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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평점 :
"클레어 키건의 글은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색채가 선명한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맡겨진 소녀> p. 103, 옮긴이의 말 중에서)
허진 번역가는 국내 초역되는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 옮긴이의 말에서 그녀의 작품을 접한 소회를 밝혔다. 이는 인물들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 보다는 배경과 사물 등을 활용한 은유적 표현으로 간접적으로 전달하면서 독자들이 전반적인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도록 하는 그녀만의 문체가 잘 표현된 말이다. 번역가의 말이 인상 깊게 남아서 <맡겨진 소녀>를 읽고 내가 남긴 리뷰의 제목도 '사랑은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색채가 선명한 수채화와 같다.' 였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옮긴이의 글도 인상적이다. 여기에서 클레어 키건은 소설가 맥가헌의 '좋은 글은 전부 암시이고, 나쁜 글을 전부 진술'이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번역가에게 남긴 조언이 언급되고 있다.
"저는 좋은 이야기의 기준 가운데 하나는 독자가 이야기를 다 읽고 첫장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도입 부분이 전체 서사의 일부로 느껴지고 이 부분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그 뒤에 이어질 내용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p. 128, 옮긴이의 글 중에서)
클레어 키건은 '단 하나의 단어도 낭비하지 않는 작가'라는 수식어처럼 그리고자 하는 이미지를 표현하는 단어를 수없이 정제하고, 그렇게 함축적으로 표현한 시적인 표현들로 독자들과 대화하는 작가다. 클레어 키건은 국내에 소개된 지 불과 1년 만에 국내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가 되었다. 그녀의 소설은 2023년 출간된 지 열흘만에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고 소설가 50인이 꼽은 올해의 소설로 선정되었다. 국내 독자들에게 처음으로 선보인 <맡겨진 소녀>와 대표작 <이처럼 사소한 것들>, 국내에 소개된 것은 단 두 작품에 불과하지만 24년 상반기 서점가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소설이 되었다. (알라딘·YES24 소설 1위, 교보문고 소설 2위) 클레어 키건의 신간 <푸른 들판을 걷다>은 국내에 소개되는 그녀의 세번째 작품이자 처음으로 선보이는 소설집이다.
"난 사랑에 빠진 적이 없어요."
"내 마음이 아프려고 하네요."
"당신 마음은 이미 아프잖아요." (p. 226)
<푸른 들판을 걷다>는 저마다의 슬픔과 절망,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에 관한 7개의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성적으로 학대를 받던 소녀와 사랑이 결핍된 부부, 사랑 앞에 이기적인 연인, 아픈 과거를 딪고 새로운 삶을 찾는 이들이 등장한다.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인 만큼 7개 중 6개의 이야기가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녀의 초기 단편들로 현재가 아닌 20여년전에 쓰여진 이야기지만, '먼 훗날 고전으로 불리게 될 소설'이라는 소설가 최은영의 찬사처럼 클레어 키건의 단편들은 시공간에 구애 받지 않고 인간의 삶의 전형들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기만 하면 사제는 그녀의 손을 잡고 여기서 달아나리라. 적어도 사제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로 그것이 그녀가 한때 바라던 일이었지만 세상에서 두 사람이 같은 순간에 같은 것을 바라는 일은 거의 없다. 때로는 바로 그 점이 인간으로서 가장 힘든 부분이다." (p. 52)
일반화된 행복의 공식은 존재할 수 있을까?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읽으며 생각했다. 삶을 순간 단위로 미분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특정 시점에서 각자의 태도와 신념, 성향 등이 고려된 개인 마다 최적화된 행복의 공식은 존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특정 시점으로 한정한다고 하더라도 각자에게 주어진 수많은 특수한 상황과 변수들을 만족시키는 일반화된 행복의 공식은 존재할 수 없다. 더더군다나 미세한 순간적인 변화들이 누적된 삶의 적분값을 고려할 경우 즉, 순간순간의 경험들과 이러한 경험들로 인해 삶에 대한 가치관이 변하는 변곡점들을 모두 고려할 경우에는 일반화된 행복의 공식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저마다 행복을 바라보는 시각과 지향점이 다르고, 또 그 곳에 도달하기 위한 방안에 대한 선택도 다르기 때문이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행복을 바라보는 시각과 지향점, 선택도 상수가 아닌 변수로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행복은 혼자서 만들어갈 수 없다.
