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가 옳았던 이유 - 프로메테우스의 꿈과 좌절
테리 이글턴 지음, 박경장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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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옳았던 이유』는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화 비평가이자 문학 평론가 테리 이글턴이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가장 표준적인 비판 열 가지를 택하여 하나하나 반박하고 있는 책이다.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에 대한 테리 이글턴의 역비판을 차근차근 읽어가다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밑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일반 독자들을 위해 쓴 마르크스 입문서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꼭꼭 씹어가면서 읽으면 ‘위대한 도덕 사상가’이자 자본주의 분석의 끝판왕인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다. 이 책을 지팡이 삼아 앞으로 더 많은 마르크스 사상에 대해 읽어갈 계획이다.

마르크스주의를 오해하지 말자.
왜냐하면……

1. 마르크스주의는 끝나지 않았다
2. 마르크스주의는 도그마가 아니다
3. 마르크스주의는 결정론이 아니다
4. 마르크스주의는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았다
5. 마르크스주의는 경제 환원론이 아니다
6. 마르크스는 기계적 유물론자가 아니었다
7. 마르크스주의는 계급 강박증이 없다
8. 마르크스주의는 폭력 혁명을 옹호하지 않았다
9. 마르크스주의는 국가를 믿지 않는다
10. 마르크스주의는 급진적 운동에 기여했다

위 열 가지는 이 책의 목차로,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 열 가지에 대한 테리 이글턴의 답이다.
이 책의 <옮긴이의 말>(박경장 성프란시스대학 작문교수)에서는 테리 이글턴의 반박을 5페이지로 요약하고 있다. 이 5페이지의 요약을 또 요약해서 이 독후감에 써볼까 고민을 잠시 했는데, 블로그 글이 상당히 길어질 것 같아서 첫 번째 반박만 언급하기로 한다.
이 반박은 우리가 왜 마르크스의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또 왜 우리 시대에 마르크스의 사상을 읽어야 하는지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가 끝났다고 말한다. 비판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인 사회계급론은 21세기 탈산업화시대엔 더 이상 적용 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테리 이글턴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가 모든 역사 체제 가운데 가장 역동적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이 체제에는 이상하게도 정태적이고 반복적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p333, <옮긴이의 말> 중)라고 반박한다.

“ (20~21페이지) 마르크스주의는 이제껏 시도된 그 어느 비판보다 가장 면밀하고 엄격하며 포괄적인 자본주의 비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위력을 떨치는 한 마르크스주의도 마찬가지로 자기 본분인 비판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자본주의의 다양한 역사적 형태라는 개념 - 상업적‧농업적‧독점적‧금융적‧제국주의적 등 -은 마르크스주의 자체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면 자본주의가 최근 몇십 년 사이에 형태를 바꾸었다고 해서, 자본주의 본질을 변화로 본 마르크스 이론을 왜 불신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마르크스 자신은 노동계급이 쇠퇴하고 화이트칼라 노동이 가파르게 증가할 것이라고 예고까지 했다. ”


마르크스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 시대 자본과 권력은 그 어느 때보다 소수에 집중되어 있으며, 불평등은 갈수록 심화되어 간다. 자산의 규모를 표현하는 숫자가 너무나 커서 가늠조차 안되는 부를 가진 부자에 대한 뉴스와 최저임금도 되지 않는 월급을 떼 먹히는 사람들의 뉴스가 뒤섞여 흐른다. 국가의 억압은 평소 때는 그 모습을 잘 감추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언제나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의 평범한 대화 속에 ‘주권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라는 헌법 조문을 읊게 만들고, 헌법 조문을 필사하게 만들고 있다.

국가와 사회에 순응하며 대체로 순종적이며 평범하기 그지없는 대표적으로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마르크스 사상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어 한다. 왜냐면 우리는 ‘고삐 풀린‘, ‘폭주기관차같이 내달리는’ 자본주의 사회가 안겨주는 고통과 불안과 번뇌에 매일매일 신음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개인들로 하여금 인생의 모든 문제를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도록 우리를 세뇌시켰다. 나는 그간 스스로가 ‘금융맹’, ‘재테크맹’이라서 다소 부끄러웠다. 나는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해서 ‘마르크스맹’(이라는 단어는 들어본 적 없지만)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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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과 생각
정용준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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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과 생각』은 젊은작가상, 황순원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수상한 정용준 소설가의 산문집이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있는 정용준 작가는 2009년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 책은 작가가 읽기와 쓰기를 주제로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한 글 37편을 수록하고 있다. 문예지, 일간지, 단행본 등으로 발표한 글들이기에 형식과 내용이 다채롭다. 내밀한 자기 고백적 에세이, 소설 창작자들을 위한 조언, 각박한 사회 분위기에 대한 쓴소리, 서평, 짧은 소설처럼 읽히는 글 등 다양한 글들이 이 책에 함께 엮여 있다.



