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
파리누쉬 사니이 지음, 이미선 옮김 / 북레시피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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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출신 작가 파리누쉬 사니이의 신작 장편소설 『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은 이란 혁명(1979) 이후 30년 만에 재회한 한 가족이 열흘간 함께 지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파라누쉬 사니이는 1949년 이란 태생으로 오랜 세월 이란 사회의 억압과 여성의 억눌린 삶을 조명해온 작품을 썼다. 이번 작품은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이란 사회에 불어닥친 이민 물결로 인한 가족 간의 갈등 문제를 다루고 있다. 




소설은 도키라는 이란 소녀가 서술자이다. 도키의 할머니는 아들 셋과 딸 셋 총 여섯 명의 자식을 낳았다. 할머니의 자식 중 절반은 이란을 떠났고 절반은 이란에 남았다. 이 가족은 이란 혁명 이후 30년 만에 타국의 땅에서 재회하고 총 열흘을 함께 지낸다. 재회의 기쁨은 채 하루도 가지 않는다. 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은 그들이 살았던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감정적으로도 멀어졌기 때문이다. 떨어져 지내는 동안 쌓였던 오해와 원망은 다섯 번째 날 이윽고 터져 나온다. 작가는 한 가족 내부에서 벌어진 싸움을 통해 이란 사회에 내재된 각종 문제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들이 화해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겐 여전히 깊은 유대감이 존재하며 이를 통해 화해와 재결합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전달한다.




이란 혁명 이후 이란의 이민 물결


이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이란 혁명 이후 이란 사회 내 불어닥친 이민 물결에 대해 알아야 한다. 작가는 책의 서문에서 이란 사회의 이민 문제에 대해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작가는 이민이 이란 사회에서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수많은 이란인들이 고국을 떠났다. 이민의 목적지와 목적도 이민자들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배경에 따라 다양했다. 혁명 후 이란을 떠난 사람들도 있었지만, 잠시 여행을 갔다가 혁명 후 당시의 사회적 여건 때문에 귀환이 막힌 경우도 있었고, 이란으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ㅎ해서 거주국에 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오늘날 이란의 거의 모든 도시 가정에는 해외에 거주하는 가족 구성원이 몇 명씩 있다고 한다. 이런 현 상황 때문에 가족 관계가 과거와 달라졌다. 과거 이란 사회에는 형제자매뿐만 아니라 친가와 외가 쪽 사촌까지 가까운 곳에 살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가까운 친척조차 한 번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이란을 떠난 가족들과 이란에 남은 가족들 사이에 물리적 정서적 거리감이 점차 커지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남은 사람들은 떠난 사람들이 엄청나게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 환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남은 사람들은 떠난 사람들이 타국에서 정착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고생과 아픔과 상실을 겪었을지 알지 못하고 헤아리려 노력하지도 않는다. 

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이 공유하는 문화가 점점 줄어들면서 그들 사이에는 동포로서의 정서적 유대감도 희미해지고 있다.  작가는 이란을 떠난 사람들과 남은 사람들이 동포로서 다시 연결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이 작품을 통해 그 해결의 실마리를 더듬어 본다.





갈등 폭발



첫째 날에는 가족들이 재회한다. 하비브의 딸이자 작품의 서술자인 도키와 도키의 삼촌 모흐센의 아들인 사촌 시루스의 대화를 통해 이란을 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 사이의 균열, 오해, 갈등을 엿볼 수 있다. 가족들이 재회한 첫째 날의 대화는 주로 옛일에 대한 회상이었다면 둘째 날의 화제는 이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운명에 관한 것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등장인물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하지 않는다. 오로지 등장인물의 대화만 들려줄 뿐이고 독자는 대화를 통해 가족 내의 갈등과 이란 사회의 현실을 더듬듯이 파악해 나간다. 