그렇다면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인생의 법칙이 존재할 수 있을까? 행복의 공식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인생의 법칙도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정답은 존재하지 않고,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른 상황에서 저마다의 인생의 답을 정의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일생을 단순하게 정의하자면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온 매 순간순간의 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일생은 생명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어 그 지난한 시간과 역사를 거치며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일상의 소소한 순간 순간들, 행복했던 추억과 고통스러운 기억 모두 현재 우리를 구성하는 일부가 된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어떤 일을 겪고 경험을 하든지 간에 그것을 현재 시점에서 어떻게 재생하고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행복한 기억 또는 뼈아픈 추억으로도 받아들 일수 있다.
“그녀 인생의 너무나 많은 부분이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p.. 126, '삼림 관리인의 딸')
기억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마법이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 고동치는 두번째 심장이기 때문이다. 과거 경험에 대한 기억은 사건의 잔상과 흔적, 진실의 파편 속에서 원형만이 남아 우리의 의식속에 누적된다. 그러한 기억의 원형들을 현재의 시점에서 되살려낼 때 우리 삶과 진실의 의미가 재구성된다. 우리가 어떤 일을 겪고 경험을 하든지 간에 그것을 현재의 시점에서 어떻게 재생하고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행복한 기억이 될수도, 뼈아픈 추억이 될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개인은 모더니스트 (Modernist)인 동시에 자기 자신의 역사가(His own historian)라고 할수 있다. 키건의 소설 속에서 완전한 사랑과 행복이라는 가치는 지나간 과거의 기억 속에서나 존재하거나, 잡히지 않는 미래의 이상향,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인생이란 채워도 채워도 부족한 것을 하염없이 채워가는 과정이 아닐까? 누구나 고통스럽고 불온했던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떠올리기 조차 힘겨운 그 순간을 겪어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 고통스럽고 불온했던 순간들을 사랑할 수는 없어도 그 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 자신이 있다는 걸 기억한다면 그 순간들에도 나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읽으며 깨닫고 위로를 받는다.
"그녀는 인간 혼자서는 스스로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랑을 나누는 행위 너머에 진짜 앎이 있다고 믿었다." (p. 61)
우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계획이나 구상을 ‘청사진 (Blue Print)’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미래를 그리는 행위는 특정 시점의 순간을 박제하는 사진 보다 그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사진을 찍는 행위가 순간의 단면을 정확히 스크랩하는 것이라면,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일정 시간에 걸쳐 대상을 관찰하면서 시간의 흐름에 걸쳐 변화하는 대상의 입체적 모습을 화폭에 담는 것이다. 따라서, 사진은 특정 시점에 국한된 대상의 모습을 무엇보다 정확히 포착하는 반면 그림은 일정 시간 동안의 대상의 변화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묘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사진이 아닌 그림을 지향하면서 신뢰와 사랑 그리고 책임이 동반된 관계를 그려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현실의 행복과 미래의 기적을 일궈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림 속 불분명한 선들로 이뤄진 한 사람의 형상 그리고 그가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구축하며 쌓아온 세월의 궤적은 사진 보다 불분명해 보일 수는 있어도 그 시간의 농축성을 기반으로 안정된 과거와 현재, 그리고 질서 너머의 미래 모습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덮고 난 후에도 깊은 감동의 여운이 남는다. 그리고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색채가 선명한 수채화'라는 허진 번역가의 클레어 키건의 문체에 대한 평가가 계속해서 뇌리를 맴돈다. 이 소설이 질서와 혼돈이 뒤섞인 세상에서 한줄기 절망의 해독제가 될 수 있을까? 그건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누군가에겐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할수 있는 건 책을 향한 수많은 찬사처럼 이 책은 당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에 유의미한 영향을 줄 것이고,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도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아니 이해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건네는 온기 어린 위로가 되어줄 것이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