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바다 암실문고
파스칼 키냐르 지음, 백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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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최근이었다. 올해 5월 즈음 신간 소식에 소개된 파스칼 키냐르의 책 『성적인 밤』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호기심에 검색해 보았더니 파스칼 키냐르는 작가들의 작가라고 불리는 사람이라고 한다. 파스칼 키냐르는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흠모하는 소설가였다. 파스칼 키냐르는 1948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언어학자와 음악가들을 배출했는데 이러한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5개 국어를 습득하고 다양한 악기를 연주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심하게 앓았던 두 차례의 자폐증, 68혁명의, 실존주의 구조주의 철학 등은 그의 작품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으며,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소설에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사랑 바다』에서는 17세기 예술가들의 기구한 삶이 펼쳐진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엔 작가가 기존에 창조했던 인물들도 등장한다. 예술가들은 예술은 사랑하는 만큼 인간의 육체와 감각이 빚어내는 열정도 사랑한다. 상대방을 자체를 욕망하는 것인지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상대방을 욕망하는 것인지 구분이 모호할 때도 있지만 어쨌든 욕망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파스칼 키냐르의 글은 탐미적이라고 하는데 사랑에 대해 쓴 부분에선 특히 더 아름다운 그의 문체가 돋보였다. 한편 『사랑 바다』를 소개할 땐 등장인물이 누구였는데 그들이 어떤 일들을 겪었고 등의 서사를 풀어 놓아야겠다는 생각은 굳이 들지 않는다. 나는 튈린이 왜 떠났는지 이유가 크게 궁금하지는 않았다. 인간은 맞는지 틀렸는지 영영 알 수 없는 온갖 이유로 무슨 행동이든 할 수 있는 존재이니까. 









파스칼 키냐르의 『사랑 바다』는 소설이지만 시처럼 읽힌다. 글을 읽다가 페르난도 페소아의 『불안의 서』가 떠올랐다. 나를 페소아의 글을 읽을 때는 점점 어둑어둑해지는 늦은 오후의 심상을 받는다. 『사랑 바다』는 나중에 어떤 심상이었다고 말하게 될까? 한편 최근 사서 읽고 있는 책 중 토마스 포스터의 『교수처럼 문학 읽기』가 있다. 이 책에서는 보통의 독자들이 소설을 읽을 때는 작품의 감정적 차원에서 반응하는 반면 문학 교수들은 물론 감정적인 차원에서도 반영하지만 대게 다른 요소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다고 설명한다. 이 작품의 감정적인 효과는 어디서 오는지. 등장인물들은 누구와 비슷한지. 이러한 장면을 전에 본 적이 있는지 등등. 교수들은 상징적 의미를 고려하고 작품 속에서 드러난 은유와 비유를 유추한다. 또한 패턴을 의식하며 책을 읽는다고 한다. 저자인 토마스 포스터 교수는 평범한 우리 독자도 교수처럼 읽을 수 있도록 훈련시키고자 하는데... 『사랑 바다』에서는 이 훈련법을 적용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어느 날 삶은 옷을 벗는다"(p441)라고 말했고 나는 이 문장에 반응했다. "세상은 깊고 밤은 거대하다"(p441)라고 말했을 때 나는 이미 한밤이었다.  



*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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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공학 - 불확실한 세상에서 최선의 답을 찾는 생각법
빌 해맥 지음, 권루시안 옮김 / 윌북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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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원제는 『The Things We Make』 이다. 윌북에서 나온 한국어 번역본 제목은 『삶은 공학』이고 부제는 "불확실한 세상에서  최선의 답을 찾는 생각법"이다. 어떤 책들은 원제목보다 번역본 제목이 더 책의 핵심을 잘 전달해 주기도 하는데 나는 이 책도 그렇다고 본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알 수 있다. 우리 대부분은 이미 '공학적' 마음가짐 내지는 태도로 살아왔다는 것 말이다. 평범한 우리들은 살면서 자연스레 공학적 방법으로 삶을 살아내는 법을 배워간다. 우리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예기치도 못했던 일련의 사건들을 앞에서 그 당시에는 나름대로의 최선의 판단이라 믿은 선택들을 내리며 한발 한발 나아간다. 우리는 선택에 앞서 스스로 이런저런 정보를 탐색하고 누군가에게 조언이나 자문을 구한다. 그러나 언제나 정보는 불충분했다. 그럼에도 선택을 내린다. 시행착오와 실패를 반복해서 겪지만 이러한 경험을 인생의 밑천 삼아 무너지지 않고 계속하여 삶을 살아낸다. 저자에 따르면 바로 이것이 바로 공학적 방법이다. 


