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보는 마음
김유담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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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는 마음>의 제목에서 보듯이 돌봄의 행위는 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누군가를 잠시라도 돌본 경험이 있다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서 우리는 그 때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와, 이거 장난이 아니네?



엄마는 나이 육십 세에 팔순이 넘은 외할머니를 돌보기 위해 요양사자격증을 땄다. 생전 바깥일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착실한 주부였던 엄마는 아빠와 나를 돌보는 것에 더해 이제는 할머니의 마지막 생애까지 돌보기로 마음 먹으신 거다. 분명히 외할머니는 결혼하지 않은 총각 삼촌과 함께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돌봄은 떨어져 살고 있는 장녀-엄마에게 넘겨졌다. 서른 넘어 바라보는 엄마의 삶에서 나는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도 엄마처럼 나의 인생은 가족을 돌보다 마감하는 걸까. 결국 그 길 밖엔 없을까..




김유담 작가의 <돌보는 마음>을 읽는 내내 불행과 행복이 교차했다. 불행했던 이유는 피부에 와 닿는 다양한 돌봄의 종류가 필터없이 보여졌기 때문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했던 이유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뤄진 돌봄의 세계에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바래진 주인공들의 감정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대추>에서 할머니는 손주 영석에 대한 사랑이 당연하지만 영석은 할머니가 좋아하는 대추를 힘들게 구하면서도 서늘하게 할머니가 맛있는 대추를 드시고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소설 속 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는데 그건 놀라서라기 보단 영석이 느끼는 할머니의 사랑이 어떤 불편한 상태로 공존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우리 친할머니도 큰 집 사촌 오빠를 신으로 모시듯 아꼈다. 좋고 예쁜 건 죄다 오빠에게 주면서 명절 때마다 보는 내겐 왜 고추를 달고 나오지 못했냐고 매번 인사처럼 하셨으니 할머니가 사는 세상에서 남자는 말 그대로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 하지만 의외로 나는 그 말에 별로 서운하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의 그 말은 나를 싫어해서는 아니고 그저 아들이 없는 우리 집을 진심으로 안타까워신 것처럼 들려서였다

할머니의 삶에서 아들이 없는 우리 부모님의 삶은 불완전한 형태 그 자체였으니 늘 고추를 바라셨던게 아니었을까. 




<돌보는 마음>에서 <내 이웃의 거리>는 단연 최고였다. 집값, 마스크, 맘카페의 익숙한 언어로 이루어진 두 집의 관한 이야기는 모성에 기댄 두 여성의 연대에서 시작하다가 집값 시세 차이에서 벌어지는 두 사람간의 멀어진 거리를 느끼는 게 묘미였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 마음에서 비롯된 친절은 결국 무리를 해서 빚을 내 매매를 한 상대의 집값이 10억 시세를 찍었다는 사실에 그 동안 배풀었던 소설 속 내가 지불했던 소소한 비용까지 우습게 만들어 버리는 이 블랙 코미디 같은 상황. 사실 이런 이런 일은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봐오고 있어 마냥 웃고 넘길 수 있지만 또 마냥 우습지만은 않은 뾰족한 이야기였다.





정윤은 한 대 맞은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했다. 4000원짜리 스타벅스 커피 한 잔 사 마실 돈도 없다고 엄살을 떠는 혜미가 10억짜리 집을 소유한 자산가라니. 1000원이라도 더 싼 기저귀 핫딜을 찾느라고 밤잠을 설치는 혜미를 궁상맞다고 속으로 비웃었는데 오히려 혜미 입장에서는 마흔이 넘도록 내 집 마련도 하지 못하고 돈을 쉽게 써 대는 자신이 더 우스워 보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 208)


사전에서 돌보다의 의미를 찾아봤더니 <1. 힘써 도와주다. 2. 뒤를 보살펴 주다. 3. 보호하다>였다.




분명 <돌보는 마음> 속 주인공들은 모두 나 이외의 다른 누군가를 돌보는데 헌신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 대상은 남편일 수도, 자식일 수도, 부모일 수도, 아니면 모두 다 일 수도 있지만 정작 돌봄의 대상에서 쏙 빠진 건 . 나를 보호하고 보살피는 대신 그 애쓰는 최선의 마음을 사랑하는 사람 혹은 해야만 한다고 의무로 받아들인 사람에게 분투하는 걸 보면서 과연 나는 어떻게 나를 돌볼 수 있을 것인지 계속 곱씹게 됐다.