갈등이 폭발하는 것은 다섯 번째 날이다. 물론 이날 이전에도 서로 간의 물리적 정서적 거리감과 문화 차이를 엿볼 수 있지만 다섯 번째 날 샤마키 고모부와 하미디 고모부 간 벌어진 '대결투'에서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모든 갈등들이 직설적으로 거침없이 표출된다. 도키의 두 고모부가 서로를 향해 퍼붓는 거친 대화를 들으며 이란 혁명 이후 이란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어떠한 것일지 들여다본다. 샤파키 고모부 떠난 사람들을 대변하는 쪽 극단에 서있고 하마디 고모부는 남은 사람들을 대변하는 쪽 반대편 극단에 서있다.  




[샤파키 고모부]


"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당신에게 득이 되면 다른 나라로 도망쳤다가, 모든 게 안정되고 정리되면 돌아와서 당신 몫을 주장할 거라는 뜻이오? 나라는 당신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모자가 아니오. 진짜 남자라면... "


" 우리는 목숨과 재산을 내놓고, 뉴스 보도를 준비하고, 정권이 저지른 범죄를 폭로했소. 여러 목표를 위해 행진과 회의, 세미나를 준비했소. 이란의 자유를 위해 짐을 짊어졌는데 배은망덕한 동포들은 우리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감히 우리를 모욕하고 있소. "




[하마디 고모부]


" 샤파키, 그 짐을 내려놓아도 돼요. 이제 너무 애쓰지 마요. 지구 반대편에서 하는 싸움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니까. "


" 당신 같은 사람들이 돌아와서 우리를 통치하도록 내버려두라고? 내 자식을 사지로 몰아넣길 바라는 거요? 절대 그럴 수 없소! 우리는 다시 속지 않을 것이오. 나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사람이 넥타이를 맨 지식인이건, 수염을 기른 종교 지도자건 무슨 차이가 있겠어? 그리고 당신은 우리를 걱정하는 게 아니오. 당신은 한몫 챙기지 뭐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 나라의 부를 주무르고 있다는 것을 걱정하고 있을 뿐이오. "




다섯 번째 날 폭발한 갈등은 계속된다. 일곱째 날에는 사촌 마이클과 도키의 대화를 통해 떠난 이들의 자녀들, 이민 2세가 겪는 아픔과 혼란에 대해 듣는다.



[마이클]


" 이제는 더 이상 가족처럼 보이지 않아. 그냥 서로 삐걱거리는 낯선 사람들 같아. "


" 돈은 있어. 그렇지만 나는 가족도, 친척도, 연고도 없어. (...)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항상 혼자라는 느낌이 있어. (...) 내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가족도, 나라도 없었어. "


" 텔레비전에서는 이란에 대해 나쁜 뉴스만 나오고, 이란인이라는 게 더 이상 좋은 게 아니었어. 외할머니는 '걱정 말거라. 너는 미국인이야. 네 아버지가 이란인이란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거라.'고 하셨어. "



[도키]


" 30년의 거리감 때문이죠. 양쪽의 관점과 경험, 심지어 말하는 방식도 달라요. 우리에게는 같이 공유하며 이야기할 미래도, 친구도, 계획도 없어요.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며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오래가겠어요? "



화해


떠난 이들 남은 이들 각자 모두 힘겨운 삶을 살았다. 그들 사이에 켜켜이 쌓인 오해와 원망은 말싸움이라는 형태를 가진 다소 거친 소통으로 시작되었다. 그들 각자의 아픔과 슬픔은 뜨거운 눈물과 서로 피하지 않는 시선이라는 증거를 통해 이해 받았고 수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할머니] 


