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참 쓸모 있는 인간 - 오늘도 살아가는 당신에게 『토지』가 건네는 말
김연숙 지음 / 천년의상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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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글쓰기 모임 하는 곳이 만든 주제가 '내가 되고 싶은 책'이라고 한다.
딱 읽고 무릎을 탁 쳤다. 주제가 너무 멋있어서다. 내가 되고 싶은 책이라니.. 읽고 싶은 책보다 훨씬 능동적이고 실천적인 책 읽기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요 근래 몇 권의 책이 생각났다. 그중 하나가 '나, 참 쓸모 있는 인간'이란 책인데 최근 포털 사이트에서 요즘 방영 중인 '미스터 선샤인'과 '토지'의 비슷한 점을 이야기해 놓은 걸 본 적이 있다. 바로 이 책이 토지에 나오는 인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하기 때문. 사실 '새롭게'라는 말은 나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일지도 모르겠다. 부끄럽지만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는 3권쯤 읽다가 포기한 게 여태 이어지고 있고, 어렸을 때 tv로 본 토지만이 조금씩 생각날 뿐이다. 그런데 요즘, 케이블에서 예전의 그 토지를 방영해 주니 책을 읽으면서 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서희와 길상이만 있는 줄 알았던 어린 나의 시각이 넓어져 이제는 주인공 옆 주변인들의 이야기가 더욱 실재감 있게 다가온다.
망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자신의 하인과 결혼도 불사할 만큼 독하게 여겼던 서희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 보니 무당의 딸 첫사랑 월선이를 평생 마음에 품고도 조강지처와 첩에게 휘둘리며 사는 용이, 서희 집안의 재산을 가로채는 조준구의 아들 꼽추 조병수, 박경리 작가님이 토지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로 꼽은 주갑이의 삶은 퇴근 후 지하철에서 읽는 포도당 영양제 같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물론 '나, 참 쓸모 있는 인간'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하나같이 다 반짝이는 바람 같은 인생을 살고 있어서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에서 굉장히 큰 힘과 위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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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라는 말을 쓴다는 것은 인간의 '소유' 즉 인간이 지닌 욕망, 감정, 관계, 판단, 선택 등등에 얽힌 인간 삶에 주목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연과 같은 순수한 마음이나 인간 존재의 본성보다는 욕망이 들끓고 있다든가 그것 때문에 서로 경쟁하고 싸우고 죽인다든가 하는 세상만사를 통해 인간의 삶을 이야기해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토지'라는 제목에 담긴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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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순수와 욕망을 양쪽으로 굴리며 살아간다. 어떤 것을 우선순위에 두고 가치있게 쓸 것인가는 각자 판단하는 몫이고 행동해야 하는 책임감인데 토지에 나오는 인물은 워낙 방대하고 선택하는 삶 또한 다양해서 여러 면을 교훈으로 삼기 적당하다. 그래서 내가 되고 싶은 책에 뽑히기도 했고.


-조병수-

탐욕스러운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지만 천성은 착한 꼽추 조병수. 선천적인 결함 때문에 자신이 따르고 싶지 않은 부모님을 거역하기 힘들고, 죽으려 강가에 뛰어들어보기도 하지만 살겠다고 나온 자신을 원망할 줄 아는 사내.

"부모의 악업으로 얻은 재물로 자신이 연명되고 있다는 그 뼈를 깎는 고통, 더러운 곡식을 아니 먹으려고 수없이 기도했던 자살, 그러나 생명에의 집착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포기하였고 더러운 물 더러운 곡기를 미친 듯 빨아 당기는 자신의 모습 앞에서 '병수는 죽지 못하는 치욕 때문에 미쳐버릴 지경으로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삶 속에서 조병수에게 배울 수 있는 건 '양심 있는 사람'일 수 있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이 끌린 건 자신의 삶을 바꾼 능동적인 힘이다. 부모가 도망가면서 조병수를 버리다시피 한 덕분에 홀로 설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졌고 목수라는 직업은 '자기 구원의 길'이 되어 나무를 만지며 예술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 과정에서 그의 삶이 단단하게 바뀌었다.

"예술을 한다는 건 단지 무언가를 표현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표현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만나고, 자기 삶을 변환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조병수는 부모의 죄 때문에 자신이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임으로써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낼 수 있게 되고 운명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토대로 삶을 탄탄하게 쌓는다. 결국 조병수는 이제서라도 인생을 제대로 걷는다고 볼 수 있으니 어찌 안 반할 수 있겠나.


-용이-

하... 용이는 참 뭐라고 할 수 없는 참 답답하고도, 내 남편이면 정말 용서할 수 없는 남자이기도 한.. 하.....
tv 드라마에서는 박상원 배우님이 연기를 하시는데 정말 보면서 복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하필 내가 처음 본 에피소드가 용이 조강지처 강청댁이 콜레라에 걸려 죽는데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첩이 용이 아들을 낳는다. 죽어가는 부인 곁을 떠나 첩의 아이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강청댁은 너무 억울하고 슬픈 나머지 기어이 마당까지 기어 나와 죽음을 맞이하는데...쓰면서도 참 우울하고 사람 인생이 다 뭔가 싶다. 용이를 너무 사랑한 죄밖에 없는 강청댁의 삶이 참으로 허무하고 허망할 뿐.

