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 다산책방 청소년문학 3
스즈키 루리카 지음, 이소담 옮김 / 놀(다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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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

사실 제목만 봐서는 진부하고 따분한 엄마와 딸 이야기가 아닐지 싶었다.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다가 어떤 계기로 서로를 알아가는 뭐 그런 이야기쯤?

제목이 이 책의 진가를 너무 쉽게 평가할 것 같아 속상한 소설은 오랜만이다. 그만큼 웃기고 재밌고, 또 슬쩍 감동도 있다.

 

현재 만 열다섯 살 소녀가 이 책의 작가인데 천재 소설가라는 수식이 붙는 이 소녀의 책은 읽는 내내 '정말 학생이 쓴 거라고?' 의심을 들게 한다.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 책의) 화자 딸 다나카 하나미는 남편, 가족, 친인척 하나 없이 막노동으로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엄마 다나카 마치코와 둘이 산다. 여기서 포인트는 '가난'이다. 삶을 힘들고 어둡게 만드는 가난. 하지만 이 모녀가 이 가난을 대하는 방식은 굉장히 색다르다.

반값 세일에서 얻은 과일을 행복하게 챙겨 먹고, 비싼 놀이동산에 가고 싶은 하나미는 엄마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자판기 아래 동전을 줍는다. 대단한 식성을 지녀 밥이면 모든 것이 오케이인 엄마. 그런 엄마를 대하는 딸은 가감 없이 솔직하고 직관적으로 엄마를 사랑한다. 서로 사랑하는 방법이 좋다. 가난을 핑계로 미안해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둘. 없으면 없는 대로, 어쩌다 행운이 생기면 그것대로 행복하게 여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도 참 행복했다. 가난은 죄도 아니고 불편함도 아닌 아무것도 아니었으므로.

여러 에피소드가 있는데 대체로 유머러스하다. 몇 년 만에 책 읽으면서 실소를 터트렸는지.. 과연 학생다운 솔직함이 내숭 없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 같다.

아빠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 궁금해하는 딸. 그런 딸에게 옆집 아저씨의 옛날 사진을 갖다 주며 아빠라고 말하는 엄마. (금방 들통난다)

어린 여자아이가 수영을 하면 위험하단 말에 남자 수영복을 입혀 놀게 하는 엄마. (특이해..)

가끔이 철딱서니 없어 보이는 듯 보여도 갑자기 유식한 문장을 말하는 엄마.

예전 꿈이 닷짱이었다고 말하는 말하는 엄마 (닷짱: 절에서 잡일을 하며 그 몫으로 절에서 머무르는 사람으로 성묘에 바치는 모든 음식을 맘껏 먹을 수 있어서 꿈이었다는..)

툭툭 튀어나오는 엄마의 성격을 드러내는 문장은 어이가 없다가도 그럴 수도 있지 뭐 생각하게 한다. 꼭 꿈이 거창해야 할 이유는 없고, 진실을 밝혀야 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마치코는 공사 현장에서 여자로서는 혼자 일하는데, 정직한 노동으로 밥 벌어먹고사는 고단함이 언뜻 느껴지기도 하지만 유쾌한 생각과 단단한 태도로 딸과 살아가는 모습이 멋있다. 바로 이 책이 힘을 내는 지점이다. 현실이 단순하면 행복은 멀지 않다는 것.

딸의 시선에서 묘사되는 엄마의 여러 면모는 잘 들여다볼수록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어떤 남자와 사랑을 해서 자식을 낳고 살아왔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딸을 사랑하는 마음 가득 담아 이름을 지어주며 현재를 즐겁고 충실하게 살기 바라는 마음에서 곧음이 느껴진다.

아래 밑줄 그은 문장은 책을 관통하는 주제이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삶에 대한 성찰이다.