이 책의 지은이 정용준 작가는 밑줄 긋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 문장이 몸과 마음에 천천히 스며드는 시간도 좋다고 말한다. 그 언어와 내 언어가 섞이고 남의 언어를 닮은 새로운 나의 언어가 생기는 것이 좋다고 한다. 나도 밑줄 긋는 것을 좋아해서 책을 한 번도 중고로 팔아본 적이 없다. 책을 읽을 때는 꼭 밑줄을 긋고 색깔별로 나만의 고유한 규칙이 부여된 인덱스를 붙인다. 독서에 관한 책들, 뇌과학이나 인지신경학 책들은 한결같이 강조한다. 인간은 눈으로 손으로 입으로 다양한 감각적 경험을 통해 책을 읽는다고 말이다. 정용준 작가는 이 책을 여는 첫 번째 글 <작가의 말>에서 독자들이 자신의 책을 지저분하게 읽어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소설이 아니었다면

나는 세계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가가 쓴 산문집이다 보니 소설가는 어떻게 읽을지, 어떻게 쓸지, '소설'이라는 언어들의 묶음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눈여겨보게 된다. 내 책장에는 이미 소설가들이 쓴 창작론이나 독서 에세이들이 가득하지만 그래도 또 눈길이 간다. 이 세상엔 무수히 많은 소설가들이 존재하고 있고 그들은 각자 어느 점에서는 비슷하고 어느 점에서는 다를 테니 말이다. 나는 정용준 작가가 '소설이 아니었다면 나는 나라는 세계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표면 밑에 심연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타인의 마음에 숲과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거고 인간의 감정과 감각에 바람과 별자리가 있다는 것도 몰랐을 거다.'라고 쓴 문장에 밑줄을 그어 두었다. 저자가 말하는 내용이 새로워서가 아니다. 이 사람이 골라 쓴 언어가 좋았기 때문이다. 독후감을 쓰다 보니 쓰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번거로운 것인지 알게 된다. 좋은 글들은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내게 생각과 감정들을 밀어 넣는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 개념으로 정리되지 않은 이 생각들과 감정들을 '표상'이라고 부른다고 알려주었다. 독후감을 쓰기 위해 이 표상들을 단어와 문장으로 끄집어 내려고 노력하지만 정말로 어렵다. 정용준 작가도 '소설을 쓸 때마다 생각한다. '생각하는 거 힘들다. 쓰는 것도 힘들다. 아, 귀찮아. 번거로워. 왜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되었나. 현실의 삶을 살아내는 것도 잘 못하면서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 새로운 인물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라고 말한다. 독자인 나는 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얼마나 치열하고 고통스럽게 성실하게 글을 썼을지 말이다. 독자인 나는 소설가들이 고통스럽게 쓴 언어들을 통해 언어를 배운다. "표면 아래 심연"이 있다고 말이다.



사인칭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


이 책을 읽고 나니 늘 그렇듯 서점 장바구니가 조금 더 무거워졌다. 제일 먼저 올가 토카르추크의 『다정한 서술자』를 구입할 것이다. 작가가 읽은 책 중에 이 책만큼 마음을 일렁이게 만든 적이 없다고 하니 말이다. 이 책을 읽고 쓴 글에서 작가는 '언젠가부터 나는 작가도 인물도 아닌 서술자라는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라고 말하는데 나는 여기에 밑줄을 그었다. 책을 읽고 또 읽으면 일인칭에서 이인칭으로 삼인칭으로 서서히 옮겨가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사인칭이라니. 더 나아가 작가는 '사인칭의 마음을 갖자'라고 제언한다.' 먼저 사인칭은 누구인가. 저자는 서술자를 사인칭으로 표현한다.







