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편지 모음 : 200년 만에 도착한 편지 - 최초의 마르크스 종합 서간집 마르크스 컬렉션
카를 마르크스 지음, 이회진 편역 / 21세기문화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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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만에 도착한 편지』는 이론가이자 혁명가였던 카를 마르크스가 가족, 친구, 지인 등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서간집이다. 동아대 맑스엥겔스연구소 특별연구원 이회진이 엮은 이 책은 국내 최최의 마르크스 편지 선집이다.


카를 마르크스
카를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여전히 크고 무겁다. 자본주의가 계속되는 한 그의 이름은 끝없이 소환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들어가며>와 <나오며>는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쓴 글인데, 이 두 글을 통해 마르크스라는 사람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어떠한 업적을 남겼는지 대강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들어가며>에 실린 아주 짧은 마르크스의 전기는 이회진 편역자에 따르면 마르크스 생전이나 사후에 작성된 그 어떤 전기보다도 마르크스의 생애와 업적을 압축적이고 객관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나오며>는 엥겔스의 기고문 「카를 마르크스 장례식」에서 발췌한 글인데, 마르크스가 남긴 유산을 기리고 있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와 노동운동 전체에 과학적 기초를 제시했다. 엥겔스는 <들어가며>에서 마르크스가 학문의 역사에 남긴 수많은 중요한 발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요약한다. 첫 번째는 그가 세계사 이해 전체를 완벽히 전복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 이전까지 모든 역사적 변화의 최종 근거는 인간의 변화하는 이념이 아니었다. 정치적 변화가 역사 전체를 지배한다는 생각에 기초를 두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인간에게 있어 이념은 어디에서 나오고, 정치적 변화를 추동하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추적해서 밝혀냈다.

두 번째로는 마르크스가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최종적으로 해명한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 내부를 면도칼처럼 예리하게 밝혀냈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점을 증명했다. 자본주의적 착취 형태는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비슷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봉건 영주, 자본가 등 언제나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는 웅대한 기관이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인간 마르크스
인문쪽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카를 마르크스의 이름을 수백수천 번 들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너무나 압도적이다. 마르크스와 관련된 수많은 교양서가 존재한다.

그간 마르크스에 관한 글을 꽤 많이 접했다. 대부분의 글들은 이론가, 사상가, 혁명가로서의 '마르크스' 내지는 '맑스'였다. 인간 마르크스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이 책은 인간 마르크스를 입체적이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청년 마르크스, 아들 마르크스, 남편 마르크스, 아버지 마르크스, 친구 마르크스, 작가 마르크스, 사상가 마르크스 등을 만날 수 있다.




청년 마르크스

이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었다. 제1부는 청년 마르크스가 쓴 편지를 실었다. 책의 제일 첫 번째 편지는 1837년 11월 10일 베를린에 있는 청년 마르크스가 트리어에 있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는 마르크스가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법학이 아니라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의사를 담고 있다. <법학에서 철학으로>라는 제목을 가진 이 편지는 청년 마르크스가 가진 철학에 대한 열망뿐만 아니라 본인이 법학을 전공하길 원했던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동원한 법철학적 지식을 매우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마르크스가 1818년 생이니 이때가 만 19세 한국 나이로는 20세 정도인데, 글의 깊이는 역시 '마르크스'구나 하고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 삶에는 마치 이정표처럼 지나간 시간을 마주하는 동시에 새로운 방향도 분명히 가리키는 순간이 있습니다. (...)

세계사 자체는 이런 식의 회고를 즐기면서 가끔은 퇴보와 정체라는 가상을 눌러쓴 자신을 보곤 하죠. 그런데도 세계사는 자신을 안락의자에 던져 놓고, 자신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정신적 행위를 지적으로 꿰뚫어 보려는 일만 할 뿐이에요.

그러나 이런 순간에 개인은 서정적으로 됩니다. ”
__1837년 11월 10일, 카를 M. 이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중



추방자, 망명자, 무국적자 마르크스

책의 제2부는 추방된 자로서 마르크스의 삶이다. <끝없는 가난>이라는 소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브뤼셀로 추방되면서 망명자, 무국적자 신세로 끝없는 가난 속에서 불확실한 삶을 보냈다. 어린 자식 세 명이 죽었고 그의 아내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경제적 궁핍으로 인한 치욕의 순간들도 편지 속에서 읽을 수 있다.

