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장애의 얼굴들 - 철학은 지적장애를 어떻게 보아왔는가
리시아 칼슨 지음, 이예린.유기훈 옮김 / 심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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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고로 뇌 손상을 입고 신체 안에 갇힌 사람들, 지적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불운이 내 것이 될 수도 있었고, 반대로 우리의 우연적인 행운이 그들의 것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나의 이러한 반응은 적절한 것일까. 나의 반응은 특정한 지식 주장에 근거한 편견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 우리는 정신지체인이 그 지체 상태로 인해 고통받는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이들에 대한 공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들과 어떻게 공감해야 할지를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감의 원천이 되는 바로 그 상상력이 (...) 그들에게 부재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한다. 우리는 정신지체인이 그처럼 중요한 자원을 결여함으로써 치명적 결함을 지니게 된다고 여긴다. 상상력이 결여되면 그들은 공감의 주체가 될 능력 자체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지적장애를 가진 사람을 자연종이라 생각하지 않고 그들이 '비정상'으로 여겨지는 것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 생각해왔다. 나의 모든 가시적 반응 아래 은폐된 것을 파헤치고 싶다. 그래서 내 반응을 이끌어내는데 기여한 상징적 언어나 구조적 기저를 드러내는 『지적장애의 얼굴들』을 읽고 싶었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지적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향한 그간의 내 반응들을 해석할 수 있는 언어를 얻었다. 나도 어쩌면 지적장애가 있는 개인을 보면서 왜곡된 형태로서의 나 자신을 보았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말이다. 누가 지적장애가 있는 사람을 취약하고 고통만 가득하다고 분류하는 것일까. ‘지적장애’라는 언어에 내재한 상징적 폭력은 무엇일까. 누가 개념과 언어를 생산하는 것일까.


미국 프로비던스 철학과 교수 리시아 칼슨은 지적장애에 대한 철학적 연구를 확장한 선구적인 학자라 평가받는다. 칼슨 교수는 이 책 『지적장애의 얼굴들』 에서 지적장애인을 '결여된 존재', '비시민적 존재' 또는 '동정의 대상'으로 여겨온 시선들을 철학적으로 고찰한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을 검토할 것처럼 보이는 철학자들에게도 지적장애는 생소한 주제였다고 한다.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 안에는 지적장애가 포함돼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 동안 여러 철학 담론에서 지적장애가 등장했다. 그 논의는 일반적으로 전통적 접근과 비판적 장애 접근으로 구분할 수 있다. 비판적 장애 접근은 전통적 접근 방식에 대한 수정으로 볼 수 있지만, 여전히 지적장애는 신체장애와 일반적인 장애 논의에 가려져 있었다.

이 책의 목적은 지적장애를 철학적으로 사유할 때 따라야 할 이론이나 교리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칼슨 교수는 푸코적 시각과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지적장애 역사를 탐구하여 지금까지 논의된 적이 없었던 부분을 조명하고 논의에 기여하고자 한다. 칼슨 교수는 이 책에서 비판적 장애 접근의 입장을 확고히 견지하면서 지적장애를 철학적으로 사유한다.



✅지적장애의 역사


저자는 1부 <지적장애의 역사적 세계>에서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지적장애에서 다양한 얼굴로 지식의 객체로서 형성된 방식을 살펴본다. '백치'라고 불리던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결핍으로 정의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 전반 백치는 별도의 고려가 필요한 존재로 뚜렷이 구분되기 시작한다. 1848년 미국의 사우스 보스턴에 백치를 위한 실험적 학교가 문을 열었고, 이 학교의 관리자들은 백치 유형학을 만들어 내게 된다. 정신박약자를 수용하는 시설이 만들어지자 새로운 전문가가 탄생했고 이들은 지적장애라는 새로운 지식의 객체의 주요 생산자가 되었다.

