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과학 - 세상을 움직이는 인간 행동의 법칙
피터 H. 킴 지음, 강유리 옮김 / 심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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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복잡하고

우리는 편향되었다.

저자 피터 H. 한은 조직행동학자로 20년 넘는 기간 동안 사회적 오해의 역학 관계와 신뢰를 연구하였고 거기서 얻은 놀랍고도 때로는 심기 불편한 통찰을 토대로 이 책을 집필했다. 저자는 연구의 결과가 때로는 '심기가 불편한 통찰'이라고 표현했을까? 왜냐면 우리는 누구나 '신뢰는 중요하다'라고 말하고 믿으면서도 신뢰와 관련된 판단에 매우 서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뢰'와 관련된 문제를 만났을 때 신뢰를 회복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성급히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우리는 아주 적은 정보를 바탕으로 낯선 사람을 선뜻 신뢰하지만 이 초기의 신뢰는 또 몹시 무너지기 쉽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신뢰가 어떻게 형성되고 훼손되는지, 또 신뢰를 회복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탐구한다. 이 책을 끝까지 읽으면 개인적인 관계 속의 신뢰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에 대한 분별력을 키울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한 명의 여성과 불륜을 저지른 클린턴 대통령은 탄핵 소추를 당한 반면 수십 년에 걸쳐 여섯 명의 여성을 추행하고 모욕한 혐의로 고발된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주지가 선거에 승리했다. 성추문이라는 비슷한 유형의 신뢰 위반 사건으로 모두 명백한 도덕성 위반이었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슈워제네거는 리프레이밍 전략을 통해 도덕성 문제를 역량 관계 이슈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신뢰를 결정짓는 두 개의 강력한 요소인 '역량'과 '도덕성'을 통해 신뢰 메커니즘을 탐구한다. 먼저 우리는 역량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정보보다 긍정적인 정보에 더 무게를 둔다. 반면 도덕성의 문제에서는 이 관계가 역전된다. 우리는 역량이 낮은 사람이 보여준 단 한 번의 눈 부신 성과를 믿을 만한 역량 신호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이 단 한 번만이라도 도덕적으로 부정직하게 행동하면 그 사람에 대한 신뢰 전체를 잃기도 한다. 즉 우리는 편향된 사고를 하는데 이는 신뢰 회복의 문제로 이어진다. 역량 기반의 신뢰를 저버린 사람이 사과하면 우리는 앞으로 그가 비슷한 잘못을 피하고 노력할 것이라고 믿기에 사과가 도움이 된다. 반면 도덕성 기반의 위반을 저지를 사람은 사과를 한다 해도 우리는 그의 뉘우침과 속죄의 신호를 대부분 무시하기 때문에 사과는 별 소용이 없고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다. 따라서 도덕성 위반자는 무엇을 해도 별 소용이 없는 것을 알기에 사과를 하지 않는 전략을 택하기도 한다. 우리는 완전한 정보를 가지지 않은 채로 세상의 문제를 판단한다. 사건과 관련된 복잡한 정황을 세세하게 따지기보다는 흑 또는 백으로 결론짓는다. 진실은 복잡하고 회색 지대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저자는이 책은 '신뢰 문제의 복잡성을 이해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세심하게 이 문제에 접근할 의지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라고 말한다. 이 책은 대인관계부터 집단, 문화, 국가에 이르기까지 점점 범위를 확대하면서 신뢰 문제를 탐구한다. 우리는 스스로는 도덕적으로 좀 더 옳다고 보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반대로 생각한다. 늘 불충분한 정보를 토대로 누군가를 너무 빨리 신뢰하고 누군가의 사과는 받아주지 않는다. 대중은 권력자에 대한 낭만화된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권력자 또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권력자는 단 한번의 실수에도 평생 동안의 업적이 물거품이 되기도 한다. 또는 반대로 작용해서 객관적인 신뢰 위반의 데이터가 쌓여도 이를 부인하고 우상화하기도 한다.

