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키 키린 - 그녀가 남긴 120가지 말 키키 키린의 말과 편지
키키 키린 지음, 현선 옮김 / 항해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책을 읽으면서 기억력이 좋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별로 없는데 '키키 키린, 그녀가 남긴 120가지의 말'에선 분명했다.

밑줄 긋고 싶지만 전체 페이지를 닳게 할까 선뜻하지 못하겠는 마음. 귀한 음식을 꼭꼭 씹어 천천히 음미하듯 문장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고 싶은 마음 말이다.

사실 키키 키린의 방송, 광고 등의 출연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관심 있는 몇몇 일본 영화에서 자연스러운 연기가 돋보인 배우였고, 눈동자에서 보인 알 수 없는 어떤 분위기에 반한 배우 정도랄까? 그래서 처음에 이 분의 책이 나온다고 했을 땐 유명한 배우여서 책도 쓰시는구나 싶어 별 관심이 없다가 포털 사이트에서 소개된 몇 문장에 반해 그녀가 남긴 120가지의 말을 다 들어 보고 싶었다.

로큰롤에 심취한 남편과 45년 결혼 생활 중 43년을 별거하면서 깨달은 부부에 대한 이야기, 인생과 행복에 대한 솔직한 감정, 일과 책임에 대한 소신, 암 투병 시 깨달은 삶과 죽음의 이야기까지, 길지 않은 짧은 물음과 대답 속에 그녀의 생활 철학이 드러난다. 거창하고 화려하지 않은 문맥 속에서 잘근잘근 본인이 직접 머리와 몸으로 깨우친 담담한 이야기가 지금의 청년들에게 꼭 필요한 이유다.

키키 키린, 그녀가 남긴 120가지의 말이라고 하면 얼마나 말이 많을까 싶지만 막상 책을 펼치면 텔레비전, 신문, 잡지 등에서 남긴 짧은 메모 형식의 말을 엄선한 것이기 때문에 알맹이 중의 알맹이만 읽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하루에 다 읽기엔 생각할 거리가 많은 이야기여서 괜찮다면 하루에 몇 가지의 문장을 읽고 나머지는 본인의 상황에 빗대어 생각이란 걸 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내 생각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그게 '의존증'이라는 겁니다. 스스로 생각하세요" (책 구절 中)

제일 좋은 건 매일의 뽑기 운세처럼 지치고 힘든 하루를 지켜줄 든든한 문장을 뽑는 것처럼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는 것이다. 마치 포춘 쿠키의 말처럼 어떤 말이든 내 상황에 적절히 녹아들지도 모른다.

그녀가 남긴 120가지의 말에서 키키 키린은 굉장히 불안하고 자유분방한 젊은 시절을 보낸 뒤 점점 나이를 먹어가며 차분하고 담담한 태도로 인생을 마무리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막연하게 올곧기만 한 도덕 선생님 같은 그저 그런 말이 아니라 놀 것 다 놀아 보고 실컷 방황하면서 깨우친 사람의 알찬 말이다. 우리에게 더 가깝고 깊게 들리는 이유다.

[에세이] 키키 키린, 그녀가 남긴 120가지의 말 中

- 사람이 뭔가를 품는 데는 한계가 있어서 그것보다 더 가지려고 해도 가질 수 없어요.

- 실패하면, 실패한 데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요. 지금도 봐요. 여기 옷이 해졌잖아요. 그럼 헤진 데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 딱히 대단한 아이디어도 아니에요. 내가 가진 걸로 어떻게든 해나가는 거죠.

- 가능한 한 나를 일상적인 상황에 두려고 합니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지 않으면 삶 속에서 성장하기 어렵고, 당연히 생활 감각도 잘 모르게 됩니다.

- 인생이 모두 필연이듯 내 암도 분명 필연이라고 생각합니다.

-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성숙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늙으며 죽어가는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주려고 해요. 자식, 손자들한테도 해요. 그러면 죽음이 무섭지 않게 됩니다. 또 사람을 귀히 여기게 되죠.

정말 이것 외에도 좋은 문장이 너무 많지만 다 옮겨 적을 수 없고, 또 종이 위 글자를 조용히 읽으며 느끼는 바가 더 크기 때문에 다들 직접 읽어 보시라 필사를 멈춘다.

