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폭력비판을 위하여 / 초현실주의 외 발터 벤야민 선집 5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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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성격벤야민은 성격희극을 말하면서 ‘성격희극의 주인공이 분명히 악덕을 행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웃을 수밖에 없는가라는 난처한 물음을 던졌습니다. 벤야민은 󰡔수전노󰡕󰡔상상병 환자󰡕의 주인공인 아르강을 예로 들어주는 보기 드문 친절함까지 보였지만, 미천한 저로서는 오히려 이 희극 앞에서 좌절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흥부가󰡕에 등장하는 놀부를 떠올렸습니다. 놀부는 호박에 말뚝을 박고, 가는 처녀 다리 걸고, 엎어지려는 아이의 엉치를 걷어차고, 불난 데 부채질을 하는 썅놈중에서도 썅놈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놀부를 순 썅놈이라고 말하며 웃을지언정 그의 행동 앞에서 왜 분노하지 않는 것일까요? 오히려 유쾌하게 그의 행동을 바라보는 것일까요?

어쩌면 이 답은 아주 단순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놀부는 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법·윤리·도덕 같은 것들에 조금도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것도 없는 정말 파렴치한 인간입니다. , 바로 이것입니다. 놀부는 법·윤리·도덕·양심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훌쩍 뛰어넘어 있는 인간입니다. 그는 철저히 악덕을 행함으로써 법·윤리·도덕·양심 따위를 완전히 불태워 없애 버립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완벽한 자유인입니다.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그런 이상한 인간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가상적 질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벗어나면 결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홉스의 󰡔사회계약설󰡕은 이러한 전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이데올로기와 같은 질서, 혹은 권력 작용에 갇혀 있으며, 여기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놀부는 이러한 질서로부터의 일탈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일탈 후에도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인간에게 순연한 자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놀부는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벤야민의 물음, ‘성격희극의 주인공이 분명히 악덕을 행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웃을 수밖에 없는가라는 물음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성격희극의 주인공을 편의상 놀부를 바꾸어보죠.) 놀부는 악덕을 행합니다. 놀부는 지독한 악덕을 행함으로써 악덕을 행하면 안 된다는 우리의 신념을 파괴해버립니다. 그렇게 하여 놀부는 완벽한 자유를 획득하게 됩니다. 즉 놀부는 법·윤리·도덕·양심 따위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삶 역시 가능하다는 것을 놀부는 보여줍니다. 그러니 놀부를 향한 우리의 웃음은 순연한 자유를 누리는 놀부에게 보내는 박수이자, 그러한 자유를 추구하려는 우리의 염원일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운명과 성격의 다음 부분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전략몰리에르 희극의 인물들은 그러한 심리학에게는 예시 수단으로서도 쓸모가 없다. 성격은 그 인물들에게서 그 성격의 유일한 특성의 광채 속에서 태양처럼 전개되는데, 그 광채는 어떤 다른 특성도 그 특성 주변에서 보이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가린다. 성격희극의 숭고함은 이러한 인간의 익명성에 바탕을 두고 그의 성격특성의 유일성 속에서 개성이 최고도로 전개되는 한복판에서의 그의 도덕성에 바탕을 둔다. 운명이 죄지은 인물의 엄청난 분규, 그 인물의 죄의 분규와 연계성을 전개해나가는 반면, 성격은 죄 연관 속에 있는 인물의 신화적 노예화에 대해 창조적 정신의 답변을 준다. 분규는 단순함이 되고, 운명은 자유가 된다. 왜냐하면 희극적 인물의 성격은 결정론자들의 허수아비 인형이 아니고, 그 광채 아래에서 그 인물의 행위의 자유가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촛대이기 때문이다(75).

 

그러니 인간을 구속할 수 있는 운명이란 없으며, 인간을 규정하고 단정 지을 수 있는 성격조차 없습니다. 인간은 운명과 성격에서 얽매이지 않는 완벽한 자유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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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 발칙한 글쟁이의 의외로 훈훈한 여행기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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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곳은 따분한곳이다.

1)썰렁한 도시: 사람을 만나기 힘들며, 설사 만나더라도 말을 걸어도 대구하지 않는다. 바에서도 썰렁하기는 마찬가지다.