“ 짧게 한 문장만 쓸게. 오늘 1시 15분에 작은 애가 죽었어. ”
_ 1852년 4월 14일 런던의 마르크스가 맨체스터의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

“ 사랑하는 아이가 죽으니 집은 으레 황량하고 적막해. 그 애가 우리 집에 활기를 불어넣은 영혼이었는데, 아이의 빈자리가 우리 곁의 모든 곳에서 느껴져.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이미 온갖 종류의 불운을 겪어 봤지만, 이제야 진짜 불행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완전히 망가진 기분이야. (...)
이런 참혹한 고통 속에서도 언제나 나를 붙잡아 둔 것은, 너와의 우정을 떠올리면서 우리가 함께 이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야.

덧붙임 : 아내가 방금 너에게 몇 줄 쓴 것도 동봉할게. ”
_ 1855년 4월 12일 런던의 마르크스가 맨체스터의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

마르크스의 벗, 엥겔스

책의 제3부는 평생토록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 엥겔스와 결별하게 될 뻔한 순간과 화해 과정을 담고 있다. 엥겔스에게도 마르크스는 너무나 귀중하고 소중한 벗이었다. 편지를 읽다 보면 엥겔스가 얼마나 도량이 넓은 친구였을까 상상하게 된다. 엥겔스는 추방자에 무국적자에 빈털터리인 친구가 겪는 온갖 종류의 불운을 위로하고,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우정이란 호혜적 관계에서 싹튼다. 일방적인 관계는 대게는 지속될 수 없다고들 한다. 1863년 1월 7일 엥겔스는 그의 동반자 메리 번즈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마르크스에게 썼는데, 마르크스는 그 편지에 대한 답장에 위로보다는 자신의 궁핍한 삶을 다시금 설명하면서 돈을 빌려 달라는 내용을 썼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결별할 뻔했다가 화해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인간 엥겔스도 만나게 된다. 물론 책은 마르크스가 보낸 편지만 싣고 있지만, 편지의 주석에는 엥겔스가 쓴 답장 일부가 실려 있다. 편지와 주석을 통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나눈 우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어슴푸레 짐작을 해본다.

“ 네게 답장을 쓰기 전에 시간을 얼마쯤 두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 한편으로 네 상황이, 다른 한편으로 내 상황이, 이 상황을 "냉철하게"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더라.
네게 그 편지를 쓴 것은 내가 보아도 그릇된 일이었다. 그 편지를 보내자마자 후회했어. 하지만 이 일은 결코 냉혹한 마음에서 나온 것은 아니야. 네 편지가 도착했을 때 난 나의 가장 친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으니까. (...) 그런데 그날 저녁 네게 편지를 쓸 때는 매우 절망적인 상황인지라 그런 일이 벌어져 버렸다. (...) ”
_1863년 1월 24일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



제4부는 인류의 업적이자 유산으로 칭송받는 『자본』의 출판 전후 과정을 담고 있다. 현재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를 병행하여 읽고 있다. 그래서인지 『자본』의 탈고 과정은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마지막 제5부는 노년의 마르크스가 떠난 요양 여행을 보여준다.


***
언제부턴가 서간집을 좋아하게 되었다. 두 소설가가 주고받은 서간집, 주요 역사적 순간을 담고 있는 서간집, 신경외과 의사가 동료 학자와 주고받은 서간집 등 여러 분야의 서간집을 읽어왔다. 이번 책 『200년 만에 도착한 편지』는 인간 마르크스를 펼쳐 보인다. 압도적 두께와 난해함을 자랑하는 『자본』 원전 읽기는 아직 시도조차 못했기에 그간 내게 '카를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범접 불가한 커다란 존재 그 자체였다.