지적장애를 설명하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양적 관점과 질적 관점이다. 먼저 양적 관점은 백치가 단지 다양한 인간 자질의 '많고 적음', 즉 양적 차이의 문제라고 본다. 백치는 '정상인'과 단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보지 않는다. 19세기 중반부터 현대적 정의에 이르기까지 지적장애는 일관되게 양적 차이 개념을 중심으로 이해되었다. 한편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양적 관점이 결국 정신능력검사로 구체화되어 정신박약 수준을 다양한 지능의 정도로 분류하게 된 것이다. 지능검사가 대중화되면서 백치의 정의는 지능을 나타낸다고 여겨진 수치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질적 관점은 지적장애를 본질적으로 다른 부류, 즉 인간 이하 동물과 같은 존재로 간주한다. 질적 관점에서 지적장애인들은 정상인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비인격체 인간이며, 인간보다 동물에 더 가까운 종으로 분류했다. 이 책의 2부를 읽으면 철학 담론에서 철학자들이 어떤 식으로 지적장애의 얼굴에 동물의 얼굴을 덧씌웠는지 알게 된다.

1부를 읽으며 지적장애에 대한 기본적인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지적장애인들은 언제부터 격리의 대상이 되었을까? 정신박약자 시설과 지능검사의 도입으로 지적장애에 관하여 어떤 지식이 생산되었고 어떤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을까? 이들은 치료가 가능한 존재들인가? 왜 누군가는 백치로 태어나는가? 한편 서구의 역사에서 '백치'의 역사는 왜 백인 백치들에 대한 텍스트만 등장하는가? 정신박약 어머니는 어떤 억압을 당했는가?

1부 덕분에 내 머릿속 개념 사전에 하나를 추가했다. 바로 '시설'이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만든다는 것이다. 정신의학의 발전사를 읽으면 '병명'이 병을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설 안팎의 권력관계에 주목한 1부는 나의 빈약한 개념 사전을 약간은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또한 1부는 어빙 고프만의 수용소 개념을 비롯하여 특히 미셸 푸코의 규율 권력, 아이리스 매리언 영의 억압 개념 등에 관한 그간의 나의 산발적 독서가 나름의 빛을 발휘한 순간이었다. (읽기의 기쁨 +_+)

“시설이 보여주듯, 어떤 유형의 개인은 지식 생산의 새로운 기술과 함께 등장한다. 이 점은 지능검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능검사는 모론이라는 정신박약의 새로운 유형과 함께 등장했다.”

✅지적장애의 철학적 세계

1부를 통해 정신박약자 시설과 지능검사가 도입되면서 의사, 심리학자, 입법자, 여성 현장 연구원, 페미니스트 운동가, 개혁주의자들이 지적장애에 관한 지식을 생산했다. 한편 철학자들은 지적장애에 관한 지식 생산과 담론 형성에 무엇을 역할을 했을까?

이것보다 더 앞서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철학자가 지적장애를 정의해야 할 책임이 있을까? 지적장애의 모든 형태나 사례를 포함하는 하나의 용어를 철학자들이 만들 수 있을까? 혹시 철학자들에게 너무 과한 요구가 아닐까?

독자인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점점 궁금해진다. 철학자들은 인간의 모든 삶을 다룬다면서 왜 지적장애에 대하여는 신중했던 것일까

책의 2부 <지적장애의 철학적 세계>에서는 철학자와 전문가가 구성한 인식의 대상, 논의에서 배제된 타자의 목소리 사이에 형성된 권력 관계를 탐구한다. 20세기 전환기의 제도적• 시설적 세계에서 현대 철학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있었을까. 지적장애와 관련된 철학 담론을 살펴보면 가장 선한 의도를 지닌 철학자조차도 지적장애를 다루면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실질적인 해악의 위험을 초래하기도 했다. 철학자는 지적장애에 관한 지식과 담론 생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철학 문헌은 지적장애를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드러낸다. 먼저 지적장애를 동물화하는 것이다. 철학자는 지적장애인의 이해관계를 이들과 유사한 비인격체, 비인간 동물에 관한 논의로 자주 격하시켰다. 지적장애인을 비인간 동물과 동일한 범주에 몰아넣고 자신들의 도덕적 정치적 이론의 가장자리 사례로 구성하기도 했다.

