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가 날 대신해 소설, 잇다 5
김명순.박민정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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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잇다' 시리즈

『천사가 날 대신해』는 '소설, 잇다'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이다. 이 시리즈는 충분히 언급되지 못한 근대 여성 작가의 주요 작품들을 오늘날 주목받고 있는 현대 작가의 작품과 함께 엮어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다. 약 10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있는 두 작가의 작품들을 한 책에서 읽는 경험은 이런저런 상념에 빠지게 한다. 시공간의 격차 덕분에 변한 것과 이 격차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이번 책은 1세대 여성 작가 김명순과 2009년 《작가세계》 신인상 수상을 비롯하여 김준성문학상, 문지문학상, 젊은작가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박민정 작가를 한 책에서 묶었다.



김명순의 소설

김명순 작가(1896~1951 추정)의 소설은 총 세 편이 소개되고 있다. 김명순 작가는 생전에 170여 편의 소설, 시, 수필, 희곡을 남겼는데 이 책에는 『의심의 소녀』, 『돌아다볼 때』, 『외로운 사람들』 세 편의 소설을 실었다. 이 작품들은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이 당연시되지 않던 시기에 태어나 식민지 시기 여성에게 가해졌던 폭력까지 겪으며 써낸 글들이다. 그의 작품은 주로 연애와 결혼, 신여성의 삶, 자전적 글쓰기로 압축된다. 첫 번째 소설 『의심의 소녀』는 작가의 데뷔작이다. 『의심의 소녀』는 '범네'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미소녀를 둘러싼 이야기다. 이 6.5페이지의 짧은 분량임에도 범네를 둘러싼 추측과 소문 그녀에게 가해진 학대는 생생하게 와닿는다. 두 번째 소설 『돌아다볼 때』는 '소련'이라는 신여성이 주인공이다. 소련의 어머니는 본처가 아닌 첩이었는데, 이로 인해 그녀의 삶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마지막 소설 『외로운 사람들』 세 편의 소설 중 가장 긴 분량의 이야기다. 이 소설에서는 최씨 가문 네 남매의 삶을 통해 사랑에 대해 탐구한다.


박민정의 소설

박민정 작가는 앞서 소개한 것처럼 다수의 상을 연이어 수상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반면 김명순 작가는 천부적인 재능과 지적인 능력에도 불구하고 문단과 사회에서 추방되고 유폐된 삶을 살았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천사가 날 대신해』는 박민정 작가의 소설로 친구 '세윤'을 읽은 화자가 세윤의 기록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친구 '세윤'은 세상과 남성으로부터 소외와 괴롭힘을 겪은 뒤 '죽음'에 이르렀다. 이 소설은 화자가 친구를 잃은 뒤 겪는 '모호한 상실'(이 표현은 폴린 보스의 책 『모호한 상실』 (작가정신 출판사, 2023)에서 가져온 표현이다.)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박민정의 에세이

책의 마지막 글은 박민정 작가의 에세이 『때가 이르면 굳은 바위도 가슴을 열어』이다. 이 에세이에서 박민정 작가는 김명순 작가와 한 책에서 묶인다는 것에 대한 소회와 본인의 소설 『천사가 날 대신해』를 쓸 때 다분히 김명순 작가의 『의심의 소녀』를 의식하고 있었음 등을 밝힌다. 김명순 작가의 세 편의 소설과 박민정 작가의 소설 한 편을 읽은 뒤 에세이를 마지막으로 읽으면서 여성의 삶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여성 작가의 삶에 대해서도. 백 년 전의 삶은 지금의 삶과 얼마나 다를까. 여성과 여성 작가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섣불리 하기가 어렵다.