그는 '작가가 회복해야 하는 능력은 개인에게 집중하는 일인칭도, 이 세계를 조명하고 조망하는 삼인칭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작가는 서술자가 되어서 나와 타인이 함께 있는 세계를 바라보고 스토리텔러로서 이야기를 건넨다. 독자인 내가 오늘 하루 더 버티고 살아낸 것은 서술자들이 들려준 이야기들 덕분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서술자가 전해주는 이야기에는 항상 이야기 그 이상의 것이 있다. 나는 이것들을 거의 대부분 나의 언어로 표현 못 하지만 이상하게 하루를 더 버틸 힘을 받는다. 서술자들에게 받은 것들을 되돌려주는 방법은 내가 다정한 서술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별로 괜찮지 않은 사람이고 뭉툭하고 나르시시즘에 허우적대는 사람이지만 무수히 많은 서술자들이 쓴 글들을 읽고 인간의 구실을 흉내낸다. 나는 읽어야 할 운명인가 보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독후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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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원이면 좋겠습니다 - 릴케 수채화 시집 수채화 시집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한스-위르겐 가우데크 엮음, 장혜경 옮김 / 모스그린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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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20세기 최고의 독일어권 시인 중 한 명으로, 그의 시는 수없이 많은 사상가와 예술가의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내가 정원이면 좋겠습니다』는 1941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화가 한스-위르겐 가우데크가 그린 그림과 릴케의 시를 함께 엮은 책이다. 화가는 청소년 시절부터 릴케의 시를 많이 읽었다. 그는 릴케의 시는 고요한 언어로 신비한 세상을 그려내고, 다양한 차원에서 자신의 주제를 서정적으로 풀어가는 방식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는 릴케의 문학으로 들어가서 그림으로 그의 시와 대화를 나누고자 했다. 그는 릴케의 작품 중에서 자연과 직접 관련이 있는 시들을 골랐고, 이 시들에 가장 잘 어울리는 기법으로 수채화를 선택하여 이 책을 만들었다.



내가 정원이면 좋겠습니다


<내가 정원이면 좋겠습니다>는 릴케가 1897년에 쓴 시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시를 처음 읽을 때는 언어적인 아름다움이 주로 느껴졌다. 두 번째 이후부터는 꽃들이 말 없는 대화로 하나가 되었다는 장면을 상상해 보고, 꽃들의 말을 엿듣고 싶다는 릴케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가을날

가을이 오면 어김없이 소환되는 시, 그 유명한 시 <가을날>이다. 이 시는 워낙에 유명해서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알고 있던 시였다. 제1연과 제2연을 지나 만나는 제3연을 제일 좋아한다. 줄곧 방랑가의 삶을 살다가 간 시인 릴케의 생애를 조금이라도 알게 된다면 제3연이 주는 호소력을 음미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그의 책 『인생의 역사』에서 시는 그를 사랑했다고 말한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내가 왜 평론가의 글들을 좋아하는지 깨닫는 한편 부러움도 느꼈다. 나는 시가 아직 어렵다. 왜일까. 직관적으로 바로 이해되는 평범한 일상어로 쓰인 시는 위로를 주곤 했지만 나를 매료시키지 못했다. 내가 읽고 싶은 시는 시인의 삶을 먼저 이해하여야 하고, 시인이 팬을 든 시대의 정신을 공부해야 하며, 거듭 반복해 읽어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정제된 언어로 쓰인 시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는 보통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릴케의 시집 『두이노의 비가』는 오랫동안 내 장바구니에 담겨서 결재만 기대리는 중이다. 선뜻 구입하지 못했던 이유는 앞서 말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시』도 장바구니에 담았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구입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한스-위르겐 가우테크가 엮음 릴케의 시들을 읽고 나니 『두이노의 비가』를 빨리 결재해야겠다는 결심이 선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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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의 미래 - AI라는 유혹적 글쓰기 도구의 등장, 그 이후
나오미 배런 지음, 배동근 옮김, 엄기호 해제 / 북트리거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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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자 나오미 배런은 『쓰기의 미래』에서 인간이 AI에 글쓰기를 점점 더 의존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묻는다. 이 책이 던지는 핵심 질문은 인간이 AI 언어처리 프로그램과 어떤 방식으로 상부상조할 수 있을까이다.

