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위로 - 글 쓰는 사람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곽아람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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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신간을 꼬박 기다렸다. 매일 퇴근을 하고 읽었던 전작은 마치 공부하는 학생처럼 하루를 버틸 양식처럼 흡입했고 몰랐던 책에 대해 그리고 책 속 캐릭터에 대해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서는 이번 <공부의 위로>가 3월에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손꼽아 기다리며 5년 회사 생활 중 가장 막막한 시기를 견뎌냈다.


책은 내게 이런 존재다. 어떤 감내도, 힘듦도 어찌어찌 견뎌내며 그 시간을 굴복하게 하는 힘을 주는 것.


<공부의 위로>는 작가가 배웠던 대학교 교정의 교양수업을 담은 이야기다.

제목에서 모든 걸 유추할 수 있듯 공부 그리고 젊고 찬란했던 20대에 배웠던 교양 수업이 현재 밥벌이를 위한 세계를 걷고 있는 본인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차분하고 단단한 마음으로 썼다.


다른 분들의 리뷰를 읽어보니 저마다의 대학교 교양 수업 추억을 써놓으셨더라.

나도 마찬가지였다. <공부의 위로>를 읽는 내내 대학교 때 들었던 단 한 개의 교양수업이 생각났다.


사실 나의 대학생활은 공부를 잘하지도, 그렇다고 신나게 잘 놀지도 못한 어정쩡한 4년이었다. 그래서 가장 아쉽고 슬픈 시기로 기억되고 다시 돌아가라면 주저 없이 열심히 공부만 해보겠다는 다짐을 보이는 때이기도 하다. (연애도 사치!!! CC 못해봄...)

여하튼, 나는 소위 신방과(신문방송학과) 학생으로서 전공은 신문, 잡지, 홍보, 미디어 등등이었고 교양수업이라고 해봤자 친구들과 시간 맞추기 좋은 쪽으로만 짰던 기억밖에 없다. 그러던 중, 유일하게 '아 공부란 이런 거구나'를 처음으로 머리에 얻어맞은 '만화와 철학' 수업이 있었다. 교수님이 지정해 준 만화를 읽고 그에 대한 리포트를 써오는 과제가 있었고 처음에는 재밌을 것 같아 신청한 과목이 알고 보니 인기 교수님의 수업이었다. 나는 대학생활 처음으로 과제로 제출한 리포트가 뽑혀 강당 앞에 나가 읽는 기회까지 주어졌는데 그 수업 시간에 처음으로 생각이란 것을 하고, 더 넓혀가 다양한 사고를 해볼 수 있었으며, 글 쓰는 일을 진지하게 대할 수 있었다. 전공에서는 전혀 느껴볼 수 없었던 공부의 재미와 진지함을 철학 교수님에게 배웠다.


곽아람 작가의 <공부의 위로>의 서문을 읽자마자 이 책은 막 고등학교 정규교육을 끝내고 수능의 압박감을 벗어난 학생들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 내게 조카가 있었더라면 당장 이 책을 선물했을거다. 멋진 어른이고 나발이고, 일단 네 손에 쥐어진 스무 살을 가장 천진하고 싱그럽게 보내려면 쓸모없는 공부의 진지함을 터득해야 한다고. 내가 말할 순 없고(공부 안 한 나는 설득력이 떨어지니까..) 이 책이 자연스럽게 알려줄 것이라고 믿는다.


-10

그 모든 것들을, 나는 대학 강의실에서 배웠다. 읽고 쓰고 생각하는 훈련과 함께. 캠퍼스에서의 배움은 음화처럼, 내가 무엇을 아느냐보다 무엇을 모르는가를 뚜렷하게 하고 자아의 음역대를 넓혀 주었다. 그래서 이 책은 실용이라는 구호에 밀려 교양 강의가 축소되고 팬데믹의 영향으로 강의실이 망가져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대학에 바치는 비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 같은 어른들은?

읽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인가?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

30대 중반의 직장인인 내가 읽어본 결과 <공부의 위로>는 확실히 내게도 위로가 되었다.



학창 시절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사람들은 대개 자존감을 쌓고 나눌 기회가 없다. 어떤 주제에 대해 스스로 사고하고 불편한 지점을 부딪치며 나만의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힘이 부족한 이유는 제대로 공부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그저 공부는 따분하고 시시하다는 이유와 현실은 공부가 아닌 실전이라며 아르바이트 등의 생계적 수단을 먼저 익히려는 학생들에게서 공부는 정말 쓸모없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몸으로 사회를 익힌 사람들도 나름의 이유와 근거를 대며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인식하지만 모름지기 '공부하는 데서 오는 힘'은 기본 중의 기본. 타인을 이해하고 그대로 인정하는 내면의 깊이를 더 파고드는 데 있다.