한때는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혼란된 자아를 주체하지 못했지만 그보다 더 영혼이 복잡한 남편을 만나 그 사람을 무게 추처럼 여기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를 잘 중심 잡으며 살았다는 키키 키린.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왕이면 삶을 즐겁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려 했던 그녀의 노력과 태도가 확연히 보이는 대목이다. 살아가는 삶 속에서 성숙해가며 마지막을 향해 걸어갔던 그녀의 발걸음이 당당한 이유도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했던 의지가 충분했기 때문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이 듦의 심리학 - 비로소 알게 되는 인생의 기쁨
가야마 리카 지음, 조찬희 옮김 / 수카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나이 듦의 심리학. 이런 책 종류는 서점에 가면 참 많다. 꼼꼼하게 읽지 않아도 어떤 분위기에 무슨 내용이 있을지 짐작되지만 그래도 끌리는 이유는 내가 서른 중반인 때문일까. 언제부터인지 나이를 잘 먹고 싶단 생각을 한다.

 

이왕이면 곱고 차분하게 늙고 싶은데 그럴려면 경제적 기반도 있어야 할 것 같고 주위에 마음 터 놓을 친구도 있어야 할 것 같고, 건강도 잘 관리해서 내 고관절로 이곳저곳 돌아 다니고 싶다. 일단 건강하게 나이를 먹으려면 신체 관리도 중요하지만 마음, 내가 늙어감을 인정하는 태도도 중요하다.

 

나이 듦의 심리학에서는 작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가야마 리카가 환자들을 치료한 사례를 적으면서 다양한 주제로 자신의 생각을 펼친다. 목차를 보면 그 주제가 꽤나 다양한데 신선한 것도 있다.

 

이를테면 [성희롱에 정년은 없다] [혼자서 살아간다] [부모 돌보는데에 너무 몰두하지 마라] 가 내가 곱씹으며 좀 더 집중하게 된 이야기다. 나 또한 중년의 성을 간과했다. 아줌마라서  멋진 연하남이 슬쩍 어깨동무를 해도 좋아한다? 아줌마한테 해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왜 화를 내?

 

은근히 이런 풍토가 깔려 있는 제3의 성이라고 불리는 아줌마. 중년 여성. 정말로 중년의 성은 희롱으로부터 아무렇지 않을까?나부터 반성을 해야 할 것 같다. 성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유로우면서도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기에 이건 아니다 싶으면 중년도 당당히 소리쳐야 한다. "내 몸을 건들지 마시오!"

 

비혼인 작가는 아이 없는 삶에 대한 이러쿵 저러쿵 간섭을 꽤나 받아 왔다. 무려 40대까지도 충분히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니 말 다했지.. 50대가 되서야 비로소 그 질문에 자유로워졌고 스스로 조급했던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한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와 일본은 정서가 비슷해 아이에 대한 시선도 크게 다르지 않을거다. 결혼은 했냐, 아이는 없냐, 왜 안 낳냐, 그래도 하나는 있어야지, 아직 늦지 않았다....

 

사회 문제로도 대두되는 임신과 출산은 그래도 엄연히 사적 영역이다. 부부가 함께 결정할 일이지 사회에서, 주변에서 들들 볶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적어도 아이 키우기 좋은 나라만 되면이야 더할나위 없겠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100쌍의 부부가 모두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님이 사실이다. 작가는 이 점을 꽤 진지하게 다루지만 역시 시간이 해결임을 말한다.

 

주위에서 물어 보면 아주 타당하게 맞받아 치고 싶지만 그럴수록 옆 사람은 더 측은하게 바라볼뿐. 인생은 흑백으로 나뉘는게 아니라서 아이 있는 삶도 나름 행복하고 없는 삶도 충분하다. 그러니 비혼으로 늙어 간다면 현실적인 방안을 마련하는게 제일 현명하다고 조언한다. 요양원을 알아 본다든가, 지역 사회 커뮤니티를 찾아보는 등 우리가 50~60대가 되면 예전과 다른 미혼/비혼 공동체가 분명히 만들어질 것이니 적절하게 활용하면 된다. 또한 나의 장례식이나 무덤은 어떻게 할 것인지 처리해 놓는다면 더욱 좋겠지.