저자는 이 질문을 다루기 위해 먼저 인간과 AI 양쪽 모두에 대한 배경지식부터 설명한다. 먼저 저자는 1부에서 인간의 글쓰기가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언어학자인 저자는 문자의 출현에서부터 미국 대학에서 작문 수업에 이르기까지 쓰기의 역사와 그 중요성에 대해 설명한다.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에서 쓰기가 도입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쓰기의 역사는 5천 년 정도이며 우리의 뇌 속에 아직 깊게 뿌리내리지 못했다. 저자는 우리는 아직 듣고 말하는 방식에 대해 여전히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수천 년의 쓰기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간이 글을 쓰고 또 고쳐 쓰는 이유를 다양한 이유들을 찾아낼 수 있다. 우리는 글쓰기를 통해 사고를 명확하게 하며 우리의 존재를 드려낸다.

2부부터는 본격적으로 AI의 언어능력을 다룬다. AI의 탄생과 발전, 인간과의 공생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1950년대 이래로 AI 기술은 현기증을 느낄 만큼 빠른 속도로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저자의 표현처럼 AI에 관한 글은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구식이 되어버린다. 컴퓨터과학의 아버지 앨런 튜링의 사고 실험으로 출발한 AI의 근본적인 숙제는 언어였고, 구어와 문어를 모두 통달하고자 했다. 현재 AI의 자연어 처리 능력은 특정 데이터세트나 광범위한 인터넷을 탐색하여 정보에 접근하는 것에서부터 받아쓰기 소프트웨어나 시 창작 소프트웨어와 같이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AI가 평범한 인간이 가진 언어 능력에 견주어 탁월한 영역은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이다. AI는 벽돌책을 읽고 순식간에 서평을 써낼 수 있으며, 논문 초록이나 이메일, 광고와 마케팅 문안을 창의적으로 작성한다. AI의 능력은 법률 분야에서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수십 명의 인간 변호사가 필요한 대규모 소송에 있어서 수백만 건의 문서를 검토하고 복잡한 전략을 세울 수 있는 AI 법률 프로그램들이 출시되고 있다. 한편 AI가 점점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일 잘하는 우수한 비서 정도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창의력 넘치는 작가가 되어 우리의 밥그릇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9장에서 ‘창의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AI의 창의성에 대해 탐색한다. 저자는 AI의 창의성에 대해 신중하게 긍정하며 더불어 우리가 AI의 창의성을 통해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저자는 AI의 능력을 수용하고 신기술을 이용하되 전적으로 끌려가지 말며 스스로 쓴 것에 대한 통제권을 지키라고 권고한다. 책의 마지막 문단은 이 책 전체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 (P517) 인간의 글쓰기는 인간의 마음을 날카롭게 벼리고, 다른 사람과 이어 주는 마법검이다. 아무리 도우미로서 AI가 효율적이라 하더라도 그 검이 빛을 발하도록 지키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


이 책의 해제를 쓴 사회학자 엄기호 교수는 우리 모두는 누군가 에게 배우는 자가 되기도 하고 가르치는 자가 될 수도 있다고 말 한다. 엄기호 교수는 AI가 인간의 창의성에 위협이 될 것인가 아 닌가가 아니라 어떻게 함께 성장할 수 있을 지 배워야 한다고 말 하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게 읽는 행위는 내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하며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쓰는 행위는 더 잘 읽고 명확하 게 사고하기 위해 수고롭게 노력해야 하는 영역이다. 이 책은 나의 이러한 다짐 속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영역이었던 AI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출판사 제공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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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책세상 세계문학 12
샬럿 브론테 지음, 신해경 옮김 / 책세상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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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의 나는 학급문고에 꽂혀 있는 청소년용 『제인 에어』를 읽었었다. 그때 읽었던 『제인 에어』는 원작을 편집되고 각색되어 불우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굳센 의지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한 성장 서사였다. 그리고 제인 에어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남성 로체스터와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둘만의 사랑을 완성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성인이 된 지금의 나는, 어린 시절의 나의 부모 나이가 된 지금 나는, 『제인 에어』를 다시 읽었다.


