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순식간에, 너무 자연스럽게, 너무 행복하게 지나가서 그 무엇도 머릿속에 기억해둘 수 없었다. 생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는 생에 대한 성찰이 불가능한 법이다. - P121
"나한테 솔직하라고 했잖아, 안 그래? 내가 보기에 문제는 빤해, 10년 뒤에 그녀가 바람이라도 피울까봐 두려운 거야." 타인의 입을 통해 진실을 확인하는 건 얼마나 민망한가. 아침에 막 잠자리에서 일어나 정신을 온전히 차리기 전, 하루 중 남은 시간동안 남들에게 보이고 또 남들을 보게 될 가면을 쓰기 전, 누구나 적대심과 자기원망이 가득 찬 씁쓸한 허튼소리를 내뱉는 시간을 갖기 마련인데 차마 그럴 때에도 선뜻 입밖에꺼내지 못하는 그런 진실이라면 특히 더 민망하다. 정말로 10년 뒤에 그녀가 바람을 피울까봐 겁이 나는 걸까? - P129
그녀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몸에 담요를 두른 채 창가에 서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역시 가까이 다가가 비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나는 깨달았다. 그 순간이, 일상의 그 작은 조각이 지고의 축복이자 행복임을 전에는 그 순간만큼 완벽하게 행복했던 적이 결코 없었지만, 다시는 그런 감정을, 적어도 그 정도로 강렬하게는 느끼지 못하리라는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행복의 절정은 무릇 그러하다. 분명 그러하다. 더욱이 그 절정은 섬광처럼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는 찰나에 불과하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 순간을 더 길게 늘일 권리는 없다. - P130
그녀가 나에게 의미 없는 존재였을 때, 내성적이고 단지 호감 가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을 때, 그녀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의 그녀를 기억할 뿐이다. 나의 넋을 빼앗고, 내 가슴에 분에 넘치는 기쁨을 가져다주고, 나를 정복한 달콤하고 깜찍한 여자. - P131
이리저리 따져보니, 아니발이 옳을 수도 있겠다. 내가 결혼을 피하는 건 아베야네다의 미래를 지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웃음거리가 되는 게 두려워서다. - P138
"사랑해요."
"지금껏 당신에게 그 말을 하지 못했어요." 아베야네다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에요. 이젠 그 이유를 알겠어요." - P164
오늘, 온종일 한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혀 지냈다. 아침을 먹는 동안에도, 일하는 동안에도, 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무뇨스와 언쟁을 하는 동안에도. 이 생각에서 숱한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일었다. ‘죽기 전에 무슨생각을 했을까? 그 순간 그녀에게 난 어떤 의미였을까? 나에게 의지했을까? 내 이름을 불렀을까?‘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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