그다음은 지적장애인을 고통의 얼굴로 드러내는 담론이다. 철학자들은 장애와 고통을 동일시했다. 칼슨 교수는 지적장애에 관한 논의에서 고통이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특정한 사유의 경향이 어떤 문제를 가져오는지 살펴보고 문제와 고통을 경감시키는데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나는 인간동물을 비롯하여 비인간동물, 궁극적으로는 지구상 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의 경이로움과 고통을 읽어나가고 싶다. 기존의 앎을 지속적으로 허물고 새로운 앎을 추가하여 더 겸손하고 덜 무지한 인간동물이 되고 싶다. 성인이 되고 난 뒤 내 앎은 주로 은폐된 것들, 고통스러운 것들에 대한 글들을 통해 성장했지만 동시에 고통을 구경하는 사람이 될까 봐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고 내 존재가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이번 책 『지적장애의 얼굴들』에 나와 같은 사람들을 정확히 분석한 대목이 있다. 취약한 인간의 모습 속에서 자기 자신을 상상하는 것은 지적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부정확한 지식과 관련이 있다. 지적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고통받는 존재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 책 2부에서 설명한다. 약간 덜 무지한 쪽에 속하는 사람이 지적장애인에게서 동물의 얼굴을 발견하지 않았다고 치자. 그러나 그 사람은 지적장애인의 얼굴에서 고통만을 선택적으로 인식했을 수 있다.

지식 생산의 문지기들이 대체로 '정상'으로 분류하는 사람들, 지적장애가 없는 사람들조차도 능력주의 시대에 태어난 탓에 신자유주의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상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탈진과 번아웃 신경쇠약에 시달린다. 우리는 어느 수준에 부합되지 않을까 봐 어느 문턱을 넘지 못할까 봐 늘 전전긍긍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상인'들의 탈진을 지적장애인의 얼굴에 씐 두 개의 가면 짐승의 얼굴과 고통의 얼굴과 연관하여 읽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개념화하고 언어로 구체화한다. 이들의 언어는 제도가 되고 시스템이 된다. 다수는 이 시스템에 종속되어 삶을 살아간다. 우리 삶을 가득 메운 절망과 고통은 많은 경우에 연유가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재확인했다.

이 책은 성실하게 읽고 부지런히 생각하여 기존의 인식론적 장벽을 끊임없이 깨부수는 독자가 되고 싶다는 결심에 용기를 준다. 철학 담론을 검토하는 글을 독해하는 것은 이토록 유익하다. +_+

“푸코가 "우리는 어떻게 도덕적 주제로서 자신을 구성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그 질문은 다음과 같은 더 넓은 함의를 내포한다. 우리는 어떻게 도덕 공동체의 경계를 그으며 누가 그 안에 포함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가? (...)

도덕 담론 속에서 지적장애인이 가장 추상적이고 희미한 방식으로 그려질 때, 그런 '비인격체'의 결핍된 삶과 타인과 공동체 속에서 함께 나누는 풍부한 삶 사이에서 깊은 간극이 발생한다. “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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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 6가지 우회적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 외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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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라는 필명으로 널리 알려진 서평가 이현우는 절판되었다가 15년 만에 개정판으로 출간된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 개정판 옮긴이의 후기에서, 20년 전에 쓰인 이 책이 던지는 ‘폭력’이라는 화두는 여전히 유효하며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인간동물의 세상에서 ‘폭력’이라는 화두가 사라지게 되는 날이 올까? 오히려 이 화두는 갈수록 더 심각하게 느껴진다.


한국 사회에서 가시적인 폭력(지젝은 이것을 ‘주관적 폭력’이라 명명했다)을 당하는 사람은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 우리는 국가권력에 항의하는 사람들을 향해 공권력이 총을 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다. 우리는 길을 걷다가 다짜고짜 불심검문을 당해서 몽둥이로 두드려 맞을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경찰서에 끌려가 취조를 받을 때 신체를 훼손시키는 고문을 받을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상대방이 나와 다른 종교를 가졌다고 해서 나를 공격할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요즘의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두드려 패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회사에서 상관들이 아랫사람들 욕설을 사용해가며 모욕하거나 감정이 격해졌다고 정강이를 걷어차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이처럼 명확히 식별 가능한 폭력은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국 사회 역시 분노 사회다. 우리를 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게 만드는것은 우리가 구조적 폭력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 폭력은 주관적 폭력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무엇이 시위대로 하여금 화염병을 던지게 하는 것일까. 무엇이 테러 단체가 비행기를 납치하게 만드는 것일까. 무엇이 외국인 노동자를 멸칭으로 부르는 만드는 것일까. 무엇이 이민자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국경에 벽을 세우는 만드는 것일까. 무엇이 2008년 금융위기를 가져온 것일까. 무엇이 빌 게이츠가 어마어마한 기부를 하게끔 만든 것일까. 무엇이 가자 지구를 불태우도록 만든 것일까.