1847년 31살의 샬럿 브론테는 '커러 벨'이라는 남자 가명으로 『제인 에어』를 출간했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는 어여쁜 외모를 가진 순종적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주인공이 대세였다. 반면 소설 『제인 에어』 속 주인공 제인은 눈길을 잡아끄는 금발의 상냥한 아가씨가 아니었다. 평범한 외모에 당시 기준엔 드센 성격(오늘날 우리는 이를 '독립적'이며 '의지가 강하다'라고 표현한다)을 가졌다. "어려서는 아버지, 젊어서는 남 편에게, 늙어서는 아들에게 종속되어 일평생 독립적인 개인으로 존재할 수 환경에서 『제인 에어』는 처음으로 변화하고 성장하는 정신, 욕망하고 능동적 주체의 여성을 입체적으로 그려냈다"(P760, 신해경).



『제인 에어』는 당시 사회의 모습을 굉장히 사실적으로 묘사한다고 알려져 있다. 성인 독자인 나는 먼저 신해경 번역가가 쓴 작품 해설부터 읽었다. 신해경 번역가의 <작품 해설>에 따르면 『제인 에어』의 시대적 배경은 19세기 초 영국으로 산업혁명에 따른 상공업 발달과 식민지 경영 등에서 벌어들이는 막대한 부에 기반한 중산계급의 영향력이 폭발적으로 커지던 시기였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젠트리 계급 출신으로 식민지에서 벌어들이는 부에 기반하여 그들의 사회 경제적 삶을 영위한다. 당시 시대에서 경제적 곤궁이나 몰락은 현대인인 우리가 보기엔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착각하는) 인간적인 품위나 존엄을 거의 기대하지 못하게 한다.

또 당시 영국 사회의 법은 결혼한 여성에게 어떠한 법적 지위나 권리도 인정하지 않았다. 부유한 계급의 여성이라도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소유물이 되었다. 한편 제인 에어가 가정교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역시나 제인 에어의 계급 덕분이다. 제인이 학교에 입학하고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제아무리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아가씨’였어도 어쨌거나 ‘제인 아가씨’였기 때문이다.

제인 에어가 보여주는 강인한 정신력과 삶에 대한 의지는 학교 교육을 받기 전부터 두드러지며, 학교에 입학해서도 제인의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제인이 학교에서 받는 처우를 읽다 보니 예전에 구입해서 읽었던 조지 오웰의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 중 그의 학창 시절에 대한 글 《정말, 정말 좋았지》가 떠올랐다. 조지 오웰이 학교를 다니던 20세기 초 영국 사회는 아동이나 학생에 대한 인권 개념이 지금과 달랐던 시절이었다. 학교는 학생들을 계급에 따라 특혜를 주거나 철저하게 차별했다. 이 가혹한 에세이를 읽는 것은 무척 심란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이 형식적인 존엄이 얼마나 역사적이며 최신의 발명품인지 『제인 에어』를 읽으면서 다시금 떠올렸다.
한편 『제인 에어』를 읽으면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제인 에어가 학교 교육을 무려 8년이나 받았다는 점이다. <작품 해설>을 보면 ‘당시로서는 상류계급의 여성들도 받기 힘든 학교 교육을 8년이나 받은 제인 에어는 말투와 억양만으로도 어디를 가나 상류계급 출신으로 여겨졌을 것이다’라고 나와있다. 제인 에어가 선택할 수 있었던 직업인 가정교사는 제인 에어가 상류계급 출신이었기에 가능했다. 제인 에어가 세상이 불합리한 것인지 아닌지 스스로 판단하고 내면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태도는 이러한 환경적 맥락을 함께 고려해야 이해할 수 있다.

제인 에어가 겪었던 삶의 난관들을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 소설은 출간 당시 영국 사회에서 열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근대적 여성의 주제적 삶을 다룬 최초의 소설이었고, 주류의 억압적 질서에 반대되는 목소리를 용기 있게 냈기 때문이다.
다른 시대와 공간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온갖 것들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깨닫게 된다.
제인 에어 겪었던 삶의 난관들 중 어떤 것들은 이제는 꽤 낯선 것이 되었고 어떤 것들은 표출되는 형식이 조금 변했을 뿐 여전히 현실에 존재한다. 우리 모두는 태어난 시공간과 환경과 계급에 따라 각자 다른 것을 겪는다. 누군가는 겪을 필요가 없는 것들을 누군가는 겪어야만 한다. 누군가는 삶에서 당연시되는 것들이 누군가는 오직 상상에서만 존재한다. 성인이 되어 다시 읽은 소설 『제인 에어』는 인간의 역사에서 개개인별로 삶의 조건들이 얼마나 우연적인지 다시금 깨닫게 한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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