 

100세 시대가 어색하지 않을만큼 70세 자식이 구순의 노인을 수발하는 일이 흔하다. 자연스러운 세대 교체가 더뎌지기 때문인데 이때 거리 두기가 실로 중요하다고 전한다. 일단 내가 건강하고 마음이 편해야 부모님을 잘 간병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특히 치매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면 정신적 부담을 해소할 무언가가 더 필요함을 인지한다. 

 

너무 혼자서 감당하려 하지 말고 시스템, 커뮤니티를 적극 활용하고 본인이 즐겁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에 죄책감을 갖지 말자. 어느 부모님이든 자신 때문에 자식이 힘든건 원치 않으실테니까.

 

실로 현실적인 책이었다. 실제 사례 상담이 내 고민과 다를 바가 없기도 하고, 그에 대해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도 완벽하기 보단 인간적이어서 좋았다. 작가는 56세가 되고 나서 마음뿐 아니라 몸도 고칠 수 있는 의사가 되기 위해 종합진료과에서 수련을 시작했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배우는데 물러서지 않고 용기를 냈더니 젊었을 때와는 또 다른 설렘과 기쁨이 있다고 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서 노년으로 가는 기차 속도도 똑같을거다. 유한한 시간을 직면하고 내게 주어진 것들을 열심히 해내다 보면 그 안의 희노애락을 모두 사랑할 수 있겠지. 마음이 점점 더 너그러워지고 여유있는 중년과 노년을 보낼 수 있기를..!

 

나이 듦의 심리학 밑줄 친 문장-

 

· 정년 후에 어떤 일이 생기든 와르르 무너지지 않도록 '나는 나'라며 본인 스스로를 꽉 붙들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성희롱에 정년은 없다.

 

· 막연히 상상했던 내 인생과 너무 달라서 가끔 이렇게 살아도 될까 싶은 생각이 들고 이렇게 50대가 되는 건가 싶어서 초조해졌다. 그런데 쉰 살이 된 순간,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마음이 가뿐해졌다. 지금의 이 상쾌한 느낌이 계속 됐으면 좋겠다.

 

· 나이가 들어도 지금같은 호사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너무 외롭지 않은 곳에 살면서 아주 가끔 문화생활을 즐기는 것, 그저 그게 원하는 전부다.

 

·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자신의 몸 상태에 연연하기보다는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음식, 만나고 싶은 사람에게 관심을 둬야 하지 않을까.

 

· 어떻게든 본인의 숨통을 틔우는 것이 중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 다산책방 청소년문학 3
스즈키 루리카 지음, 이소담 옮김 / 놀(다산북스)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

사실 제목만 봐서는 진부하고 따분한 엄마와 딸 이야기가 아닐지 싶었다.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다가 어떤 계기로 서로를 알아가는 뭐 그런 이야기쯤?

제목이 이 책의 진가를 너무 쉽게 평가할 것 같아 속상한 소설은 오랜만이다. 그만큼 웃기고 재밌고, 또 슬쩍 감동도 있다.

 

현재 만 열다섯 살 소녀가 이 책의 작가인데 천재 소설가라는 수식이 붙는 이 소녀의 책은 읽는 내내 '정말 학생이 쓴 거라고?' 의심을 들게 한다.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 책의) 화자 딸 다나카 하나미는 남편, 가족, 친인척 하나 없이 막노동으로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엄마 다나카 마치코와 둘이 산다. 여기서 포인트는 '가난'이다. 삶을 힘들고 어둡게 만드는 가난. 하지만 이 모녀가 이 가난을 대하는 방식은 굉장히 색다르다.

반값 세일에서 얻은 과일을 행복하게 챙겨 먹고, 비싼 놀이동산에 가고 싶은 하나미는 엄마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자판기 아래 동전을 줍는다. 대단한 식성을 지녀 밥이면 모든 것이 오케이인 엄마. 그런 엄마를 대하는 딸은 가감 없이 솔직하고 직관적으로 엄마를 사랑한다. 서로 사랑하는 방법이 좋다. 가난을 핑계로 미안해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둘. 없으면 없는 대로, 어쩌다 행운이 생기면 그것대로 행복하게 여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도 참 행복했다. 가난은 죄도 아니고 불편함도 아닌 아무것도 아니었으므로.

