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e, There, and Anywhere”에서 조나단 스미스는 고대 후기의 지중해 연안 종교들의 지형을 서술하기 위해 여기”, “저기”, “어디에서나라는 유형을 제시한다. “여기의 종교는 가정 종교로서 세속적이면서 동시에 내세를 지향하는, 현세와 내세가 분리되지 않은 종교를 말한다. 여기가 삶의 터전이자 지향점이다. “저기의 종교란 국가적인 권력과 결탁된 종교로서 성과 속이 분리되고 위계화 된 형태로 나타난다. 왕이나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피지배적 위치에 놓인 시민들까지도 이곳을 지향점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들의 지향점은 저기이며, 저기가 그들의 지향점이라면 현실은 디스토피아다. “어디에서나의 종교에서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왕이라는 개념은 폐기된다. 그리하여 사회적 구성원들 간의 연결이 강조된다. “저기의 종교가 신성한 곳에서만 신과의 소통이 일어난다면, “어디에서나의 종교는 어디에서든초월적 존재와 대면할 수 있다. 따라서 어디에서나의 종교는 유토피아를 추구한다.

그렇다면 지중해 연안에서 어디에서나의 종교로의 변화가 일어나는가. 스미스는 이 변화에 주목한다. 스미스가 강조하는 것은 이 변화에 맞서는 또는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종교의 잠재성이며, 인간의 창조력이다. 인간의 삶에서 변화는 필수불가결하다. 그 변화와 맞닥뜨렸을 때, 인간은 인식론적 지도를 펼쳐야 한다. 그러한 인식론적 지도를 만드는 일, 이것이 종교의 역할이다.

종교란 결국 인식과 현실의 불일치 속에서 발휘되는 창조력이다. 그 창조력이란 세계를 의미 있게 만드는 일이며, 동시에 그 의미 속에서 나의 자리를 구축하는 일이다(Map is not Territory, 1978, 290~291).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수동적인 변화에 대한 대응으로써만 종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변화를 주체적으로 이끌어낸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스미스가 위고네바고족의 이원적 조직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통해 얻어는 낸 가정은 이렇다. 상위계층의 위고네바고족들은 그들 종족이 비위계적이며, 수평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반면 하위계층의 부족민들은 위계적이며 수직적으로 그들의 사회를 이해한다는 것이다(<<자리잡기>>, 2009, 89~106). 비록 스미스가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부족민들의 불일치가 극복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디에서나의 종교는 불일치를 극복하려는 노력의 결과물이며, 그 방법은 변증법일 것이다.