그런 내게 이 책은 내게 인간 마르크스를 소개해 주면서 그와의 거리를 좁혀준다. 덤으로 친구 엥겔스도 소개해 준다. 나는 난해한 책을 읽을 때 비록 내용은 소화하지 못할지언정 작가와의 거리를 크게 느끼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유독 너무나 컸다. 아마 내 숨이 붙어있는 한 계속해서 마르크스를 읽어갈 텐데 그래서인지 이 책은 무척 소중한 읽기의 시간이었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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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 : 위기의 문학 - 모더니즘 입문서 테리 이글턴 컬렉션
테리 이글턴 지음, 도원우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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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학 평론가이자 문화비평가 테리 이글턴이 들려주는 모더니즘 문학 입문서이다.

이 책은 2025년 예일 대학교 출판사에서 발행한 『모더니즘 : 위기의 문학』을 번역한 것으로, 원서에는 저자 서문이 없지만 21세기문화원에서 출판한 한국어 번역본에는 한국 독자들을 위한 서문이 실려 있다.

“ 나처럼 한반도의 비무장지대에 서서 철모를 쓴 군인들이 블랙홀만큼 깊은 심연을 가로질러 서로를 응시하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국가의 지속적인 회복력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더니즘은 우리에게 그 너머, 아직 실현되지 않은 인간 연대의 형태를 바로 보도록 유혹한다. 하여 한국에 비무장지대가 있을지라도 이상, 임화, 박태원 같은 위대한 모더니스트 예술가들을 배출했으리라. ” _ <한국어판 서문> 중

모더니즘이란

모더니즘은 르네상스 이후 예술의 가장 활발한 전성기 중 하나를 대표하는 문화 혁신이다. 모더니즘은 프로테스탄티즘과 과학적 합리주의의 시대, 도시화, 산업 자본주의, 사유 재산의 주권적 권리의 부상, 근대 식민주의 및 제국주의가 도래하던 때에 시작되었다.

모더니즘의 시대 구분은 학자마다 다르다. 일부 학자들은 1910~1930년으로 보고, 다른 이들은 1980~1930년이나 1890~1940년으로 보기도 한다. 비평가 게오르크 루카치가 선호하는 견해에 따르면, 모더니즘의 첫 움직임은 1848년 유럽 혁명 이후 시기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글턴은 모더니즘은 일반적으로 거대한 규모의 역사적 위기에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제국주의 열강 간의 대립, 심각한 경제 불황, 혁명, 파시즘의 대두, 새로운 기술이 가져오는 흥분과 두려움 등.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상상해 보았다. 우리 시대도 격변한다고들 하지만 모더니즘이 대두하던 시기만큼 과연 혼란스러울까? 지금도 우크라이나에는 드론 폭탄이 떨어지고 사람들이 찢겨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이 말 그대로 세계가 전쟁에 빠져 있지는 않다.

구시대는 무너졌고 전통은 극복되어야 한다. 합리적 이성은 기대만큼 믿을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기술발전과 함께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는 설렘과 흥분보다는 불확실성과 절망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시기에 바로 모더니즘이 등장했다.

“ 사회 전반에는 불안과 종말론적 정서가 퍼져 있었으며, 오래된 확실성의 붕괴, 자아의 불안정화, 전통적 도덕의 침식이 일어나고 있었다. (…)

자유주의적 중도층이 무너지면서, 사회주의 세력은 점점 우파 정치로 내몰리고 있던 지배계급과 대결하게 된다. 전통적 유대의 해체가 일어나고 있으며, 역사마저 멈춘 듯한 느낌이 지배적이다. 평화•진보•해방이라는 계몽주의적 이상은 이프르Ypress와 솜Somme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개인의 삶은 점점 고립과 소외로 점철되고 있다. ” (18-19쪽)

모더니즘 문학

모더니즘은 다양한 예술 형식을 아우른다. 문학 비평가로서 이글턴은 모더니즘 문학의 주요 작가들과 작품들을 소개한다.

모더니즘 작품은 어떠한 일관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까? (우리 독자들은 작가들이 대체로 답이 명확하지 않거나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을 때 질문을 던진다는 걸 알고 있다.)

이글턴에 따르면 모더니즘은 통일된 형성체도 순수하게 서로 다른 발전 양상의 집합도 아니다. 그러나 반복해서 나타는 몇몇 특징들은 있다. 이글턴은 ‘충격, 불협화, 몽타주, 환상, 엄격함, 파편화, 다양성, 비인격성’ 등을 든다.