아직까지는, 나는 나를 보호하는데 더 분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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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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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차분한 채도를 가진 책을 읽었다.

소설 <영의 자리>는 무채색에 가까운 이야기에 아주 조금씩 채도가 높은 색깔로 덧칠되지만 멀리서 보면 결국 처음보다 눈에 띄게 달라지지 않은 그런 색깔의 이야기다.


'나'는 20대에 해고를 당하고 급하게 들어간 회사에서도 겨우 1년이 넘기고 폐업을 당한 백수이자 취준생이다. 딱히 무얼 하고 싶지도, 그렇지만 뭘 하지 않기도 애매해 어느 약국의 전산원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다. 대뜸 약사는 "유령이 또 왔네"라는 말을 남기지만 처음에 '나'는 그 말이 의미인지 몰랐다. 같이 일하는 조부장은 몇 년 째 약국에서 일한 경력이 있고 그런 삶에 익숙한 듯 유령임을 자처하는데...


p032-033

유령이 되기로 했다. 유령이라고 하니까. 믿음 앞에서 논리는 무용했다. 사람들은 사실을 근거로 믿는 게 아니라 믿고 싶은 이야기를 선택할 뿐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생'의 기분에 젖어 있었던 듯했다. 상실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유령이 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의 자리>에서 영은 숫자 '0'을 말한다.

참 신비하고 오묘한 숫자인 0

더할 때나 뺄 때, 곱할 때, 나눌 때 옆 자리 수에 상관없이 존재할 것 같지만 실로 대단한 영향을 미치는 숫자다. 특히 곱셈에서 0은 어떤 수를 갖다 대더라도 모든 수를 아무것도 없음으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조부장의 도움을 받으며 약국일을 배운다. 처방전을 입력하고 조제약을 확인하고 약사를 도와 조제까지 돕는다.


<영의 자리>를 읽다 보면 작가님이 직접 약국 아르바이트를 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꽤 자세하고 재밌는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가령 향정신성의약품은 보건소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따로 모아두고 실재고를 맞춰놔야 한다든가 제약사 영업사원들이 오는 장면이나 의약분업의 일화, 약국에서는 치료가 이뤄지면 안 된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재밌게 읽었다. 소설을 읽으며 몰랐던 지식을 얻는 것도 생각지 못한 큰 기쁨일지도 :)

아! 후시딘과 마데카솔 효능이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다면?

<영의 자리>에서 아주 자세히 알려드립니다!


그렇게 '나'는 무기력한 채로 약국의 전산원 아르바이트생으로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가끔 약국에서 먹는 식빵이나 퇴근 후 집에서 시켜 먹는 단맛으로 삶의 달콤함을 맛보지만 어디까지나 그뿐일 뿐, 소수점을 하나씩 넘는 숫자에서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이는 '나'의 의욕이 삶을 크게 이끌지도 않고 버려두지도 않은, 수많은 0의 소수점 세계에 잠시 안착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소설 <영의 자리>에서는 '나'뿐만 아니라 '조' '약사' '약사 어머니' 등 유령이 된 존재가 많다. 그 말은 유령은 우리 곁에 얼마든지 있으며 그들의 존재가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들이 채도가 낮은 모습을 하고 살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하루하루를 살아낸다는 의지보단 살아낼 뿐이라는 수동적인 모습에서 우리 모두는 유령을 닮았지만 어쨌든 0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거운 셈을 치루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다행히 이 책은 결국 아주 작은 희망에 결말을 슬쩍 기대어 본다.

숫자 0은 얼마든지 변모할 수 있고 달라질 수 있는 대단한 수이니까.


정말 갑자기 그리고 우연히, 아니면 필연적으로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밤이 깊도록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력서를 작성한다.

이처럼 인생은 갑자기 어떤 또렷한 계기가 없이도 어떠한 연쇄작용으로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는 곳으로 가닿아 있기도 한다.