여성의 삶은 백 년 전에 비해 분명히 달라졌다. 대학에도 들아가고 회사에도 채용된다. 여성들이 출입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의 범위는 분명히 확대되었다. 그러나 여성은 여전히 그 장소에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차별과 배척은 복잡하고 미묘하게 변화했다. 여성은 여전히 어디든 '기능'으로 평가받지 '존재' 그 자체로 환대받을 수 없다. 이 책의 해설을 쓴 박인성 문학평론가는 '가장 두려운 적과 싸우는 작가들'이라는 제목으로 두 작가의 소설들을 분석한다. '가장 두려운 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바로 '외로움'이다. 여성은 먼저 세상과 남성으로부터 소외된다. 그 다음엔 자기가 스스로를 소외시킨다.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나 외롭다. 그러나 누군가의 외로움은 항상 다른 누군가의 것들보다 더 깊고 잔인할 수 있다.



* 출판자 지원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사랑을 원하여도 얻지 못하고, 자유를 원하여도 얻지 못하고, 이별을 청하여도 안 들어 의심받고, 학대받고 갇혀 비관하던 나머지 병든 몸을 일으켜 평양의 별장에서 자살하였다. - P26

전남편과 이혼한 다음 날 세윤을 불러낸 그의 모친을 마주할 때도, 그 모친이 상가 공중화장실에서 밑을 닦은 휴지를 들고 나와 세윤에게 버리라고 쥐어줄 때도, 그녀와 동행한 전남편의 동생이 "형수는 팔자가 늘어지셨네요"라고 지껄일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 세윤은 내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나는 정말 언니라고 생각했어."

그때 나는 처음으로 세윤에게 고함을 쳤다.

"내가 말했잖아, 씨발! 회사에 언니란 건 없다고!"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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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만든 세계 - 세계사적 텍스트들의 위대한 이야기
마틴 푸크너 지음, 최파일 옮김 / 까치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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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인간이 문자를 발명하지 않았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모든 이야기들이 오직 누군가의 입과 입으로만 전해졌다면 우리의 의식은 지금과 어떻게 다를까.

만약 문자가 없었다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가장 좋아했던 책, 『일리아스』가 없었을 것이다. 『일리아스』에 적힌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머리맡을 늘 지켰고 그의 세계관에 영향을 주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대대로 그리스인들에게 근본 텍스트였기 때문이다. 근본 텍스트들은 사람들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즉 알렉산드로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으로 여겼고, 트로이 전쟁을 다시 체험하기 위해 아시아를 정복하고자 했다. 만약 『일리아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의 군대를 이끌고 어디서 누구와 전투를 벌였을까.


저자 마틴 푸크너는 하버드 대학교 영문학과 비교문학 교수로 철학부터 예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대한 글을 썼다. 작년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소개하여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 책 『글이 만든 세계』는 "문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인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여기서 문학은 시와 소설과 같은 예술작품만이 아니라 글로 된 모든 것을 뜻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글이 만든 세계』의 부제는 "세계사적 텍스트들의 위대한 이야기"이다. 세계사적 텍스트들은 인류 역사를 형성해온 근본 텍스트들을 말한다. 근본 텍스트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면서 커다란 권력과 중요성을 쌓아가고 마침내는 여러 문화들 전체의 소스 코드가 된 텍스트들의 영향력이다(p16).'


『일리아스』, 『길가메시 서사시』, 『히브리 성서』, 『소크라테스와의 대화』, 『금강경』, 『논어』, 『겐지 이야기』, 『천일야화』, 『95개조 반박문』, 『포폴 부』, 『돈키호테』, 미국의 신문들, 세계 문학, 『공산당 선언』, 『진혼곡』,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오메로스』, 『해리 포터』를 근본 텍스트로 삼아 인류의 4,000여 년의 역사를 탐구한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동서양의 근본 텍스트들의 탄생과 영향력을 펼쳐 보이는 저자의 역량은 가히 놀랍다.

이 위대한 문학들은 스토리텔링이 글쓰기와 교차했기 때문에 비로소 탄생한 것이다. 저자는 문학의 역사를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한다.

(제1단계) 소수의 서기 집단들에 의해서 지배되던 시기. 극소수만이 초창기의 어려운 문자 체계를 숙달했고, 『길가메시 서사시』나 『히브리 성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일리아스』 같은 이야기꾼들로부터 취합한 텍스트들을 지배했다.