주관적 폭력 아래 은폐된 진실은 무엇일까. 우리는 손쉬운 분노를 자아내는 주관적 폭력 아래 숨겨진 진짜 폭력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럴 때 지젝이 제시하는 폭력의 삼각 구도 - 주관적 폭력, 상징적 폭력, 구조적 폭력 - 를 하나하나 짚어보는 것은 무척 유의미하다.

우리는 압도적이고 자극적이며 가시적인 주관적 폭력을 직접 다루는 대신 상징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을 일별하기 위해 잠시 물러서야 한다. 지젝이 설명하는 폭력으로 향하는 여섯 가지 우회로를 모두 가보아야 한다. 우리를 구조적 폭력에 둔감하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먼저 지젝이 말하는 폭력은 총 세 가지로 방금 언급한 주관적 폭력이 그 하나고 나머지 두 개는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이다.


지젝은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을 묶어 ‘객관적 폭력’이라 말한다. 먼저 상징적 폭력은 하이데거가 ‘존재의 집’이라고 칭한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폭력이다. 온갖 멸칭이 난무하는 한국 사회에서 상징적 폭력의 예시를 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상징적 폭력은 습관적인 언어 사용을 통해 재생산되는 사회적 지배 관계나 선동적인 언어 속에서만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형태의 폭력이 언어 자체에 들어 있고, 언어가 의미 세계를 대상에 부과할 때 따라붙는 것이다.


마지막 구조적 폭력은 경제 체계와 정치 체계가 작동할 때 나타나는 파국적인 결과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에는 근본적인 구조적 폭력이 존재하다. 지젝에 따르면 이 폭력은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어떠한 직접적인 사회-이데올로기보다 훨씬 더 섬뜩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대부분은 구조적 폭력에 둔감하다. 나 역시 20대 시절만 해도 자기계발서나 자기위로 서적을 따위를 읽었다. 그러나 이런 책들이 대게 구조적 폭력은 하나도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자연스레 멀어졌다. 누군가가 일터에서 흘린 땀과 눈물, 누군가가 광장에서 쏟아낸 피와 내장들을 하나도 언급하지 않은 채, 너의 행복과 너의 감정만 돌보라고 말하는 책들은 나를 끝없이 생각에 빠트린다. 이 책의 출간된 시대적 역사적 정치 경제적 배경에는 어떠한 구조적 폭력이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더 나아가 이 책은 어떠한 구조적 폭력을 강화하고 기여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우리 집 위에 드론 폭탄이 떨어질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 나는 출신 국가와 인종과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에게 가시적인 위협을 가하는 것은 길거리에서 거의 보지 못한다.(구조적 폭력은 서로 가하고 있겠지만) 대신 은퇴 이후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나 걱정은 가끔 한다. 이 년 전부터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포함한 일체의 동영상을 시청하지 않는다. 오로지 읽고 읽고 또 읽는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실린 챕터 중 구조적 폭력을 다룬 <1장 SOS 폭력>이 현재의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구조적 폭력을 가장 잘 설명한다고 느꼈다. 왜냐면 지금의 한국 사회는 무척 인상 깊기 때문이다.

