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가즈오 이시구로. 처음 읽었을때보다 훨씬 좋다. 깊이가 다르다. 직업의식과 정의, 인간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들어있다.

돌이켜 보면 나는 한때 열일곱 명의 직원을 거느렸턴 사람이다. 그리고 이곳 달링턴 홀에서 스물여 명의 직원이 일했던 것이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니다. 그런 집을 네 명의 직원으로, 다시 말해 가장 최소한의 인원으로 굴릴 방안을 짜보라니 생각만 해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 딴에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나의 회의적인 생각이 은연중에 드러났던 모양이다. - P16

우리 대부분이 그렇지만 물론 나도 옛날 방식을 지나치게 많이 바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각에서 목격되듯 단지 전통 그 자체를 위해 전통에 매달리는 식의 집착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 P16

결국 내가 최근들어 겪었던 모든 난제들의 중심에 바로 이 인력 부족이라는 문제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 볼수록 점점 더 명백해지는 사실이 있었으니 이 집에 무한한 애정을 가졌을 뿐 아니라 타의 모범이 될만한, 요즘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프로 정신을 갖춘 켄턴 양이야말로 달링턴 홀의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인력 관리안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요소라는 점이었다. - P20

차분한 아름다움, 절제의 미라는 표현이 꼭 들어맞는다. 마치 땅 자체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대함을 자각하고 있어 굳이 소리 높여 외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여기에 비해 아프리카나 미국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풍경들은 전율에 가까운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꼴사나운 과시욕으로 인해 객관적인 관찰자에게는 저급하다는 인상을 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 P47

위대한 집사들의 위대힘은 자신의 전문 역할 속에서 살되 최선을 다해 사는 능력 배분이다. 그들은 제아무리 놀랍고 무섭고 성가신 외부 사건들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점잖은 신사가 정장을 갖취 입듯 자신의 프로 정신을 입고 다니며, 악한들이나 환경이 대중의 시선앞에서 그 옷을 찢어발기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그가 그 옷을 벗을 때는 오직 본인의 의사가 그러할 때뿐이며, 그것은 어김없이 그가 완전히 혼자일 때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품위‘의 요체다. - P71

영국의 풍경이 오늘 아침 내가 보았던 것과 같은 최고의 경지를 드러내는 것이나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최고 경지를 드러내는 것이나 같은 이치다. 그런 이들과 마주치면 내가 지금 위대함을 면전에 두고 있다는 것을 그냥 ‘알게‘ 되니까 말이다. - P73

그러나 정말 뿌듯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하는 말이지만 달링턴 나리께서 내 눈과 귀를 우려하여 무언가를 숨기려 하신 적은 결코 없었다. 모 인사가 말을 하다 말고 나를 향해 경계의 눈길을 던질라치면 나리께서 "아, 괜찮습니다. 스티븐스 앞에서는 무슨 얘기든 해도 돼요, 내가 보증합니다."라고 말씀하셨던 경우가 무수히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 P118

"켄턴 양, 부친께서 방금 작고하셨는데도 올라가 지 않는다고 막돼먹은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말아 주시오. 당신도 짐작하겠지만 아버님도 이 순간 내가 이렇게 처신하기를 바라셨을 거요." - P174

어쨌거나 때늦은 깨달음에 의지해 과거를 뒤져 보노라면 그러한 ‘전환점‘들이 도처에서 눈에 띄게 마련이다. 우리의 저녁 모임을 중단하기로 한 나의 결정뿐 아니라 그전에 내 집무실에서 있었던 일도 그런 시각으로 보자면 얼마든지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그녀가 꽃병을 들고 들어왔던 그날 저녁에 만약 내가 약간 달리 반응했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 P268

달링턴 경의 노력이 잘못되있을 뿐 아니라 어리석기까지 했음을 세월이 입증해 주었다고 해서 어떤 면으로든 어떻게 내가 비난받아야 한단 말인가? 내가 그분을 모신 세월을 통틀어 증거를 저울질하고 나아갈 길을 판단한 것은 바로 그분 자신이었으며, 나는 다만 나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지극히 온당하게 움직였을 뿐이다. 그리고 가히 ‘일등급‘이라고 인정받을 만한 수준에서 내 능력 닿는 데까지 직무를 수행한 것밖에 없다. - P312

"하지만 어르신이 걱정되지도 않소? 당신이 진심으로 아끼는 분이라고 방금 전에 그랬잖소. 그분을 그렇게 생각한다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거 아니오? 최소한 일말의 호기심이라도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영국 총리와 독일 대사가 당신 상전의 주선으로 저렇듯 심야에 밀회를 나누고 있는데 궁금증도 생기지 않는단 말이오?"

"전혀 궁금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일에 호기심을 보이는 것은 제 직분에 어긋나는 겁니다, 도런님." - P340

하지만 이따금 한없이 처량해지는 순간이 없다는 애기는 물론 아닙니다. ‘내 인생에서 얼마나 끔적한 실수를 저질렀던가‘ 하고 자책하게 되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럴 때면 누구나 지금과 다른 삶, 어쩌면 내 것이 되었을지도 모를 ‘더 나은‘ 삶을 생각하게 되지요. 이를테면 저는 스티븐스 씨 당신과 함께했을 수도 있는 삶을 상상하곤 한답니다. - P364

사람이 과거의 가능성에만 매달려 살 수는 없는 겁니다. 지금 가진 것도 그 못지않게 좋다, 아니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감사해야 하는 거죠. - P364

언제까지나 뒤만 돌아보며 내 인생이 바랐던 대로 되지 않았디고 자책해 본들 무엇이나오겠는가? -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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