여러 에피소드가 있는데 대체로 유머러스하다. 몇 년 만에 책 읽으면서 실소를 터트렸는지.. 과연 학생다운 솔직함이 내숭 없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 같다.

아빠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 궁금해하는 딸. 그런 딸에게 옆집 아저씨의 옛날 사진을 갖다 주며 아빠라고 말하는 엄마. (금방 들통난다)

어린 여자아이가 수영을 하면 위험하단 말에 남자 수영복을 입혀 놀게 하는 엄마. (특이해..)

가끔이 철딱서니 없어 보이는 듯 보여도 갑자기 유식한 문장을 말하는 엄마.

예전 꿈이 닷짱이었다고 말하는 말하는 엄마 (닷짱: 절에서 잡일을 하며 그 몫으로 절에서 머무르는 사람으로 성묘에 바치는 모든 음식을 맘껏 먹을 수 있어서 꿈이었다는..)

툭툭 튀어나오는 엄마의 성격을 드러내는 문장은 어이가 없다가도 그럴 수도 있지 뭐 생각하게 한다. 꼭 꿈이 거창해야 할 이유는 없고, 진실을 밝혀야 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마치코는 공사 현장에서 여자로서는 혼자 일하는데, 정직한 노동으로 밥 벌어먹고사는 고단함이 언뜻 느껴지기도 하지만 유쾌한 생각과 단단한 태도로 딸과 살아가는 모습이 멋있다. 바로 이 책이 힘을 내는 지점이다. 현실이 단순하면 행복은 멀지 않다는 것.

딸의 시선에서 묘사되는 엄마의 여러 면모는 잘 들여다볼수록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어떤 남자와 사랑을 해서 자식을 낳고 살아왔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딸을 사랑하는 마음 가득 담아 이름을 지어주며 현재를 즐겁고 충실하게 살기 바라는 마음에서 곧음이 느껴진다.

아래 밑줄 그은 문장은 책을 관통하는 주제이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삶에 대한 성찰이다.

오랜만에 에세이가 아닌 소설로 묵직한 이야기를 만났다. 환상과 기대, 드라마 따위 반전 결말은 없지만 왠지 우리 옆에 있을 것만 같은 사람의 묵직한 이야기로 힘을 얻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 중에서

-

예전에 엄마랑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뭐가 좋을지 얘기한 적이 있다. 부자가 좋다고 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벌레가 좋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먹고 배설하고 그냥 사는 거야. 삶의 보람이니 의무니 과거니 장래니 일이니 돈이니 하는 것과 관계없이 단순하게 살다가 죽는 게 좋겠어"

그래도 같이 살다 보니 소소한 부분에서 언뜻 보이는 것이 있다. 우선 먹을 것에 한해서는 먹보나 식탐 수준을 넘어 이상할 정도로 집착이 강하다. 엄마를 보고 있으면 먹는 게 곧 사는 것이라고 절절하게 느낀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아무리 절망적이고 최악의 상황이라도 그 사람 나름의 희망이 있으니까 살아가는 것 아닐까? 비록 바늘 끝처럼 보잘것없는 희망이라도, 희미한 빛이라도, 환상이라도, 그게 있으면 어떻게든 매달려서 살 수 있어.

슬플 때는 배가 고프면 더 슬퍼져. 괴로워지지. 그럴 때는 밥을 먹어. 혹시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슬픈 일이 생기면 일단 밥을 먹으렴. 한 끼를 먹었으면 그 한 끼 만큼 살아. 또 배가 고파지면 또 한 끼를 먹고 그 한 끼만큼 사는 거야. 그렇게 어떻게든 견디면서 삶을 이어가는 거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최혜진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집은 방과 달라서 내 손길과 발길이 수없이 닿아야 하고, 눈길이 가야 해요. 그런 시간 끝에 집과 나 사이에 어떤 길이 생겨서 '내 집'이라는 감각이 생기는 거죠... 저는 집안일이라는 반복적 행위가 삶의 비트를 이룬다고 믿어요. 내 삶에 음악성을 부여하는 근간인거죠. 지겨울 때도 있죠. 하지만 손끝으로 느끼는 단단하고 구체적인 생의 감각은 살림으로부터 와요.
 