종교와 인간에 대한 스미스의 입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역사적 조건 속에서 변화하는 상황을 유의미한 것으로 바꾸려는 지속적인 노력을 보이며, 그러한 상황의 변화를 인식론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종교다. 나아가 종교는 그러한 상황의 변환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스미스의 시각에서 다음의 현상은 어떻게 이해될까.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루마니아의 민속학자인 콘스탄틴 부라일로이우는 마라무레쉬라는 마을에서 아름다운 민요 하나를 채집할 수 있었다. 산의 요정에게 홀린 젊은 남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남자의 결혼식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자 질투심에 불탄 요정이 남자를 바위 꼭대기에서 아래로 떠밀어버린다. 그 다음날, 목동들이 남자의 시신과 함께 나무에 걸려 있는 모자를 찾아낸다. 목동들이 시신을 마을로 가져오자 남자의 약혼녀가 보러 온다. 약혼자의 목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그녀는 장송곡 하나를 부르기 시작한다. 노랫말은 신화적인 암시들로 가득한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제례용 가사이다. …… [이 민요는] 사실 아주 평범한 비극이었다. 그녀의 약혼자가 어느 날 저녁 부주의로 절벽에서 미끄러진다. 그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지 않았다. 비명 소리를 들은 산사람들이 그를 마을로 데려오고, 그 얼마 뒤에 그는 목숨을 거둔다. 장례식에서 남자의 약혼녀는 마을의 다른 여자들과 함께 평범한 장송곡을 되풀이해서 불렀지만, 그 노래에 산의 요정에 대한 언급은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이 민요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청년의 약혼녀인) 증인은 살아 있으며, 사실과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요정과 관계된 민요를 만들고, 그와 관계된 설화를 만들어 냈다. 이 사례를 이해하는 데 있어 조나단 스미스의 시각은 매우 유용하다. 마라무레쉬 마을 사람들이 겪은 것은 일종의 불일치이기 때문이다. 결혼을 앞둔 청년의 안타까운 혹은 어이없는 죽음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사람들이 선택한 것은 그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인식론적 지도를 제작하는 일, 마을 사람들은 이를 통해 그들이 경험한 불가해한 경험을 이해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일화를 차용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사람이 다름 아닌 엘리아데라는 것이다(<<영원회귀의 신화>>, 57). 이 두 학자의 분기점은 스미스가 종교적 현상을 현실의 구체적 사건으로 본다면, 엘리아데는 현상을 현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알레고리적인 것으로, 어떤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 성스러운 것으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즉 엘리아데가 관념적이고 존재론적이라면, 스미스는 현실적이며 실제적이다. 엘리아데는 이 사례를 고대인들이 비가역적인 것을 거부하고 모범적이고 원형적인 범주 안에서 통합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설명한다. 즉 죽은 자를 조상으로 개성적 개인이 아닌 비개성적 영웅으로 바꾼다. 그리하여 청년의 죽음은 비극적 영웅의 서사구조로 흡수되고 기억의 재구성이 일어난다.

엘리아데와 스미스의 방식 중 어떤 것이 더 합리적인가, 혹은 무엇이 더 윤리적인가. 여기에 대해 답하기는 어렵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둘의 공통점은 낯선 상황, 인식불가능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 종교가 작동한다는 것, 다시 말해 성스러움이란 인식 불가능한 것을 인식 가능하게 만드는 특수한 장치, 구조, 체계, 체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종교적이고 성스러운 것이 끼어들 때, 우리는 그 사건의 진실에 다가서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르는 것은 순수한 사건이 아닌, 그 사건을 감싸고 있는 종교와 성스러움이라는 껍질들이다. 엘리아데의 언급처럼 원형적인 범주 속으로 통합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사건의 원초성에 다가설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스미스의 언급처럼 인간이 제작한 지도는 실재 속에서 언제든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고 말 운명에 처해져 있다. 종교적 지도가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때마다 종교적 지도를 폐기하고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사건은 항상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 있다는 것이며, 종교적 지도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종교적 지도가 폐기되는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사건과 대면할 수 있게 된다. 비교종교학은 그러한 사건을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위해 사건자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은 채, ‘사건을 인간의 차원으로 끌어내리고 이것을 향유한다.

아감벤은 성스러움과 종교가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본다. 성스러움이란 사물, 장소, 사람을 공통의 사용에서 끄집어내 분리된 영역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세속화profanazione본디 성스럽거나 종교적이었던 것에서 인간들이 소유할 수 있게 돌려진 것이다. 아감벤은 성스러움의 세속화가 시급한 문제라고 말한다(아감벤, <<장치란 무엇인가>>, 39;48).

 