-함메르페스트에서 시간을 보내려면 전화번호부에 불을 놓거나 웨이터에게 모욕을 주다가 쫓겨나는 일을 제외하고 뭘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결국 들을 수가 없었다(39).

 

2)갑작스러운 불꽃놀이

-반시간 동안 노르웨이 반도 전역에서 불꽃이 터지고 항구의 하늘을 화려하게 장식한 후 바닷물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런 다음, 시작한지 정확히 30분 만에 모두들 집안으로 돌아갔고, 함메르페스트는 다시 잠들었다(40).

 

3)무료와 권태

-나는 의사에게서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정말 따분한 곳에 가서절대 안정을 취하라는 처방이라도 받은 환자 같은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41).

 

-갑자기 온갖 잡다한 일을 할 시간이 생겼다. 가령, 양쪽 신발 끈이 정확히 같은 길이가 될 때까지 부츠의 끈을 몇 번이고 다시 묶었다 풀기를 되풀이했다. 지갑 속을 가지런히 정동하고, 코털도 다듬고, 도무지 할 일이 없을 땐 뭘 할지 기나긴 목록도 작성했다. 어떨 때 양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다(41).

 

-그러다 보니 은퇴 후의 삶이란 게 어떤 것인지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나는 심지어 산책 다닐 때도 조그만 메모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매일의 동선을 무의미한 일기로 남기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가 은퇴 후에 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아버지는 매일 산책을 다니다가 동네 슈퍼마켓의 스낵 코너에서 점심을 드셨다. 지나가다가 마주치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조그만 공책에 일기를 쓰고 계셨다. 돌아가신 후에 보니 이런 공책이 벽장에 가득 들어 있었다. 그 공책은 모두 이런 일기로 채워져 있었다.

‘14. 슈퍼마켓까지 걸어감. 디카페인 커피 두 잔 마심. 날씨 좋음.’

이제야 아버지의 기분을 알겠다(42)

 

2. 지독하게 춥고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분다.

-나는 무장 강도처럼 목도리로 얼굴을 온통 감싸고 바람에 떠밀리며 터덜터덜 걸었다(37).

 

-바닥에 있는 얼음에 머리를 얼마나 세계 부딪혔는지, 작년 여름에 헛간 열쇠를 어디 뒀는지가 갑자기 기억났다. 머리가 아픈 데다 바람이 한 번만 더 불면 아까 보았던 종이 박스처럼 나도 바다로 직행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새로 발견한 이 신종 스포츠를 그만두고 조심스럽게 자오선 기둥으로 발길을 재촉했다(38).

 

3. 비아냥거리기

-너무 뻔한 가짜 콧수염을 달고서 엉덩이에 꼬챙이라도 꽂혔는데 그로 인해 연기에 지장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결연한 각오라도 한 듯이 점잔을 빼며 걸어 다니는 촌스러운 드라마다. 물로 베르트뮐러 리듬 카데트와 같은 재즈 방송도 있다. 노르웨이 방송에 대해 굳이 칭찬하자면 건강에 대한 염려나 불편 없이 혼수상태란 과연 무엇인가 경험하게 해주는 점이라고나 할까?(41)

 

-시장은 장의사 같은 얼굴에다가 청바지에 푸른 작업복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하루 동안 가석방된 수감자 같은 인상이었지만, 친절한 분이었다(42).

 

4. 오로라의 출현

빌 브라이슨 이 장엄한 오로라를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서 함메르페스트를 조롱하고 비아냥댔으며, 자신의 따분함을 지나치게 떠벌렸고, 추위 앞에서 엄살을 부렸다. 그리하여 스스로의 천박함을 한껏 드러냈다. 그런데 오로라를 묘사한 부분에 이르면 이것이 모두 그의 전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빌 브라이슨이 함메르페스트를 비난하면 할수록 오로라는 더욱 장엄한 광채를 내뿜는다. 단지 오로라의 아름다움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함메르페스트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격상시킨다. 이것이 그의 글쓰기의 매력이다.

다음은 이 글의 하이라이트인 오로라를 묘사한 부분이다.