저자는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로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자동 조종장치를 끄고 나의 신뢰성이 위협받을 때 남들이 해줬으면 하는 것과 똑같은 수준의 사려 깊고 섬세한 배려로 신뢰 위반 상황을 해석하고 노력하는 것이다(p387)라고 말한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편향성을 극복하는 것은 힘들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진실은 생각보다 훨씬 복합하고 우리는 기대보다 어리석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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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 문명을 가로지른 방랑자들, 유목민이 만든 절반의 역사
앤서니 새틴 지음, 이순호 옮김 / 까치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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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Nomad)라는 말의 어원은 초기 인도유럽어 단어 노모스(nomos)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모스의 뜻은 다양한데 "고정된 지역 혹은 경계 지역", "방목자", "방랑하는 유목민의 일원", "방목지를 찾아다니는 사람" 등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가축 떼를 방목할 법적 권리를 가질 장소를 찾아다니는 사람"을 의미할 수도 있는 노마스(nomas)의 근어가 싼 튼 바로 그 근어인데, 이 근어는 나중에 여러 갈래로 분기된다. 소도시와 대도시가 건설되고 많은 사람들이 정착하는 삶을 살게 되자 이제 노마드는 '벽 없이 생활하며 경계 너머에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 정착민들은 노마드를 두 가지로 사용한다. 어떤 이들은 '노마드'라는 단어에서 낭만과 향수를 찾는다. 반면 한편에서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을 떠돌이, 철새, 방랑자, 도피하는 사람, 주거 부정인 사람들이라고 암묵적으로 판단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우리는 노마드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돈이 많아 이곳저곳을 선택하여 옮겨 다니며 살 때는 보통 첫 번째 의미를 적용하는 경향이 있고, 반대로 가진 돈이 적어 삶에 떠밀리듯 이곳저곳을 떠돌며 사는 사람들에겐 두 번째 의미를 적용하기도 한다. 저자는 두 번째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알 수 없는 사람들"로 해석하고 무지에서 비롯된 위협과 불안, 혐오와 편견을 가진 이들을 향해 해석에 좀 더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이동하며 사는 사람들과 정착해 사는 사람들 간의 관계 변화를 추적한다. 1만 2,000년에 걸친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인류 역사의 절반을 차지했지만 기억되지 못했고 그나마 남은 기억도 오해로 가득 찼던 유목민들의 역사를 탐구한다. 

책은 총 3부로 이루어졌다. 제1부에서는 인간이 수렵채집을 멈춘 시점이었던 1만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정착민과 유목민들이 대체로 협력했던 초기 역사에 대해 말한다. 1부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정착민과 유목민은 서로를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 정착민들은 인류 문명이 대부분 정착민들이 이룩한 성취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명은 초기부터 언제나 유목민, 이주자, 그리고 이동하며 살았던 사람들에 기여에 힘입어 성장했다.

제2부에서는 소제목 '제국 세우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동성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세운 몇몇의 위대한 제국들의 흥망성쇠를 다룬다. 유목민들은 유럽의 르네상스를 비롯하여 현대 세계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서구의 역사가들은 이 시대를 일컬어 암흑시대로 명명했다. 그러나 2부를 읽어가다 보면 이 시대가 결코 암흑시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제3부에서는 유럽인들이 그들의 식민지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전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유목민들의 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다룬다. 유럽인들은 어디를 가든 유목민의 힘과 마주쳐야 한다는 오래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인들은 과학혁명과 함께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된다. 유럽의 백인들은 인간 세상뿐만 아니라 자연도 지배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은 유목민들의 삶을 야만적이라 여겼다. 유목민들의 삶은 부정당했고 그들의 역사는 지워졌으며,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정착민들이 '노마드'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나는 이 책의 서문 격인 <이란, 자그로스 산맥에서>을 읽으면서 유목민의 역사를 다시 읽을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작가, 언론인, 방송인, 「지리학」지의 편집고문, 왕립지리학회 회원지 「콘데 나스트 트래블러」 기고 편집자인 저자 앤서니 새틴은 이 책의 시작을 바흐티야리 부족민들과 함께 보낸 경험을 들려주며 시작한다. 저자는 성인이 된 이후 오랜 시간 전 세계 곳곳의 유목민들과 만났다. 유목민들과의 대화는 늘 같은 주제였다고 한다. 연속성, 소속되어 있다는 자부심,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삶, 자연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존경하는 마음, 국가가 정착을 바라는 상황에서 유목 생활을 하는 것의 어려움 등등. 이 주제들은 낭만적이고 몽환적으로 들린다. 나는 여기서 내 오해와 무지를 바로잡아야겠다고 느꼈다. 나는 이 유목민들과 어렸을 적 학교에서 기계처럼 외웠던 '흉노족의 침략' 속 유목민들을 연결 짓지 못했기 때문이다. 흑인의 삶처럼, 여성의 삶처럼, 소수민족의 삶처럼, 아시아인의 삶처럼 유목민의 삶도 역사에서는 늘 잊혔다. 이 책을 통해 유목민들의 삶을 새로 배웠다.