공학자는 완전한 지식 없이 작업을 하고 때로는 잘못된 경험칙을 사용한다. '경험칙'의 공식적인 용어는 '발견법(heuristic)'인데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내기 위한 지름길로서 사용되는 부정확한 방법을 뜻한다. 공학자의 선택에는 편향이 담겨 있고 어떤 상황에서는 이런저런 충동으로 부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공학자는 어떤 식으로든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방법을 알아내려 고분분투한 사람들이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파리에 있는 시테궁의 생트샤펠 대성당을 공학적 전략의 대표적 모범 사례로 들고 있다. 생트샤폘 대성당은 오늘날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기본적인 산수나 기하학을 배운 적이 없는 건축가 팀이 설계하고 건설했다. 현대의 도구나 기법 없이 어떻게 이런 대성당을 지어냈을까? 생트샤폘은 좋은 공학을 결정하는 것은 컴퓨터 알고리즘, 구조분석, 건축 재료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결국은 공학적 '방법'에 있음을 알려준다. 이 장엄하고 아름다운 대성당은 숫자가 표시된 자도, 유클리드 기하학도 없이 가장 기본적인 수학만을 가지고 만들어냈다. 그러나 대성당 건축에는 1000년에 걸쳐 구전으로 전해진 비례 법칙이 적용되어 있다. 이 법칙이야말로 공학적 지혜의 대표적 사례이다. 반복되어 사용되면서 점점 다듬어지고 개선되는 것이 바로 공학적 문제 해결의 본질이다.


책의 지은이 빌 해맥은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어배너-섐페인 캠퍼스 화학 및 생체 분자 공학 교수로 어린 시절 공장 견학을 좋아하신 부모님을 따라다니다가 제조 과정에 자연스레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공대로 진학했다. 저자의 부모님은 식물학자와 연극 교수였는데 삼 남매를 데리고 캘리포니아 어느 공장에서는 옥수수를 분당 수천 개씩 캔에다 부어 넣는 광경을 보러 가기도 하고, 미시간의 켈로그 시리얼 공장에 견학을 가기도 했다. 이런 흥미로운 취미를 가지신 부모님 덕분에 저자는 공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현대는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면서 과학 커뮤니케이터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은 웅장한 대성당 건축에서부터 사진기, 자전거, 전자레인지, 세탁 세제 등 일상적으로 접하는 많은 것들에 깃든 공학 이야기를 들려준다. 불확실한 정보와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시행착오를 밥 먹듯이 되풀이하는 공학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오점투성이의 내 삶이 조금은 달리 보인다. 에필로그에 저자는 어떤 공학 해설자의 말을 인용하는데 무척 위로가 된다. 공학도 삶도 언제나 이해하기 쉽게 깔끔하게 정리된 적은 없었고 우리는 그냥 나아갈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서 살아갔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무수한 실패 덕분에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공학을 한다는 것은 인간적이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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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의 과학 - 세상을 움직이는 인간 행동의 법칙
피터 H. 킴 지음, 강유리 옮김 / 심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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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복잡하고

우리는 편향되었다.

