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영화관 ㅣ 환상 시리즈
호리카와 아사코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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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처음부터 꽤 익숙하고 편안하게 읽혔다.

어딘가 기묘하면서도 묘하게 따뜻하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허물어지는 이야기.

그 중심에는 ‘게르마 전기관’이라는
조금 특별한 영화관이 있다.

주인공 스미레는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 뒤
등교를 거부하게 되고,
결국 학교를 나가는 대신 이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나는 이런 주인공 설정부터 흥미로웠다.

보통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 학생이라고 하면
어딘가 어둡고 우울한 모습을 떠올리기 쉽다.
상처를 가진 사람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그런데 스미레는 자신 역시 아픔을 가진 사람이면서도
영화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사건에 적극적으로 뛰어들며
자신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오히려 자신에게 아픔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고,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도 있다는 점이
스미레라는 인물을 더욱 인상적으로 만들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상점가에서 벌어진
하나의 행방불명 사건이 있다.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도 꽤 흥미로웠고,
그 반전을 따라가는 과정 역시 재미있었다.

그렇다고 추리에만 집중해야 하는 작품은 아니었다.
큰 사건을 따라가다 보면
그 안에서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와
또 다른 사건들이 하나씩 뻗어 나온다.

처음에는 서로 별개의 이야기처럼 보이던 것들이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하나의 큰 줄기인 영화관으로
모인다는 점이 좋았다.

사람의 주마등을 영화처럼 보여주는 영화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을
누군가는 영화처럼 바라보고,
그곳에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이어진다니.

그러한 설정 덕분인지
‘죽음이란 뭘까’라는 질문을 무겁게 생각하기보다
조금은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됐다.

무거운 소재를 지나치게 어둡거나 비극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도 이 작품만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일본 특유의 언어 감각이나, 유머, 감동을 전달하는 방식이
한국 독자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것 같은 부분도 있었다.

작가가 의도했을 법한 장면이 온전히 와닿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조금 아쉬움도 남았다.

그럼에도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보면
독특한 소재와 구성이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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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판박이
아베 코보 지음, 곽형덕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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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러움’

이 작품을 끝까지 읽고 난 후,
가장 먼저 든 감정이다.

결국, 이 남자는 진짜 화성인인가,
아니면 그저 지구인일까.


화성인 관련 라디오 프로그램의 각본을 맡고 있는 ‘나’에게
어느 날 자신이 화성인이라는 기묘한 남자가 찾아온다.
남자를 직접 대면하기 전,
그의 아내로부터 남편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전화까지 받는다.

그런데 막상 마주한 남자는
생각보다 훨씬 논리적인 말로 자신이 화성인임을 주장한다.

결국 두 사람은
‘화성인인지, 지구인인지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를 두고 묘한 대화를 이어간다.

‘아베 고보 작가의 유일한 SF’라는
타이틀에 이끌려 책을 집어들었다.

작품의 대부분은 좁은 방 안에서 벌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로만 채워져 있다
그럼에도 그 대화는 지루할 틈이 전혀 없었다.

‘나’는 남자에게 자신이 화성인이라는 것을 증명해보라고 다그치지만,
남자는 지구인이 자신이 지구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듯
자신 역시 화성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있으면 묘하게 수긍하게 된다.

문득 범죄 사건에서 범인으로 지목된 인물이
“내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라고 억울해하던 모습이 겹쳐지기도 한다.

남자의 기묘한 논리를 따라가다 보니,
나 역시 어느 순간부터 그의 정체를 추리하고 있었다.
그는 정말 화성인일까.
아니면 정말 정신이 이상한 사람인 걸까.

그런데 작품의 끝에 다다르자
내가 가장 궁금해했던 질문이
오히려 더 큰 혼란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주인공이 왜 ‘각본가’ 여야만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현실을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각본가를
이야기의 중심에 세워두고,
작가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흔들어놓는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이야기인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결국 나는 남자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보다
내가 믿고 있던 것들을 의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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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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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작가의 작품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궁금증을 품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작품을 쓰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나 역시 그의 광대한 세계관을 들여다보며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의 작품을 읽을 때면 인간이 이렇게까지 깊은 생각을
언어로 옮겨낼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곤 한다.

이 책은 그 찬란한 명작들 뒤에 가려져 있던
작가의 보다 인간적인 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책 속에서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어릴 적의 기억을 추억하며,
예술을 향한 자신만의 깊은 신념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특히 그의 문장에 매번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대목은
단연 자연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원 북쪽 가장자리에는 아직도 누르스름한 빛의 눈이 쌓여 있다.”(42p)

‘자연을 문장으로 옮겨온다는 건 바로 이런 느낌이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가 묘사하는 자연은 단순히 예쁜 풍경 그 이상으로,
눈부시도록 생생하게 살아 움직였다.

물론 나 역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모습을 바꾸는 자연을 몹시 사랑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단 한 번도 자연 그 자체를
‘깊이’ 사유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저 눈으로 바라보는 아름다운 풍경 정도로만
대해왔던 것은 아닐까 하고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그의 가벼운 손짓 하나에 굳어 있던 문장들이
페이지 위에서 살랑살랑 춤을 추는 듯하다.
어쩜 이리도 자연의 숨결을 가감 없이 옮겨 적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책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던 것은,
그 완벽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치열한 고민이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는 시인으로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예술가로서 겪는 남모를 고충을 고백한다.

언어라는 무기는 누구나 매일 사용하는 너무나 일상적인 수단이기에,
오히려 그 평범한 언어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진심을 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야기한다.