거대한 대의와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인 세계의 집, 밥, 일상을 몸으로 그려낸 그들의 작품이 좋으면서, 동시에 이런 일상성에 대한 찬양이 또 다른 억압의 빌미가 될까 두렵기도 하다. 일상 속 작은 행복에 기뻐하는 자세에 열광하면서, 그 작은 행복을 가꾸는 손이 누구의 것인지 분명히 드러내지 않는 건 온당치 않다.

(책 속 밑줄 그은 문장들)


작가님의 북콘서트도 다녀오고 이런저런 다른 리뷰들도 많이 찾아 보았지만 역시 타인과 내가 밑줄 그은 문장들은 다르다. 주부의 속성을 떼어 놓고 책을 볼 수 없는지라 위의 문장에 눈길이 특히 머문다. 가사 노동의 희미함을 그림과 문장으로 뚜렷하게 내어 놓은 것. 혼자 살림을 도맡아 하노라면 외롭고 불안한 마음도 든다. 그럴 땐 타인의 살림살이를 바라보는게 위안이 될때가 있는데 북유럽 그림에서 진정성이 느껴질줄은 몰랐다. 어딘가 안갯속을 헤매는 듯한 터치감에서 보이는 그들의 덤덤하고 담담한 일상.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그림의 분위기가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잘 아문듯 하다. 너무 화려하지도, 또 너무 가난하지도 않은 소박한 표정과 몸짓. 그들에게서 팍팍한 가사 노동을 위로 받았음은 물론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살아가는 것일지 방향도 얻은 것 같다. 
책을 읽고 꿈이 생겼다면 나도 직접 북유럽 미술관에 가서 그림이 주는 기운을 몸으로 직접 받고 싶달까. 
일상과 가깝게 연결된 북유럽에 대한 책, 반가웠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 참 쓸모 있는 인간 - 오늘도 살아가는 당신에게 『토지』가 건네는 말
김연숙 지음 / 천년의상상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디선가 글쓰기 모임 하는 곳이 만든 주제가 '내가 되고 싶은 책'이라고 한다.
딱 읽고 무릎을 탁 쳤다. 주제가 너무 멋있어서다. 내가 되고 싶은 책이라니.. 읽고 싶은 책보다 훨씬 능동적이고 실천적인 책 읽기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요 근래 몇 권의 책이 생각났다. 그중 하나가 '나, 참 쓸모 있는 인간'이란 책인데 최근 포털 사이트에서 요즘 방영 중인 '미스터 선샤인'과 '토지'의 비슷한 점을 이야기해 놓은 걸 본 적이 있다. 바로 이 책이 토지에 나오는 인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하기 때문. 사실 '새롭게'라는 말은 나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일지도 모르겠다. 부끄럽지만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는 3권쯤 읽다가 포기한 게 여태 이어지고 있고, 어렸을 때 tv로 본 토지만이 조금씩 생각날 뿐이다. 그런데 요즘, 케이블에서 예전의 그 토지를 방영해 주니 책을 읽으면서 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서희와 길상이만 있는 줄 알았던 어린 나의 시각이 넓어져 이제는 주인공 옆 주변인들의 이야기가 더욱 실재감 있게 다가온다.
망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자신의 하인과 결혼도 불사할 만큼 독하게 여겼던 서희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 보니 무당의 딸 첫사랑 월선이를 평생 마음에 품고도 조강지처와 첩에게 휘둘리며 사는 용이, 서희 집안의 재산을 가로채는 조준구의 아들 꼽추 조병수, 박경리 작가님이 토지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로 꼽은 주갑이의 삶은 퇴근 후 지하철에서 읽는 포도당 영양제 같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물론 '나, 참 쓸모 있는 인간'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하나같이 다 반짝이는 바람 같은 인생을 살고 있어서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에서 굉장히 큰 힘과 위로가 되고 있다.