* 출판사에서 지원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그때 이후로 정착 생활을 했다. 지난 세기에 우리 대부분은 크고 작은 도시들에 정착했고, 우리의 삶의 방식은 자연계를 떠나 벽 안에 사는 형태로 극적으로 달라졌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 중 일부를 사악한 인간, 신뢰할 수 없는 동반자, 마약 중독자, 스릴을 쫓는 사람, 도박꾼,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으로 바꿔놓았으며, 또 다른 사람들이 탁 트인 도로, 새로운 도시에 대한 기대, 새로운 경관 혹은 다음번에 만날 친구를 고대하며 노마드랜드(유목민의 땅)를 방랑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게 만들었다. - P51

인간 역사의 대부분을 지나오면서 우리 인간은 모두 이동하며 살았다. 우리 세계, 우리 문화,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유목민들이 만들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의 행동은 자궁에서 나오는 첫 여행으로부터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여향까지 모두 여행과 연계되어 있으며, 진화가 우리에게 의도한 것도 여행이었다.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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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 날 대신해 소설, 잇다 5
김명순.박민정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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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잇다' 시리즈

『천사가 날 대신해』는 '소설, 잇다'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이다. 이 시리즈는 충분히 언급되지 못한 근대 여성 작가의 주요 작품들을 오늘날 주목받고 있는 현대 작가의 작품과 함께 엮어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다. 약 10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있는 두 작가의 작품들을 한 책에서 읽는 경험은 이런저런 상념에 빠지게 한다. 시공간의 격차 덕분에 변한 것과 이 격차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이번 책은 1세대 여성 작가 김명순과 2009년 《작가세계》 신인상 수상을 비롯하여 김준성문학상, 문지문학상, 젊은작가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박민정 작가를 한 책에서 묶었다.



김명순의 소설

김명순 작가(1896~1951 추정)의 소설은 총 세 편이 소개되고 있다. 김명순 작가는 생전에 170여 편의 소설, 시, 수필, 희곡을 남겼는데 이 책에는 『의심의 소녀』, 『돌아다볼 때』, 『외로운 사람들』 세 편의 소설을 실었다. 이 작품들은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이 당연시되지 않던 시기에 태어나 식민지 시기 여성에게 가해졌던 폭력까지 겪으며 써낸 글들이다. 그의 작품은 주로 연애와 결혼, 신여성의 삶, 자전적 글쓰기로 압축된다. 첫 번째 소설 『의심의 소녀』는 작가의 데뷔작이다. 『의심의 소녀』는 '범네'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미소녀를 둘러싼 이야기다. 이 6.5페이지의 짧은 분량임에도 범네를 둘러싼 추측과 소문 그녀에게 가해진 학대는 생생하게 와닿는다. 두 번째 소설 『돌아다볼 때』는 '소련'이라는 신여성이 주인공이다. 소련의 어머니는 본처가 아닌 첩이었는데, 이로 인해 그녀의 삶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마지막 소설 『외로운 사람들』 세 편의 소설 중 가장 긴 분량의 이야기다. 이 소설에서는 최씨 가문 네 남매의 삶을 통해 사랑에 대해 탐구한다.