버지니아 울프는 ‘간헐적인 것, 모호한 것, 파편적인 것, 실패한 것을 용인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왜곡, 자기 성찰, 아이러니, 불확정성, 예술 작품의 자율성, 자아의 고립 또는 해체, 비선형적 서사, 다양한 관점’ 등도 들 수 있다. 레이먼드 윌리엄스(이글턴의 스승님)은 모더니즘을 ‘불안정, 무국적, 고독, 빈곤한 독립에 대한 단일한 서사’로 보았다.

이글턴은 누가 모더니스트 작가로 분류되고 어떤 것이 모더니스트 글쓰기로 간주되는지 판단하는 일은 쉽지 않다고 말한다.

독자들은 1부 〈모더니즘 시대〉를 읽어가며 모더니즘 문학이라는 것에 대해 그림을 조금씩 그려갈 수 있게 된다. 만약 조지프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등을 읽었거나 읽으려 시도한 사람들이라면 이 책이 그간의 읽기에 대한 총체적 해제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나는 큰 도움을 받았다.

2부 〈말과 사물〉 와 3부 〈예술의 죽음〉을 읽으면서 내가 왜 소설을 읽는지 끊임없이 상기했다. 모더니즘 문학을 읽기 위해서는 문학적 체력이 필요하다. 2부와 3부를 읽으면서 나는 나의 20대와 30대와 그 이후의 읽기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20대 시절에 모더니즘 문학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지금은 이런 책을 사서 읽게 되었다. 흩어지는 언어들 속에서 불확실성, 전통과의 이별, 균열, 불안, 상실, 단절 등을 예전보다 더욱 민감하게 포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더니즘적인 감성이 불편하지 않게 되었다. 내 삶이 그렇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베케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로 ‘Perhaps 아마도’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공지능의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는 어쩌면 아마도의 시대를 사는 것은 아닐까. AI가 가져올 미래에 대해 온갖 예측이 난무한다. 테크 거물들은 장밋빛 미래를 내놓지만 우리 대중들은 그들과 다소 다른 반응을 내놓는 것 같다. 우리의 역사 언제부턴가 기술은 늘 급변하고 시대는 따라기 벅차게 되었다. 역사는 너무 빨리 변하고, 어제와 오늘은 연결되지 않는다. 미래는 불확실하다.



지금도 모더니즘이 유효한 이유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모더니즘이 유효한 이유는 '기후 위기, 세계화, 디지털 파편화 시대를 이해하는 거울'(253, 도원우)이기 때문이다. 테리 이글턴은 모더니즘을 끝나버린 과거의 문화 사조로 한정 짓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모더니즘은 과거와의 불협화음, 위기, 균열 속에서 태어났다. 현대도 모더니즘이 잉태되었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과거가 아무리 풍부하다고 해서 현재가 풍요롭지 않다. 미래는 극소수에게만 유리한 것처럼 느껴진다.

책의 초반부에서 이글턴은 페리 앤더슨이 말한 모더니즘의 조건을 언급한다. 앤더슨의 주장을 요약하면 모더니즘은 “여전히 활용 가능한 고전적 과거, 불확실한 기술적 현재, 여전히 예측 불가능한 정치적 미래”를 손에 쥐어야 한다고 한다. 앤더슨의 말은 2026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적당히 잘 들어맞지 않는가? 나는 그렇게 들린다. 오늘날의 위기를 해석할 때 모더니즘은 여전히 활용할 수 있는 자본이다. 내 삶을 해석할 때 나를 둘러썬 관계들을 해석할 때 나를 구성하는 이 시대를 해석할 때 모더니즘은 여전히 좋은 해석의 토대가 되어준다.

“ 결국 모더니즘은 기존의 지배적 합리성이 재앙적으로 실패한 시대에 대안적 합리성을 모색하는 시도이다. (...)

변형된 이성과 배척된 이성 사이의 경계는 모더니스트들이 끊임없이 넘나든 영역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문제가 되는 영역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더니즘 자체는 이미 한 세기 전의 것이지만, 그것이 다루었던 문제들은 여전히 그 어느 때보다 긴급하게 제기된다. ” 233-234쪽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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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현대지성 클래식 72
투퀴디데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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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역사서로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꼽는다. 페르시스 전쟁을 다룬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신화와 전설, 여행담과 풍문까지 폭넓게 담고 있는 것과 달리, 투키디데스는 오로지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한 역사 기술을 추구했다.