오랜만에 에세이가 아닌 소설로 묵직한 이야기를 만났다. 환상과 기대, 드라마 따위 반전 결말은 없지만 왠지 우리 옆에 있을 것만 같은 사람의 묵직한 이야기로 힘을 얻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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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엄마랑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뭐가 좋을지 얘기한 적이 있다. 부자가 좋다고 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벌레가 좋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먹고 배설하고 그냥 사는 거야. 삶의 보람이니 의무니 과거니 장래니 일이니 돈이니 하는 것과 관계없이 단순하게 살다가 죽는 게 좋겠어"

그래도 같이 살다 보니 소소한 부분에서 언뜻 보이는 것이 있다. 우선 먹을 것에 한해서는 먹보나 식탐 수준을 넘어 이상할 정도로 집착이 강하다. 엄마를 보고 있으면 먹는 게 곧 사는 것이라고 절절하게 느낀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아무리 절망적이고 최악의 상황이라도 그 사람 나름의 희망이 있으니까 살아가는 것 아닐까? 비록 바늘 끝처럼 보잘것없는 희망이라도, 희미한 빛이라도, 환상이라도, 그게 있으면 어떻게든 매달려서 살 수 있어.

슬플 때는 배가 고프면 더 슬퍼져. 괴로워지지. 그럴 때는 밥을 먹어. 혹시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슬픈 일이 생기면 일단 밥을 먹으렴. 한 끼를 먹었으면 그 한 끼 만큼 살아. 또 배가 고파지면 또 한 끼를 먹고 그 한 끼만큼 사는 거야. 그렇게 어떻게든 견디면서 삶을 이어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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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최혜진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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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방과 달라서 내 손길과 발길이 수없이 닿아야 하고, 눈길이 가야 해요. 그런 시간 끝에 집과 나 사이에 어떤 길이 생겨서 '내 집'이라는 감각이 생기는 거죠... 저는 집안일이라는 반복적 행위가 삶의 비트를 이룬다고 믿어요. 내 삶에 음악성을 부여하는 근간인거죠. 지겨울 때도 있죠. 하지만 손끝으로 느끼는 단단하고 구체적인 생의 감각은 살림으로부터 와요.
 
거대한 대의와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인 세계의 집, 밥, 일상을 몸으로 그려낸 그들의 작품이 좋으면서, 동시에 이런 일상성에 대한 찬양이 또 다른 억압의 빌미가 될까 두렵기도 하다. 일상 속 작은 행복에 기뻐하는 자세에 열광하면서, 그 작은 행복을 가꾸는 손이 누구의 것인지 분명히 드러내지 않는 건 온당치 않다.

(책 속 밑줄 그은 문장들)