 " 모든 게 날 울리는구나.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 때문에 울고 있단다. 성공한 의사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하마드 때문에 운다. 이제는 그 애가 얼마나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알게 됐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마이클 때문에 운다. 자기 이름이 다리우쉬인지 마이클인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에서 편안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마흐나즈 때문에 운다. 이제는 자존심 센 내 딸이 혼자 두 아이를 키우면서 힘든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됐어. 평생을 내 곁에 있었지만 떠나지 않은 것을 항상 후회했던 모흐센 때문에 운다. 이상주의적 신념 때문에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은 하비브 때문에 운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모든 것을 참는 마리암 때문에 운다. 그리고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추위와 어둠의 땅으로 추방된 막내 메흐디 때문에 운다. 그렇게 쓰라린 기억으로 어린 시절을 잃은 너 때문에 운다. (...) "


할머니는 말한다. 이 여행의 핵심은 이 모든 얘기를 듣기 위한 것이었다고. 어디에나 나름의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이것이 바로 인생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는 여전히 서로가 있다는 것이다. 이 여행 이후 다시 만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어디서든 서로 응원하고 함께해 주길 부탁한다고 말이다. 모하마드 삼촌은 여기에 희망을 실어준다. 서로 멀어지게 내버려두지 않고 다음번에는 꼭 집에서 모이자고 말이다. 

역자 후기에서 이 작품은 마치 초상집에서 한밤에 모여 앉은 자식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내다가 큰 싸움으로 번지는 상갓집 풍경을 연상하게 한다고 썼다. 나는 이 비슷한 싸움을 어렸을 때 명절 때마다 보았다. 물론 내가 보았던 집안 싸움과 이 작품에서 드러난 싸움은 다르다. 작품 속 할머니는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자식들과 손주들의 아픔에 하나하나 귀를 기울이고 마음 아파하지만 내가 겪은 현실에서는 그런 어른은 없었다. 



이란 혁명 이후 극단주의자가 집권하면서 이란 사회가 겪었을 억압과 혼란에 대해서 나는 여전히 거의 아는 바가 없다. 이 작품을 통해 읽은 것은 빙산의 일부일 것이다. 작가는 2005년 이 책을 썼을 때 사실 멀어져 버린 관계를 되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눈곱만큼도 없었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이후 여러 일들, 특히 수감당한 동포들의 자유를 외치며 고국을 떠난 사람들의 참여로 인해 그들 사이에 깊은 유대감이 여전히 존재함을 알 수 있었다. 작가가 강조하듯 우리는 서로를 더 친절하고 공정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한편 진실 보기는 무척 어려운 작업이다. 


 우리는 가족을 비롯하여 공동체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쩌면 이해 그 자체가 아닐 수 있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판단 과정이 선행될 수밖에 없는 한계 가득한 작업이며, 우리는 온갖 이유로 이 작업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등장인물 각자가 겪은 아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나 아닌 존재의 아픔에 대해 무지하다. 우리의 무지는 오해와 불신과 원망을 낳고 우리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스스로의 아픔에만 빠져 있을 때는 이 작품을 떠올려 보자. 이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아픔과 슬픔이 도처에 널려있다. 할머니의 여섯 자식들과 그들의 자녀들 모두가 다 아프고 힘들었듯이 말이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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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아프리카누스
아민 말루프 지음, 이원희 옮김 / 교양인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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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아프리카누스』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1488년 그라나다에서 태어난 여행가이자 상인, 외교관, 지리학자였던 실존 인물 레오 아프리카누스를 주인공으로 한 역사 소설이다.

이 책을 옮긴 이원희 번역가는 레오 아프리카누스를 ‘16세기 코스모폴리탄’이라고 소개한다. 그가 코스모폴리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대항해 시대의 막이 오르면서 역사의 소용돌이에 내던져졌기 때문이다.

그의 첫 번째 이름은 알하산 이븐 무함마드 알와잔 알파시 알자야티였다. 그는 어렸을 때는 조국에서 할례를 받았고, 성인일 때는 타국의 노예가 되어 개종한 뒤 교황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는 아랍어, 튀르크어, 카스티야어, 베르베르어, 히브리어, 라틴어, 이탈리아어까지 할 수 있게 된다.