코스피가 7,000이라는 숫자가 은폐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폭력은 무엇일까. 삼성전자 노사가 성과급 배분을 놓고 노사 협상에 들어갔지만 서로의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정유회사 4사의 영업이익이 950억에서 5조 9635억으로 급증했다고 한다. 다음 달에 지방 선거를 앞두고 역시나 막말이 넘쳐흐른다. 나는 지젝의 『폭력』을 읽으며 인식의 도구를 훈련한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폭력, 상징적 폭력을 나의 언어로 표현하고 싶다. 이 책에서 지젝이 소환하는 온갖 철학자와 사상가들의 이론과 개념을 내 것처럼 사용하고 싶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개인’이라는 근대적 주체에게 삶의 모든 것은 스스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영역이라 명령한다(너의 삶은 너의 것이라 말한다). 우리는 일단 본인의 탓을 한다. 나의 노력이 부족했던 탓이고 그래서 나의 능력이 미천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것을 책임감 있는 태도라 말한다. 능력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구조적 폭력이 무엇인지 파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가 설계해 놓은 세상에서 일과 자율성의 노예가 되어 삶을 일에 통째로 갖다 받친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가 관심을 가지는 분야에서 일터를 구한 운이 좋은 몇몇들은 ‘경쟁’에서 성공하고 오늘날 사라지고 있다는 중간계급으로 도약한다. 그러고는 니체가 말한 최후의 인간이 되어 간다.

1장에서 대표적인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로 빌 게이츠, 조지 소로스 등이 등장한다. 이 책이 20여 년 전쯤 출간되었으니 나는 여기에 샘 올트만, 일론 머스크, 젠슨 황 등의 이름들을 추가하여 읽었다.

우리가 온갖 매체에서 접하는 무수히 많은 폭력적인 이미지 아래 도대체 어떠한 구조적 폭력이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불의에 가득 찬 온갖 사건들을 보고 들으면서 우리는 손쉬운 분노에 휩싸인다. 우리는 무엇에 의해 이 분노가 촉발된 것인지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상태에서 부지불식간에 상징적 폭력을 가하는 주체가 되기도 한다.

바로 이때 우리는 지젝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우리는 바로 이 시점에 이 책 『폭력』을 읽어야 한다. 지젝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칫하면 주관적 폭력의 비이성적 폭발처럼 보이는 구조적 폭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한발 물러서야 한다고 말한다.

지젝은 이 책에서 전 지구적 문제를 다루면서 독자에게 말을 건다. 인도주의적 위기 사태를 보면 즉각 참여하고자 하는 충동이 일어나지만 일단 기다리면서 두고 보라고 말이다. 왜냐면 우리가 느끼는 급박함과 분노는 어쩌면 가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징적이고 구조적인 폭력, 즉 객관적 폭력을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잠시 한발 물러서서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 한다. 그래서 나와 같은 독자들은 읽고 읽고 또 읽기로 한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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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 번영과 낙관은 어떻게 파국으로 치달았는가
앤드루 로스 소킨 지음, 조용빈 옮김, 신현호 감수 / 웅진지식하우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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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4~5명 중 1명꼴로 주식을 보유한 코스피 6000 시대, 1929년 대폭락의 진실이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과 시사점은 무엇일까. 월터 아이작슨은 “소킨이 또 해냈다”고 말한 이 책은 너무나 기대되는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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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턴 파괴자들 - AI 시대의 변곡점을 발견하고 미래를 선점하는 법
마이크 메이플스 주니어.피터 지벨먼 지음, 신솔잎 옮김 / 부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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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트위치, 리프트, 에어앤비 등 혁신적인 스타트업의 시작은 언제나 틀을 깨고 비주류가 되겠다는 결심이었다. 익숙함을 떠나 불확실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여정 전체를 조망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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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젊은 시인이 보낸 편지 - 릴케와 카푸스 왕복 서한집
라이너 마리아 릴케.프란츠 크사버 카푸스 지음, 최성웅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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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젊은 시인이 보낸 편지』는 그 유명한 릴케의 서한집이다. 테레지아 육군 사관학교 생도였던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1883-1966)는 밤나무 고목 아래서 릴케의 시집을 읽다가 우연히 릴케가 사관학교의 선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당시 카푸스는 갓 스물도 되지 못한 젊은 청년으로 군인의 길에 접어든 상태였지만 릴케와 마찬가지로 시인이 되고 싶은 마음도 품고 있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일곱 살 많은 선배이자 흠모하는 위대한 시인 릴케에게 편지를 쓴다. 그리고 릴케에게 답장을 받는다. 그 두 사람은 1908년까지 서신을 교환하다가 점차 소원해졌다.