아마 이렇게까지 되는 이유는 1에 가기 위한 마음과 노력 덕분이고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수점을 밟지 않고 더 높은 숫자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도 보인다. 결국 우리들은,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건 이 무수한 0의 자리에서 맴돌며 삶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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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위로 - 글 쓰는 사람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곽아람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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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신간을 꼬박 기다렸다. 매일 퇴근을 하고 읽었던 전작은 마치 공부하는 학생처럼 하루를 버틸 양식처럼 흡입했고 몰랐던 책에 대해 그리고 책 속 캐릭터에 대해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서는 이번 <공부의 위로>가 3월에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손꼽아 기다리며 5년 회사 생활 중 가장 막막한 시기를 견뎌냈다.


책은 내게 이런 존재다. 어떤 감내도, 힘듦도 어찌어찌 견뎌내며 그 시간을 굴복하게 하는 힘을 주는 것.


<공부의 위로>는 작가가 배웠던 대학교 교정의 교양수업을 담은 이야기다.

제목에서 모든 걸 유추할 수 있듯 공부 그리고 젊고 찬란했던 20대에 배웠던 교양 수업이 현재 밥벌이를 위한 세계를 걷고 있는 본인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차분하고 단단한 마음으로 썼다.


다른 분들의 리뷰를 읽어보니 저마다의 대학교 교양 수업 추억을 써놓으셨더라.

나도 마찬가지였다. <공부의 위로>를 읽는 내내 대학교 때 들었던 단 한 개의 교양수업이 생각났다.


사실 나의 대학생활은 공부를 잘하지도, 그렇다고 신나게 잘 놀지도 못한 어정쩡한 4년이었다. 그래서 가장 아쉽고 슬픈 시기로 기억되고 다시 돌아가라면 주저 없이 열심히 공부만 해보겠다는 다짐을 보이는 때이기도 하다. (연애도 사치!!! CC 못해봄...)

여하튼, 나는 소위 신방과(신문방송학과) 학생으로서 전공은 신문, 잡지, 홍보, 미디어 등등이었고 교양수업이라고 해봤자 친구들과 시간 맞추기 좋은 쪽으로만 짰던 기억밖에 없다. 그러던 중, 유일하게 '아 공부란 이런 거구나'를 처음으로 머리에 얻어맞은 '만화와 철학' 수업이 있었다. 교수님이 지정해 준 만화를 읽고 그에 대한 리포트를 써오는 과제가 있었고 처음에는 재밌을 것 같아 신청한 과목이 알고 보니 인기 교수님의 수업이었다. 나는 대학생활 처음으로 과제로 제출한 리포트가 뽑혀 강당 앞에 나가 읽는 기회까지 주어졌는데 그 수업 시간에 처음으로 생각이란 것을 하고, 더 넓혀가 다양한 사고를 해볼 수 있었으며, 글 쓰는 일을 진지하게 대할 수 있었다. 전공에서는 전혀 느껴볼 수 없었던 공부의 재미와 진지함을 철학 교수님에게 배웠다.


곽아람 작가의 <공부의 위로>의 서문을 읽자마자 이 책은 막 고등학교 정규교육을 끝내고 수능의 압박감을 벗어난 학생들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 내게 조카가 있었더라면 당장 이 책을 선물했을거다. 멋진 어른이고 나발이고, 일단 네 손에 쥐어진 스무 살을 가장 천진하고 싱그럽게 보내려면 쓸모없는 공부의 진지함을 터득해야 한다고. 내가 말할 순 없고(공부 안 한 나는 설득력이 떨어지니까..) 이 책이 자연스럽게 알려줄 것이라고 믿는다.


-10

그 모든 것들을, 나는 대학 강의실에서 배웠다. 읽고 쓰고 생각하는 훈련과 함께. 캠퍼스에서의 배움은 음화처럼, 내가 무엇을 아느냐보다 무엇을 모르는가를 뚜렷하게 하고 자아의 음역대를 넓혀 주었다. 그래서 이 책은 실용이라는 구호에 밀려 교양 강의가 축소되고 팬데믹의 영향으로 강의실이 망가져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대학에 바치는 비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 같은 어른들은?

읽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인가?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

30대 중반의 직장인인 내가 읽어본 결과 <공부의 위로>는 확실히 내게도 위로가 되었다.



학창 시절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사람들은 대개 자존감을 쌓고 나눌 기회가 없다. 어떤 주제에 대해 스스로 사고하고 불편한 지점을 부딪치며 나만의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힘이 부족한 이유는 제대로 공부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그저 공부는 따분하고 시시하다는 이유와 현실은 공부가 아닌 실전이라며 아르바이트 등의 생계적 수단을 먼저 익히려는 학생들에게서 공부는 정말 쓸모없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몸으로 사회를 익힌 사람들도 나름의 이유와 근거를 대며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인식하지만 모름지기 '공부하는 데서 오는 힘'은 기본 중의 기본. 타인을 이해하고 그대로 인정하는 내면의 깊이를 더 파고드는 데 있다.