그라나다에서 부유한 검량사의 사랑받는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우수한 학생이었다. 경전을 통째로 외우는 명석함 뿐만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스스로 살피는 법을 알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나라가 사람들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우쳤다. 술탄이 향락에 빠져 국사를 등한시할 때 봉급을 받지 못한 병사들은 생계를 위해 의복과 말, 무기를 팔아서 연명하는 것을 보았다. 민심을 보살피기는 커녕 폭군으로 변하는 군주들을 보았다.

그는 사업 수완도 좋아 20대 초반에 도매상인으로서 큰 부를 쌓는다. 소설은 대항해 시대에 동방과 서구 세계의 만남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동서양이 무역을 통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며 교류하지만 문화, 종교, 민족, 인종 등 무수한 이유로 끊임없이 갈등하고 전쟁을 벌인다. 당시를 격동의 시대로 표현하는데 레오 아프리카누스의 삶을 따라가다보면 그 표현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간의 교섭? 무슨 목적으로?”

“평화를 위해서. 지중해권에서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함께 살 수 있고, 전쟁이나 해적 행위도 없이도 교역할 수 있다면, 시칠리아 해적에게 납치되는 일 없이 내가 가족을 데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 튀니스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 ___ p480

그가 파란만장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정신적 유연함과 빠른 판단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냉혈한 군주 셀림 1세의 마수로부터 아이를 구하기 위해 이슬람 제국을 도망치다가, 해적에게 붙들려 노예가 되어 어느 성에 갇히게 된다. 그가 갇혀 있을 때 교황의 측근이 자신에게 찾아오는데, 그는 여행가로서 한 활동, 술탄의 사신으로서 국제적 경험을 쌓았던 것을 빠뜨리지 않고 말하는 순발력을 보여준다. 이어 그들을 위해 할줄 아는 이탈리어 몇 마디도 들려주는 센스까지 지녔으며, 이탈리어를 배우겠다고까지 말한다.

한편 그가 생존에 급급해 모든 것을 그저 수용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슬람의 세계에서 기독교의 세계로 건너가 겪는 혼란 들도 묘사되어 있다. 기독교의 세계에서는 수염뿐만 아니라 온갖 것들을 금지한다. 수염을 깎지 않는 것은 교황에 대한 도전이며 심지어 신을 모독하는 불경한 표시로 여겼다. 그러나 무어인 그는 수염이 관례인 나라에서 태어났고 굴욕과 굴종의 표시인 면도를 거부한다. 그는 술탄의 왕국에서 교황의 세계로 건너가 잘 정착했지만 결코 그 세계에 완전히 동화될 수 없었던 외국인이었다.

❝ (…) 아이를 구하기 위해 이슬람 제국을 도망쳐야 했고, 로마에 와서는 교황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었다. 머리로는 이 역설을 받아들이지만, 양심에 거리낌마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허세를 부리지 않고서도 내 동족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던 시절은 지나간 걸까? ❞ ____ p452


이 작품을 읽으면 먼저 이슬람 문화에 대해 배우게 된다. 그리고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세계 간의 충돌과 교류를, 기독교 세계 내부의 갈등을 배운다. 진지하고 건조한 역사책에서 읽었던 사건들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woojoos_story 모집 #교양인 도서 지원으로
#우주서평단 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레오아프리카누스 #아민말루프 #교양인 #우주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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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클레오파트라의 남자들
조지 버나드 쇼 지음, 김연수 옮김 / 히스토리퀸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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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원제는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이다)는 잉글랜드계 아일랜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가 1898년에 집필한 희곡이다. 이 작품은 로마 공화정 말기 제1차 삼두정치를 이끌었던 세 명 중 한 명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7세의 사랑과 전쟁을 다루고 있다.