왜냐하면, 신의 섭리는 결국 종말을 지향한다. 엘리아데 식으로 말한다면, “무형적인 혼돈 상태로의 이행과 그에 따른 새로운 창조를 지향한다. 아감벤은 이러한 연대기적 시간을 끊고 카이로스적인 시간으로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혼돈에서 창조로의 이행은 신의 지향점이지 인간의 지향점은 아니지 않은가. 성스러움을 세속화하는 일이란 결국 시간을 정지하는 일이다. 연대기의 정지, 이 정지 속에서 향유가 일어날 수 있다. “매순간마다 [……] 하나의 전체이자 완성태로 존재할 수 있는 그러한 향유가 가능할 수 있다고 아감벤은 말한다(아감벤, <<유아기의 역사>>,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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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의 세계사 - 수렵채집부터 GMO까지, 문명을 읽는 새로운 코드
톰 스탠디지 지음, 박중서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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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귀를 기울이면˝님의 지적은 적확하다. 이 책을 산다면 한 번 훑어보고 즉시 환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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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의 세계사 - 수렵채집부터 GMO까지, 문명을 읽는 새로운 코드
톰 스탠디지 지음, 박중서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속았다. "귀를기울이면"님의 100자평에 귀를 기울였다면 이 따위책을 사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자의 직업이 '미국'의'저널리스트'이자 '베스트샐러' 작가였다는 것을 꼼꼼히 체크했더라면 더욱 사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저자(식)은 자극적인 것들을 골라 독자를 자극하는데에만 급급할 뿐이다.

  이 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2장인데, 그 제목은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인류역사상 최악의 실수"라는 논문의 제목을 그대로 따왔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논문의 구성을 조금 바꾸고, 흥미로운 부분을 자극적으로 늘려놓았다. 그럼에도 제레드 다이아몬드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다. 그냥 "한 인류학자"라고만 말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식)인 톰 스탠디지는 남의 글을 훔쳐온 도둑님이다.

  그러니까 무식하고 게으른 미국인들의 지적 욕구를 교묘하게 자극하여 너절하게 글을 써대는 그런 글쟁이, 글까지도 자본화하는 그래서 훌륭한 연구자들이 힘들게 연구해 놓은 알맹이만 빼먹는 그런 기생충 같은 자식의 글이다. 그러니 부탁이다. 읽지 말길 바란다.

  책 곳곳에는 제국주의에 대한 예찬, 서구우월주의, 자본에 대한 막연한 신뢰, 부자와 권력에 대한 터무니없는 찬양으로 뒤덤벅 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눈이 있는 독자라면 간절히 간곡히 말한다. 절대 읽지 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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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한길그레이트북스 11
한나 아렌트 지음 / 한길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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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렌트는 인간에 대한 긍정의 최극단까지가 나아간다. 놀라운 것은 그러한 긍정을 싸구려 감상이나 낭만적 감수성이 아닌 치밀한 논리와 이성으로 구축해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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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재발견 - 민주주의를 둘러싼 싸움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민주주의 강의
박상훈 지음 / 후마니타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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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화가 나고 짜증이 난다.

출판사 대표라는 인간이 이따위 것을 책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경청할만한 곳도, 밑줄을 그을 만한 곳도 없다.

무슨 설사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휘갈기고 있다.

장과 절의 제목은 거창하지만 그 언저리에도 가 닿지 않는다.

장과 절 제목에 부합하는 글을 쓰기만 했더라도 이렇게까지 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단 하나다.

민주주의에서 갈등은 필수불가결하며 그러한 갈등에 대해 논쟁하여야 한다는 것...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국민'들은 그러한 논쟁이 경제를 망친다고 생각하고 있다.

경제를 살려야지 논쟁을 해서 뭐 하냐고 묻고 있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논쟁이 중요하다는 것을 설득하는 것이 옳다.

 

말만 있고, 그 말을 책임지려고는 하지 않는다.

논쟁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은 좋다.

그런데 당신은 그 중요하다는 말만 할 뿐이다.

더욱 웃긴 것은 그 울림도 없는 말을 주입하려고 하고 있다.

당신이야말로 논쟁이 아니라 대중을 계몽하고 훈육하려 한다.

 

이 책의 어조는 차분하다.

그리고 그 차분한 말은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

그런데도 저자는 끝없이 지껄인다.

토론의 기본은 남의 말을 듣는 것이다.

저자는 논쟁을 하자면서 마치 귀머거리 중이 불경 외 듯이 듣거나 말거나 지껄일 뿐이다.

이건 논쟁도 아니고 당신이 말하는 강의도 아니다.

무엇보다 이런 건 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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