<공부의 위로>는 우리에게 작가가 들은 착실한 교양수업을 소개하며 공부하는데 느꼈던 희열, 순수한 학문적 기쁨, 재미와 동시에 현실에서 위로받는 공부의 쓸모도 놓치지 않는다. 현재 언론사 기자로서 치열한 밥벌이의 세계에 있으면서도 대학 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취준시기의 어두운 터널을 지날 수 있었다 고백한다. 그러하니 학문의 길을 뒤로하고 생계의 영역으로 한 발을 더뎌야 하는 취준생과 생계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직장인들도 이 책은 꽤 쓸모가 있을 것이다.


-216-217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라는 문장은 수업을 들은 많은 이들에게 삶의 모토가 되었다. 


"분투하는 인간은 길을 잃는다."라고도 해석될 수 있는 이 문장은 흔히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고 번역되는데, 내게는 독일어를 하나도 모르면서도 원문을 외워 적을 정도로 아끼는 문장이 되었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고시 공부를 할 것인가, 내 바람대로 인문학 공부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취직을 해서 제3의 길을 찾을 것인가 방황 중이던 당시의 내게는 이 문장만큼 위로가 되는 말이 없었다.



미술사, 불어, 독어, 동양미술사, 영시, 중세 미술, 종교학, 심리학 개론까지 이 책 한 권만으로 우리는 공짜로 대학생이 되어 교양 수업을 듣는 기분이다. 이 얼마나 좋은 책인지? 평소 공부다운 공부, 지식 다운 지식, 쓸모의 여부를 떠나 당장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교양 수업을 원했던 독자들이라면 <공부의 위로>는 그 부응에 딱 떨어지는 책이다.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말 그대로 전부는 아니어서 우리에겐 교양이라는 덕목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중요한 일부기도 하므로 다양한 세계에 발을 담그는 방법은 공부가 제일 빠르고 쉽다.


-10


교양이란 완벽한 지식체계가 아니다. 자신의 세계를 공고히하되 다른 세계에 틈입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교양이란 겹의 언어이자 층위가 많은 말, 날것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 일, 세 치 혀 아래에 타인에 대한 배려를 넣어도는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나의 경우 27살 때 처음 퇴근 후 유튜브로 인문학 강의를 들었다. 그때는 회사는 너무 싫은데 퇴사할 용기는 없고 매일 친구들과 만나 커피 마시는 것도 지겨울 때라 다른 방법으로 머리와 마음의 환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인문학 강의를 듣는 것이었고, 그 행위는 점차 신문 필사하기- 한국사 공부와 시험 보기로 이어지며 대학생 때 들었던 '만화와 철학' 수업의 기쁨을 다시 맛보는 계기가 되었다.


곽아람 작가는 우리가 쓸모없다고 여겼던 공부를 재정의한다.

이런 정의는 늘 반복되는 하루와 하루 사이에 놓인 우리들에게 반가운 일탈이고 희망이다.


- 작가의 말에서


책 읽는 즐거움과 글 쓰는 고통 사이에서 방황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워질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공부의 위로'다.

공부는 나에게 '획기적인 창문'을 하나 열어 주는 것이며, 상처를 입고도 치유자가 될 수 있는 길이며, 현실에 매몰되지 않도록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성장할 수 있다는 희미하지만 단단한 자신감을 갖는 일이다.


<공부의 위로>를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는 내내 마치 스무 살 언저리의 내가 된 것 같았다.


갈 수만 있다면 다시는 그 시간을 남의 눈치 따위에 얽매여 보내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내면을 다지고 넓히는 과정을 거치는 대학 교정을 거닐고 싶다. 스무 살만이 새길 수 있는 운율과 리듬을 흘려보내지 않고 철저하게 고민하고 처절하게 사고한 나의 생각을 노트에 빼곡히 적고 싶다.


막 1년의 시작과 잘 어울리는 3월에 좋은 책을 만났다.