​🌿투키디데스,
역사학자이자 전쟁의 목격자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기억되는 고대 아테나이 출신의 투키디데스는 추방당한 장군이었다. 즉 그는 전쟁의 참전자이자 목격자였다. 기원전 460년경, 아테나이에서 약 6킬로미터 떨어진 해안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유력 가문 출신에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청년기에는 소피스트들과 교류하며 수사학, 철학, 역사를 배웠고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 초기부터 이를 기록하기로 결심했다. 기원전 424년에는 트라케 해안 지역의 방어 임무를 맡아 장군으로 임명되어 타소스섬에 파견되었는데, 일련의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20년간 아테나이에서 추방당했다. 추방 기간 동안 아테나이 적국인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을 자유롭게 여행하며 정보를 수집하면서, 전쟁을 다양한 관점에서 관찰하고 연구했다. 기원전 423년-403년 동안 헬라스 전역을 다니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집필했고 추방이 해제된 뒤에도 집필을 계속 이어갔다. 기원전 400년경에 사망하여 그의 저작은 기원전 411년까지의 사건만을 다룬 채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는 역사학자이자 전쟁의 참전자로서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을 오로지 인간의 행위에서 찾으면서, 역사의 무게중심을 신의 섭리에서 인간의 선택으로 옮겨놓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20세기의 냉전사와 21세기의 패권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고대 헬라스 세계에서 기원전 431년부터 404년까지 이어진 전쟁으로 민주정을 대표하는 아테나이(아테네)와 과두정을 대표하는 라케다이몬(스파르테) 간의 충돌이었다. 아테나이(아테네)는 페르시스 전체에 제국주의 정책을 펼치며 동맹국과 헬라스 도시국가들을 억압하며 팽창했다. 아테나이의 팽창을 견제하고자 라케다이몬(스파르타)은 전쟁에 나섰고, 당시 헬라스 세계는 이 두 강대국을 중심으로 양분되었다. 두 국가는 자신의 정치 체제를 동맹국에게 강요했는데, 민주정을 채택하지 않으면 아테나이의 동맹국이 될 수 없었고, 과두정을 따르지 않으면 라케다이몬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21세기 패권 전쟁과 비슷한 면이 많고, 두 강대국이 자신의 정치 체제를 동맹국에게 강요했다는 점에서는 20세기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그 영향을 미치는 냉전사도 떠올리게 만든다. 투키디데스가 말했듯 인간의 본성상 과거에 일어난 일들이 미래에도 되풀이된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사회-국가 간 갈등을 들여다보면 인간과 사회의 본성을 통찰할 수 있다.

[제3권 제국의 균열]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도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 한 상황이 바뀔 때마다 비슷한 사태가 펼쳐진다. 인용하고 싶은 내용이 너무 많아서 고르기가 힘들 정도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구성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총 8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권은 전쟁의 배경과 발발 과정, 제2권은 실전 개시, 제3권은 동맹국들의 이탈과 내전, 제4권은 펠로폰네소스반도 서쪽 최남단 필로스에서 벌어진 전투, 제5권은 니키아스 평화조약과 라케다이몬의 동맹국들 간의 동맹 와해, 제6권과 제7권은 시켈리아 원정, 마지막 제8권은 시켈리아 원정 패전 이후를 다룬다. 이 전쟁은 기원전 404년에 끝났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기원전 411년, 라케다이몬과 페르시스 관계가 틀어지는 장면에서 갑자기 끝난다.

🌿연설문
앞서 말했듯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달리 객관적인 사실에 기반한 역사 기술을 추구했다. 투키디데스 본인이 조사하고 연구한 내용에 근거하여 쓴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예외적으로 포함시킨 것이 연설문이다. 그는 연설문이 단순한 상상이나 수사적 장식이 아니라, 발언 당시의 정세와 이해관계를 면밀히 조사하고 합리적으로 재구성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 연설문들을 읽는 재미가 상당하다. 각기 다른 상황과 입장에서 이루어진 명연설들은 고대 헬라스에서 발달한 대중연설의 정수를 보여준다. 연설문들은 전쟁이라는 극한의 현실 속에서 인간 사회는 어떤 논리와 명분으로 자신들을 정당화했는지 생생하게 펼쳐 보인다.