(제2단계) 교사 문학 시기. 제1단계의 근본 텍스트들의 영향력이 커지자 부처와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 같은 '카리스마적인 교사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이 교사들은 사제와 서기들의 영향력을 규탄했고, 그들의 추종자들이 새로운 글쓰기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 교사들은 글을 남기지 않고 학생들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함으로써 가르치기를 고집했다. 제자들은 스승들이 죽자 가르침의 장면들, 문답들을 포착하여 그들이 했던 말을 글로 적었다. 이 텍스트들은 제자들에 의해 생명력을 얻고 다음 세대들에게 계속하여 전해졌다.

(제3단계) 개별적인 작가들이 등장하는 시기. 이 단계는 일본의 무라사키 부인과 에스파냐의 세르반테스 같은 대담한 작가들이 등장하여 소설을 창조한 시기다. 글쓰기에 있어서 세계 문학사 최초의 위대한 소설인 『겐지 이야기』는 일본 궁중의 어느 시녀가 쓴 소설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익명의 궁중 여인이 썼기 때문에 저자는 그가 창조한 소설 속 여주인공의 이름 '무라사키'로 기억된다. 그리고 세르반테스는 유럽에서 근대 소설을 발명했다. 제3단계에서는 글쓰기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혁신들이 뒷받침되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종이가 풍부해졌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돈키호테』는 해외에서도 인기를 끌었고 유럽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애독서가 되었다.

(제4단계) 텍스트들의 대량생산과 대중 문자해득의 시대. 풍부해진 종이와 인쇄술의 광범위한 활용은 신문과 대형 전단지, 그리고 『프랭클린 자서전』이나 『공산당 선언』과 같은 텍스트들을 널리 보급하였다. 그리고 바야흐로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대중들을 탄생시켰다.

이 책은 문학의 네 단계 발전이라는 뼈대를 세우고 근본 텍스트들 살점으로 붙여 넣는다. 페키니아 알파벳에서부터 아르파넷(Afpnet)이라고 하는 컴퓨터 네트워크에 대한 아이디어까지, 『일리아스』에서부터 『해리 포터』에까지 읽을 줄 아는 동물 인류의 역사가 물 흐르듯 이어진다.

그간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제임스 글릭 『인포메이션』, 월터 J. 옹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메리언 울프 『다시, 책으로』, 닐 포스트먼 『죽도록 즐기기』 등을 읽어왔다. 이 책들은 읽고 쓰줄 아는 능력이 인간이라는 동물에게 얼마나 중요한 진화였는지 알려주었다. 이번에 읽은 『글이 만든 세계』는 특정 텍스트들이 어떻게 탄생하였는지 또 우리의 역사의 진로를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책 『글이 만든 세계』 는 '읽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겠다는 내 결심이 무려 4,000년의 역사를 가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몇 십년 남짓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선물받은 내 삶을 최대한 낭비하지 않고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현재의 기술 혁명은 전자우편과 전자책부터 블로그와 트위터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해마다 새로운 글쓰기 형태를 내놓으면서, 문학이 보급되고 읽히는 방식뿐만 아니라 쓰이는 방식까지 변화시키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근래에 우리가 사용하기 시작한 일부 용어들은 문학의 아득한 역사 속에서 초창기 순간들과 비슷하게 들린다. 고대의 서기들처럼 우리는 다시금 텍스트를 스크롤하고(scroll: 원래는 두루마리를 펼친다는 뜻이다) 고개를 숙여 태블릿(tablet: 서판, 고대에는 주로 석판이나 점토판을 썼다)을 들여다보고 앉아 있다. 이 옛것과 새것의 조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P21

20세기 문학의 부침과 기능을 곰곰이 생각하면, 나에게는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참상을 증언하는 작가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물론 더 앞선 작가들도 폭력의 묘사에 몸을 사리지 않았다. 『일리아스』에서 호메로스와 그의 서기는 창이 인간의 몸속으로 어떻게 들어가는지 아니면 머리를 어떻게 깨부수고 관통하는지를 적나라한 세부묘사로 포착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의 체계적인 대량 감금을 묘사하는 것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문학은 이 도전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 왕과 영웅들의 운명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사람에도 관심을 쏟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 P354

