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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 - 딥페이크 성범죄부터 온라인 담론 투쟁까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언어들
한국여성학회 기획, 허윤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평점 :
『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은 한국여성학회 40주년을 맞아 편찬된 책으로 여성학적 지식뿐 아니라 지금의 디지털 시대가 직면한 의제들을 풀어내고자 기획되었다. 이 책은 한국 사회가 드러낸 문제들을 어떻게 사유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페미니스트의 시각으로 디지털+페미니즘을 살펴본다. 2010년대 중반의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 변화한 양상을 여성학적 시선에서 분석하고 있다.
★ 한국여성학회 : 1985년 창립되었으며 한국 여성학의 기틀을 마련한 학술 단체이다. 이 책이 출간된 2024년 40주년을 맞이했으며, 그간 한국여성학괴는 가부장제, 젠더, 섹슈얼리티, 노동 등 다양한 주제를 학술적으로 다루었다. 2005년 아시아 최초로 세계여성학대회를 개최했으며 현재 학회원 수는 1000명을 넘어섰다.
1부에서는 디지털 페미니즘과 관련된 의제들을 모았다. 사이버 레커와 디지털 여성살인, 온라인 소비 시장에서의 백래시와 남성 소비자 정치, 딥페이크 이미지 등과 같은 기술매개 성폭력, 온라인 페미니즘과 디지털 행동주의 등을 다룬다. 2부는 디지털 시대와 여성주의 지식 생산이 만나는 장면을 살펴본다. 온라인을 중심으로 한 여성 청년의 페미니스트 되기 과정, 지역 여성운동과의 관계, 인공지능 윤리 문제, IT 업계의 젠더 편향 등을 다룬다. 3부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페미니즘이 직면하고 있는 한국의 현 상황을 진단하면서 능력주의와 젠더가 만나 빚어지는 갈등에 대해 살핀다.
디지털 기술은 페미니즘의 담론 형성이나 전개 양상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PC 통신, 인터넷과 같은 디지털 미디어가 1990년대 영페미니스트들의 활동에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2010년대 페미니즘 리부트에도 디지털 미디어가 전면에 등장했다. 페이스북, 트위터, 온라인 커뮤니티 등은 페미니즘의 대중화에 영향을 주었고 디지털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온라인 행동주의는 '따로 또 같이'라는 느슨하고 일시적인 연대를 만들어냈다. 이 책은 이러한 변화의 지점에서 우리가 디지털과 페미니즘을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지금의 디지털 사회가 만들어내는 문제를 읽어내는 힘을 길러줌과 동시에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길잡이가 되어 준다.
우리 시대를 읽다
이 책은 한국 여성학의 최전선에서 페미니즘과 관련된 의제 열두 개를 다루고 있다. 여성학 역시 다른 학문들처럼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시대의 문제를 톺아보고 질문을 던지며 답을 모색하는 학문이다. 페미니즘이나 여성학이라는 단어를 듣기만 해도 불편함을 느끼거나 반사적인 저항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음을 안다. 각자의 입장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저항 담론이 많은 분야일수록 현실을 입체적이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 책 『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은 우리 시대의 좌절과 분노, 기대와 욕망을 읽는 눈을 길러 준다.
먼저 이 책을 통해 배운 우리 시대를 읽는 단어들을 몇 개 소개하고 싶다. 우리 시대를 표현하는 단어를 떠올려 보니 '신자유주의', '소비주의', '능력주의', '나르시시즘', '경쟁사회', '각자도생사회', '축소사회' 등이 순식간에 떠오른다. 이 책을 통해 '디지털 고어 자본주의', '가시성 정치', '백래시 정치학', '랟펨 정치학', '자산기반 경제' 등 어디선가 들어는 보았지만 명확한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았던 단어들과 개념에 대한 이해를 다질 수 있었다.
디지털 고어 자본주의
이 책을 통해 새롭게 배웠거나 기존의 앎을 두텁게 해준 우리 시대를 설명하는 단어들 중 제일 먼저 공유하고 싶은 것은 1부 1장에서 나오는 '디지털 고어 자본주의'라는 개념이다. 철학자이자 트랜스페미니스트인 사야크 발렌시아는 고향 멕시코의 나르코 국가를 분석한 『고어 자본주의』에서 '고어 자본주의'라는 말은 고안했다. 고어 자본주의는 국가가 무너지고 마피아가 국가 자체가 된 멕시코의 생산 양식을 포착하는 말로 폭력과 살인, 신체 훼손과 시신을 자본축적의 수단으로 삼는다. 사야크 발렌시아의 통찰은 정경유착을 바탕으로 약자에 대한 착취, 위험을 자본 축적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한국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폭력이 자본 축적 수단이 된 사회에서 디지털 기술은 온라인 공간에서의 폭력을 산업화한다. N번방, 악플러, 사이버 레커 등은 온라인 공간을 거점으로 벌어지고 있는 디지털 고어 자본주의의 대표적 예라고 볼 수 있다.