작가님의 북콘서트도 다녀오고 이런저런 다른 리뷰들도 많이 찾아 보았지만 역시 타인과 내가 밑줄 그은 문장들은 다르다. 주부의 속성을 떼어 놓고 책을 볼 수 없는지라 위의 문장에 눈길이 특히 머문다. 가사 노동의 희미함을 그림과 문장으로 뚜렷하게 내어 놓은 것. 혼자 살림을 도맡아 하노라면 외롭고 불안한 마음도 든다. 그럴 땐 타인의 살림살이를 바라보는게 위안이 될때가 있는데 북유럽 그림에서 진정성이 느껴질줄은 몰랐다. 어딘가 안갯속을 헤매는 듯한 터치감에서 보이는 그들의 덤덤하고 담담한 일상.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그림의 분위기가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잘 아문듯 하다. 너무 화려하지도, 또 너무 가난하지도 않은 소박한 표정과 몸짓. 그들에게서 팍팍한 가사 노동을 위로 받았음은 물론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살아가는 것일지 방향도 얻은 것 같다. 
책을 읽고 꿈이 생겼다면 나도 직접 북유럽 미술관에 가서 그림이 주는 기운을 몸으로 직접 받고 싶달까. 
일상과 가깝게 연결된 북유럽에 대한 책, 반가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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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참 쓸모 있는 인간 - 오늘도 살아가는 당신에게 『토지』가 건네는 말
김연숙 지음 / 천년의상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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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글쓰기 모임 하는 곳이 만든 주제가 '내가 되고 싶은 책'이라고 한다.
딱 읽고 무릎을 탁 쳤다. 주제가 너무 멋있어서다. 내가 되고 싶은 책이라니.. 읽고 싶은 책보다 훨씬 능동적이고 실천적인 책 읽기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요 근래 몇 권의 책이 생각났다. 그중 하나가 '나, 참 쓸모 있는 인간'이란 책인데 최근 포털 사이트에서 요즘 방영 중인 '미스터 선샤인'과 '토지'의 비슷한 점을 이야기해 놓은 걸 본 적이 있다. 바로 이 책이 토지에 나오는 인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하기 때문. 사실 '새롭게'라는 말은 나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일지도 모르겠다. 부끄럽지만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는 3권쯤 읽다가 포기한 게 여태 이어지고 있고, 어렸을 때 tv로 본 토지만이 조금씩 생각날 뿐이다. 그런데 요즘, 케이블에서 예전의 그 토지를 방영해 주니 책을 읽으면서 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서희와 길상이만 있는 줄 알았던 어린 나의 시각이 넓어져 이제는 주인공 옆 주변인들의 이야기가 더욱 실재감 있게 다가온다.
망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자신의 하인과 결혼도 불사할 만큼 독하게 여겼던 서희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 보니 무당의 딸 첫사랑 월선이를 평생 마음에 품고도 조강지처와 첩에게 휘둘리며 사는 용이, 서희 집안의 재산을 가로채는 조준구의 아들 꼽추 조병수, 박경리 작가님이 토지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로 꼽은 주갑이의 삶은 퇴근 후 지하철에서 읽는 포도당 영양제 같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물론 '나, 참 쓸모 있는 인간'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하나같이 다 반짝이는 바람 같은 인생을 살고 있어서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에서 굉장히 큰 힘과 위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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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라는 말을 쓴다는 것은 인간의 '소유' 즉 인간이 지닌 욕망, 감정, 관계, 판단, 선택 등등에 얽힌 인간 삶에 주목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연과 같은 순수한 마음이나 인간 존재의 본성보다는 욕망이 들끓고 있다든가 그것 때문에 서로 경쟁하고 싸우고 죽인다든가 하는 세상만사를 통해 인간의 삶을 이야기해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토지'라는 제목에 담긴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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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순수와 욕망을 양쪽으로 굴리며 살아간다. 어떤 것을 우선순위에 두고 가치있게 쓸 것인가는 각자 판단하는 몫이고 행동해야 하는 책임감인데 토지에 나오는 인물은 워낙 방대하고 선택하는 삶 또한 다양해서 여러 면을 교훈으로 삼기 적당하다. 그래서 내가 되고 싶은 책에 뽑히기도 했고.


-조병수-

탐욕스러운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지만 천성은 착한 꼽추 조병수. 선천적인 결함 때문에 자신이 따르고 싶지 않은 부모님을 거역하기 힘들고, 죽으려 강가에 뛰어들어보기도 하지만 살겠다고 나온 자신을 원망할 줄 아는 사내.

"부모의 악업으로 얻은 재물로 자신이 연명되고 있다는 그 뼈를 깎는 고통, 더러운 곡식을 아니 먹으려고 수없이 기도했던 자살, 그러나 생명에의 집착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포기하였고 더러운 물 더러운 곡기를 미친 듯 빨아 당기는 자신의 모습 앞에서 '병수는 죽지 못하는 치욕 때문에 미쳐버릴 지경으로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삶 속에서 조병수에게 배울 수 있는 건 '양심 있는 사람'일 수 있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이 끌린 건 자신의 삶을 바꾼 능동적인 힘이다. 부모가 도망가면서 조병수를 버리다시피 한 덕분에 홀로 설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졌고 목수라는 직업은 '자기 구원의 길'이 되어 나무를 만지며 예술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 과정에서 그의 삶이 단단하게 바뀌었다.

