간을 박제하는 사진 보다 그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사진을 찍는 행위가 순간의 단면을 정확히 스크랩하는 것이라면,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일정 시간에 걸쳐 대상을 관찰하면서 시간의 흐름에 걸쳐 변화하는 대상의 입체적 모습을 화폭에 담는 것이다. 따라서, 사진은 특정 시점에 국한된 대상의 모습을 무엇보다 정확히 포착하는 반면 그림은 일정 시간 동안의 대상의 변화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묘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사진이 아닌 그림을 지향하면서 신뢰와 사랑 그리고 책임이 동반된 관계를 그려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현실의 행복과 미래의 기적을 일궈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림 속 불분명한 선들로 이뤄진 한 사람의 형상 그리고 그가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구축하며 쌓아온 세월의 궤적은 사진 보다 불분명해 보일 수는 있어도 그 시간의 농축성을 기반으로 안정된 과거와 현재, 그리고 질서 너머의 미래 모습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덮고 난 후에도 깊은 감동의 여운이 남는다. 그리고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색채가 선명한 수채화'라는 허진 번역가의 클레어 키건의 문체에 대한 평가가 계속해서 뇌리를 맴돈다. 이 소설이 질서와 혼돈이 뒤섞인 세상에서 한줄기 절망의 해독제가 될 수 있을까? 그건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누군가에겐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할수 있는 건 책을 향한 수많은 찬사처럼 이 책은 당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에 유의미한 영향을 줄 것이고,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도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아니 이해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건네는 온기 어린 위로가 되어줄 것이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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