 

-함메르페스트 체류 16일째 되던 날,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아침 산책을 마치고 곶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아무것도 없는 마을 위편 하늘 한쪽에서 투명하면서도 다채로운 색상의 구름이 나타났다. 분홍색, 초록색, 푸른색 그리고 연보라색이 뒤섞인 구름이었다. 구름은 희미한 빛을 띠었고 소용돌이치는 듯했다. 구름은 서서히 하늘 전체에 퍼졌다. 석유가 고인 곳에 무지개 빛깔이 나듯이 묘하게도 유성이 느껴졌다 나는 그 자리에 선 채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로라는 300km 정도 되는 대기 아주 높은 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책에서 읽었는데, 지금은 마치 쇼가 마을 바로 위에서 멈춘 듯했다. 오로라에는 두 종류가 있다. 먼저 누구나 사진으로 본 적이 있는 거미줄처럼 엷은, 반짝이는 커튼 모양이 있다. 그리고 내가 본 것처럼 다소 드문 가스 구름층이 있다. 오로라는 늘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며 같은 모양이 생기는 적은 없다. 어떨 때는 바람굴 (공기의 흐름이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빠르고 센 기류를 일으키는 장치)에 연기가 지나가듯 유령처럼 쏜살같이 하늘을 휙 지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밝은 커튼이나 빛나는 창살처럼 하늘에 걸려 있기도 한다. 아주 이따금씩, 평생 한두 번쯤은 수평선 전체에서 스며 나와 머리 위로 흘러가는데, 빛과 색채가 어우러진 조용한 폭발이라고나 할까, 형용하기 어려운 장관을 자아낸다고 한다. 또 인공조명이 전혀 없어 칠흑 같은 밤만 이어지는 시골에 가면 오로라는 매우 기묘하고 무서울 정도로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하늘에서 튀어나와 죽일 듯 이쪽을 향해 엄청난 고속으로 날아오니, 무서운 것도 무리가 아니다. 스칸디나비아 북부의 라프족은 오로라에 흰 손수건이나 백지를 보이면 북극광이 다가와 그 사람을 데려간다고 오늘날까지도 굳게 믿고 있다.

내가 본 오로라는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였고 몇 분 동안 지속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살면서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더 멋진 오로라를 보기 전까지는 생애 최고의 북극광으로 남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날 저녁 더 멋진 오로라가 나타났다. 몇 시간이고 계속되는 북극광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번에는 단색 오로라 였고 레이더 장치 모니터에서 나오는 듯한 섬뜩한 빛을 발하는 초록색이었는데, 대단히 활동적인 녀석이었다. 좁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섬광이 광활한 돔형의 하늘을 가로질러 휩쓸고 지나가더니, 비행운처럼 그 자리에 걸렸다. 때로는 별똥별처럼 반짝이며 하늘을 날기도 하고, 때로는 지루하게 빙빙 돌기도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전에 파이프를 물고 책을 읽으실 때 파이프에서 나른하게 뿜어 나오던 담배 연기처럼 말이다. 오로라는 때때로 서쪽에서 환하게 명멸하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는 장난이라도 치는 양 뒤쪽에 서 순식간에 다시 나타나기도 했다. 나는 오로라의 궤적을 따라가기 위해 계속 빙글빙글 돌거나 몸을 비비 꼬아야 했다. 한 뼘의 하늘이라도 변화를 놓치지 않고 따라잡으려 해본 사람이 아니면 하늘이 얼마나 광활한지 상상 할 수 없다. 섬뜩한 점은 그 변화가 모두 쥐죽은 듯 조용히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면 ''하는 낮은 소리나 정전기 소리라도 나야 할 것 같은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 거대한 에너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소진되는 것이다(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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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학
아리스토텔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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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논증의 비순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하는 곳이 적지 않다. 이를 테면, “행동자는 필연적으로 성격과 사상에 있어 일정한 성질을 가지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이 양자에 의하여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일정한 성질의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와 같은 부분이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 행동자가 성격과 사상을 갖는 이유를 필연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성격과 사상은 일정한 성질을 갖고 있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순환논증 중 가장 압권은 이것이다(51).

 

그런데 전체는 시초와 중간과 종말을 가지고 있다.

시초는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다른 것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 다음에 다른 것이 존재하거나 생성되는 성질의 것이다. 반대로 종말은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또는 대개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것 다음에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 중간은 그 자체가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또 그것 다음에 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56).