"예술을 한다는 건 단지 무언가를 표현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표현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만나고, 자기 삶을 변환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조병수는 부모의 죄 때문에 자신이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임으로써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낼 수 있게 되고 운명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토대로 삶을 탄탄하게 쌓는다. 결국 조병수는 이제서라도 인생을 제대로 걷는다고 볼 수 있으니 어찌 안 반할 수 있겠나.


-용이-

하... 용이는 참 뭐라고 할 수 없는 참 답답하고도, 내 남편이면 정말 용서할 수 없는 남자이기도 한.. 하.....
tv 드라마에서는 박상원 배우님이 연기를 하시는데 정말 보면서 복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하필 내가 처음 본 에피소드가 용이 조강지처 강청댁이 콜레라에 걸려 죽는데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첩이 용이 아들을 낳는다. 죽어가는 부인 곁을 떠나 첩의 아이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강청댁은 너무 억울하고 슬픈 나머지 기어이 마당까지 기어 나와 죽음을 맞이하는데...쓰면서도 참 우울하고 사람 인생이 다 뭔가 싶다. 용이를 너무 사랑한 죄밖에 없는 강청댁의 삶이 참으로 허무하고 허망할 뿐.

어쨌든 내가 여기서 다룰 이야기는 그래도 흘러가는 용이의 인생이다. 용이라고 뭐 이렇게 인생이 꼬이고 싶어 그랬겠냐마는 '나, 참 쓸모 있는 인간'에서 용이는 부끄러움을 안고 사는 사람으로 비춰진다.

"용이가 괴로워하는 부분, 자기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을 그냥 '살아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용이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토해내는 모습에 눈길이 끌렸습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용이는 타인의 시선 안에 점점 움츠러들고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었다. 거기다 가난은 남자로서의 용이 자존심도 꺾게 만들어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그저 두 여자와 아들 홍이에게 끌려다니기만 한 삶뿐이었다. 그나마 간도에서 월선이와 홍이를 두고 욕심 많은 임이네를 데려와 멀리 떨어져 사는 일이 월선이를 위한 일이었는데, 어떻게 보면 임이네에겐 못할 짓인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개척하기 위한 특별한 일도 아닌 것 같아 시시한 건 사실이지만 유일한 사랑인 월선이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부끄러움, 그것이 용이로 하여금 묵묵히 자기 삶의 무게를 견디어나가게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용이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데서 머무르지 않고, 그로부터 자신을 바라다보고, 자기 삶의 무게를 견디어 나갑니다. 사람이 마지막으로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을 견디어낸다, 지금의 삶, 그때그때,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이 인간이 가진 대단한 힘일 수 있음을 용이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내심은 바닥을 치고 참으면 사람을 우습게 보는 이 시대에서 ‘무엇을 견디어낸다는 일’은 참 어리석어 보여도 결국은 우리가 지켜야 할 마지막 무언가 같은 거다. 부끄러움으로 그치지 않고 거리를 둬서 그 부끄러움을 인정하고 견뎌낼 수 있으면 어느 정도 직장 생활은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들고, 직장인뿐 아니라 자영업자, 주부, 노동자, 근로자 등 모든 일선에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용이의 꾸역꾸역 살아가는 힘은 위로가 되기도 하겠지.


-주갑-

사실 주갑은 이 책 '나, 참 쓸모 있는 사람'에서 알게 됐다. 간도에서 동학운동을 했던 주갑이는 자신의 삶을 떳떳하게 걷는 모습을 보여준다. 긍정적이고 확신에 찬 사람, 무슨 일을 하든 계산적으로 재지 않고 따지지 않을뿐더러 작가의 말에 따르자면 거침없이 활발한 사람.