<공부의 위로>는 우리에게 작가가 들은 착실한 교양수업을 소개하며 공부하는데 느꼈던 희열, 순수한 학문적 기쁨, 재미와 동시에 현실에서 위로받는 공부의 쓸모도 놓치지 않는다. 현재 언론사 기자로서 치열한 밥벌이의 세계에 있으면서도 대학 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취준시기의 어두운 터널을 지날 수 있었다 고백한다. 그러하니 학문의 길을 뒤로하고 생계의 영역으로 한 발을 더뎌야 하는 취준생과 생계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직장인들도 이 책은 꽤 쓸모가 있을 것이다.


-216-217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라는 문장은 수업을 들은 많은 이들에게 삶의 모토가 되었다. 


"분투하는 인간은 길을 잃는다."라고도 해석될 수 있는 이 문장은 흔히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고 번역되는데, 내게는 독일어를 하나도 모르면서도 원문을 외워 적을 정도로 아끼는 문장이 되었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고시 공부를 할 것인가, 내 바람대로 인문학 공부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취직을 해서 제3의 길을 찾을 것인가 방황 중이던 당시의 내게는 이 문장만큼 위로가 되는 말이 없었다.



미술사, 불어, 독어, 동양미술사, 영시, 중세 미술, 종교학, 심리학 개론까지 이 책 한 권만으로 우리는 공짜로 대학생이 되어 교양 수업을 듣는 기분이다. 이 얼마나 좋은 책인지? 평소 공부다운 공부, 지식 다운 지식, 쓸모의 여부를 떠나 당장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교양 수업을 원했던 독자들이라면 <공부의 위로>는 그 부응에 딱 떨어지는 책이다.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말 그대로 전부는 아니어서 우리에겐 교양이라는 덕목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중요한 일부기도 하므로 다양한 세계에 발을 담그는 방법은 공부가 제일 빠르고 쉽다.


-10


교양이란 완벽한 지식체계가 아니다. 자신의 세계를 공고히하되 다른 세계에 틈입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교양이란 겹의 언어이자 층위가 많은 말, 날것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 일, 세 치 혀 아래에 타인에 대한 배려를 넣어도는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나의 경우 27살 때 처음 퇴근 후 유튜브로 인문학 강의를 들었다. 그때는 회사는 너무 싫은데 퇴사할 용기는 없고 매일 친구들과 만나 커피 마시는 것도 지겨울 때라 다른 방법으로 머리와 마음의 환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인문학 강의를 듣는 것이었고, 그 행위는 점차 신문 필사하기- 한국사 공부와 시험 보기로 이어지며 대학생 때 들었던 '만화와 철학' 수업의 기쁨을 다시 맛보는 계기가 되었다.


곽아람 작가는 우리가 쓸모없다고 여겼던 공부를 재정의한다.

이런 정의는 늘 반복되는 하루와 하루 사이에 놓인 우리들에게 반가운 일탈이고 희망이다.


- 작가의 말에서


책 읽는 즐거움과 글 쓰는 고통 사이에서 방황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워질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공부의 위로'다.

공부는 나에게 '획기적인 창문'을 하나 열어 주는 것이며, 상처를 입고도 치유자가 될 수 있는 길이며, 현실에 매몰되지 않도록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성장할 수 있다는 희미하지만 단단한 자신감을 갖는 일이다.


<공부의 위로>를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는 내내 마치 스무 살 언저리의 내가 된 것 같았다.


갈 수만 있다면 다시는 그 시간을 남의 눈치 따위에 얽매여 보내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내면을 다지고 넓히는 과정을 거치는 대학 교정을 거닐고 싶다. 스무 살만이 새길 수 있는 운율과 리듬을 흘려보내지 않고 철저하게 고민하고 처절하게 사고한 나의 생각을 노트에 빼곡히 적고 싶다.


막 1년의 시작과 잘 어울리는 3월에 좋은 책을 만났다.

책 속에서 언급되는 인연 책처럼 이 책 역시 올해 나의 인연 책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봄과 어울리는, 삼십 대 중반인 내가 이십 대에 잠깐 머무를 수 있었던 좋은 이야기였다.


특히 유독 '공부'라는 단어에 환상을 갖고 여전히 학문의 세계와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동경을 갖는 내게, 더없이 좋은 행복을 주는 책이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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