저자 피터 H. 한은 조직행동학자로 20년 넘는 기간 동안 사회적 오해의 역학 관계와 신뢰를 연구하였고 거기서 얻은 놀랍고도 때로는 심기 불편한 통찰을 토대로 이 책을 집필했다. 저자는 연구의 결과가 때로는 '심기가 불편한 통찰'이라고 표현했을까? 왜냐면 우리는 누구나 '신뢰는 중요하다'라고 말하고 믿으면서도 신뢰와 관련된 판단에 매우 서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뢰'와 관련된 문제를 만났을 때 신뢰를 회복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성급히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우리는 아주 적은 정보를 바탕으로 낯선 사람을 선뜻 신뢰하지만 이 초기의 신뢰는 또 몹시 무너지기 쉽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신뢰가 어떻게 형성되고 훼손되는지, 또 신뢰를 회복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탐구한다. 이 책을 끝까지 읽으면 개인적인 관계 속의 신뢰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에 대한 분별력을 키울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한 명의 여성과 불륜을 저지른 클린턴 대통령은 탄핵 소추를 당한 반면 수십 년에 걸쳐 여섯 명의 여성을 추행하고 모욕한 혐의로 고발된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주지가 선거에 승리했다. 성추문이라는 비슷한 유형의 신뢰 위반 사건으로 모두 명백한 도덕성 위반이었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슈워제네거는 리프레이밍 전략을 통해 도덕성 문제를 역량 관계 이슈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신뢰를 결정짓는 두 개의 강력한 요소인 '역량'과 '도덕성'을 통해 신뢰 메커니즘을 탐구한다. 먼저 우리는 역량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정보보다 긍정적인 정보에 더 무게를 둔다. 반면 도덕성의 문제에서는 이 관계가 역전된다. 우리는 역량이 낮은 사람이 보여준 단 한 번의 눈 부신 성과를 믿을 만한 역량 신호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이 단 한 번만이라도 도덕적으로 부정직하게 행동하면 그 사람에 대한 신뢰 전체를 잃기도 한다. 즉 우리는 편향된 사고를 하는데 이는 신뢰 회복의 문제로 이어진다. 역량 기반의 신뢰를 저버린 사람이 사과하면 우리는 앞으로 그가 비슷한 잘못을 피하고 노력할 것이라고 믿기에 사과가 도움이 된다. 반면 도덕성 기반의 위반을 저지를 사람은 사과를 한다 해도 우리는 그의 뉘우침과 속죄의 신호를 대부분 무시하기 때문에 사과는 별 소용이 없고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다. 따라서 도덕성 위반자는 무엇을 해도 별 소용이 없는 것을 알기에 사과를 하지 않는 전략을 택하기도 한다. 우리는 완전한 정보를 가지지 않은 채로 세상의 문제를 판단한다. 사건과 관련된 복잡한 정황을 세세하게 따지기보다는 흑 또는 백으로 결론짓는다. 진실은 복잡하고 회색 지대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저자는이 책은 '신뢰 문제의 복잡성을 이해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세심하게 이 문제에 접근할 의지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라고 말한다. 이 책은 대인관계부터 집단, 문화, 국가에 이르기까지 점점 범위를 확대하면서 신뢰 문제를 탐구한다. 우리는 스스로는 도덕적으로 좀 더 옳다고 보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반대로 생각한다. 늘 불충분한 정보를 토대로 누군가를 너무 빨리 신뢰하고 누군가의 사과는 받아주지 않는다. 대중은 권력자에 대한 낭만화된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권력자 또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권력자는 단 한번의 실수에도 평생 동안의 업적이 물거품이 되기도 한다. 또는 반대로 작용해서 객관적인 신뢰 위반의 데이터가 쌓여도 이를 부인하고 우상화하기도 한다.

저자는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로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자동 조종장치를 끄고 나의 신뢰성이 위협받을 때 남들이 해줬으면 하는 것과 똑같은 수준의 사려 깊고 섬세한 배려로 신뢰 위반 상황을 해석하고 노력하는 것이다(p387)라고 말한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편향성을 극복하는 것은 힘들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진실은 생각보다 훨씬 복합하고 우리는 기대보다 어리석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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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 문명을 가로지른 방랑자들, 유목민이 만든 절반의 역사
앤서니 새틴 지음, 이순호 옮김 / 까치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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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Nomad)라는 말의 어원은 초기 인도유럽어 단어 노모스(nomos)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모스의 뜻은 다양한데 "고정된 지역 혹은 경계 지역", "방목자", "방랑하는 유목민의 일원", "방목지를 찾아다니는 사람" 등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가축 떼를 방목할 법적 권리를 가질 장소를 찾아다니는 사람"을 의미할 수도 있는 노마스(nomas)의 근어가 싼 튼 바로 그 근어인데, 이 근어는 나중에 여러 갈래로 분기된다. 소도시와 대도시가 건설되고 많은 사람들이 정착하는 삶을 살게 되자 이제 노마드는 '벽 없이 생활하며 경계 너머에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 정착민들은 노마드를 두 가지로 사용한다. 어떤 이들은 '노마드'라는 단어에서 낭만과 향수를 찾는다. 반면 한편에서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을 떠돌이, 철새, 방랑자, 도피하는 사람, 주거 부정인 사람들이라고 암묵적으로 판단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우리는 노마드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돈이 많아 이곳저곳을 선택하여 옮겨 다니며 살 때는 보통 첫 번째 의미를 적용하는 경향이 있고, 반대로 가진 돈이 적어 삶에 떠밀리듯 이곳저곳을 떠돌며 사는 사람들에겐 두 번째 의미를 적용하기도 한다. 저자는 두 번째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알 수 없는 사람들"로 해석하고 무지에서 비롯된 위협과 불안, 혐오와 편견을 가진 이들을 향해 해석에 좀 더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이동하며 사는 사람들과 정착해 사는 사람들 간의 관계 변화를 추적한다. 1만 2,000년에 걸친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인류 역사의 절반을 차지했지만 기억되지 못했고 그나마 남은 기억도 오해로 가득 찼던 유목민들의 역사를 탐구한다. 