어쨌든 내가 여기서 다룰 이야기는 그래도 흘러가는 용이의 인생이다. 용이라고 뭐 이렇게 인생이 꼬이고 싶어 그랬겠냐마는 '나, 참 쓸모 있는 인간'에서 용이는 부끄러움을 안고 사는 사람으로 비춰진다.

"용이가 괴로워하는 부분, 자기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을 그냥 '살아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용이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토해내는 모습에 눈길이 끌렸습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용이는 타인의 시선 안에 점점 움츠러들고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었다. 거기다 가난은 남자로서의 용이 자존심도 꺾게 만들어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그저 두 여자와 아들 홍이에게 끌려다니기만 한 삶뿐이었다. 그나마 간도에서 월선이와 홍이를 두고 욕심 많은 임이네를 데려와 멀리 떨어져 사는 일이 월선이를 위한 일이었는데, 어떻게 보면 임이네에겐 못할 짓인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개척하기 위한 특별한 일도 아닌 것 같아 시시한 건 사실이지만 유일한 사랑인 월선이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부끄러움, 그것이 용이로 하여금 묵묵히 자기 삶의 무게를 견디어나가게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용이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데서 머무르지 않고, 그로부터 자신을 바라다보고, 자기 삶의 무게를 견디어 나갑니다. 사람이 마지막으로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을 견디어낸다, 지금의 삶, 그때그때,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이 인간이 가진 대단한 힘일 수 있음을 용이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내심은 바닥을 치고 참으면 사람을 우습게 보는 이 시대에서 ‘무엇을 견디어낸다는 일’은 참 어리석어 보여도 결국은 우리가 지켜야 할 마지막 무언가 같은 거다. 부끄러움으로 그치지 않고 거리를 둬서 그 부끄러움을 인정하고 견뎌낼 수 있으면 어느 정도 직장 생활은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들고, 직장인뿐 아니라 자영업자, 주부, 노동자, 근로자 등 모든 일선에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용이의 꾸역꾸역 살아가는 힘은 위로가 되기도 하겠지.


-주갑-

사실 주갑은 이 책 '나, 참 쓸모 있는 사람'에서 알게 됐다. 간도에서 동학운동을 했던 주갑이는 자신의 삶을 떳떳하게 걷는 모습을 보여준다. 긍정적이고 확신에 찬 사람, 무슨 일을 하든 계산적으로 재지 않고 따지지 않을뿐더러 작가의 말에 따르자면 거침없이 활발한 사람.

"빨래는 여자가 한다, 남자는 이래야 한다 등등에 대해 주갑이는 자신이 필요하면 하는 일이고, 내가 뭘 하든지 아무 거리낌이 없는 사람입니다. 공부하는 것은 하늘과 땅, 철기(계절) 같은 자연에서 체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얽매인 생각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옳다고 생각하는 일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드는 멋진 사내 주갑. 미안하지만 용이와 비교하자면 참으로 호방하고 쾌활하여 복잡한 상황을 애초에 만들지 않고 단순하고 깔끔하게 인생을 자로 자르듯 사는 것 같다.

"'안 배워도 독립운동하고, 일자무식이어도 나는 동학운동했다'라는 주갑이의 말을 다시 떠올려봅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주갑이라는 사람은 자기 삶을 그냥 살아갑니다. 그냥 살아간다는 것은 행위 그 자체의 온전함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나가는 것 자체, 실천한다는 것 자체가 삶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얼마나 간단 명료한 삶일까. 요즘 말하는 '미니멀 라이프' '단순한 삶'과 일맥상통 할지도 모르겠다. 옳다고 믿는 나의 신념을 의심하지 않고 한 길로 걸을 수 있다는 건 내 삶의 주체가 누구인지 바로 알고 가는 것과 같으니 복잡할 일이 없다.

아무리 내 인생이 쓰레기 같다고 느껴져도 어쨌든 내 것이니 품을 이도 나밖에 없다는 걸 묵직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책이다.

작은 사무실에서도 온갖 인간군상을 만나 관계를 맺는다. 누구에겐 후배로, 또 누구에겐 동료로 인정받으며, 상대방에 따라 달라지는 나의 모습, 대화 내용, 분위기를 고려하고 결국은 나의 가치관이 그곳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으면 한다. 또한 매일 움직이고 있는 내 발걸음에도 확신이 찰 수 있길 바란다.

서희같이 입체적 인물도 흥미롭지만 이번 책을 읽으며 좋았던 점은 평면적으로 보일지언정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살아가는 평사리 사람들이 내게 더 인생의 영감을 주었단 점이다. 때로, 아니 대체적으로 역사는 잔다르크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꾸역꾸역 이어오기 마련이므로.


“토지는 그저 관계 속에서 어떤 흐름이 이어지는지를 보여줄뿐입니다.”

<나, 참 쓸모 있는 인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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