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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
파리누쉬 사니이 지음, 이미선 옮김 / 북레시피 / 2025년 7월
평점 :
이란 출신 작가 파리누쉬 사니이의 신작 장편소설 『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은 이란 혁명(1979) 이후 30년 만에 재회한 한 가족이 열흘간 함께 지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파라누쉬 사니이는 1949년 이란 태생으로 오랜 세월 이란 사회의 억압과 여성의 억눌린 삶을 조명해온 작품을 썼다. 이번 작품은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이란 사회에 불어닥친 이민 물결로 인한 가족 간의 갈등 문제를 다루고 있다.
소설은 도키라는 이란 소녀가 서술자이다. 도키의 할머니는 아들 셋과 딸 셋 총 여섯 명의 자식을 낳았다. 할머니의 자식 중 절반은 이란을 떠났고 절반은 이란에 남았다. 이 가족은 이란 혁명 이후 30년 만에 타국의 땅에서 재회하고 총 열흘을 함께 지낸다. 재회의 기쁨은 채 하루도 가지 않는다. 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은 그들이 살았던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감정적으로도 멀어졌기 때문이다. 떨어져 지내는 동안 쌓였던 오해와 원망은 다섯 번째 날 이윽고 터져 나온다. 작가는 한 가족 내부에서 벌어진 싸움을 통해 이란 사회에 내재된 각종 문제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들이 화해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겐 여전히 깊은 유대감이 존재하며 이를 통해 화해와 재결합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전달한다.
이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이란 혁명 이후 이란 사회 내 불어닥친 이민 물결에 대해 알아야 한다. 작가는 책의 서문에서 이란 사회의 이민 문제에 대해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작가는 이민이 이란 사회에서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수많은 이란인들이 고국을 떠났다. 이민의 목적지와 목적도 이민자들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배경에 따라 다양했다. 혁명 후 이란을 떠난 사람들도 있었지만, 잠시 여행을 갔다가 혁명 후 당시의 사회적 여건 때문에 귀환이 막힌 경우도 있었고, 이란으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ㅎ해서 거주국에 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오늘날 이란의 거의 모든 도시 가정에는 해외에 거주하는 가족 구성원이 몇 명씩 있다고 한다. 이런 현 상황 때문에 가족 관계가 과거와 달라졌다. 과거 이란 사회에는 형제자매뿐만 아니라 친가와 외가 쪽 사촌까지 가까운 곳에 살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가까운 친척조차 한 번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이란을 떠난 가족들과 이란에 남은 가족들 사이에 물리적 정서적 거리감이 점차 커지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남은 사람들은 떠난 사람들이 엄청나게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 환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남은 사람들은 떠난 사람들이 타국에서 정착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고생과 아픔과 상실을 겪었을지 알지 못하고 헤아리려 노력하지도 않는다.
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이 공유하는 문화가 점점 줄어들면서 그들 사이에는 동포로서의 정서적 유대감도 희미해지고 있다. 작가는 이란을 떠난 사람들과 남은 사람들이 동포로서 다시 연결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이 작품을 통해 그 해결의 실마리를 더듬어 본다.
첫째 날에는 가족들이 재회한다. 하비브의 딸이자 작품의 서술자인 도키와 도키의 삼촌 모흐센의 아들인 사촌 시루스의 대화를 통해 이란을 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 사이의 균열, 오해, 갈등을 엿볼 수 있다. 가족들이 재회한 첫째 날의 대화는 주로 옛일에 대한 회상이었다면 둘째 날의 화제는 이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운명에 관한 것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등장인물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하지 않는다. 오로지 등장인물의 대화만 들려줄 뿐이고 독자는 대화를 통해 가족 내의 갈등과 이란 사회의 현실을 더듬듯이 파악해 나간다.
갈등이 폭발하는 것은 다섯 번째 날이다. 물론 이날 이전에도 서로 간의 물리적 정서적 거리감과 문화 차이를 엿볼 수 있지만 다섯 번째 날 샤마키 고모부와 하미디 고모부 간 벌어진 '대결투'에서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모든 갈등들이 직설적으로 거침없이 표출된다. 도키의 두 고모부가 서로를 향해 퍼붓는 거친 대화를 들으며 이란 혁명 이후 이란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어떠한 것일지 들여다본다. 샤파키 고모부 떠난 사람들을 대변하는 쪽 극단에 서있고 하마디 고모부는 남은 사람들을 대변하는 쪽 반대편 극단에 서있다.
[샤파키 고모부]
"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당신에게 득이 되면 다른 나라로 도망쳤다가, 모든 게 안정되고 정리되면 돌아와서 당신 몫을 주장할 거라는 뜻이오? 나라는 당신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모자가 아니오. 진짜 남자라면... "
" 우리는 목숨과 재산을 내놓고, 뉴스 보도를 준비하고, 정권이 저지른 범죄를 폭로했소. 여러 목표를 위해 행진과 회의, 세미나를 준비했소. 이란의 자유를 위해 짐을 짊어졌는데 배은망덕한 동포들은 우리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감히 우리를 모욕하고 있소. "
[하마디 고모부]
" 샤파키, 그 짐을 내려놓아도 돼요. 이제 너무 애쓰지 마요. 지구 반대편에서 하는 싸움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니까. "
" 당신 같은 사람들이 돌아와서 우리를 통치하도록 내버려두라고? 내 자식을 사지로 몰아넣길 바라는 거요? 절대 그럴 수 없소! 우리는 다시 속지 않을 것이오. 나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사람이 넥타이를 맨 지식인이건, 수염을 기른 종교 지도자건 무슨 차이가 있겠어? 그리고 당신은 우리를 걱정하는 게 아니오. 당신은 한몫 챙기지 뭐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 나라의 부를 주무르고 있다는 것을 걱정하고 있을 뿐이오. "
다섯 번째 날 폭발한 갈등은 계속된다. 일곱째 날에는 사촌 마이클과 도키의 대화를 통해 떠난 이들의 자녀들, 이민 2세가 겪는 아픔과 혼란에 대해 듣는다.