박민정의 소설

박민정 작가는 앞서 소개한 것처럼 다수의 상을 연이어 수상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반면 김명순 작가는 천부적인 재능과 지적인 능력에도 불구하고 문단과 사회에서 추방되고 유폐된 삶을 살았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천사가 날 대신해』는 박민정 작가의 소설로 친구 '세윤'을 읽은 화자가 세윤의 기록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친구 '세윤'은 세상과 남성으로부터 소외와 괴롭힘을 겪은 뒤 '죽음'에 이르렀다. 이 소설은 화자가 친구를 잃은 뒤 겪는 '모호한 상실'(이 표현은 폴린 보스의 책 『모호한 상실』 (작가정신 출판사, 2023)에서 가져온 표현이다.)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박민정의 에세이

책의 마지막 글은 박민정 작가의 에세이 『때가 이르면 굳은 바위도 가슴을 열어』이다. 이 에세이에서 박민정 작가는 김명순 작가와 한 책에서 묶인다는 것에 대한 소회와 본인의 소설 『천사가 날 대신해』를 쓸 때 다분히 김명순 작가의 『의심의 소녀』를 의식하고 있었음 등을 밝힌다. 김명순 작가의 세 편의 소설과 박민정 작가의 소설 한 편을 읽은 뒤 에세이를 마지막으로 읽으면서 여성의 삶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여성 작가의 삶에 대해서도. 백 년 전의 삶은 지금의 삶과 얼마나 다를까. 여성과 여성 작가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섣불리 하기가 어렵다.





여성의 삶은 백 년 전에 비해 분명히 달라졌다. 대학에도 들아가고 회사에도 채용된다. 여성들이 출입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의 범위는 분명히 확대되었다. 그러나 여성은 여전히 그 장소에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차별과 배척은 복잡하고 미묘하게 변화했다. 여성은 여전히 어디든 '기능'으로 평가받지 '존재' 그 자체로 환대받을 수 없다. 이 책의 해설을 쓴 박인성 문학평론가는 '가장 두려운 적과 싸우는 작가들'이라는 제목으로 두 작가의 소설들을 분석한다. '가장 두려운 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바로 '외로움'이다. 여성은 먼저 세상과 남성으로부터 소외된다. 그 다음엔 자기가 스스로를 소외시킨다.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나 외롭다. 그러나 누군가의 외로움은 항상 다른 누군가의 것들보다 더 깊고 잔인할 수 있다.



* 출판자 지원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사랑을 원하여도 얻지 못하고, 자유를 원하여도 얻지 못하고, 이별을 청하여도 안 들어 의심받고, 학대받고 갇혀 비관하던 나머지 병든 몸을 일으켜 평양의 별장에서 자살하였다. - P26

전남편과 이혼한 다음 날 세윤을 불러낸 그의 모친을 마주할 때도, 그 모친이 상가 공중화장실에서 밑을 닦은 휴지를 들고 나와 세윤에게 버리라고 쥐어줄 때도, 그녀와 동행한 전남편의 동생이 "형수는 팔자가 늘어지셨네요"라고 지껄일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 세윤은 내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나는 정말 언니라고 생각했어."

그때 나는 처음으로 세윤에게 고함을 쳤다.

"내가 말했잖아, 씨발! 회사에 언니란 건 없다고!"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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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만든 세계 - 세계사적 텍스트들의 위대한 이야기
마틴 푸크너 지음, 최파일 옮김 / 까치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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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인간이 문자를 발명하지 않았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모든 이야기들이 오직 누군가의 입과 입으로만 전해졌다면 우리의 의식은 지금과 어떻게 다를까.

만약 문자가 없었다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가장 좋아했던 책, 『일리아스』가 없었을 것이다. 『일리아스』에 적힌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머리맡을 늘 지켰고 그의 세계관에 영향을 주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대대로 그리스인들에게 근본 텍스트였기 때문이다. 근본 텍스트들은 사람들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즉 알렉산드로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으로 여겼고, 트로이 전쟁을 다시 체험하기 위해 아시아를 정복하고자 했다. 만약 『일리아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의 군대를 이끌고 어디서 누구와 전투를 벌였을까.


