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상과 모던뽀이들 - 산책자 이상 씨와 그의 명랑한 벗들
장석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며칠을 1930년대 경성거리를 헤맸다. 판탈롱 바지와 반짝이는 에나멜 구두를 신고
한껏 멋을 부린 모던껄이 되어 양복을 걸쳐 입고 중절모를 쓰고 스틱을 든 모던뽀이들과
미시꼬시 백화점의 옥상정원 파라솔 아래에서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여급에게
커피도 주문해 보기도 하고,
양인과 같이 창백한 얼굴과 봉두난발과 구레나룻에 양복을 걸치고 백구두를 신고
스틱을 휘휘 돌리는 이상과 땅에 질질 끌리는 망토 같은 인바네스 외투를 입고 높은
중산모를 쓴 구본웅이 걸어가는 모습도 바라보고,
화신상회 앞에서 동대문행 전차를 타고 있는 갓빠머리를 한 박태원도 만나고...
이처럼 <이상과 모던뽀이들>은 이상과 그의 벗들의 일상과 백화점,까페,전차 등
신문물이 급격하게 휩쓸기 시작한 회색조의 근대 경성 풍경을 선명하게 재현하여
경성거리를 걷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시대를 앞서간 전방위 예술가, 경성을 누비던 모던보이, 불행하게 요절한 천재 시인,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문제적 작가....
이상을 수식하는 문구는 끝도 없다. 저자는 거기에다가 ‘지구에 너무 일찍 온 사나이’
'트렌드 리더'라고 덧붙인다.
책은 크게 4부로 나뉜다.
건축가이며 화가였으며 작가였던 이상의 삶을 살펴보는 1부,
1930년대 근대 경성 풍경을 샅샅이 훝어보는 2부,
이상이 참여했던 구인회 멤버를 중심으로 그의 벗들을 소개하는 3부.
이상이 죽기전에 머물렀던 일본에서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4부
카프카에게 프라하가 있고, 제임스 조이스에게 더블린이 있고, 발터 벤야민에게
파리가 있고, 폴 오스터에게 뉴욕이 있다. 그리고 1930년대 모던보이들에게는
근대 경성이 있었다.
이상을 비롯한 경성의 산책자들은 “근대 도시의 기호를 해석하고 기록하며 ‘고고학자’로
거듭난다”. 그러나 새로운 서양 기술과 유행들이 밀려든 경성의 모습은 이상과 같이
시대를 훨씬 앞서는 근대의식을 가진 ‘모던뽀이’조차도 ‘졸도’할 듯한 위협과 현기증을
느낀다.
“암만해도 나는 19세기와 20세기 틈사구니에 끼여 졸도하려 드는 무뢰한인 모양이오.
완전히 이십세기 사람이 되기에는 내 혈관에는 너무도 많은 19세기의 엄숙한 도덕성의
피가 위협하듯이 흐르고 있소그려.”
이상은 독자들 항의에 연재를 그칠 정도로 난해한 연작시 ‘오감도’ 을 발표하는 시대를
앞선 문학를 추구하며 예술적 자유를 맘껏 누리고 싶은 근대인이었으나, 정작 자신은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자식이 없는 큰아버지 양자로 입양되는 봉건의 굴레를 쓰고
있었고, 맏아들로서 가난한 부모님께 생활비를 못 드리는 괴로움에 고통 받고, 아내의
정조가 의심스러워 괴로워하는, 자신속에 남아 있는 19세기적 자신 사이에서 갈등했다.
이처럼 이상은 19세기와 20세기에 끼인 경계인으로 헤매이다 근대와 전근대, 조선과
일본, 혈통적 의무와 예술적 자유, 친부와 양부 사이에 끼어 있는 이중적 업압에
반발하며 '튕겨'나간다.
가족,사회가 부과하는 책임과 의무들, 인습적 사고방식, 당위적 강령들에 반발하고
일탈하고 분열하면서 그 당시로서는 수용할 수 없을 정도의 시대를 크게 앞지른
모더니즘 문학을 발표한다.
그는 소설을 시처럼, 수필을 시처럼, 시에 기하학적 도형을, 숫자판을 도입하고, 문법해체
등 도저한 형식 실험을 한다. 이상의 작품이 오늘날까지도 모든 문학평론가에게
매력적인 이유가 아무리 분석해도, 아무리 껍질을 벗겨보아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양파같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한 가지로 정리하기 어려운 이상의 복잡다단한 문학을 저자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신경증 환자들의 가족 로망스' 이론을 가져와 양자입양으로 빚어진 트라우마를
설명한다. 또한 발터 벤야민, 지그문트 바우만, 들뢰즈의 사유와 철학을 빌려와 1930년대
경성을 말한다.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있어 자칫하면 이론과 겉돌수 있는 현대비평이론을
가져와 자연스럽게 근대라는 키워드에 녹여내는 노련함을 보여준다. 그동안 요부라고
칭하던 금홍에 대해서도 이상 신화를 입체화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사악함과 애욕이
실제와 달리 과장되고 날조되었다는 해석을 펼친다.
김유진 감독의 ‘금홍아 금홍아’라는 영화로, 유상욱 감독의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로
학창시절에 배운 '날개'로 감히 그의 문학과 정신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의 작품은 지금
읽어도 새롭고 신기할 정도로 신선하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예술가들에게 창작의 영감이
되어 각종 콘텐트로 재탄생하며 날로 진화하나 보다.
그러나 이상을 복잡한 사생활로 인해 '퇴폐' 내지는 '광인'으로 각인된 이미지를
부각시켰던 이상에게 씌워진 잘못된 인식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을 제대로 안내할 길잡이인 이 책이 그 길을 도와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바이올리니스트 미샤 엘만의 연주를 좋아했던 이상.
100년도 더 지난 지금 나도 엘만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오감도 15호와 함께.
그리고 이상과 금홍이가 다녔던 대한문을 거쳐 중추원, 경성재판소, 이화학당,
경성방송국, 이화여전으로 이어지는 덕수궁과 서소문동을 잇는 정동길을 걷는
경성산책에 하릴없이 동참하고 있다.
우리는 왜 지금까지 이상을 이야기하는지,
혹은 이상(異常)한 인간 이상(李箱)이 그리 좇았던 이상(理想)을 알 수있을까 하는
미련한 생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