"빨래는 여자가 한다, 남자는 이래야 한다 등등에 대해 주갑이는 자신이 필요하면 하는 일이고, 내가 뭘 하든지 아무 거리낌이 없는 사람입니다. 공부하는 것은 하늘과 땅, 철기(계절) 같은 자연에서 체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얽매인 생각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옳다고 생각하는 일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드는 멋진 사내 주갑. 미안하지만 용이와 비교하자면 참으로 호방하고 쾌활하여 복잡한 상황을 애초에 만들지 않고 단순하고 깔끔하게 인생을 자로 자르듯 사는 것 같다.

"'안 배워도 독립운동하고, 일자무식이어도 나는 동학운동했다'라는 주갑이의 말을 다시 떠올려봅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주갑이라는 사람은 자기 삶을 그냥 살아갑니다. 그냥 살아간다는 것은 행위 그 자체의 온전함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나가는 것 자체, 실천한다는 것 자체가 삶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얼마나 간단 명료한 삶일까. 요즘 말하는 '미니멀 라이프' '단순한 삶'과 일맥상통 할지도 모르겠다. 옳다고 믿는 나의 신념을 의심하지 않고 한 길로 걸을 수 있다는 건 내 삶의 주체가 누구인지 바로 알고 가는 것과 같으니 복잡할 일이 없다.

아무리 내 인생이 쓰레기 같다고 느껴져도 어쨌든 내 것이니 품을 이도 나밖에 없다는 걸 묵직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책이다.

작은 사무실에서도 온갖 인간군상을 만나 관계를 맺는다. 누구에겐 후배로, 또 누구에겐 동료로 인정받으며, 상대방에 따라 달라지는 나의 모습, 대화 내용, 분위기를 고려하고 결국은 나의 가치관이 그곳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으면 한다. 또한 매일 움직이고 있는 내 발걸음에도 확신이 찰 수 있길 바란다.

서희같이 입체적 인물도 흥미롭지만 이번 책을 읽으며 좋았던 점은 평면적으로 보일지언정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살아가는 평사리 사람들이 내게 더 인생의 영감을 주었단 점이다. 때로, 아니 대체적으로 역사는 잔다르크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꾸역꾸역 이어오기 마련이므로.


“토지는 그저 관계 속에서 어떤 흐름이 이어지는지를 보여줄뿐입니다.”

<나, 참 쓸모 있는 인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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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서유미 지음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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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미 작가는 내게 좀 특별하다. 한 권의 책 '쿨하게 한걸음'은 첫 사회 생활 동안 한껏 방황하는 나에게 어떤 삶의 이정표 같고 숨쉬게 해준 오아시스 같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걸 읽은 뒤 사표를 던지고 런던으로 어학연수를 떠날 수 있었던 용기는 주인공 '연수' 덕분이었다.

그 이후로 서유미 작가의 모든 책을 읽어 왔고, 그 중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는 쿨하게 한걸음 뒤로 좋아하는 책이 되었다.
내가 좀 우울한 감성을 좋아해 그런지는 몰라도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책은 일상을 살아가는 소시민의 좌절과 슬픔이 날 것으로 보여 소설의 공감력이 더욱 커진 것 같다.


지방에서 떠나와 서울에서 팍팍한 자취 생활을 하고 있는 자매 이야기(에트르), 성매매 삐기가 직업이지만 기형도 시를 읽으며 위로 받고 이 생활을 끝내고 싶은 청년(개의 나날), 이혼 후 찜질방에서 생활하며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중년 남성(이후의 삶), 치매인 어머니와 곧 출산하는 딸 사이에서 방황하는 중년 여성 이야기(변해가네) 등이 전하는 이야기는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동시에 다가올 미래와 겹쳐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많은 감정 이입을 하게 된 단편 소설은 에트르와 개의 나날, 그리고 변해가네이다.


취업준비생 두 자매는 나날이 높아지는 월세 때문에 열심히 일해도 늘 그 자리인 것 같은 하루를 산다. 내년부터 올려야 하는 보증금이나 월세를 감당하려면 일을 더 해야 하던지, 지금의 집보다 더 적은 공간으로 밀려나야 한다.