책 속에서 언급되는 인연 책처럼 이 책 역시 올해 나의 인연 책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봄과 어울리는, 삼십 대 중반인 내가 이십 대에 잠깐 머무를 수 있었던 좋은 이야기였다.


특히 유독 '공부'라는 단어에 환상을 갖고 여전히 학문의 세계와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동경을 갖는 내게, 더없이 좋은 행복을 주는 책이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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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것도 부른다면 - 박보나 미술 에세이
박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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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받게 된 책 한 권은 나의 고정된 생각과 신념을 흔들어 놓았다. 이런 것도 예술이라고? 의아해 하는 내게 ‘당연히’라는 답을 성실하게 말해주는 <이름 없는 것도 부른다면>은 여러모로 내 주위 모든 생명체들을 다르게 보게 한다.


“생태 중심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존재에 귀 기울이며, 서로를 해치는 모든 사악한 구조에 등을 지고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작가의 말을 힌트 삼아 이 책을 읽는다면 모호하고 헷갈리는 텍스트의 문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름 없는 것도 부른다면>은 나무, 새, 호랑이, 돌, 돼지, 원숭이 등의 인간이 아무 생각 없이 해치고 멋대로 다루는 생명체를 그 존재로서 바라보게 하며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함께 아니 그들 각자의 세계에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염려를 드러낸다. 물론 그 염려는 읽으면 읽을수록 인간의 잔임과 폭력성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지고 이 모든 것들이 예술로서 표현되는 방식이 신선하여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상상의 맹수 호랑이를 키우고 있지 않은지


아무래도 동양인이다 보니 이 챕터의 내용은 허투루 넘기지 못했다. 미국인들의 시선으로 보는 차이나타운은 한국에서 내가 바라보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시선과 크게 엇갈리지 않았다. 한 땅의 덩어리에 가깝게 있지만 ‘여기’와 ‘거기’는 다르다는 내 머릿속의 잣대에서 이 두 나라간의 거리는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멀다.


- 그림 같은 폭포 아래에서 포효하는 호랑이나 흐니 눈을 맞으며 파란 눈으로 우리를 응시하는 백호처럼 실제와는 다르게 제멋대로 오해받는 대상인 것 같았다. 그것은 분명히 이질감이나 거리감을 드러내는 태도였다. 미국인들의 마음속에서 차이나타운은 실제 거리보다 더 멀리 위치하고 있었다.


홍 류는 중국에서 태어나 1980년대 미국으로 이주한 작가로 1994년 작업 [오래된 황금 산]에서 중국인들의 미국 이주 역사를 표현했고 [파리스의 심판]에선 서구인들의 눈에 그려진 왜곡된 타자로서의 아시아를 드러낸다. (-40)



[오래된 황금 산]을 보면 포춘쿠키로 산을 쌓아 올렸고 양쪽에 서로 가로지르는 철길이 있는데, 이 교차하는 철길은 중국 이민자들과 서양의 문화가 교차하는 순간을 표현하고, 쌓아 올려진 포춘쿠키는 당시 작업하다 목숨을 잃은 노동자를 나타낸다고 한다. 여기에 주목할 점은 포춘쿠키에 있다. 실제 중국에는 포춘쿠키가 없고 처음 만든 사람은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일본인 사업가였다고. 그러니까 포춘쿠키는 미국에만 있는, 미국사람들 의식에만 존재하는 이주한 중국인들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파리스의 심판]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사진만 보더라도 괴기한 초록색 형상에 분홍색 옷을 입고 있는 여자는 중국 매춘부를 모사한 것이고, 가운데 상의를 벗고 있는 여신들이 남자 인간에게 미모 순위를 받고 있는 모습이다. 도자기의 형태나 전체적인 분위기를 본다면 중국이긴 하지만 정작 중국의 본모습이 아니라 서구의 눈에 비친 잘못된 아시아의 모습일 뿐이다.

텍스트의 서양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또한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과 구분짓고 잘못된 해석 안에서 잘못된 오류를 계속 키우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예술의 한계는 없다고 여기는 편이지만 실제 생활 속에서 그런 경험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술’이란 단어가 갖는 한계를 스스로 짓는다. 이해하기 어렵고, 해석하기 불편하고, 큰 의미를 둘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들. 그러나 이번 <이름 없는 것들을 부른다면>에서 표현되는 여러 장치들은 그동안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생명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확장되는 텍스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돼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던가. 맛있는 삼겹살로서 가치를 충분히 내었는가. 아니다. 돼지는 그저 돼지로 잘 살려고 이 세상에 왔을 뿐, 인간에게 희생당할, 인간을 위한 마음 조차 전혀 없었다. 돼지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건 오로지 우리, 인간의 이기심일 뿐.