책은 총 3부로 이루어졌다. 제1부에서는 인간이 수렵채집을 멈춘 시점이었던 1만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정착민과 유목민들이 대체로 협력했던 초기 역사에 대해 말한다. 1부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정착민과 유목민은 서로를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 정착민들은 인류 문명이 대부분 정착민들이 이룩한 성취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명은 초기부터 언제나 유목민, 이주자, 그리고 이동하며 살았던 사람들에 기여에 힘입어 성장했다.

제2부에서는 소제목 '제국 세우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동성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세운 몇몇의 위대한 제국들의 흥망성쇠를 다룬다. 유목민들은 유럽의 르네상스를 비롯하여 현대 세계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서구의 역사가들은 이 시대를 일컬어 암흑시대로 명명했다. 그러나 2부를 읽어가다 보면 이 시대가 결코 암흑시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제3부에서는 유럽인들이 그들의 식민지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전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유목민들의 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다룬다. 유럽인들은 어디를 가든 유목민의 힘과 마주쳐야 한다는 오래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인들은 과학혁명과 함께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된다. 유럽의 백인들은 인간 세상뿐만 아니라 자연도 지배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은 유목민들의 삶을 야만적이라 여겼다. 유목민들의 삶은 부정당했고 그들의 역사는 지워졌으며,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정착민들이 '노마드'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나는 이 책의 서문 격인 <이란, 자그로스 산맥에서>을 읽으면서 유목민의 역사를 다시 읽을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작가, 언론인, 방송인, 「지리학」지의 편집고문, 왕립지리학회 회원지 「콘데 나스트 트래블러」 기고 편집자인 저자 앤서니 새틴은 이 책의 시작을 바흐티야리 부족민들과 함께 보낸 경험을 들려주며 시작한다. 저자는 성인이 된 이후 오랜 시간 전 세계 곳곳의 유목민들과 만났다. 유목민들과의 대화는 늘 같은 주제였다고 한다. 연속성, 소속되어 있다는 자부심,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삶, 자연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존경하는 마음, 국가가 정착을 바라는 상황에서 유목 생활을 하는 것의 어려움 등등. 이 주제들은 낭만적이고 몽환적으로 들린다. 나는 여기서 내 오해와 무지를 바로잡아야겠다고 느꼈다. 나는 이 유목민들과 어렸을 적 학교에서 기계처럼 외웠던 '흉노족의 침략' 속 유목민들을 연결 짓지 못했기 때문이다. 흑인의 삶처럼, 여성의 삶처럼, 소수민족의 삶처럼, 아시아인의 삶처럼 유목민의 삶도 역사에서는 늘 잊혔다. 이 책을 통해 유목민들의 삶을 새로 배웠다.



* 출판사에서 지원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그때 이후로 정착 생활을 했다. 지난 세기에 우리 대부분은 크고 작은 도시들에 정착했고, 우리의 삶의 방식은 자연계를 떠나 벽 안에 사는 형태로 극적으로 달라졌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 중 일부를 사악한 인간, 신뢰할 수 없는 동반자, 마약 중독자, 스릴을 쫓는 사람, 도박꾼,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으로 바꿔놓았으며, 또 다른 사람들이 탁 트인 도로, 새로운 도시에 대한 기대, 새로운 경관 혹은 다음번에 만날 친구를 고대하며 노마드랜드(유목민의 땅)를 방랑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게 만들었다. - P51

인간 역사의 대부분을 지나오면서 우리 인간은 모두 이동하며 살았다. 우리 세계, 우리 문화,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유목민들이 만들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의 행동은 자궁에서 나오는 첫 여행으로부터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여향까지 모두 여행과 연계되어 있으며, 진화가 우리에게 의도한 것도 여행이었다.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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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 날 대신해 소설, 잇다 5
김명순.박민정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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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잇다' 시리즈

『천사가 날 대신해』는 '소설, 잇다'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이다. 이 시리즈는 충분히 언급되지 못한 근대 여성 작가의 주요 작품들을 오늘날 주목받고 있는 현대 작가의 작품과 함께 엮어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다. 약 10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있는 두 작가의 작품들을 한 책에서 읽는 경험은 이런저런 상념에 빠지게 한다. 시공간의 격차 덕분에 변한 것과 이 격차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이번 책은 1세대 여성 작가 김명순과 2009년 《작가세계》 신인상 수상을 비롯하여 김준성문학상, 문지문학상, 젊은작가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박민정 작가를 한 책에서 묶었다.