문학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발화를 시공간으로 깊숙이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인터넷은 몇 초만에 지구상 어디로든 글을 보낼 수 있게 하면서 공간을 확대했다. 그렇다면 시간은 어떨까?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에 대한 안내자로서 지난 4,000년간의 문학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미래의 문학고고학자들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길가메시 서사시』 같은 망각된 걸작들을 발굴해낼 수 있을까? - P416

문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은, 생존을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속적인 사용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텍스트는 번역되고, 전사되고, 코드 변환될 만큼 계속해서 우리에게 유의미해야 하고 세월에 걸쳐 지속되도록 세대마다 읽혀야 한다. 기술이 아니라 교육이 문학의 미래를 보장할 것이다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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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중독 - 실패 혐오 시대의 마음
롤란드 파울센 지음, 배명자 옮김 / 복복서가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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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중독』은 걱정과 불안이 어떻게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밝히는 책이다. 저자 롤란드 파울센은 스웨덴 웁살라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룬드대학교 사회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자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걱정과 불안이 많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사회를 분석한다. 머나먼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왜 인간은 생각과 걱정에 중독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걱정이 일상인 우리는 과한 걱정을 다스리기 위해 약이나 상담이 점점 더 의존하고 있다. 걱정과 불안에 대한 흔한 설명으로는 풀숲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사자를 불안해하던 시절 우리 조상들의 생존본능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라 한다. 이 강력한 생존본능 때문에 불안과 걱정은 어느 정도는 어쩔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다일까? 사회학자인 저자는 대중 "현상"으로써 걱정과 불안을 분석한다.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걱정을 낯설게 볼 필요가 있다.




걱정은 기본적으로 "만약에 ... 이면, 어떡하지?를 물을 때 생기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우려로 정의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정의를 좀 더 명확히 한다. 저자에 따르면 걱정은 스스로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 학문적 의미에서 걱정은 불안에서 야기된 반사실적 사고라고 정의할 수 있다(p76). 여기서 반사실적 사고란 "만약에... 이면, 어떡하지?"식의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생각이다. 반사실적 가정은 매우 비현실적일 수 있지만, 우리의 삶에 매우 현실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정서 중 많은 부분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돕기도 한다. 반사실적 사고는 인간의 근본적 능력이기도 한데 문제는 반사실적 세계에 몰두하는 강도가 전과 달라졌다는 것이다. 1930년대 소련의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 심리학자인 알렉산더 루리야는 농경사회를 지나 산업사회가 도래하면서 우리의 걱정은 크게 증가했음을 발견했다. 산업사회는 문해력과 추상적 사고력이 점점 더 중요해졌고 감각적 경험에 의존하던 농경사회에 비해 온갖 정보원에 의존하는 산업사회에 이르러서는 반사실적 사고에 기반을 둔 논리적 추론이 중시되었다는 것이다. 루리야는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일찍이 논리적 추론을 배우고, 그리고 인해 상상력이 자라고 자기 성찰 능력도 갖추게 되어, 사람들은 더 자유로와지고 주변 환경에도 덜 얽매일 것이라 봤다. 한편 이것은 부분적으로만 옳은 생각이다. 우리는 반사실적 사고를 많이 하긴 하지만 상상력을 발휘해 창의적인 반사실적 사고를 하기보단 주로 거의 대부분 내 개인에 대해 우리 가족에 대해 걱정한다. 걱정은 개인의 책임과 자기 결정과 연관된 것에 더 강하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인류학 연구를 자세히 살피면 '생각이 너무 많은 것'은 전 세계 어디에서든 발견된다. 늘 질병을 설명할 때 그 중심에 있었다.