자꾸 의미를 더하고, 색을 진하게 표현하고, 화려한 말로 꾸미는 인간의 욕심을 덜어내는 작업이 ‘생명’에 다가가는 진실한 유일한 진실일지 모르겠다. 바로 그 앎을 이 책을 통해 배웠고, 앞으로 전진이 아닌 ‘옆으로 확장’하는 대화를 통해 ‘이 세상에 남아 돌거나 소외되어도 괜찮은 존재는 하나도 없다’는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의 말이 다가온다.


- 우리가 함부로 밀어낸 다양한 존재들을 하나하나 부르는 미술작가들의 작업을 넓게 읽고 사회와 유연하게 연결시킴으로써, 더 늦기 전에 이 땅 위의 생존 문제를 같이 얘기해보고자 했다. 모든 것이 우주적 관계 안에서 서로 ‘옆으로’ 의존할 때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꾹 눌러 말하기 위해 글쓰기 방식에도 나름의 유기적인 규칙을 더해봤다.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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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회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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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을 읽겠다고 다짐한 건 순전히 백수린 작가의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설을 읽고 난 후 나는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놀랍게도 트레버 덕분에. 그 고독이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윌리엄 트레버의 책은 그 전에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어서 너무 궁금했는데 이번 기회에 이르러서야 그의 세계에 초대 받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밀회>를 읽으며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발견했다. 섬세하지만 모호하고, 모호하지만 뭔지 알 것만 같은 표현들이 자꾸만 문장을 더듬더듬 읽게 만들었다.

<밀회 - 고인 곁에 앉다>

12편의 단편이 들어 있는 <밀회>는 첫 이야기부터 강렬했다. 남편이 죽은 아내가 털어놓는 비밀.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기도, 그러나 사랑 후 남은 잔잔한 재인 듯도 한 원망과 미움이 섞인 고독한 감정이었다. 타인에게 털어 놓는 남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 여인이 함께 살았던 남자는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란 생각보다 남편이 죽고 난 뒤 살아갈 여인의 삶이 더 궁금해질만큼 여인이 느끼고 섬세한 심리 묘사는 미스터리처럼 남아 있다.

- 에밀리는 기도를 올렸다.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오랫동안 자신을 모욕한 이 남자의 구원을 빌었다. 두려움이 에밀리가 말한 사랑을 고갈시켜 껍데기만 남았지만, 방문객 앞에서 그랬듯 에밀리는 사랑의 잔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밀회 - 신성한 조각상>

다음 단편으로 내 마음을 붙잡은 건 누엘라의 이야기였다. 가난한 집에 남편과 아이들과 살고 있는 누엘라는 뱃속에 있는 아이를 남편 모르게 친구에게 주려고 했지만 친구가 거절했고 영원히 혼자 알고 있어야 할 비밀을 간직하게 된다.

너무도 간략하게 줄거리를 적었지만 윌리엄 트레버는 세밀하고 모순된 마음을 너무도 순수한 언어로 잘 풀어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드는 마음을 죄책감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함께 움직인다.

- 누알라는 최선을 다해 남편에게 연민과 지지를 보냈고, 이제 영원히 혼자서 간직할 일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렸다. 모두가 떠나고 집에 홀로 남았을 때 누알라는 아침 먹을 그릇을 닦고 마음에 들게 부엌을 정리했다.

<밀회>를 읽는 동안 계속 드는 머리 속 상상은 겨울에 읽기 잘 했다는 점이었다. 흰 눈의 배경도,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떠오르는 일도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소설과 너무도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단편 소설 속 인물들은 저마다 말할 수 없는 상처와 고독을 갖고 있지만 말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는 감정선도 들어 있다. 마음은 춥고 외롭지만 그렇기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그런 마음들…

만약 내가 소설을 쓰는 작가 혹은 지망생이라면 <밀회>의 모든 이야기를 열심히 필사했을 정도로 섬세했고 우리 모두 알고 있는 평범한 감정이 이야기를 어떻게 끌고 가는지 들여다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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