"

사를 가고 싶은 것과 이사를 갈 수 있는 것은 다른 문제라 보증금을 올리려면 대출을 받아야 하고 월세를 더 내려면 수입이 늘어나거나 지출을 줄여야 했다. 현실적으로는 대출이 불가능하고 더 벌 수도 없으니까 쓰는 걸 줄여야 했다. 그동안 잠도 줄이고 게으름 피우는 시간도 줄이고 말도 줄이고 꿈과 기대와 감정까지 줄이며 살았는데 여전히 뭔가를 더 줄여야만 했다.

"

 

열심히 사는데도 매일이 팍팍할 때, 우리는 한숨을 쉰다. 뭘 더 짜낼 볼 힘도 없고 그렇게 무기력하게 시간을 죽일 뿐이다. 특히 아직 미래가 한참 남은 20대에게서 이런 현상이 반복되니 이게 정말 나의 문제인건지, 정부의 무능력인건지, 지구가 망해가는 징조인지 알 수 없다. 그저 내 몸을 편히 뉘일 수 있는 그런 공간이면 충분한데...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단편집 소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에트르만큼은 결말이 뚜렷하지 않다. 자매가 무사히 이사를 했는지, 아니면 일을 더하면서 고단한 일상을 더 쥐어짜는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면에서 어떤 위로가 된다. 건조한 일상의 이어짐이 막역한 불행보다는 유일한 희망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작은 기대감이랄까?
밝음만이 행복과 기쁨으로 이어질 순 없는게 어쩌면 인생인 것 같기도...

그리고 소시민에서도 좀 더 바깥으로 밀려난 성매매 삐기인 나. 가출 이후 변변한 직업 없이 살다 거구의 몸으로 겨우 할 수 있는 일이 조라는 인물 밑에서 야한 사진을 찾아 헤매고 여러 SNS에 미끼를 던지는 삶이다. 그런 매일 속에서 어느 날 예전에 엄마의 남편이 될 뻔했던 장의 죽음 소식을 듣고 그가 남긴 유언을 듣게 된다.

 

 

유일하게 새 아빠로 낙점된 장은 결국 엄마와 헤어지게 되고 나와도 연락이 끊기게 되는데 장은 그동안 나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일기장을 유산으로 남겨 놓았다. 사랑이라곤 받아 본 적 없이 살아왔던 나에게 그의 일기장은 뭔가 마음을 건드리게 되고, 야한 사진의 계정 안에서 유일한 숨 쉴 공간이 되는 한 기형도 봇에서 읽은 문장은 조 몰래 훔쳐보는 유일한 문장이자 희망이 된다.

"

읽을 수 있는 글이지만 내가 속한 세계의 언어가 아니었다. 포르노를 처음 접하고 호기심으로 꽉 차 속절없이 빠져들던 때처럼 거기 적힌 글들을 홀린 듯이 읽어 내려갔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내용도 있고 알듯 말듯해서 몇번씩 읽어야 하는 글도 있었다. 그런 문장이 왜 나를 건드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라는 문장을 봤을 때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건 내가 하고 싶던 말이었고 내 안에서 들끓던 말이었다.

 "

 

내가 느끼기에 에트르 보다는 조금 더 열린 밝은 결말이었지만 아니어도 상관없다. 주인공이 본능적으로 품고 있는 저 문장에서 어떤 희망을 엿보았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보니까. 지긋지긋한 삶을 조금이라도 지탱할 수 있는 뭔가가 생겼다면 운명의 각도는 조금씩 변하지 않을까?

 

괜시리 마음이 가는 이야기가 있다. 나의 삶과 비교해 볼 수도 없고 미래를 예측하기도 어렵지만 어떤 상황에서 주인공이 견디는 태도가 단순히 마음에 들 때이다.