서구 남성 중심의 역사관을 부지불식간에 수용한 일반 대중들이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매우 빈약하다. 클레오파트라가 남동생과 치열한 왕위 다툼을 통해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가 되었는데, 그 수단으로 로마의 카이사르와 전략적 동맹을 맺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왕이 된 후에도 시시각각 변화하는 국제 정서에 기민한 뛰어난 외교 전략을 펼쳤으며, 이집트 백성의 삶을 살피고 나라를 번영으로 이끌었다.

조지 버나드 쇼의 작품은 열여섯 살 소녀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를 만나 이집트의 파라오로 성장해는 과정을 다룬다. 카이사르를 만나기 전 어린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라는 존재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과 무지로 가득 차 있다(이 책의 부연 설명에서 쇼는 클레오파트라가 전형적인 그리스 문화를 습득하지 않았고 당대 교육받은 이집트 귀부인도 아니었다는 명심하라고 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왕위 다툼 속에서 정치적 경험을 쌓고, 카이사르와의 전략적 동맹 관계가 점차 굳건해지면서 남동생과의 공동 통치자가 아닌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로 성장해간다.

조지 버나드 쇼가 그의 허구적 상상력으로 묘사한 클레오파트라는 어떤 인물인가. 히스토리퀸 출판사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원제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이다)와 쇼의 작품을 묶어 2권 세트로 출간했다. 따라서 독자는 이 두 작품을 동시에 읽고 비교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극중 두 인물인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사랑에 초점을 두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클레오파트라는 자기감정에 솔직한 '여인'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쇼의 작품에 클레오파트라는 왕족으로 태어난 미숙하고 어린 열여섯 소녀가 어엿한 파라오로 성장해 나가는 '통치자'로의 모습을 강조한다. 물론 '여성'인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라는 이성이 가진 매력에도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에게 카이사르의 매력은 그가 믿을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는 든든한 정치적 파트너라는 점에서 나온다.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카이사르가 떠나는 장면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라는 타인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통치자로서의 의지를 가진 인물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조지 버나드 쇼가 아무리 클레오파트라를 진취적인 여성으로 묘사했다고 해도 그 역시 서구의 백인 남성이다(참고로 나는 조지 버나드 쇼가 그의 처제를 위해 쓴 책 「자본주의 + 사회주의 세상을 탐험하는 지적인 여성을 위한 안내서」를 구입해서 읽었다. 나는 쇼가 당시 백인 남성들에 비해 상당히 진보적인 여성관을 가졌다고 믿는다). 로마 초기의 역사는 신화와 뒤섞여 있어 어디까지가 역사이고 어디까지가 신화이며 문학인지 알기 어렵다. 이 작품을 읽을 때 폴 벤느의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를 겹쳐 읽었다. 그래서인지 쇼라는 극작가가 잊힌 시대의 여성 통치자를 과연 어떻게 그렸는지에 주목하면서 읽었다. 얼마만큼의 '역사'라 믿어져온 것들 위에서 이 작품이 쓰였을까? 쇼는 부연 설명에서 본인들이 극중 인물들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상세히 설명하는데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설명은 카이사르만큼은 자세하지 않다. 이번에 히스토리퀸에서 출간된 두 작품을 읽으면서 통치자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관심이 생기게 되었다. 앞으로 통치자 클레오파트라(요부 클레오파트라가 아닌)에 대한 새로운 글이 나오면 계속 읽어볼 예정이다.

