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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만든 세계 - 세계사적 텍스트들의 위대한 이야기
마틴 푸크너 지음, 최파일 옮김 / 까치 / 2019년 4월
평점 :
만약 인간이 문자를 발명하지 않았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모든 이야기들이 오직 누군가의 입과 입으로만 전해졌다면 우리의 의식은 지금과 어떻게 다를까.
만약 문자가 없었다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가장 좋아했던 책, 『일리아스』가 없었을 것이다. 『일리아스』에 적힌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머리맡을 늘 지켰고 그의 세계관에 영향을 주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대대로 그리스인들에게 근본 텍스트였기 때문이다. 근본 텍스트들은 사람들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즉 알렉산드로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으로 여겼고, 트로이 전쟁을 다시 체험하기 위해 아시아를 정복하고자 했다. 만약 『일리아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의 군대를 이끌고 어디서 누구와 전투를 벌였을까.
저자 마틴 푸크너는 하버드 대학교 영문학과 비교문학 교수로 철학부터 예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대한 글을 썼다. 작년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소개하여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 책 『글이 만든 세계』는 "문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인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여기서 문학은 시와 소설과 같은 예술작품만이 아니라 글로 된 모든 것을 뜻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글이 만든 세계』의 부제는 "세계사적 텍스트들의 위대한 이야기"이다. 세계사적 텍스트들은 인류 역사를 형성해온 근본 텍스트들을 말한다. 근본 텍스트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면서 커다란 권력과 중요성을 쌓아가고 마침내는 여러 문화들 전체의 소스 코드가 된 텍스트들의 영향력이다(p16).'
『일리아스』, 『길가메시 서사시』, 『히브리 성서』, 『소크라테스와의 대화』, 『금강경』, 『논어』, 『겐지 이야기』, 『천일야화』, 『95개조 반박문』, 『포폴 부』, 『돈키호테』, 미국의 신문들, 세계 문학, 『공산당 선언』, 『진혼곡』,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오메로스』, 『해리 포터』를 근본 텍스트로 삼아 인류의 4,000여 년의 역사를 탐구한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동서양의 근본 텍스트들의 탄생과 영향력을 펼쳐 보이는 저자의 역량은 가히 놀랍다.
이 위대한 문학들은 스토리텔링이 글쓰기와 교차했기 때문에 비로소 탄생한 것이다. 저자는 문학의 역사를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한다.
(제1단계) 소수의 서기 집단들에 의해서 지배되던 시기. 극소수만이 초창기의 어려운 문자 체계를 숙달했고, 『길가메시 서사시』나 『히브리 성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일리아스』 같은 이야기꾼들로부터 취합한 텍스트들을 지배했다.
(제2단계) 교사 문학 시기. 제1단계의 근본 텍스트들의 영향력이 커지자 부처와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 같은 '카리스마적인 교사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이 교사들은 사제와 서기들의 영향력을 규탄했고, 그들의 추종자들이 새로운 글쓰기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 교사들은 글을 남기지 않고 학생들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함으로써 가르치기를 고집했다. 제자들은 스승들이 죽자 가르침의 장면들, 문답들을 포착하여 그들이 했던 말을 글로 적었다. 이 텍스트들은 제자들에 의해 생명력을 얻고 다음 세대들에게 계속하여 전해졌다.
(제3단계) 개별적인 작가들이 등장하는 시기. 이 단계는 일본의 무라사키 부인과 에스파냐의 세르반테스 같은 대담한 작가들이 등장하여 소설을 창조한 시기다. 글쓰기에 있어서 세계 문학사 최초의 위대한 소설인 『겐지 이야기』는 일본 궁중의 어느 시녀가 쓴 소설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익명의 궁중 여인이 썼기 때문에 저자는 그가 창조한 소설 속 여주인공의 이름 '무라사키'로 기억된다. 그리고 세르반테스는 유럽에서 근대 소설을 발명했다. 제3단계에서는 글쓰기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혁신들이 뒷받침되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종이가 풍부해졌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돈키호테』는 해외에서도 인기를 끌었고 유럽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애독서가 되었다.
(제4단계) 텍스트들의 대량생산과 대중 문자해득의 시대. 풍부해진 종이와 인쇄술의 광범위한 활용은 신문과 대형 전단지, 그리고 『프랭클린 자서전』이나 『공산당 선언』과 같은 텍스트들을 널리 보급하였다. 그리고 바야흐로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대중들을 탄생시켰다.
이 책은 문학의 네 단계 발전이라는 뼈대를 세우고 근본 텍스트들 살점으로 붙여 넣는다. 페키니아 알파벳에서부터 아르파넷(Afpnet)이라고 하는 컴퓨터 네트워크에 대한 아이디어까지, 『일리아스』에서부터 『해리 포터』에까지 읽을 줄 아는 동물 인류의 역사가 물 흐르듯 이어진다.
그간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제임스 글릭 『인포메이션』, 월터 J. 옹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메리언 울프 『다시, 책으로』, 닐 포스트먼 『죽도록 즐기기』 등을 읽어왔다. 이 책들은 읽고 쓰줄 아는 능력이 인간이라는 동물에게 얼마나 중요한 진화였는지 알려주었다. 이번에 읽은 『글이 만든 세계』는 특정 텍스트들이 어떻게 탄생하였는지 또 우리의 역사의 진로를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책 『글이 만든 세계』 는 '읽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겠다는 내 결심이 무려 4,000년의 역사를 가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몇 십년 남짓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선물받은 내 삶을 최대한 낭비하지 않고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현재의 기술 혁명은 전자우편과 전자책부터 블로그와 트위터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해마다 새로운 글쓰기 형태를 내놓으면서, 문학이 보급되고 읽히는 방식뿐만 아니라 쓰이는 방식까지 변화시키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근래에 우리가 사용하기 시작한 일부 용어들은 문학의 아득한 역사 속에서 초창기 순간들과 비슷하게 들린다. 고대의 서기들처럼 우리는 다시금 텍스트를 스크롤하고(scroll: 원래는 두루마리를 펼친다는 뜻이다) 고개를 숙여 태블릿(tablet: 서판, 고대에는 주로 석판이나 점토판을 썼다)을 들여다보고 앉아 있다. 이 옛것과 새것의 조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P21
20세기 문학의 부침과 기능을 곰곰이 생각하면, 나에게는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참상을 증언하는 작가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물론 더 앞선 작가들도 폭력의 묘사에 몸을 사리지 않았다. 『일리아스』에서 호메로스와 그의 서기는 창이 인간의 몸속으로 어떻게 들어가는지 아니면 머리를 어떻게 깨부수고 관통하는지를 적나라한 세부묘사로 포착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의 체계적인 대량 감금을 묘사하는 것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문학은 이 도전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 왕과 영웅들의 운명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사람에도 관심을 쏟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 P354
문학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발화를 시공간으로 깊숙이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인터넷은 몇 초만에 지구상 어디로든 글을 보낼 수 있게 하면서 공간을 확대했다. 그렇다면 시간은 어떨까?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에 대한 안내자로서 지난 4,000년간의 문학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미래의 문학고고학자들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길가메시 서사시』 같은 망각된 걸작들을 발굴해낼 수 있을까? - P416
문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은, 생존을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속적인 사용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텍스트는 번역되고, 전사되고, 코드 변환될 만큼 계속해서 우리에게 유의미해야 하고 세월에 걸쳐 지속되도록 세대마다 읽혀야 한다. 기술이 아니라 교육이 문학의 미래를 보장할 것이다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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