저자 마틴 푸크너는 하버드 대학교 영문학과 비교문학 교수로 철학부터 예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대한 글을 썼다. 작년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소개하여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 책 『글이 만든 세계』는 "문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인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여기서 문학은 시와 소설과 같은 예술작품만이 아니라 글로 된 모든 것을 뜻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글이 만든 세계』의 부제는 "세계사적 텍스트들의 위대한 이야기"이다. 세계사적 텍스트들은 인류 역사를 형성해온 근본 텍스트들을 말한다. 근본 텍스트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면서 커다란 권력과 중요성을 쌓아가고 마침내는 여러 문화들 전체의 소스 코드가 된 텍스트들의 영향력이다(p16).'


『일리아스』, 『길가메시 서사시』, 『히브리 성서』, 『소크라테스와의 대화』, 『금강경』, 『논어』, 『겐지 이야기』, 『천일야화』, 『95개조 반박문』, 『포폴 부』, 『돈키호테』, 미국의 신문들, 세계 문학, 『공산당 선언』, 『진혼곡』,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오메로스』, 『해리 포터』를 근본 텍스트로 삼아 인류의 4,000여 년의 역사를 탐구한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동서양의 근본 텍스트들의 탄생과 영향력을 펼쳐 보이는 저자의 역량은 가히 놀랍다.

이 위대한 문학들은 스토리텔링이 글쓰기와 교차했기 때문에 비로소 탄생한 것이다. 저자는 문학의 역사를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한다.

(제1단계) 소수의 서기 집단들에 의해서 지배되던 시기. 극소수만이 초창기의 어려운 문자 체계를 숙달했고, 『길가메시 서사시』나 『히브리 성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일리아스』 같은 이야기꾼들로부터 취합한 텍스트들을 지배했다.

(제2단계) 교사 문학 시기. 제1단계의 근본 텍스트들의 영향력이 커지자 부처와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 같은 '카리스마적인 교사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이 교사들은 사제와 서기들의 영향력을 규탄했고, 그들의 추종자들이 새로운 글쓰기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 교사들은 글을 남기지 않고 학생들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함으로써 가르치기를 고집했다. 제자들은 스승들이 죽자 가르침의 장면들, 문답들을 포착하여 그들이 했던 말을 글로 적었다. 이 텍스트들은 제자들에 의해 생명력을 얻고 다음 세대들에게 계속하여 전해졌다.

(제3단계) 개별적인 작가들이 등장하는 시기. 이 단계는 일본의 무라사키 부인과 에스파냐의 세르반테스 같은 대담한 작가들이 등장하여 소설을 창조한 시기다. 글쓰기에 있어서 세계 문학사 최초의 위대한 소설인 『겐지 이야기』는 일본 궁중의 어느 시녀가 쓴 소설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익명의 궁중 여인이 썼기 때문에 저자는 그가 창조한 소설 속 여주인공의 이름 '무라사키'로 기억된다. 그리고 세르반테스는 유럽에서 근대 소설을 발명했다. 제3단계에서는 글쓰기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혁신들이 뒷받침되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종이가 풍부해졌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돈키호테』는 해외에서도 인기를 끌었고 유럽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애독서가 되었다.

(제4단계) 텍스트들의 대량생산과 대중 문자해득의 시대. 풍부해진 종이와 인쇄술의 광범위한 활용은 신문과 대형 전단지, 그리고 『프랭클린 자서전』이나 『공산당 선언』과 같은 텍스트들을 널리 보급하였다. 그리고 바야흐로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대중들을 탄생시켰다.

이 책은 문학의 네 단계 발전이라는 뼈대를 세우고 근본 텍스트들 살점으로 붙여 넣는다. 페키니아 알파벳에서부터 아르파넷(Afpnet)이라고 하는 컴퓨터 네트워크에 대한 아이디어까지, 『일리아스』에서부터 『해리 포터』에까지 읽을 줄 아는 동물 인류의 역사가 물 흐르듯 이어진다.