2부는 문화와 역사를 넘나들면서 우리가 이토록 걱정 가득한 삶에 도달하게 된 여정을 설명한다. 수렵 채집 공동체의 삶에서 농경사회를 거쳐 산업자본주의에 도달했다. 인간의 삶이 복잡해졌으니 걱정이 증가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합리적으로 결정해야 하고 자기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불안해진 것이다. 개인의 선택이나 의지가 중시될수록 위험관리와 실패는 개개인의 탓이 된다. 또한 우리는 신이 계획한 세계에서 벗어나 스스로 기획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영국 사회학자 프랭크 푸레디는 세속적 걱정이 종교적 걱정보다 더 빨리, 더 넓게 퍼진다고 말한다. 신에 대한 두려움이 재앙에 대한 불안으로 바뀌었고, 도덕적 양심의 가책은 위험 분석으로 대체되었다.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연구에서는 특히 대중매체가 보도와 이미지들을 통해 우리의 불안과 걱정에 대한 인식을 급진적으로 바꾸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전문가 집단이 등장하고 이에 의존하게 되면서 우리의 혼란은 가중된다. 왜냐면 전문가들이 저마다 다른 분석을 내놓기 때문이다.




3부는 불안과 걱정의 노예에서 해방되고 싶은 우리를 위한 대책을 내놓는다. 요즘 정신과 상담을 받기가 어렵다고 한다. 환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내 치료와 상담을 위한 대기 시간이 길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도 어느덧 정신과 상담, 우울증 약 복용 등에 익숙해졌다. 한편 이를 다르게 보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 삶 속에 정신 기능과 관련된 문제는 잔디에 있는 잡초와 같이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정신 건강에 있는 문제와 함께 잘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학자들 중엔 '정신질환'이라는 개념과 작별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각종 '장애', '증후군', '질병', '신경증'으로 언어적으로 명명하는 순간 그것들은 진짜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불안을 줄이려는 심리치료는 불안의 수용을 방해한다. '불확실성'을 긍정하고 이것을 한껏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 불확실성은 인간 존재와 우주의 근원임을 깨달아야 한다. 삶은 통제되지 않고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이 진실을 기꺼이 수용해야 한다. 더불어 근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착취한 지구에서 더 이상 풍요의 열매만을 수확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지구의 지배자가 아니라 지구상에 수많은 생명체 중 하나이다. 끝없는 진보와 성장은 있을 수 없다. 지금과 같은 물질숭배 삶의 방식, 자연을 재료 삼아 행복을 짜내는 삶의 방식이 어마어마하게 틀렸다는 또 하나의 진실을 깨달아야 한다.




*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사람들에게 미래가 항상 오늘날처럼 중요했던 건 아니다. 미래 지평선,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멀리까지 내다보느냐는 오로지 실용적 이유로 인류 역사 대부분에서 며칠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인의 미래 지평선은 구체성을 초월해 멀리까지 확장되어 있다. 현대인이 생각하는 ‘미래‘는, 불과 몇 세기 전만 해도 감히 추측할 수 없었건 긴 기간을 아우른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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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끊어내기로 했다 - 내 발목을 잡는 가족에게서 벗어나 죄책감과 수치심에 맞서는 심리학
셰리 캠벨 지음, 제효영 옮김 / 심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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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심리학자이자 가족 문제 전문가인 저자 셰리 캠벨은 단호하게 말한다. 해로우면서 무고한 사람은 없다. 따라서 내 가족이 내게 지속적으로 상처를 주면서 내 영혼을 갉아먹고 내 육체를 파괴해도 '그래도 가족인데...'라는 면죄부를 주면서 참지 말라고. 해로운 가족과는 관계를 끊어내도 된다고 말이다.