치매 어머니를 요양소에 처음 모시러 가는 날, 딸에게서 곧 출산을 할 것 같다는 전화가 온다. 이래저래 마음이 복잡한 상황에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슬프고, 자식은 자식대로 걱정이지만 아이를 다 키우고 이혼한 상황에서도 의연히 삶을 차분하게 살아가는 여성이다.   
"

그는 이제 남편이 아니라 전남편이고 내 삶에 어떤 문장도 보탤 수 없게 되었다. 원룸을 계약한 뒤 텅 빈 공간을 둘러보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안도의 한숨이 천천히 흘러 나왔다. 몇십년만에 처음 느끼는 홀가분함이었다.
(중략)
읽고 싶은 책을 샀고 눈치 보거나 방해받지 않고 아무 때나 펼쳐서 읽었다. 뜨거운 차를 마시며 책을 더듬 더듬 읽다가 좋은 문장을 만나면 밑줄을 그었다. 그럴 때만 찰나지만 이 생활이 충분하고 완벽에 가깝다는 기분이 들었다. 책을 읽으며 나는 줄거리만 남은 삶에 대해 생각했다. 배경이 지워지고 관계와 상황이 사라지고 묘사와 대사가 없어져 마침내 몇줄로 요약되는 삶

 "

 

자신의 내면을 방치하지 않고 지금이라도 오롯이 홀로서기를 한 여성은 그렇게 단단한 일상을 책과 함께 새겨 나간다.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를 선택하고 미래를 바꾸는 용기는 언제라도 시작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서유미 작가의 책은 우리의 삶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그 안에서 자생적인 치유와 위로를 건넨다. 물론 아까 말했듯이 표현 방식이나 문체가 꽤 건조한 편인데 이 점을 내가 참 애정하는 것 같기도 하다. 너무 말랑하고 과하게 세상은 살 만한 것이라 예찬하지 않고 누구나 겪는 삶의 애달픔을 달래지도 않는다. 인물이 처한 상황에서 어찌되었든 변화하고자 하는 하는 일말의 희망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거기서 독자가 무얼 느끼냐는 오직 우리의 몫일뿐이지만 충분히 무언가를 건져 올릴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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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수집 생활 - 밑줄 긋는 카피라이터의 일상적 글쓰기
이유미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블로그에도 공공연히 얘기했지만 나의 대학생 시절 장래희망은 카피라이터였다.
몇 줄의 글을 이리저리 굴려 상품을 가치 있고 근사하게 표현하는 작업이 소위 말해 '쿨'하게 보였다.


관련 학과 수업도 듣고, 신촌에 있는 학원에서 카피 라이팅 수업도 들었지만 재능과 열정이 부족했는지 카피라이터로서의 직업은 갖지 못했다. 그래도 출판업과 마케팅사에서 단 몇 줄의 카피 작업을 해야 했으니 카피라이터 꿈을 1/4 정도는 이룬 셈이다.

처음 문장수집생활의 내용을 접한 곳은 브런치이다.
관심 작가로 등록을 해 놓고 이유미 작가가 쓴 글이 뜨면 그때그때 보았다.
그때 쓴 글이 소설로 카피 쓰기. 그게 책으로 나온 바로 문장수집생활이다.

참 신선했다. 책이라면 나도 얼추 읽는데 역시 작가는 다른 것인지, 같은 문장을 읽고 까먹는 나와 달리, 밑줄 긋고 카피로 쓸 일이 없을까 이리저리 궁리하는 카피라이터의 삶은 참 부지런했다.


소설은 삶에 가장 깊이 맞닿아 있다. 때로는 섬세하고 처절하면서, 또 때로는 얼렁뚱땅 설렁 넘어가기도 하는 모순적인 삶을 풀어내는 데는 소설만큼 정확한 것이 없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 일상의 제품을 파는 카피가 딱 들어맞을 수 있겠다 싶었다.

문장수집생활을 읽는 내내 '대학생 때 이 책을 알았더라면'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치 옆에서 사수가 친절하게 글이란 이런 것, 문장이란 이런 맛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옆에 끼고 많은 문장을 찾고 다듬었다면 내가 꿈꿨던 카피라이터를 좀 더 현실적으로 열망해 보지 않았을까?