@woojoos_story 모집, #히스토리퀸 출판사 도서지원으로
#우주클럽_역사방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와카이사르
#조지버나드쇼
#히스토리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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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유령 - 폭력의 시대, 불가능의 글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W. G. 제발트 지음, 린 섀런 슈워츠 엮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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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유령』은 W.G. 제발트와의 인터뷰, 평론가들의 에세이를 엄선한 책이다. 이 책을 엮은 린 섀런 슈워츠는 다수의 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작가이자 번역가로 그녀에 따르면 제발트는 '독창적인 데다 완성된 소설가로 갑자기 난데없이 나타났'다. 1994년 독일에서 태어난 제발트는 1988년도 『자연을 따라. 기초시』를 출간했고 1990년에는 첫 산문픽션 『현기증. 감정들』을 출간했지만, 그의 문학이 영역본 출간된 것은 1996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인 린 섀런 슈워츠에게 제발트는 갑자기 나타난 천재처럼 인식되었을 것이다. 2001년 자동차 사고로 인한 제발트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은 문학계에 큰 상실감을 주었다. 그는 산문픽션(제발트 자신은 '산문설화(prose narratives)'라는 용어를 썼다)이라는 장르를 개척했다.

국내에서 『기억의 유령』은 같은 출판사인 아티초크에서 2023년 출간되었고 2025년도에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개정판에서는 제발트의 소설 『현기증. 감정들』에서 중요한 모티프가 되는 작품인 버지니아 울프의 「나방의 죽음」, 카프카의 「사냥꾼 그라쿠스」와 제발트의 글쓰기 어록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옮긴 공진호 번역가의 옮긴이 후기가 존댓말에서 반말로 바뀌었다.


내가 제발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19년이었다. 『토성의 고리』는 꼭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렀고 『토성의 고리』는 2023년도가 되어서 구입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아티초크에서 나온 『기억의 유령』도 구입했다.

그즈음 나는 나치와 홀로코스트, 인간악에 대한 주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프리모 레비, 장 아메리, 헤르타 뮐러, 에디트 에바 에거 등의 글을 구입해서 읽었고, 수용소 문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바스티안 하프너와 같은 독일인이 자신들의 역사를 기술한 것들을 찾아서 구입해 읽었다. 그리고 내가 늘 들여다보는 온라인 서재에서 하나같이 극찬하는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를 구입해서 읽었다.

『기억의 유령』 서문에서 슈워츠는 제발트의 『아우수터리츠』를 읽고 나서 느낀 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 서서히 자신을 잘게 부수는 땅이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것이 바로 그런 가루들이다. 우리는 그런 상상에 마음이 동요되기는커녕 이상하게 기운을 얻는 기분이 든다. 우울하긴 하지만 진리가 주는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
p44 <서문> 중, 린 섀런 슈워츠


진리가 주는 자양분. 나는 『토성의 고리』를 통해서 이러한 자양분을 얻었다. 인간은 인간을 수백만 명씩 학살하는 존재이다. 끔찍한 과오를 집단적으로 범하면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망각하는 존재이다. 제발트는 그러한 인간들의 기억을 필사적으로 붙들고선 기록으로 남긴다.



제발트의 소설 한 권과 인터뷰 및 평론집을 한 권을(구판과 개정판으로 두 번 읽었다) 읽은 나는 스스로를 '제발디언'이라 일컫는 문학 애호가들 집단에 끼워놓긴 조금 멋쩍다. 그러나 나는 제발트의 글을 감히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있다. 떠올리는 것조차 힘든 역사를 기억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젊은 청년 시절 독일에 살 때 제3제국 나치였던 교수들이 가까운 과거를 언급하지 않은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조국을 떠나 영국에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쳤던 그를 좋아한다. 불면에 시달리면서 제발 그가 다른 민족이기를 아니 아예 이 세상 어느 민족에도 속하지 않기를 간절하게 소망했던 그에게 계속하여 마음이 간다.