-
'토지'라는 말을 쓴다는 것은 인간의 '소유' 즉 인간이 지닌 욕망, 감정, 관계, 판단, 선택 등등에 얽힌 인간 삶에 주목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연과 같은 순수한 마음이나 인간 존재의 본성보다는 욕망이 들끓고 있다든가 그것 때문에 서로 경쟁하고 싸우고 죽인다든가 하는 세상만사를 통해 인간의 삶을 이야기해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토지'라는 제목에 담긴 뜻입니다.
-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순수와 욕망을 양쪽으로 굴리며 살아간다. 어떤 것을 우선순위에 두고 가치있게 쓸 것인가는 각자 판단하는 몫이고 행동해야 하는 책임감인데 토지에 나오는 인물은 워낙 방대하고 선택하는 삶 또한 다양해서 여러 면을 교훈으로 삼기 적당하다. 그래서 내가 되고 싶은 책에 뽑히기도 했고.


-조병수-

탐욕스러운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지만 천성은 착한 꼽추 조병수. 선천적인 결함 때문에 자신이 따르고 싶지 않은 부모님을 거역하기 힘들고, 죽으려 강가에 뛰어들어보기도 하지만 살겠다고 나온 자신을 원망할 줄 아는 사내.

"부모의 악업으로 얻은 재물로 자신이 연명되고 있다는 그 뼈를 깎는 고통, 더러운 곡식을 아니 먹으려고 수없이 기도했던 자살, 그러나 생명에의 집착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포기하였고 더러운 물 더러운 곡기를 미친 듯 빨아 당기는 자신의 모습 앞에서 '병수는 죽지 못하는 치욕 때문에 미쳐버릴 지경으로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삶 속에서 조병수에게 배울 수 있는 건 '양심 있는 사람'일 수 있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이 끌린 건 자신의 삶을 바꾼 능동적인 힘이다. 부모가 도망가면서 조병수를 버리다시피 한 덕분에 홀로 설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졌고 목수라는 직업은 '자기 구원의 길'이 되어 나무를 만지며 예술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 과정에서 그의 삶이 단단하게 바뀌었다.

"예술을 한다는 건 단지 무언가를 표현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표현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만나고, 자기 삶을 변환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조병수는 부모의 죄 때문에 자신이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임으로써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낼 수 있게 되고 운명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토대로 삶을 탄탄하게 쌓는다. 결국 조병수는 이제서라도 인생을 제대로 걷는다고 볼 수 있으니 어찌 안 반할 수 있겠나.


-용이-

하... 용이는 참 뭐라고 할 수 없는 참 답답하고도, 내 남편이면 정말 용서할 수 없는 남자이기도 한.. 하.....
tv 드라마에서는 박상원 배우님이 연기를 하시는데 정말 보면서 복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하필 내가 처음 본 에피소드가 용이 조강지처 강청댁이 콜레라에 걸려 죽는데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첩이 용이 아들을 낳는다. 죽어가는 부인 곁을 떠나 첩의 아이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강청댁은 너무 억울하고 슬픈 나머지 기어이 마당까지 기어 나와 죽음을 맞이하는데...쓰면서도 참 우울하고 사람 인생이 다 뭔가 싶다. 용이를 너무 사랑한 죄밖에 없는 강청댁의 삶이 참으로 허무하고 허망할 뿐.

어쨌든 내가 여기서 다룰 이야기는 그래도 흘러가는 용이의 인생이다. 용이라고 뭐 이렇게 인생이 꼬이고 싶어 그랬겠냐마는 '나, 참 쓸모 있는 인간'에서 용이는 부끄러움을 안고 사는 사람으로 비춰진다.