릴케가 시인 지망생 카푸스에게 보낸 편지들을 엮은 책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이하 『편지』)는 전설과도 같은 책이 되었다. 특히 문학계와 예술계에서 이 책은 필독 도서로 여겨졌다. J.D 샐린저는 이 책은 작가가 되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성경 같은 책이라 말했고 피아니스트 임윤찬도 그 특유의 수줍지만 카리스마 있는 말투로 이 책이 자신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미국의 팝가수 레이디 가가는 그녀의 콘서트에서 이 책에 나온 어느 구절 전체를 직접 낭독했다고 한다. 예술 작품을 생산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예술 작품을 음미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편지』는 각별하게 다가온다.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젊은 시인이 보낸 편지』는 기존의 『편지』에서는 실리지 않았던 바로 그 '젊은 시인'인 카푸스가 릴케에게 보낸 편지도 함께 싣고 있다. 을유문화사의 책은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위대한 시인 릴케와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그 젊은 시인이 주고받은 서신을 함께 읽으면서 우리는 비로소 『편지』의 내용을 더욱 온전히 흡수한다.



『편지』는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을까

예술을 소명으로 하지 않는 나와 같은 평범한 독자에게도 이 책은 왜 이토록 영속되는 영향을 주는 것일까. 나는 문학 전공자가 아니고 아직은 문학 애호가라고도 말할 수 없다.(나는 그러나 문학을 동경하고 흠모한다) 또한 예술이나 창작을 업으로 하는 사람도 아니다. 단 나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읽기 위해 산다고는 말할 수 있다. 나는 『편지』에 실린 예술과 창작에 대한 릴케의 조언은 삶과 읽기에 대한 조언으로 종종 바꾸어 읽기도 한다. 내게는 뜻이 통하기 때문이다.

“ 가능한 비평-미학 나부랭이는 읽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생명력 없이 돌처럼 굳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편파적인 것들 혹은 교묘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아, 오늘날 그중 한쪽의 견해가 옳다 한들 내일이면 뒤집히기 일쑤입니다.”
_릴케, 1903년 4월 23일



나는 위 문장을 온갖 버전으로 변용하여 읽는다. 나는 문학작품에 실린 해설이나 해제는 꼭 읽고 이름난 작가나 사상가 들이 쓴 예술작품에 대한 비평도 종종 찾아 읽는다. 그러나 나는 수전 손택이나 버지니아 울프의 조언을 명심한다. 문학작품을 내 맘대로 해석한다. 무지와 편견에 가득 찼지만 어쨌거나 나는 내 식으로 해석한다. 거기에 릴케의 조언을 함께 명심한다. 나는 소위 '지식인' 내지는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들의 언어놀이에 너무 빠지지 말아야지...

“슬플 때면 스스로 고독한 채로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왜냐하면 미래는 언뜻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보이는 '마비된' 순간에 바깥에서 일어나는 시끄럽고 우발적인 사건들보다 훨씬 더 삶에 다가가 있습니다.”
_릴케, 1904년 8월 12일


나는 신자유주의에 염증을 느낀지 오래고 소비와 물질의 신은 내게 예전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나는 관계에 미숙하고 비대한 자아를 가진 한없이 천박한 영혼을 가진 현대인이다. 나는 권태에 빠진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현대인이지만 자본주의식 삶이 별로 살만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한지 오래다. 그래서 무가치한 내 삶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종결하는 방법으로 자살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런 내게 릴케의 서한들은 이 세상에 좀 더 존재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조언이 내게도 한밤의 등대가 되어준다. 이 감동과 뭉클함, 그리고 먹먹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릴케의 서한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것은 그가 읽는 이의 마음을 두드리고 다정하고 따뜻하게 말을 걸어 오기 때문이다. 릴케의 조언은 보잘것없는 내 삶이라는 것도 내 나름의 방식으로 창조적 생산이 가능한 대상이라고 알려준다. 허무와 회의에 빠진 수십억 인간동물 중 한 개체인 나는 릴케의 『편지』를 읽다가 가슴에 꼬옥 안았다. 아.. 이것이 바로 『편지』의 전설과도 같은 감동이구나.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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