전 세계 수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작가조차
그런 예술적 갈증과 고민을 안고 있었다는 점이
묘하게 큰 위로와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자연과 고향, 그리고 예술을 향한 그의 진솔한 고백은
마치 깊은 바다를 떠올리게 했다.
물 위에서 바라보면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표면이 아름답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그 빛 아래 묵직하고 서늘한 모습이 펼쳐지는 바다처럼.

쓸쓸하면서도 깊어지는 가을날,
찬란한 문장 너머에 자리한
헤르만 헤세의 인간적인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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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볼딘 동물원 ㅣ 은행나무 시리즈 N° 23
송섬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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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볼딘이라는 찬란함으로 시작해,
상처라는 이름의 동물원에 마침표를 찍다.

연락이 끊겼던 친구 수진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연서.
멜볼딘여자고등학교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두 사람은
단절된 관계를 다시 이어가기 시작한다.
영업이 중단된 빈 동물원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서로에게 편지를 쓰게 된다.
그러나 그 편지는 절대로 읽어보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불현듯 수진은 사라져 버린다.

10년 뒤, 연서는 수진의 딸 표은에게서 과거의 편지를 받게 된다.
두 사람은 떠나버린 수진이 남긴 흔적을 찾기 위해
외국의 한 동물원으로 향한다.


수진과 연서, 그리고 표은.
이 세 사람을 둘러싼 이야기는
나도 모르게 손을 움켜쥐게 했다.

슬프다는 말도, 먹먹하다는 말도,
그렇다고 서늘하지도 않았다.

사랑이 끝난 후,
비로소 이별을 받아들이는 순간에 문득 찾아오는
알싸한 감정이 드는 작품이었다.

표은은 삶의 마지막에 자신을 떠난 엄마에게
강한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지만,
정작 본인은 그 감정을 온전히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를 열렬히 미워하는 마음 안에는
그만큼 상대를 향한 깊은 사랑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책을 읽는 내내 표은이라는 인물에게 자꾸 눈이 갔다.


엄마가 남겨두고 간 편지.
자신에게 적은 것이 아닌 그 편지를,
표은은 대체 왜 연서에게 전해주려 했던 것일까.

그 행동의 의미를 한참 곱씹어봤지만,
명확히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병실에서 죽어가던 엄마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가 다른 사람인 양 기억하고 싶었던 것처럼,
표은 역시 엄마라는 사람의 또 다른 한 조각의 모습을
알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편지의 주인을 통해 자신이 전혀 알지 못했던
엄마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연서에게 멜볼딘여자고등학교는
수진과의 관계가 시작된 찬란한 기억의 장소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두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냈던 ‘동물원’은
시간이 흐른 뒤 전혀 다른 의미로 다시 등장한다.

한 사람의 부재가 남겨진 두 사람을 만나게 하고,
한때 누군가와 기억이었던 공간이
또 다른 관계를 향해 나아가는 장소가 된다.

이 소설은 헤어짐과 만남이 반복되는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잃는다고 해서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멜볼딘에서 시작된 찬란했던 기억은
수진의 죽음이라는 상처를 지나
결국 연서와 표은이라는 새로운 관계로 이어진다.

서로 다른 동물원,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시작된 만남과 헤어짐.

그 너무나 당연하지만 살아내느라 쉽게 잊고 살았던 진실을,
세 사람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통해 조용히 되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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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6 - 사과
박솔뫼 외 지음 / 북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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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솔뫼 작가의 <사과>를 처음 만난 건
2026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을 통해서였다.

처음 읽었을 때는 솔직히
서로의 ‘차이’를 넘어서지 못하고 결별한 연인의 이야기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읽으니 이상하게도
‘끝남’보다 ‘왜 끝났을까’에 더 마음이 갔다.

두 사람이 어떤 명확한 이유로 멀어졌다는 설명은 없다.
대신 선호가 출장을 간 사이 그의 방에서 생활하게 된 애리가
선호의 사적인 공간을 하나씩 들여다보며
자신과는 다른 그의 세계를 조금씩 발견하게 되는 듯하다.

처음에는 그저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두 번째 읽을 때는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이 이야기는 관계의 ‘끝남’ 자체가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발견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장소와 회사를 옮겨 다니며 온전한 정착을 이루지 못하는 애리.
회사를 다니면서 카페 일도 병행하는 애리는
손님으로 만난 선호와 연인인 듯 아닌 듯 애매한 관계를 이어간다.

반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바닷가 건물에서
함께 미래를 그리자는 선호는,
애리와 달리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는 인물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명확한 단어로 정의되지 않는다.
단순히 손님과 직원 이상의 관계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연인이라고 단정 짓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 애매한 관계의 간극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흙이 묻은 감자’와 ‘사과’가 아닐까.

애리는 선호가 자신을 ‘흙이 묻은 감자를 굳이 씹어 먹는 사람’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고 느낀다.
자신이 먹고 있는 것은 감자가 아닌 ‘사과’라는 걸 보여줄 수도 있었지만,
애리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

감자와 사과는 색도, 모양도, 맛도 엄연히 다르다.
애리와 선호의 차이 역시 단순한 취향이나 생활방식의 차이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애리는 자신이 사과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관계 자체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닐까.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온전한 감자나 온전한 사과 그 자체로 바라보지 못했다.

이번 수상작품집에는 박솔뫼 작가를 비롯해
여러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함께 담겨 있다
저마다의 색깔이 뚜렷해서 어느 한 작품만을 고르기 어려울 정도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게는 소위 ‘문학상 수상작’ 특유의 결이
아주 잘 맞지는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숨겨진 의미를 파헤치고
해석하는 과정이 때로는 조금 버겁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한 번 더 읽어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재독을 통해 작품의 세세한 부분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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