혹자는 말한다. 가족은 모두 조금씩 미쳐있으니 결함을 받아들이라고 말이다. 물론 모든 부모는 완벽하지 않다. 의도치 않게 자녀에게 고통을 주기도 하고 자녀가 원할 때마다 나타나 정서적 욕구를 다 해결해 줄 수도 없다. 그러나 어떤 부모나 조금씩 가지고 있는 평범한 결함과 한 인간이 정상적으로 자라는 과정을 파괴하는 해로움은 분명히 다르다. 저자는 1장에서 해로운 가족과 결함이 있는 가족을 구분한다. 해로운 부모는 자녀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한다. 네가 더 착하거나 덜 보채는 아이였다면 자신도 부모 노릇을 더 잘했을 거라 주장하고, 부모가 하는 말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분별할 수 없는 아이를 그렇게 믿게 만든다. 자기 행동과 무관한 갈등이 생겨도 비난의 화살이 자녀를 향한다. 건강한 부모와 그렇지 않은 부모와 다른 점은 자녀에게 상처를 줬을 때 부모가 속상해하는지 아닌지다. 본인 인생의 불행을 자녀에게 풀고 그것에 대하여 수치스러움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부모는 해로운 부모다. 한편 해로운 부모는 어떤 사람들인가? 저자는 1장에서 해로운 사람의 특성을 잘 정리하고 있다(p28~31). 이 특성들에 대한 목록을 내 부모 혹은 가족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성격적 결함들과 비교해 보자.





불행히도 최근까지도 가족 문제에 있어서는 '참아라'가 우세했다. 수많은 문학작품들은 가족에서 비롯된 불행과 학대를 피해 도망치는 사람들을 다루어왔지만, 대중 매체는 거의 대부분 매우 정상가족 신화에 사로잡혀 매우 좁은 가족 이미지를 제시했다. 가족문제 상담가들 역시 가족을 화해시키거나 관계를 개선하는 데 목표를 두었지 '가족과 단절하여도 된다'라는 식의 조언은 없었다. 따라서 최근까지도 우리는 가족문제에 있어선 '그래도 가족인데'라는 망령을 견뎌야 했다. 저자 역시 가족으로 인해 불행을 견뎌야 했다.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은 비교할 본보기나 설명 같은 것이 없었고, 본인 선택의 결과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확인할 방법도 없었던 것이다. 가족을 떠나서 생존해야겠다는 이 간절하고 중대한 결정 앞에 기댈 수 있는 조언이 없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썼다. 책의 원제는 『 Adult Surviors of Toxic Family Members 』으로 국내 번역본과 차이가 있다. 국내 번역본 제목 『가족을 끊어내기로 했다』 은 무척 직관적이고 책의 모든 내용을 함축한다.


이 책은 해로운 가족과 관계를 끊으면 희망이 생기고 삶이 명료해진다는 진실을 전한다. 해로운 가족과 선을 긋는 기술과 외부의 편견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느 전략을 알려준다. 저자는 맺음말에서 이 책을 쓰는 건 별로 유익한 일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왜냐면 이 책 때문에 저자의 가족은 더 길길이 화를 내고 더 큰 앙심을 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가족의 학대에서부터 살아남아 삶을 살아야 할 생존자들을 위해 힘주어 말한다. 가족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은 상처 많고 어딘가 음울해 보여 왠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부류의 인간이 아니라 심리적 육체적으로 자립하여 타인의 마음을 고통을 더 잘 이해하는 사람들일 수 있다.


*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피도 눈물도 없고, 무감각하고, 다정하지 않은 사람이라서 가족과 관계를 끊는 게 아니다. 사실 정반대다. 경계선을 긋는 이유는 내가 입은 상처를 걱정하고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다.

학대하는 가족과의 관계에서 경계선이 생기면 상처가 치유되고 내가 원하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다양한 선택지와 방법이 열린다. - P57

해로운 가족과 관계를 끊는 건 그들을 버리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 더 이상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접촉 지점을 없애는 것이다. 해로운 가족은 정서적 유기에 도가 튼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죄책감, 그리고 자신의 잔인성을 인지한 후 느낄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행위가 일으키는 악영향을 계속 모른 척하기로 스스로 선택한다. (중략)