그간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제임스 글릭 『인포메이션』, 월터 J. 옹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메리언 울프 『다시, 책으로』, 닐 포스트먼 『죽도록 즐기기』 등을 읽어왔다. 이 책들은 읽고 쓰줄 아는 능력이 인간이라는 동물에게 얼마나 중요한 진화였는지 알려주었다. 이번에 읽은 『글이 만든 세계』는 특정 텍스트들이 어떻게 탄생하였는지 또 우리의 역사의 진로를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책 『글이 만든 세계』 는 '읽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겠다는 내 결심이 무려 4,000년의 역사를 가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몇 십년 남짓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선물받은 내 삶을 최대한 낭비하지 않고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현재의 기술 혁명은 전자우편과 전자책부터 블로그와 트위터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해마다 새로운 글쓰기 형태를 내놓으면서, 문학이 보급되고 읽히는 방식뿐만 아니라 쓰이는 방식까지 변화시키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근래에 우리가 사용하기 시작한 일부 용어들은 문학의 아득한 역사 속에서 초창기 순간들과 비슷하게 들린다. 고대의 서기들처럼 우리는 다시금 텍스트를 스크롤하고(scroll: 원래는 두루마리를 펼친다는 뜻이다) 고개를 숙여 태블릿(tablet: 서판, 고대에는 주로 석판이나 점토판을 썼다)을 들여다보고 앉아 있다. 이 옛것과 새것의 조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P21

20세기 문학의 부침과 기능을 곰곰이 생각하면, 나에게는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참상을 증언하는 작가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물론 더 앞선 작가들도 폭력의 묘사에 몸을 사리지 않았다. 『일리아스』에서 호메로스와 그의 서기는 창이 인간의 몸속으로 어떻게 들어가는지 아니면 머리를 어떻게 깨부수고 관통하는지를 적나라한 세부묘사로 포착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의 체계적인 대량 감금을 묘사하는 것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문학은 이 도전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 왕과 영웅들의 운명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사람에도 관심을 쏟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 P354

문학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발화를 시공간으로 깊숙이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인터넷은 몇 초만에 지구상 어디로든 글을 보낼 수 있게 하면서 공간을 확대했다. 그렇다면 시간은 어떨까?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에 대한 안내자로서 지난 4,000년간의 문학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미래의 문학고고학자들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길가메시 서사시』 같은 망각된 걸작들을 발굴해낼 수 있을까? - P416

문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은, 생존을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속적인 사용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텍스트는 번역되고, 전사되고, 코드 변환될 만큼 계속해서 우리에게 유의미해야 하고 세월에 걸쳐 지속되도록 세대마다 읽혀야 한다. 기술이 아니라 교육이 문학의 미래를 보장할 것이다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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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중독 - 실패 혐오 시대의 마음
롤란드 파울센 지음, 배명자 옮김 / 복복서가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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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중독』은 걱정과 불안이 어떻게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밝히는 책이다. 저자 롤란드 파울센은 스웨덴 웁살라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룬드대학교 사회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자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걱정과 불안이 많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사회를 분석한다. 머나먼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왜 인간은 생각과 걱정에 중독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걱정이 일상인 우리는 과한 걱정을 다스리기 위해 약이나 상담이 점점 더 의존하고 있다. 걱정과 불안에 대한 흔한 설명으로는 풀숲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사자를 불안해하던 시절 우리 조상들의 생존본능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라 한다. 이 강력한 생존본능 때문에 불안과 걱정은 어느 정도는 어쩔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다일까? 사회학자인 저자는 대중 "현상"으로써 걱정과 불안을 분석한다.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걱정을 낯설게 볼 필요가 있다.