[마이클]
" 이제는 더 이상 가족처럼 보이지 않아. 그냥 서로 삐걱거리는 낯선 사람들 같아. "
" 돈은 있어. 그렇지만 나는 가족도, 친척도, 연고도 없어. (...)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항상 혼자라는 느낌이 있어. (...) 내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가족도, 나라도 없었어. "
" 텔레비전에서는 이란에 대해 나쁜 뉴스만 나오고, 이란인이라는 게 더 이상 좋은 게 아니었어. 외할머니는 '걱정 말거라. 너는 미국인이야. 네 아버지가 이란인이란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거라.'고 하셨어. "
[도키]
" 30년의 거리감 때문이죠. 양쪽의 관점과 경험, 심지어 말하는 방식도 달라요. 우리에게는 같이 공유하며 이야기할 미래도, 친구도, 계획도 없어요.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며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오래가겠어요? "
화해
떠난 이들 남은 이들 각자 모두 힘겨운 삶을 살았다. 그들 사이에 켜켜이 쌓인 오해와 원망은 말싸움이라는 형태를 가진 다소 거친 소통으로 시작되었다. 그들 각자의 아픔과 슬픔은 뜨거운 눈물과 서로 피하지 않는 시선이라는 증거를 통해 이해 받았고 수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할머니]
" 모든 게 날 울리는구나.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 때문에 울고 있단다. 성공한 의사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하마드 때문에 운다. 이제는 그 애가 얼마나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알게 됐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마이클 때문에 운다. 자기 이름이 다리우쉬인지 마이클인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에서 편안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마흐나즈 때문에 운다. 이제는 자존심 센 내 딸이 혼자 두 아이를 키우면서 힘든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됐어. 평생을 내 곁에 있었지만 떠나지 않은 것을 항상 후회했던 모흐센 때문에 운다. 이상주의적 신념 때문에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은 하비브 때문에 운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모든 것을 참는 마리암 때문에 운다. 그리고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추위와 어둠의 땅으로 추방된 막내 메흐디 때문에 운다. 그렇게 쓰라린 기억으로 어린 시절을 잃은 너 때문에 운다. (...) "
할머니는 말한다. 이 여행의 핵심은 이 모든 얘기를 듣기 위한 것이었다고. 어디에나 나름의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이것이 바로 인생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는 여전히 서로가 있다는 것이다. 이 여행 이후 다시 만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어디서든 서로 응원하고 함께해 주길 부탁한다고 말이다. 모하마드 삼촌은 여기에 희망을 실어준다. 서로 멀어지게 내버려두지 않고 다음번에는 꼭 집에서 모이자고 말이다.
역자 후기에서 이 작품은 마치 초상집에서 한밤에 모여 앉은 자식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내다가 큰 싸움으로 번지는 상갓집 풍경을 연상하게 한다고 썼다. 나는 이 비슷한 싸움을 어렸을 때 명절 때마다 보았다. 물론 내가 보았던 집안 싸움과 이 작품에서 드러난 싸움은 다르다. 작품 속 할머니는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자식들과 손주들의 아픔에 하나하나 귀를 기울이고 마음 아파하지만 내가 겪은 현실에서는 그런 어른은 없었다.
이란 혁명 이후 극단주의자가 집권하면서 이란 사회가 겪었을 억압과 혼란에 대해서 나는 여전히 거의 아는 바가 없다. 이 작품을 통해 읽은 것은 빙산의 일부일 것이다. 작가는 2005년 이 책을 썼을 때 사실 멀어져 버린 관계를 되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눈곱만큼도 없었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이후 여러 일들, 특히 수감당한 동포들의 자유를 외치며 고국을 떠난 사람들의 참여로 인해 그들 사이에 깊은 유대감이 여전히 존재함을 알 수 있었다. 작가가 강조하듯 우리는 서로를 더 친절하고 공정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한편 진실 보기는 무척 어려운 작업이다.
우리는 가족을 비롯하여 공동체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쩌면 이해 그 자체가 아닐 수 있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판단 과정이 선행될 수밖에 없는 한계 가득한 작업이며, 우리는 온갖 이유로 이 작업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등장인물 각자가 겪은 아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나 아닌 존재의 아픔에 대해 무지하다. 우리의 무지는 오해와 불신과 원망을 낳고 우리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스스로의 아픔에만 빠져 있을 때는 이 작품을 떠올려 보자. 이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아픔과 슬픔이 도처에 널려있다. 할머니의 여섯 자식들과 그들의 자녀들 모두가 다 아프고 힘들었듯이 말이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