고대 헬라스 세계를 쇠퇴하게 만든 27년의 전쟁사를 읽으면서 변치 않는 인간사를 엿본다. 세상이 혼란에 빠지면 가장 영악한 사람들이 득세한다. 명분 같은 것은 그때 그때 만들어내면 되는 것이다. 혼란을 틈타 각자의 욕망을 추구하고, 떼로 뭉쳐 조직적으로 탐욕을 충족시킨다.

✅박문재 번역가의 매끄러운 번역과 657개의 주석, 해설. 지도 등은 이 책을 온전하게 읽는데 큰 도움을 준다. 당시 도시국가의 수는 학자에 따라 700개에서 2,000개 이상으로 추정되며, 상당수가 이 책에 등장한다. 생소한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명이 계속하여 등장하기 때문에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이 책 뒤에 실린 지도 세 장을 복사하여 곁에 두고 본문과 함께 읽었다. 처음에는 다소 진도가 더뎠지만, 익숙해지니 페이지가 잘 넘어갔고 읽고 나서도 남는 것이 많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20세기 국제정치학과 실증주의 역사학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2,500년 전의 역사가 다소 멀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빅히스토리의 관점으로 우리 인간동물의 길고 긴 역사를 고려했을 때 2,500년 전에 쓰인 책은 아주 최신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100년도 채 못 살고 죽는 인간동물은 빅히스토리 관점으로 본인의 삶과 공동체의 역사를 돌이켜보는 훈련이 잘 되어 있지 않지만 2,500년 전 고대 헬라스에 살았던 사람들도 호모 사피엔스 종이고 2026년을 살고 있는 우리도 호모 사피엔스 종이다. 인간의 본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투키디데스의 통찰은 너무나 당연히 지금도 유효하다.

​#현대지성클래식 #고전책 #펠로폰네소스전쟁사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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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그렇게 바뀌었다
류쭝쿤 지음, 강초아 옮김 / 들녘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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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그렇게 바뀌었다』는 중국 산둥성 지난시에 태어나고 자라 베이징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고 난 뒤, 미국으로 이주하여 법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년 넘게 변호사로 일한 류쭝쿤이 쓴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미국 연방 대법원의 판례를 통해 미국의 인권 논쟁의 역사를 보여준다. 150여 년에 걸친 판례에서 노예제, 인종차별, 젠더, 총기, 국가폭력 등과 관련된 미국 사회의 주요 논쟁과 그 속에서 법은 과연 무엇을 했는지 법의 민낯을 보여준다. 미국 사회를 흔들어놓았던 사건들을 읽어가며 우리는 법이란 것은 결국 우리가 함께 써나가야 할 일기장임을 보여준다. 분통 터지는 사건들은 인간 사회가 얼마나 부조리 가득한지 보여준다. 동시에 결코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과 혐오도 법원의 판결이라는 상징적인 공법 행위를 통해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힘겨운 싸움을 벌인 사람들 덕에 우리는 지금처럼 예전에 비해 극적으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 인간의 행위는 다양하며 명확히 정의 내리기 어려운 사실이 존재한다. 입법자 역시 모든 상황을 다 예측해 법을 만들 수 없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말해 인간 행위의 복잡성과 예측 불가능한 면 때문에 공정함의 원칙이 필요하다. ❞

빈약한 역사책들은 미끈한 진보의 서사로 우리 세상을 기술한다. 그러나 사려 깊은 역사책들은 인간사란 진보와 후퇴를 반복했다는 것, 상상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는 것, 진보란 누군가의 피와 땀으로 쓴 역사라는 걸을 알려준다. 『법은 그렇게 바뀌었다』 역시 후자에 속하는 책이다. "흑인은 시민이 아니다"라고 여겼던 노예제 시대에서부터 낙태 금지법 위헌 판결(로 대 웨이드), 미등록 이주민 아동의 공교육 권리 인정 판결(파일러 대 도)에 이르기까지 미국 현대사의 흐름에 영향을 준 사건들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입법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살핀다.



