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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과 생각
정용준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2월
평점 :
『밑줄과 생각』은 젊은작가상, 황순원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수상한 정용준 소설가의 산문집이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있는 정용준 작가는 2009년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 책은 작가가 읽기와 쓰기를 주제로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한 글 37편을 수록하고 있다. 문예지, 일간지, 단행본 등으로 발표한 글들이기에 형식과 내용이 다채롭다. 내밀한 자기 고백적 에세이, 소설 창작자들을 위한 조언, 각박한 사회 분위기에 대한 쓴소리, 서평, 짧은 소설처럼 읽히는 글 등 다양한 글들이 이 책에 함께 엮여 있다.

이 책의 지은이 정용준 작가는 밑줄 긋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 문장이 몸과 마음에 천천히 스며드는 시간도 좋다고 말한다. 그 언어와 내 언어가 섞이고 남의 언어를 닮은 새로운 나의 언어가 생기는 것이 좋다고 한다. 나도 밑줄 긋는 것을 좋아해서 책을 한 번도 중고로 팔아본 적이 없다. 책을 읽을 때는 꼭 밑줄을 긋고 색깔별로 나만의 고유한 규칙이 부여된 인덱스를 붙인다. 독서에 관한 책들, 뇌과학이나 인지신경학 책들은 한결같이 강조한다. 인간은 눈으로 손으로 입으로 다양한 감각적 경험을 통해 책을 읽는다고 말이다. 정용준 작가는 이 책을 여는 첫 번째 글 <작가의 말>에서 독자들이 자신의 책을 지저분하게 읽어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소설이 아니었다면
나는 세계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가가 쓴 산문집이다 보니 소설가는 어떻게 읽을지, 어떻게 쓸지, '소설'이라는 언어들의 묶음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눈여겨보게 된다. 내 책장에는 이미 소설가들이 쓴 창작론이나 독서 에세이들이 가득하지만 그래도 또 눈길이 간다. 이 세상엔 무수히 많은 소설가들이 존재하고 있고 그들은 각자 어느 점에서는 비슷하고 어느 점에서는 다를 테니 말이다. 나는 정용준 작가가 '소설이 아니었다면 나는 나라는 세계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표면 밑에 심연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타인의 마음에 숲과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거고 인간의 감정과 감각에 바람과 별자리가 있다는 것도 몰랐을 거다.'라고 쓴 문장에 밑줄을 그어 두었다. 저자가 말하는 내용이 새로워서가 아니다. 이 사람이 골라 쓴 언어가 좋았기 때문이다. 독후감을 쓰다 보니 쓰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번거로운 것인지 알게 된다. 좋은 글들은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내게 생각과 감정들을 밀어 넣는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 개념으로 정리되지 않은 이 생각들과 감정들을 '표상'이라고 부른다고 알려주었다. 독후감을 쓰기 위해 이 표상들을 단어와 문장으로 끄집어 내려고 노력하지만 정말로 어렵다. 정용준 작가도 '소설을 쓸 때마다 생각한다. '생각하는 거 힘들다. 쓰는 것도 힘들다. 아, 귀찮아. 번거로워. 왜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되었나. 현실의 삶을 살아내는 것도 잘 못하면서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 새로운 인물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라고 말한다. 독자인 나는 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얼마나 치열하고 고통스럽게 성실하게 글을 썼을지 말이다. 독자인 나는 소설가들이 고통스럽게 쓴 언어들을 통해 언어를 배운다. "표면 아래 심연"이 있다고 말이다.
사인칭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
이 책을 읽고 나니 늘 그렇듯 서점 장바구니가 조금 더 무거워졌다. 제일 먼저 올가 토카르추크의 『다정한 서술자』를 구입할 것이다. 작가가 읽은 책 중에 이 책만큼 마음을 일렁이게 만든 적이 없다고 하니 말이다. 이 책을 읽고 쓴 글에서 작가는 '언젠가부터 나는 작가도 인물도 아닌 서술자라는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라고 말하는데 나는 여기에 밑줄을 그었다. 책을 읽고 또 읽으면 일인칭에서 이인칭으로 삼인칭으로 서서히 옮겨가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사인칭이라니. 더 나아가 작가는 '사인칭의 마음을 갖자'라고 제언한다.' 먼저 사인칭은 누구인가. 저자는 서술자를 사인칭으로 표현한다.

그는 '작가가 회복해야 하는 능력은 개인에게 집중하는 일인칭도, 이 세계를 조명하고 조망하는 삼인칭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작가는 서술자가 되어서 나와 타인이 함께 있는 세계를 바라보고 스토리텔러로서 이야기를 건넨다. 독자인 내가 오늘 하루 더 버티고 살아낸 것은 서술자들이 들려준 이야기들 덕분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서술자가 전해주는 이야기에는 항상 이야기 그 이상의 것이 있다. 나는 이것들을 거의 대부분 나의 언어로 표현 못 하지만 이상하게 하루를 더 버틸 힘을 받는다. 서술자들에게 받은 것들을 되돌려주는 방법은 내가 다정한 서술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별로 괜찮지 않은 사람이고 뭉툭하고 나르시시즘에 허우적대는 사람이지만 무수히 많은 서술자들이 쓴 글들을 읽고 인간의 구실을 흉내낸다. 나는 읽어야 할 운명인가 보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독후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