"용이가 괴로워하는 부분, 자기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을 그냥 '살아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용이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토해내는 모습에 눈길이 끌렸습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용이는 타인의 시선 안에 점점 움츠러들고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었다. 거기다 가난은 남자로서의 용이 자존심도 꺾게 만들어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그저 두 여자와 아들 홍이에게 끌려다니기만 한 삶뿐이었다. 그나마 간도에서 월선이와 홍이를 두고 욕심 많은 임이네를 데려와 멀리 떨어져 사는 일이 월선이를 위한 일이었는데, 어떻게 보면 임이네에겐 못할 짓인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개척하기 위한 특별한 일도 아닌 것 같아 시시한 건 사실이지만 유일한 사랑인 월선이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부끄러움, 그것이 용이로 하여금 묵묵히 자기 삶의 무게를 견디어나가게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용이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데서 머무르지 않고, 그로부터 자신을 바라다보고, 자기 삶의 무게를 견디어 나갑니다. 사람이 마지막으로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을 견디어낸다, 지금의 삶, 그때그때,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이 인간이 가진 대단한 힘일 수 있음을 용이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내심은 바닥을 치고 참으면 사람을 우습게 보는 이 시대에서 ‘무엇을 견디어낸다는 일’은 참 어리석어 보여도 결국은 우리가 지켜야 할 마지막 무언가 같은 거다. 부끄러움으로 그치지 않고 거리를 둬서 그 부끄러움을 인정하고 견뎌낼 수 있으면 어느 정도 직장 생활은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들고, 직장인뿐 아니라 자영업자, 주부, 노동자, 근로자 등 모든 일선에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용이의 꾸역꾸역 살아가는 힘은 위로가 되기도 하겠지.


-주갑-

사실 주갑은 이 책 '나, 참 쓸모 있는 사람'에서 알게 됐다. 간도에서 동학운동을 했던 주갑이는 자신의 삶을 떳떳하게 걷는 모습을 보여준다. 긍정적이고 확신에 찬 사람, 무슨 일을 하든 계산적으로 재지 않고 따지지 않을뿐더러 작가의 말에 따르자면 거침없이 활발한 사람.

"빨래는 여자가 한다, 남자는 이래야 한다 등등에 대해 주갑이는 자신이 필요하면 하는 일이고, 내가 뭘 하든지 아무 거리낌이 없는 사람입니다. 공부하는 것은 하늘과 땅, 철기(계절) 같은 자연에서 체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얽매인 생각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옳다고 생각하는 일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드는 멋진 사내 주갑. 미안하지만 용이와 비교하자면 참으로 호방하고 쾌활하여 복잡한 상황을 애초에 만들지 않고 단순하고 깔끔하게 인생을 자로 자르듯 사는 것 같다.

"'안 배워도 독립운동하고, 일자무식이어도 나는 동학운동했다'라는 주갑이의 말을 다시 떠올려봅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주갑이라는 사람은 자기 삶을 그냥 살아갑니다. 그냥 살아간다는 것은 행위 그 자체의 온전함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나가는 것 자체, 실천한다는 것 자체가 삶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얼마나 간단 명료한 삶일까. 요즘 말하는 '미니멀 라이프' '단순한 삶'과 일맥상통 할지도 모르겠다. 옳다고 믿는 나의 신념을 의심하지 않고 한 길로 걸을 수 있다는 건 내 삶의 주체가 누구인지 바로 알고 가는 것과 같으니 복잡할 일이 없다.

아무리 내 인생이 쓰레기 같다고 느껴져도 어쨌든 내 것이니 품을 이도 나밖에 없다는 걸 묵직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책이다.

작은 사무실에서도 온갖 인간군상을 만나 관계를 맺는다. 누구에겐 후배로, 또 누구에겐 동료로 인정받으며, 상대방에 따라 달라지는 나의 모습, 대화 내용, 분위기를 고려하고 결국은 나의 가치관이 그곳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으면 한다. 또한 매일 움직이고 있는 내 발걸음에도 확신이 찰 수 있길 바란다.

서희같이 입체적 인물도 흥미롭지만 이번 책을 읽으며 좋았던 점은 평면적으로 보일지언정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살아가는 평사리 사람들이 내게 더 인생의 영감을 주었단 점이다. 때로, 아니 대체적으로 역사는 잔다르크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꾸역꾸역 이어오기 마련이므로.


“토지는 그저 관계 속에서 어떤 흐름이 이어지는지를 보여줄뿐입니다.”

<나, 참 쓸모 있는 인간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