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천사가 날 대신해 ㅣ 소설, 잇다 5
김명순.박민정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6월
평점 :
'소설, 잇다' 시리즈
『천사가 날 대신해』는 '소설, 잇다'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이다. 이 시리즈는 충분히 언급되지 못한 근대 여성 작가의 주요 작품들을 오늘날 주목받고 있는 현대 작가의 작품과 함께 엮어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다. 약 10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있는 두 작가의 작품들을 한 책에서 읽는 경험은 이런저런 상념에 빠지게 한다. 시공간의 격차 덕분에 변한 것과 이 격차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이번 책은 1세대 여성 작가 김명순과 2009년 《작가세계》 신인상 수상을 비롯하여 김준성문학상, 문지문학상, 젊은작가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박민정 작가를 한 책에서 묶었다.
김명순의 소설
김명순 작가(1896~1951 추정)의 소설은 총 세 편이 소개되고 있다. 김명순 작가는 생전에 170여 편의 소설, 시, 수필, 희곡을 남겼는데 이 책에는 『의심의 소녀』, 『돌아다볼 때』, 『외로운 사람들』 세 편의 소설을 실었다. 이 작품들은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이 당연시되지 않던 시기에 태어나 식민지 시기 여성에게 가해졌던 폭력까지 겪으며 써낸 글들이다. 그의 작품은 주로 연애와 결혼, 신여성의 삶, 자전적 글쓰기로 압축된다. 첫 번째 소설 『의심의 소녀』는 작가의 데뷔작이다. 『의심의 소녀』는 '범네'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미소녀를 둘러싼 이야기다. 이 6.5페이지의 짧은 분량임에도 범네를 둘러싼 추측과 소문 그녀에게 가해진 학대는 생생하게 와닿는다. 두 번째 소설 『돌아다볼 때』는 '소련'이라는 신여성이 주인공이다. 소련의 어머니는 본처가 아닌 첩이었는데, 이로 인해 그녀의 삶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마지막 소설 『외로운 사람들』 세 편의 소설 중 가장 긴 분량의 이야기다. 이 소설에서는 최씨 가문 네 남매의 삶을 통해 사랑에 대해 탐구한다.
박민정의 소설
박민정 작가는 앞서 소개한 것처럼 다수의 상을 연이어 수상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반면 김명순 작가는 천부적인 재능과 지적인 능력에도 불구하고 문단과 사회에서 추방되고 유폐된 삶을 살았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천사가 날 대신해』는 박민정 작가의 소설로 친구 '세윤'을 읽은 화자가 세윤의 기록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친구 '세윤'은 세상과 남성으로부터 소외와 괴롭힘을 겪은 뒤 '죽음'에 이르렀다. 이 소설은 화자가 친구를 잃은 뒤 겪는 '모호한 상실'(이 표현은 폴린 보스의 책 『모호한 상실』 (작가정신 출판사, 2023)에서 가져온 표현이다.)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박민정의 에세이
책의 마지막 글은 박민정 작가의 에세이 『때가 이르면 굳은 바위도 가슴을 열어』이다. 이 에세이에서 박민정 작가는 김명순 작가와 한 책에서 묶인다는 것에 대한 소회와 본인의 소설 『천사가 날 대신해』를 쓸 때 다분히 김명순 작가의 『의심의 소녀』를 의식하고 있었음 등을 밝힌다. 김명순 작가의 세 편의 소설과 박민정 작가의 소설 한 편을 읽은 뒤 에세이를 마지막으로 읽으면서 여성의 삶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여성 작가의 삶에 대해서도. 백 년 전의 삶은 지금의 삶과 얼마나 다를까. 여성과 여성 작가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섣불리 하기가 어렵다.
여성의 삶은 백 년 전에 비해 분명히 달라졌다. 대학에도 들아가고 회사에도 채용된다. 여성들이 출입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의 범위는 분명히 확대되었다. 그러나 여성은 여전히 그 장소에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차별과 배척은 복잡하고 미묘하게 변화했다. 여성은 여전히 어디든 '기능'으로 평가받지 '존재' 그 자체로 환대받을 수 없다. 이 책의 해설을 쓴 박인성 문학평론가는 '가장 두려운 적과 싸우는 작가들'이라는 제목으로 두 작가의 소설들을 분석한다. '가장 두려운 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바로 '외로움'이다. 여성은 먼저 세상과 남성으로부터 소외된다. 그 다음엔 자기가 스스로를 소외시킨다.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나 외롭다. 그러나 누군가의 외로움은 항상 다른 누군가의 것들보다 더 깊고 잔인할 수 있다.
* 출판자 지원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사랑을 원하여도 얻지 못하고, 자유를 원하여도 얻지 못하고, 이별을 청하여도 안 들어 의심받고, 학대받고 갇혀 비관하던 나머지 병든 몸을 일으켜 평양의 별장에서 자살하였다. - P26
전남편과 이혼한 다음 날 세윤을 불러낸 그의 모친을 마주할 때도, 그 모친이 상가 공중화장실에서 밑을 닦은 휴지를 들고 나와 세윤에게 버리라고 쥐어줄 때도, 그녀와 동행한 전남편의 동생이 "형수는 팔자가 늘어지셨네요"라고 지껄일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 세윤은 내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나는 정말 언니라고 생각했어."
그때 나는 처음으로 세윤에게 고함을 쳤다.
"내가 말했잖아, 씨발! 회사에 언니란 건 없다고!" - P28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