이 책의 수많은 곳에 인덱스를 붙이고 또 붙였다. 독후감을 쓰기 위해 페이지를 넘기다가 "보통 사람들의 말속에 드러나는 인간의 선량한 본성이야말로 그 사회의 궁극적인 희망이다." 옆에 붙은 인덱스를 발견했다. 이 문장이 내 눈길을 오래 붙든 이유는 우리 사회에는 독한 말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독하고 자극적이고 분노를 유발하는 말들/뉴스들은 대체로 돈이 된다. 그래서인지 선량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갈수록 찾기가 어려워진다. 절망적인 이야기는 현실을 통찰하는 눈을 뜨게 해줄진 몰라도 우리의 지금이 살만한 삶이라고 느끼게 만들지는 못한다. 우리 인간 동물은 희망을 좋아하는 동물로, 고통이 가득할 때보다는 절망에 빠졌을 때 생의 의지를 놓는다. 이 책은 법과 정의, 용기를 살펴본 뒤 신중한 희망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허점이 가득한지는 우리는 삶으로 배웠다. 가진 것이 적은 사람들은 법이 가진 구멍으로 인해 그나마 가진 것도 잃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법의 구멍을 이용해 대체로 가진 것을 더 불렸다.

유년 시절 가족과 함께 보았던 할리우드 법정물 영화는 정의가 가득했다. 억울한 누명을 쓴 피고인 자유와 권리를 찾아주는 멋진 백인 남성 변호사들은 정말로 멋있고 똑똑했다. 대학시절에는 미드 법정물을 좋아했다. 미드 법정물은 유년 시절 좋아했던 법정물과 조금은 달랐다. 정의는 보다 복잡해졌고, 진실은 종종 값비싼 수임료를 자랑하는 변호사의 혀끝에서 만들어졌다. 법이란 대체로 많이 가진 자들이 그들보다 강력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탄생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배웠다. 국가라는 사회제도 역시 그 연장이라는 것을 배웠다. 역사책에 가득한 없는 자들의 고통을 읽으면서 나는 조금씩 현실을 배웠다. 이 책은 지금 내게 딱 필요한 정의와 희망에 대한 신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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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은 생각한다 - 인간은 동물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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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독일 철학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1964~)는 그간 철학적 주제를 바탕으로 여러 대중서를 출간해왔다. 철학 분야 책을 좋아하는 국내 독자들 중에는 〈철하는 철학사〉 시리즈로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철학하는 철학사〉 시리즈 총 3권 모두를 차례차례 구입하여 읽었다.

이번 신간에서 그의 관심이 동물로 향했다. 책 『동물은 생각한다』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새롭게 평가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동물에 매혹되어 동물원장이 되겠다고 결심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곧 동물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 속에 양심의 가책이 싹텄다. 그는 1990년대부터 동물 윤리에 관한 에세이를 쓰거나, 동물원에 대한 특별 기고문을 실었다. 철학자 프레히트에게 인간이 비인간 동물과 맺고 있는 관계, 우리가 다른 동물들에게 얼마나 공정하지 못한지는 그의 삶의 화두라고 한다.


약 1만여 년 전부터 인간 동물은 비인간 동물을 '가축화'했다. 즉 계획적으로 사육하여 오직 우리의 이익을 위해 살아 있는 식량 자원의 형태로 키웠다는 말이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가 동물을 대하는 태도는 '무자비한 착취와 사디즘뿐 아니라 왜곡된 사랑과 본성 파괴, 의도치 않은 학대'가 뒤섞여 있다. 이 책이 던지는 주요 질문은 다음과 같다.

Q. 인간과 동물은 서로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이 적절할까?
Q. 동물을 도덕적으로 존중하기 위한 기준은 대체 무엇일까?
Q. 지능이 높은 동물의 생명권이 지능이 낮은 동물의 생명권보다 더 크고 귀할까?
(이 질문에서 '지능이 높다'는 것은 인간 중심적인 편협한 사고에서 나온 성급한 판단이다. 동물의 '지능'이란 무엇인지 합의된 기준조차 없다.)