 

이 말을 정리하면, ‘시초는 시초에 있는 것이고 중간은 중간에 있는 것이며, ‘종말은 종말에 있는 것이다. 장난처럼 들리는 이 말을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처음-중간-에 대한 간략하면서도 가장 적확한 정의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시초란 다른 것 다음에 올 수 없는 것으로 모든 사건들이 응축되어 있는 특이점(singularity)이다. 여기에서부터 사건은 분규’(“스토리의 시초부터 주인공의 운명에 전환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108)하면서 급전’(“사태가 반대 방향으로 변하는 것”, 69)발견’(“무지의 상태에서 지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 71)을 포함하게 된다. ‘중간시초종말을 그럴 수밖에 없도록 연결한다. 특정한 시초를 특정한 종말로만 이끌어가게 만드는 유일무이한 매개항인 것이다. 그리하여 사건은 완전히 닫히게 된다. 그 지점이 종말이다.

 

인간의 급수 혹은 수용론

이러한 비극의 구조는 인간의 탄생과 죽음을 모방하고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이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한다거나,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고 있다는 것을 이 책 전체에 걸쳐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31: 49).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방이라고 부른 것은 인간의 삶 전체가 아니라 행동하는 인간에게서 일어난 중차대한 사건, 혹은 급전발견으로 인한 급격한 변화가 이뤄지는 삶의 한 부분을 모방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삶의 처음과 끝을 모르며 그 진행방향에 대해서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하다면 행동하는 인간의 모방이라는 말이 가능할까.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급전이나 발견의 순간을 알 수 없다. 따라서 모방을 하려면 행동 중인 인간이 아니라 행동이 완료된 인간을 모방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진행 중인 사건이 아닌 이미 완료된 사건을 모방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완결된 행동[의] 모방”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행동이 완결된 것들은 모두 모방 가능한가. 꼼꼼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 역시 빼놓지 않과 “완결된 행동을 모방”할 수 있는 범위까지 언급하고 있다. 모든 인간이 아닌 큰 명망과 번영을 누리는 자들 가운데 한 사람”, “[명망 있는] 소수의 가문중의 한 사람이다(79: 90). 그 중에서도 무서운 사건이 일어난 가문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90).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종의 수용론적 입장까지 고려하고 있는 듯하다. 관객이 전혀 모르는 사람을 관람객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관객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할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던 것이다.

 

모방의 논리

모방의 대상은 신화적 인물이나 영웅을 모방하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하지만 그는 대상의 삶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연성’을 중시한다.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62).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개연성을 위하여 실제로 일어난 사건 중 불필요한 것은 버려도 좋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전체 중에[] 아무런 크기를 가지지 않[] 전체통일을 이룰 수 없는사건이기 때문이다(56: 59). 이러한 사건 속이 펼쳐질 때 비극의 카타르시스가 행해진다(49).

이렇게 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모방은 대상에 대한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묘사가 아니라 실제적인 사건의 조합과 배치에 가깝다. 그러한 조합과 배치의 지향점이 카타르시스일 것이다. 결국 비극의 모방이란 조합과 배치의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카타르시스: 정화 혹은 배설

그렇다면 이 완성된 작품 속에 깃드는 카타르시스는 무엇일까.

카타르시스는 '정화'나 '배설'이라는 뜻을 갖는다. 정화는 더러운 것을 씻어낸 후의 결과를 말한다면 배설은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행위를 말한다. 하지만 더러운 것을 씻어냈다고 해서 꼭 깨끗해진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배설이라는 말은 이보다는 더 의미심장하다. 배설의 논리는 이렇다. 우리의 몸은 이미 더러운 배설물을 가지고 있다. 배설물은 우리 몸이라고도 그렇다고 우리의 몸의 일부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배설물은 온전하고 완전무결한 우리를 구성하지 못하게 만드는 균열지점이다. 다시 말하면 비극은 카타르시스를 통해 '나'라는 인식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묻게 만든다. 비극의 가치는 완고한 '나'를 주체가 아닌 비주체로 만들어내는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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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마, 잘될 거야
설기문 지음 / 원앤원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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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받았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믿음이 생겼다. 이 저자 분은 안 팔려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안 팔린다면 위로의 말도 해 드려야겠다.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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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복식문화와 역사
고애란 지음 / 교문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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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알고자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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