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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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차분한 채도를 가진 책을 읽었다.

소설 <영의 자리>는 무채색에 가까운 이야기에 아주 조금씩 채도가 높은 색깔로 덧칠되지만 멀리서 보면 결국 처음보다 눈에 띄게 달라지지 않은 그런 색깔의 이야기다.


'나'는 20대에 해고를 당하고 급하게 들어간 회사에서도 겨우 1년이 넘기고 폐업을 당한 백수이자 취준생이다. 딱히 무얼 하고 싶지도, 그렇지만 뭘 하지 않기도 애매해 어느 약국의 전산원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다. 대뜸 약사는 "유령이 또 왔네"라는 말을 남기지만 처음에 '나'는 그 말이 의미인지 몰랐다. 같이 일하는 조부장은 몇 년 째 약국에서 일한 경력이 있고 그런 삶에 익숙한 듯 유령임을 자처하는데...


p032-033

유령이 되기로 했다. 유령이라고 하니까. 믿음 앞에서 논리는 무용했다. 사람들은 사실을 근거로 믿는 게 아니라 믿고 싶은 이야기를 선택할 뿐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생'의 기분에 젖어 있었던 듯했다. 상실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유령이 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의 자리>에서 영은 숫자 '0'을 말한다.

참 신비하고 오묘한 숫자인 0

더할 때나 뺄 때, 곱할 때, 나눌 때 옆 자리 수에 상관없이 존재할 것 같지만 실로 대단한 영향을 미치는 숫자다. 특히 곱셈에서 0은 어떤 수를 갖다 대더라도 모든 수를 아무것도 없음으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조부장의 도움을 받으며 약국일을 배운다. 처방전을 입력하고 조제약을 확인하고 약사를 도와 조제까지 돕는다.


<영의 자리>를 읽다 보면 작가님이 직접 약국 아르바이트를 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꽤 자세하고 재밌는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가령 향정신성의약품은 보건소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따로 모아두고 실재고를 맞춰놔야 한다든가 제약사 영업사원들이 오는 장면이나 의약분업의 일화, 약국에서는 치료가 이뤄지면 안 된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재밌게 읽었다. 소설을 읽으며 몰랐던 지식을 얻는 것도 생각지 못한 큰 기쁨일지도 :)

아! 후시딘과 마데카솔 효능이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다면?

<영의 자리>에서 아주 자세히 알려드립니다!


그렇게 '나'는 무기력한 채로 약국의 전산원 아르바이트생으로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가끔 약국에서 먹는 식빵이나 퇴근 후 집에서 시켜 먹는 단맛으로 삶의 달콤함을 맛보지만 어디까지나 그뿐일 뿐, 소수점을 하나씩 넘는 숫자에서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이는 '나'의 의욕이 삶을 크게 이끌지도 않고 버려두지도 않은, 수많은 0의 소수점 세계에 잠시 안착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소설 <영의 자리>에서는 '나'뿐만 아니라 '조' '약사' '약사 어머니' 등 유령이 된 존재가 많다. 그 말은 유령은 우리 곁에 얼마든지 있으며 그들의 존재가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들이 채도가 낮은 모습을 하고 살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하루하루를 살아낸다는 의지보단 살아낼 뿐이라는 수동적인 모습에서 우리 모두는 유령을 닮았지만 어쨌든 0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거운 셈을 치루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다행히 이 책은 결국 아주 작은 희망에 결말을 슬쩍 기대어 본다.

숫자 0은 얼마든지 변모할 수 있고 달라질 수 있는 대단한 수이니까.


정말 갑자기 그리고 우연히, 아니면 필연적으로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밤이 깊도록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력서를 작성한다.

이처럼 인생은 갑자기 어떤 또렷한 계기가 없이도 어떠한 연쇄작용으로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는 곳으로 가닿아 있기도 한다.

아마 이렇게까지 되는 이유는 1에 가기 위한 마음과 노력 덕분이고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수점을 밟지 않고 더 높은 숫자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도 보인다. 결국 우리들은,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건 이 무수한 0의 자리에서 맴돌며 삶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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