이 책은 위 질문들을 새롭게 제기하여 하나하나 고찰한다. 먼저 1부에서 인간 동물이 대체 무엇 때문에 특별한 동물인지 살펴본다. 2부에서는 인간과 동물 관계의 문화사를 살펴보고 3부에서는 저자 고유의 윤리적 입장을 개진한다. 4부에서는 동물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일상의 혼돈 등 우리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문제를 살펴본 뒤, 우리의 인식을 총결산하여 앞선 논의에서 결론을 이끌어 낸다.



근대 과학의 진보 이후 우리는 동물에 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동물의 행태에 대한 앎뿐만 아니라 신경 생물학 및 행동 생태학을 통해 동물의 정신과 의식에 대한 앎도 쌓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앎을 축적했다고 해서, 우리가 동물을 대하는 방식까지 나아졌다고 볼 수는 없다. 철학자 피어 싱어가 동물 윤리에 대한 책을 펴냈고, 전 세계 여러 젊은이들이 비건을 실천하고 동물 해방을 부르짖으며 거리에서 시위를 하고 있지만, 이것들을 인류 초창기 시설 가축 사육자들의 애니미즘과 비교하여 더 나아졌다고 볼 수 없다.

저자에 따르면 현재 우리는 인류 역사상 동물과 가장 혼란스러운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는 동물을 물건처럼 생산 수단화하고, 생존 기계나 고기 공급원으로 사육한다. 그런데 국가에 따라서는 법에서 동물을 물건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기도 한다. 우리는 판다 푸바오를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반려동물이 세상을 떠나면 반려동물 전용 장례 서비스를 통해 애도의 의례 행위를 한다. 동시에 우리는 중국으로 간 푸바오가 행여나 한국에서만큼 대접을 못 받을까 봐 걱정하면서 상상초월의 환경에서 사육되고 살해된 돼지의 살을 맛있게 구워 먹는다. 반려동물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가는 길에 마주친 비둘기 무리를 극혐한다. 즉 보통 사람들의 동물 윤리는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고 모순적이다. 한편 동물 윤리학자는 다를까? 저자는 이 책에서 동물 윤리학자들이 이념적 기저에 깔려 있는 잘못된 도덕관을 살펴본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기존에 알고 있던 대부분의 앎을 허물어야 한다. 우리는 동물이 어떤 존재인지 결코 정의 내릴 수 없으며, 인간 동물이 가진 특징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면 다른 동물을 착취하는 본인 존재를 견딜 수 없게 된다. 이 불편감은 새로운 앎을 실천하고 그간 누리던 것을 버리지 않는다면 결코 해소될 수 없다. 우리는 영양 문제와 동물 사육 문제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다른 생명들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지만, 폭력의 규모와 구체적인 방식은 바뀔 수 있다. 인간 동물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끔찍할 수 있는지는 상상초월이다. 그러나 저자는 인간 동물의 윤리를 비관적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통찰한다.

“ 인류의 역사는 인간들이 공동체적 질서 체계를 처음 떠올리고 실현하고 다시 뒤집고 개혁하는 과정들을 모아 놓은 박물관이다. 우리에게 당연해 보이는 창조와 도덕의 현 질서도 우리 시대와 문화 내에서만 이해횔 수 있다. 질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문화와 영역에서 그때그때 자기만의 규칙에 따라 만들어진다.”

저자는 '오늘날 새로운 이념과 이상의 성공을 좌우하는 것은 과거처럼 선구적인 지식인이 아니라 시대정신의 풍향계로 검증된 폭넓은 공감'(534쪽)이라고 말한다. 그가 동물 윤리에 대한 책을 펴내고 우리의 기존 앎이 죄다 틀렸음을 알려주는 것은 바로 새로운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함이다. 우리 인간 동물은 인류의 다른 산적한 문제들처럼 동물 문제에 있어서도 크게 들렸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알게 된 정확한 한 가지 진실은 우리가 거의 대부분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지의 윤리학을 토대로 무지의 실용주의를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진보나 성장이 아니라, 인간 동물을 비롯하여 비인간 동물에게까지 도덕적 척도를 향상해야하는 시급한 과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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