자산기반 경제
능력주의 시대에서 태어난 우리는 개인의 노력을 통해 얻어낸 능력으로 삶에서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다고 배웠다. 자기 자신이 '인적자본'이 되었기에 우리는 이를 잘 관리하여 시장에 내놓아야 한다. 한편 신자유주의 시대는 일상생활의 금융화를 가져왔고 모든 종류의 사물(자신의 신체를 포함하여)이 자산으로 전환되었다. 자산가치가 상승하고 임금가치가 하락하는 경제적 변화 속에서 경제적 성공은 이제 노력이나 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자본을 얼마나 세습했는지의 문제가 되었다.
자산기반 경제 시대는 자기계발을 통해 스스로를 자산화 시켜야 하는데 남성들 중에는 자신의 몸이 자본화 불가능하다고 인식하는 주체들이 생겨났다. 이 남성들은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담보로 실제 대출도 받을 수 있고 어떤 투자 없이 지속적으로 연애도 가능한 자들로 본다. 반면 스스로의 몸은 담보 가치가 없다고 설정하고 스스로를 약자이자 태생적으로 자산을 덜 소유한 불공정한 피해자로 본다.
온라인 세계, 격화-공격의 정서가 지배하는 곳
SNS에서 상호 경청과 진정한 소통은 가능할까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가 시작될 즈음 디지털 사회가 선언되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겐 온라인 세계는 더 평등하고 자유로운 의견이 오갈 것이라는 희망이 존재했다. 그러나 4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우리는 그런 기대를 대폭 수정했다. 온라인에서는 타인의 명예를 침해하지 않는 수준에서는 누구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고들 한다. 우리는 의사를 표출하는 동시에 다양한 의견들을 듣는다고 생각한다. 온라인 행동주의는 오프라인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온라인 행동주의는 단발적이고 파편화되기 쉬우며 지속성이 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의 지속성이 낮음에도 단기간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한다. 한편 우리의 의견이 과연 이 세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것일까. 온라인 세계에서 접하는 의견들은 이미 추천 알고리즘을 통해 필터 버블을 거친 편향된 의견일 가능성이 높다. 끼리끼리 뭉친 온라인 공간에서 의견은 더욱더 편향되고 분노는 격화된다. 편향된 정보에 과잉 노출된 개인은 상호 경청과 소통의 윤리를 배워야 한다. 갈등과 혐오의 표면 아래 있는 것
우리의 혐오는 정말로 '우리'만의 것인가
3장 〈돈 되지 않는 몸을 가진 남성-피해자들〉에서 여성학자인 덕성여대 김주희 교수는 젠더 갈등이라는 단어가 언론에서 처음 목격되었던 해는 여가부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언설이 공고해진 2007년으로 본다. 작금의 젠더 갈등 담론은 20대 남성을 향한 정치권의 구애와 무관하지 않다. 남성 피해자 담론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누구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담론인지 되묻게 된다.
"이러한 차이가 '누구'의 어떤 기준을 중심으로 포착되고 줄 세워지는지 골몰하지 않는 한,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허한 메시지이자 이데올로기적 선동이 될 뿐이다."(P314)라는 문장에 밑줄을 쳤다.
응당 가져야 할 것이라 기대되었던 것을 가지지 못한 자들, 가지고 있던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자들은 반드시 '무언가'를 겪고 느끼기 마련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체험한 '무언가'의 정서에 이름을 붙이고 방향성을 주고 어딘가로 이끌고 가는 주체가 그들 스스로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러한 사례를 무수히 보았다. 1차 세계대전에 패망 이후 히틀러 나치당은 유대인 혐오 정서를 부추겨 지지율을 올렸고, 결정적으로 대공황에 따른 독일의 경제 위기를 활용해서 정권을 잡았다. 현재 유럽과 미국을 휩쓸고 있는 극우 우파 정당도 복잡한 현실의 문제를 몇 가지 원인으로 축소시켜 진단하고 그 해법으로는 이민자, 난민 등 소수자들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식으로 접근한다. 우리 시대에서 정말로 약자는 누구인가. 여성들이 정말로 사회의 모든 면에서 평등을 누리고 있으며, 우리 사회에 정말로 구조적 불평등이 사라졌는가.
* 출판사 제공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유저들의 참여와 주목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디지털 플랫폼 산업은 사람들의 분노 원한을 증폭시키며 피해를 탈 맥락화하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 P333
‘공정‘ 담론에 여성주의적으로 개입하기 위해서는 다름 아니라 동시대 성차별을 공정의 언표로 만드는 경제적 가상과 연동하는 젠더에 대한 비판적 개입이 필요하다. 동시대 공정 담론은 자산화 과정에 참여하는 주체를 구축하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단순히 자기기반 경제를 문화적 측면으로만 이해하는 것을 넘어, 전 지구적으로 사회복지 시스템이 붕괴된 상황에서 개인이 생존 비용을 마련하고자 금융시장에 더욱 깊숙하게 개입하게 되는 금융화 과정에 대한 페미니스트 분석이 수반되어야 한다. (중략)
산술화는 ‘상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내기에 약자와 배제된 이들에 대한 폭력과 무시를 용이하게 만든다. 나아가 여성에 대한 폭력과 결합하는 여성 몸의 자본과 과정에 관한 관심도 촉구해야 할 것이다. -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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