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 하루 한 장만 보아도, 하루 한 장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5월
평점 :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이유는 마흔 세개쯤 된다. 일단 탄성부터 지르고
시작하고 싶다.'지화자 ~ 좋다!!'
제목만 봐도 가슴이 복받쳐 올 준비가 끝났다.
군더더기 수식어가 필요없는 손철주가 쓴 옛 그림 에세이다.
하루 한 점만 보아도, 하루 한 편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인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는 저자가 아주 작정한 듯한 찰진 글맛에 후루룩
빠져버려 전전두엽을 마구 두드리며 퍼져가는 짜릿한 쾌락을 맛보게 한다.
쾌락은 과정은 즐기는 자들의 몫이니 우린 그저 작가의 한상 그득차려놓은
밥상에서 맛있게 감상만 하면 된다.
옛 그림 68편을 꼽아 봄,여름,가을,겨울로 나누어 감상하도록 하지만 굳이
계절과 시간을 따질 필요가 없다. 그냥 척 하고 아무페이지나 펼쳐진 대로
그냥 멈춰서 읽으면 문화 한량이 따로 없다.
오늘같이 비가 와서 미를 견주던 꽃들이 하염없이 지어 아쉬운 날에는
차 한잔 마시며 활짝 핀 '양귀비꽃과 벌 나비'를 즐기는 호사를 누리면 된다.
'양귀비꽃 피는 오월이다. 아름답기로 둘째가라면 투정할 꽃이 양귀비다.
모란이 후덕한 미색이라면 양귀비는 치명적인 매력이다. 그 고혹적인 자태는
그러나 쉽게 보기 어렵다. 함부로 키우다간 경을 친다. 열매에서 나오는
아편 떄문이다. 무릇 아름다운 거은 독이 있다.
현재 심사정이 그린 양귀비가 이쁜 짓 한다. 낭창낭창한 허리를 살짝 비틀며
선홍색 낯빛을 여봐란 듯이 들이민다. 아래쪽 봉우리는 숫보기마냥 혀를
스스럽게 빼물었다. 벌과 나비는 만개한 꽃을 점찍어 날아든다. 그들은 용캐
알아차린다. 저 꽃송이의 춘정이 활활 달아올랐다. 날버레와 꽃의 정분이
이토록 농염하다.'
2쪽씩 씌여진 해박한 지식과 감성을 쏟아낸 해제의 글을 읽다보면 그림을
보는 눈이 달라져 감을 느끼게 된다.
그의 설명에 앞장을 넘겨 다시 한번 찬찬히 본다. 이제보니 아까 보이지
않던 낭창함을 자랑하는 양귀비의 허리도 보이고 부끄러운듯 혀를 내민
봉우리도 눈여겨보게 된다. 벌과 양귀비의 짧지만 황홀한 사랑에는 살짝
부러움도 가져본다.
더불어 익숙지 않지만 아름다운 우리고유의 말들도 새삼 눈에 들어온다.
수줍고 부끄러운 느낌이 있다는 '스스럽다'
순진하고 어수룩한 사람이나 숫총각이나 숫처녀를 일컫는 '숫보기'
털이 보드랍고 반지르르하다는 '함함하다'
가만가만 우리말들을 소리내어 읽어보니 참으로 어여쁘다.
어떻게 된 일인지 글들이 모두 노래같다.
읽다보면 옛 사람들이 부른 타령이 절로 생각나며 슬쩍 슬쩍 어깨로 장단을
맞추면서 흥을 돋군다. 나도 모르게 '얼쑤'하는 글 추임새를 넣게 된다.
꽃만 아름다울까? 아니다. 작가는 탄은 이정의 풍죽을 내놓는다.
내가 몇년 전에 간송미술관에서 넋놓고 보았던 그 작품이 역시 작가의
심미안에도 걸렸음이라.
"대나무가 바람에 맞서는 그림이다. 잎사귀에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빳빳이 서려는 대나무의 앙버팀이 눈에 띈다. 뒤편 그림자 진 대나무 때문에
앞쪽 호리호리한 대나무의 기세가 더 당차게 보인다. "
대나무에 왜 꽃이 없는가? 이런 물음에 한시 한편을 턱 던진다.
'마디 하나에 또 마디 하나
천대 가지에 만 개 잎이 모여도
내가 기꺼이 꽃을 피우지 않는 것은
벌과 나비를 붙들지 않으려 함이네'
이리 휘고 저리 굽는 꼴을 못 보고, 휘느니 부러지라고 말하며, 구차스럽게
벌과 나비를 붙들려고 하지 않는 대나무의 절개가 새삼 든든하다.
이렇듯 알맞게 다듬어진 문장하나하나가 멋스러운 데다가, 적재적소에 넘치지
않게 써 있는 한시가 운율과 가락을 주면서 쫄깃쫄깃한 글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준다.
요즘처럼 후덥지근한 날씨엔 이한철이 그린 '물구경'으로 여름을 버텨보자.

그림을 그린 이는 추사 김정희와 대원군 이하응의 초상을 그리고 고종의 어진
제작에 참여한 화원이다.
눈이 시원해지는 이 그림은 흐르는 물을 보며 마음을 씻는 관수세심의 모습이다.
그림에서 뿓어져 나오는 물소리로도 몸에 시원한 냉기를 주면서 이 더위를 모두
물리치게 할 기세다.
이렇듯 손철주가 꼽은 68편의 옛 그림은 눈에 익어 친숙하면 친숙한대로 낯설면
낯선대로 우리 그림의 멋스러움을 감탄하게 하고 새삼 옛 것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해준다.
빡빡한 여유가 없는 삶에서 일상과 섞이는게 꺼려져 잠시 멈추고 싶은 순간을
갖고 싶다면 마음씨 곱고 속 깊어 다정하고 그리운 옛그림을 보며 한가로운
여유를 즐겨보자. 한여름이 즐거워지는 이유다.
ps) 손철주는 1년에 한번은 책을 내라! 책을 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