" 망명을 경험해 보지 못하고 대체로 자신의 사회 계급과 환경으로 일대기를 형성해 가는 사람들과 달리, 난민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순전한 우연에 내맡김을 의미한다. 이 운명이 이끄는 삶은 대부분의 경우 종국에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것으로 일반인의 이해력을 벗어난다. 제발트는 그런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는 구전 역사가 또는 관습을 따르지 않는 전기 작가 같은 역할을 한다. 그의 책에서 멜랑콜리가 느껴진다면 이는 저자 스스로 짊어진 과업이 거의 희망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p264 <모의된 침묵> 중, 찰스 시믹(유고슬라비아 태생의 미국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번역가, 퓰리처상 수상자)



나는 제발트와 같은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 내가 알고 있던 과거의 나와 과거의 세상에서 한 걸음 두 걸음 조금씩 멀어지는 기분을 받는다. 그리고 어떤 절벽에 떨어졌는데 거기서 받은 충격이 평생토록 지속되는 느낌이다. 절벽에서 기어 나와 집에 돌아왔는데 내가 살던 집이 낯설게 보인다.

나의 안락하고 평범한 일상에는 얼마나 많은 죽은 자들과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에 빠져 살아가는 자들과 연결되어 있을까. 나는 살아가는 내내 이 기억들을 읽어야 할 처지임을 깨달았다. 제발트의 글은 그것을 들려준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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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의 남자들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연수 옮김, 안지희 감수 / 히스토리퀸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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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녀의 마지막 연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원전 69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300년 넘게 지배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였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제2차 삼두정치의 세 권력자 중 한 명이었다.

이 책의 한국어 제목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에서는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이 안토니우스보다 먼저 나오기에 클레오파트라가 조금 더 비중 있게 그려질 것이라는 착각을 줄 수 있는데, 셰익스피어의 희곡 원제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이다. 참고로 이 책에서는 두 사람이 거의 동일한 비중으로 다루어진다. 그래도 나는 한국어 번역본을 읽었으니 나의 독후감은 클레오파트라에 집중한다.

서구 백인 남성 중심의 세계사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외모’와 ‘남성편력’을 중심으로 기억된다. 여기에 덧붙이면 미모와 함께 언어능력, 다방면에 걸친 지식, 정치적 능력 등도 언급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중 매체 속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는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라는 로마의 두 권력자를 연인으로 두었던 절세 미녀이자 요부의 이미지가 강하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는데, 어린 시절 내게 클레오파트라는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백인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연기한 바로 그 클레오파트라로 기억된다.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가 백인이 아니었다…)

이 책의 <옮긴의 말>에서 역자 김연수 번역가는 ‘셰익스피어의 시적인 표현을 통해,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되는 과정부터 비극적인 최후의 모습까지 낭만적이면서 아름답게 묘사된다.’라고 말한다. 독자인 내가 이 책에서 읽은 두 사람의 사랑은 낭만적이고 아름답게 묘사되었다기보다는 각자의 감정과 욕망에 매우 충실한 두 권력자의 모습이 생생하고 훌륭하게 묘사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셰익스피어’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최고의 수식어이다. 인류의 고전을 남겼다는 칭송을 받는 셰익스피어의 명문장들을 이 책에서도 마음껏 읽을 수 있다. 한편 나는 ‘번역’에 대해 무언가 정리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식견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역자의 현대적 의역으로 추정되는(그래서 더 재미있는) 대목이 몇 군데 보였다. 어떤 장면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명문장에 감탄해서 밑줄을 긋고 플래그를 붙이고 또 어떤 장면에서는 “ㅋㅋㅋ”, “ㅎㅎㅎ”, “흠…” 등을 빈 여백에 끄적였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두 사람의 사랑에 초점을 두었지만 조지 버나드 쇼의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는 이집트와 로마 간의 변화되는 정치적 관계와 어린 클레오파트라의 성장 이야기에 주력한다고 한다. 몰락해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되살리고자 했던 클레오파트라는 유능한 정치가이자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로 로마의 실권자들과 전략적 파트너십(사랑 동맹)을 맺어 이집트를 되살리고자 했다. 쇼의 작품에서는 한 나라의 왕이자 변화무쌍한 정치 무대의 외교관으로써의 클레오파트라를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woojoos_story 모집, #히스토리출퀸출판사 도서지원으로
#우주클럽_역사방 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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