걱정은 기본적으로 "만약에 ... 이면, 어떡하지?를 물을 때 생기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우려로 정의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정의를 좀 더 명확히 한다. 저자에 따르면 걱정은 스스로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 학문적 의미에서 걱정은 불안에서 야기된 반사실적 사고라고 정의할 수 있다(p76). 여기서 반사실적 사고란 "만약에... 이면, 어떡하지?"식의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생각이다. 반사실적 가정은 매우 비현실적일 수 있지만, 우리의 삶에 매우 현실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정서 중 많은 부분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돕기도 한다. 반사실적 사고는 인간의 근본적 능력이기도 한데 문제는 반사실적 세계에 몰두하는 강도가 전과 달라졌다는 것이다. 1930년대 소련의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 심리학자인 알렉산더 루리야는 농경사회를 지나 산업사회가 도래하면서 우리의 걱정은 크게 증가했음을 발견했다. 산업사회는 문해력과 추상적 사고력이 점점 더 중요해졌고 감각적 경험에 의존하던 농경사회에 비해 온갖 정보원에 의존하는 산업사회에 이르러서는 반사실적 사고에 기반을 둔 논리적 추론이 중시되었다는 것이다. 루리야는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일찍이 논리적 추론을 배우고, 그리고 인해 상상력이 자라고 자기 성찰 능력도 갖추게 되어, 사람들은 더 자유로와지고 주변 환경에도 덜 얽매일 것이라 봤다. 한편 이것은 부분적으로만 옳은 생각이다. 우리는 반사실적 사고를 많이 하긴 하지만 상상력을 발휘해 창의적인 반사실적 사고를 하기보단 주로 거의 대부분 내 개인에 대해 우리 가족에 대해 걱정한다. 걱정은 개인의 책임과 자기 결정과 연관된 것에 더 강하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인류학 연구를 자세히 살피면 '생각이 너무 많은 것'은 전 세계 어디에서든 발견된다. 늘 질병을 설명할 때 그 중심에 있었다.



2부는 문화와 역사를 넘나들면서 우리가 이토록 걱정 가득한 삶에 도달하게 된 여정을 설명한다. 수렵 채집 공동체의 삶에서 농경사회를 거쳐 산업자본주의에 도달했다. 인간의 삶이 복잡해졌으니 걱정이 증가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합리적으로 결정해야 하고 자기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불안해진 것이다. 개인의 선택이나 의지가 중시될수록 위험관리와 실패는 개개인의 탓이 된다. 또한 우리는 신이 계획한 세계에서 벗어나 스스로 기획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영국 사회학자 프랭크 푸레디는 세속적 걱정이 종교적 걱정보다 더 빨리, 더 넓게 퍼진다고 말한다. 신에 대한 두려움이 재앙에 대한 불안으로 바뀌었고, 도덕적 양심의 가책은 위험 분석으로 대체되었다.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연구에서는 특히 대중매체가 보도와 이미지들을 통해 우리의 불안과 걱정에 대한 인식을 급진적으로 바꾸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전문가 집단이 등장하고 이에 의존하게 되면서 우리의 혼란은 가중된다. 왜냐면 전문가들이 저마다 다른 분석을 내놓기 때문이다.




3부는 불안과 걱정의 노예에서 해방되고 싶은 우리를 위한 대책을 내놓는다. 요즘 정신과 상담을 받기가 어렵다고 한다. 환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내 치료와 상담을 위한 대기 시간이 길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도 어느덧 정신과 상담, 우울증 약 복용 등에 익숙해졌다. 한편 이를 다르게 보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 삶 속에 정신 기능과 관련된 문제는 잔디에 있는 잡초와 같이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정신 건강에 있는 문제와 함께 잘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학자들 중엔 '정신질환'이라는 개념과 작별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각종 '장애', '증후군', '질병', '신경증'으로 언어적으로 명명하는 순간 그것들은 진짜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불안을 줄이려는 심리치료는 불안의 수용을 방해한다. '불확실성'을 긍정하고 이것을 한껏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 불확실성은 인간 존재와 우주의 근원임을 깨달아야 한다. 삶은 통제되지 않고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이 진실을 기꺼이 수용해야 한다. 더불어 근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착취한 지구에서 더 이상 풍요의 열매만을 수확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지구의 지배자가 아니라 지구상에 수많은 생명체 중 하나이다. 끝없는 진보와 성장은 있을 수 없다. 지금과 같은 물질숭배 삶의 방식, 자연을 재료 삼아 행복을 짜내는 삶의 방식이 어마어마하게 틀렸다는 또 하나의 진실을 깨달아야 한다.




*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사람들에게 미래가 항상 오늘날처럼 중요했던 건 아니다. 미래 지평선,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멀리까지 내다보느냐는 오로지 실용적 이유로 인류 역사 대부분에서 며칠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인의 미래 지평선은 구체성을 초월해 멀리까지 확장되어 있다. 현대인이 생각하는 ‘미래‘는, 불과 몇 세기 전만 해도 감히 추측할 수 없었건 긴 기간을 아우른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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