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회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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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을 읽겠다고 다짐한 건 순전히 백수린 작가의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설을 읽고 난 후 나는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놀랍게도 트레버 덕분에. 그 고독이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윌리엄 트레버의 책은 그 전에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어서 너무 궁금했는데 이번 기회에 이르러서야 그의 세계에 초대 받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밀회>를 읽으며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발견했다. 섬세하지만 모호하고, 모호하지만 뭔지 알 것만 같은 표현들이 자꾸만 문장을 더듬더듬 읽게 만들었다.

<밀회 - 고인 곁에 앉다>

12편의 단편이 들어 있는 <밀회>는 첫 이야기부터 강렬했다. 남편이 죽은 아내가 털어놓는 비밀.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기도, 그러나 사랑 후 남은 잔잔한 재인 듯도 한 원망과 미움이 섞인 고독한 감정이었다. 타인에게 털어 놓는 남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 여인이 함께 살았던 남자는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란 생각보다 남편이 죽고 난 뒤 살아갈 여인의 삶이 더 궁금해질만큼 여인이 느끼고 섬세한 심리 묘사는 미스터리처럼 남아 있다.

- 에밀리는 기도를 올렸다.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오랫동안 자신을 모욕한 이 남자의 구원을 빌었다. 두려움이 에밀리가 말한 사랑을 고갈시켜 껍데기만 남았지만, 방문객 앞에서 그랬듯 에밀리는 사랑의 잔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밀회 - 신성한 조각상>

다음 단편으로 내 마음을 붙잡은 건 누엘라의 이야기였다. 가난한 집에 남편과 아이들과 살고 있는 누엘라는 뱃속에 있는 아이를 남편 모르게 친구에게 주려고 했지만 친구가 거절했고 영원히 혼자 알고 있어야 할 비밀을 간직하게 된다.

너무도 간략하게 줄거리를 적었지만 윌리엄 트레버는 세밀하고 모순된 마음을 너무도 순수한 언어로 잘 풀어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드는 마음을 죄책감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함께 움직인다.

- 누알라는 최선을 다해 남편에게 연민과 지지를 보냈고, 이제 영원히 혼자서 간직할 일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렸다. 모두가 떠나고 집에 홀로 남았을 때 누알라는 아침 먹을 그릇을 닦고 마음에 들게 부엌을 정리했다.

<밀회>를 읽는 동안 계속 드는 머리 속 상상은 겨울에 읽기 잘 했다는 점이었다. 흰 눈의 배경도,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떠오르는 일도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소설과 너무도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단편 소설 속 인물들은 저마다 말할 수 없는 상처와 고독을 갖고 있지만 말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는 감정선도 들어 있다. 마음은 춥고 외롭지만 그렇기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그런 마음들…

만약 내가 소설을 쓰는 작가 혹은 지망생이라면 <밀회>의 모든 이야기를 열심히 필사했을 정도로 섬세했고 우리 모두 알고 있는 평범한 감정이 이야기를 어떻게 끌고 가는지 들여다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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