자칫 딱딱해 보이는 글쓰기의 이론적인 말들은 이유미 작가가 밑줄 그은 소설 속 문장이 어떤 카피로 활용되는지 실제 예를 들며 설명한다. 현대 29CM 온라인 편집숍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있는 작가의 현실 조언인 셈이다.
그러니 문장수집생활은 생생하게 살아있고, 우리가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는 교과서로 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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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문장]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할 때는 청소가 최고야. 특히 냉장고 청소가 특효지.
[카피 응용]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요즘, 개운하게 냉장고 청소 어떠세요?
복잡한 생각 정리에 000이 함께 합니다.

글을 쓸 때 '사적인 시점'을 가져보는 게 중요하다. 내가 겪은 일일수록, 가져봤던 감정일수록 상대도 느꼈을 확률이 높다. 내가 언제 청소를 하는지 떠올려 보자.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마음이 붕 뜨고 혼란스러울 때 사람들은 청소를 시작하기도 한다. 주변이 정돈되면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니까. 그런 포인트를 이용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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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정렬하고 다듬어 새로운 카피로 내놓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책이므로 평소 글을 써야 하는데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은 사람, 매일 카피를 써야 하는 사람, 글 쓰는 게 막연한 사람이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나 또한 문장수집생활을 읽으면서 여러 문장에 밑줄을 긋고, 간간이 적고 있는 브런치에 어떤 이야기를 쓸지 아이디어를 얻었으니깐 :)

책의 재밌는 부분이 있다면 앞과 뒤표지가 따로 있어서 앞부분은 문장 속 카피 50개를 소개하는 것이고, 뒤편엔 카피 부록같이 글쓰기의 주의점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 그러니 이 책은 글쓰기를 하고 싶은 이들이 꼭 옆에 끼고 있으면 하는 책이다.
뿐만 아니라 50개의 소설 문장도 나오기 때문에 나중에 독서 목록 리스트가 추가될 가능성이 높기도 하다. 그만큼 읽고 싶은 책을 발견하는 기쁨도 클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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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 '시기와의 궁합', 타이밍이 중요해서 지금 당장 페이지가 안 넘어간다고 나와 안 맞는 게 아니다. 잘 읽히지 않던 책도 두세 달 정도 묵혔다가 다시 꺼내보면, 그땐 왜 그리 안 읽혔을까 싶게 책장이 술술 넘어가기도 한다. 한 페이지에서 당최 넘어가질 않는다면 과감히 덮어두자. 내가 읽어야 할 책이라면 반드시 다시 만나게 돼 있다. 책은 그렇게 내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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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엔 간지럽지만 어쩌면 문장수집생활은 지금 나의 이 시기에 운명처럼 만난 책이기도 하다.
빡빡하고 건조한 회사 생활에서 책 속 문장을 찾아 더듬더듬 위안을 삼는 나에게 여러모로 글에 대한 편견과 어떻게든 글쓰기를 지속적으로 해야겠다는 다짐을 안겨 주었으니까. 때론 막막하고 기댈 곳이 없다고 느낄 때 조용히 현재 나의 상황을 글로 풀어본다든가, 좋아하는 책의 구절을 필사하는 것만으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됐다고. 나만의 글을 적어 보고 싶을 때 이 책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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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시간마다 지하철에서 소설을 읽었다. 공감되는 문장에는 밑줄을 그어 놓고, 사무실에 도착해서 타이핑으로 필사를 했다. 일종의 문장 수집이다. 그런 파일이 쌓이고 쌓여 수백 개가 넘었다. 업무 중 급하게 카피를 써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면 주제에 맞는 문장을 검색해 카피에 응용했다. 나름의 카피 라이팅 훈련이었다.

다르게 보고, 다르게 쓰고, 다르게 사는 삶.
그게 내가 카피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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