해로운 가족은 이런 무감한 방어로 자신들이 꽤 괜찮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유지한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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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과학 - 우리가 세상을 읽을 때 필요한 21가지
마커스 초운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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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마커스 초운은 대중의 눈높이에서 과학을 알려온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마커스 초운이 저술한 많은 책들이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고 좋은 반응들을 얻었다. 마커스 초운은 대학에서는 물리학을 공부했고 캘리포니아공대에서는 바로 그 유명한 리처드 파인먼의 지도로 천체물리학을 전공했다. 그가 저술한 <중력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은 영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과학 도서상인 영국 왕립학회 과학 도서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이번에 까치에서 출간된 신간 <지금 과학>의 원제는 <The One Thing You Need To Know>이다. 저자는 양자 컴퓨터에 대한 강연을 의뢰받고 어떻게 하면 과학 지식이 없는 청중들도 양자 컴퓨터를 이해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이 책의 집필을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양자 컴퓨터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하고, 다른 모든 것도 알 수 있도록 해주는 한 가지는 무엇일까?"를 깊게 파고든 저자는 그 고민의 결과를 이 책에 담았다. 나와 같은 대중은 저자가 설명해 주는 이 한 가지만 잘 이해해도 현대 과학의 핵심을 어슴푸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지난 35년 동안 무려 17권의 과학 소설과 교양서를 집필했는데 현대 과학의 모든 개념과 사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한다. 저자는 이 깨달음을 과학 전공자들만이 알아듣는 언어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번역하여 우리에게 가장 최신의 현대 과학의 큰 그림을 그려준다.


<지금 과학>의 한국어 번역본 부제는 '우리가 세상을 읽을 때 필요한 21가지'이다. 현대 과학을 이해하기 위해선 꼭 알아야할 핵심 21개는 다음과 같다.


중력

전기

지구 온난화

태양이 뜨거운 이유

열역학 제2법칙

판 구조론

양자 이론

원자

진화론

특수 상대성 이론

일반 상대성 이론

인간의 진화

블랙홀

표준모형

양자 컴퓨터

중력파

힉스장

반물질

중성미자

빅뱅


앞서 말했듯 저자는 과학의 핵심 개념들을 유기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책 속에 등장한 21개의 핵심 과학 개념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차근차근 설명된다. 이 책은 관심 있는 부분부터 먼저 읽어도 상관없지만 이 책의 진가를 알기 위해선 처음부터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책의 시작은 '중력'이다. 21개의 과학 개념들은 기초부터 시작해서 점점 심화된 설명으로 나아간다. 책을 차근차근 읽어가면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구과학의 핵심 개념을 서서히 다가온다. 지식을 알려주는 책은 결국 저자의 역량에 달려 있다. 제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어도 저자의 앎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커스 초운의 <지금 과학>은 과학 입문서로 아주 쉬운 개념부터 최신의 이론까지 담고 있다. 각 장의 도입 부분은 아주 쉬운 설명으로 우리의 호기심을 사로 잡지만 몇 장을 넘기면 난이도가 꽤 올라간다. 저자가 강조한 그 '한 가지'를 얻겠다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나가면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 분명 커다란 성취감을 맛볼 것이다.



*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자유로운 감상만을 담아 쓴 리뷰입니다.

중력은 모든 물체와 다른 모든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보편적" 인력이다. 예를 들면 여러분과 길을 지나가는 다른 사람 사이에도 중력이 작용하고, 여러분과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동전 사이에도 중력이 작용한다. 그러나 중력은 지극히 약하기 때문에 그 존재를 실제로 느끼기는 어렵다.
- P13

전기는 생물학과도 추종한다. 우리는 전기적 존재이다. 식품에 들어 있는 전자가 우리의 세포벽을 가로지르는 전기장을 만들고, 그것이 에너지를 가진 아데노신 삼인산(ATP)과 같은 분자를 생산한다. 궁극적으로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그 내용을 장기 기억 속에 저장하는 흥미로운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뇌의 뉴런(신경세포) 사이를 흘러 다니는 전자 덕분이다. - P37

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은 어제가 없는 날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우주는 영원히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느닷없이 탄생했다. 대략 138억2,000만 년 전에 우리가 빅뱅이라고 부르는 불덩어리 속에서 모든 물질, 에너지, 공간은 물론이고 심지어 시간까지 폭발하듯이 탄생했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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