김명순의 소설

김명순 작가(1896~1951 추정)의 소설은 총 세 편이 소개되고 있다. 김명순 작가는 생전에 170여 편의 소설, 시, 수필, 희곡을 남겼는데 이 책에는 『의심의 소녀』, 『돌아다볼 때』, 『외로운 사람들』 세 편의 소설을 실었다. 이 작품들은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이 당연시되지 않던 시기에 태어나 식민지 시기 여성에게 가해졌던 폭력까지 겪으며 써낸 글들이다. 그의 작품은 주로 연애와 결혼, 신여성의 삶, 자전적 글쓰기로 압축된다. 첫 번째 소설 『의심의 소녀』는 작가의 데뷔작이다. 『의심의 소녀』는 '범네'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미소녀를 둘러싼 이야기다. 이 6.5페이지의 짧은 분량임에도 범네를 둘러싼 추측과 소문 그녀에게 가해진 학대는 생생하게 와닿는다. 두 번째 소설 『돌아다볼 때』는 '소련'이라는 신여성이 주인공이다. 소련의 어머니는 본처가 아닌 첩이었는데, 이로 인해 그녀의 삶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마지막 소설 『외로운 사람들』 세 편의 소설 중 가장 긴 분량의 이야기다. 이 소설에서는 최씨 가문 네 남매의 삶을 통해 사랑에 대해 탐구한다.


박민정의 소설

박민정 작가는 앞서 소개한 것처럼 다수의 상을 연이어 수상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반면 김명순 작가는 천부적인 재능과 지적인 능력에도 불구하고 문단과 사회에서 추방되고 유폐된 삶을 살았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천사가 날 대신해』는 박민정 작가의 소설로 친구 '세윤'을 읽은 화자가 세윤의 기록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친구 '세윤'은 세상과 남성으로부터 소외와 괴롭힘을 겪은 뒤 '죽음'에 이르렀다. 이 소설은 화자가 친구를 잃은 뒤 겪는 '모호한 상실'(이 표현은 폴린 보스의 책 『모호한 상실』 (작가정신 출판사, 2023)에서 가져온 표현이다.)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박민정의 에세이

책의 마지막 글은 박민정 작가의 에세이 『때가 이르면 굳은 바위도 가슴을 열어』이다. 이 에세이에서 박민정 작가는 김명순 작가와 한 책에서 묶인다는 것에 대한 소회와 본인의 소설 『천사가 날 대신해』를 쓸 때 다분히 김명순 작가의 『의심의 소녀』를 의식하고 있었음 등을 밝힌다. 김명순 작가의 세 편의 소설과 박민정 작가의 소설 한 편을 읽은 뒤 에세이를 마지막으로 읽으면서 여성의 삶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여성 작가의 삶에 대해서도. 백 년 전의 삶은 지금의 삶과 얼마나 다를까. 여성과 여성 작가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섣불리 하기가 어렵다.





여성의 삶은 백 년 전에 비해 분명히 달라졌다. 대학에도 들아가고 회사에도 채용된다. 여성들이 출입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의 범위는 분명히 확대되었다. 그러나 여성은 여전히 그 장소에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차별과 배척은 복잡하고 미묘하게 변화했다. 여성은 여전히 어디든 '기능'으로 평가받지 '존재' 그 자체로 환대받을 수 없다. 이 책의 해설을 쓴 박인성 문학평론가는 '가장 두려운 적과 싸우는 작가들'이라는 제목으로 두 작가의 소설들을 분석한다. '가장 두려운 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바로 '외로움'이다. 여성은 먼저 세상과 남성으로부터 소외된다. 그 다음엔 자기가 스스로를 소외시킨다.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나 외롭다. 그러나 누군가의 외로움은 항상 다른 누군가의 것들보다 더 깊고 잔인할 수 있다.



* 출판자 지원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사랑을 원하여도 얻지 못하고, 자유를 원하여도 얻지 못하고, 이별을 청하여도 안 들어 의심받고, 학대받고 갇혀 비관하던 나머지 병든 몸을 일으켜 평양의 별장에서 자살하였다. - P26

전남편과 이혼한 다음 날 세윤을 불러낸 그의 모친을 마주할 때도, 그 모친이 상가 공중화장실에서 밑을 닦은 휴지를 들고 나와 세윤에게 버리라고 쥐어줄 때도, 그녀와 동행한 전남편의 동생이 "형수는 팔자가 늘어지셨네요"라고 지껄일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 세윤은 내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나는 정말 언니라고 생각했어."

그때 나는 처음으로 세윤에게 고함을 쳤다.

"내가 말했잖아, 씨발! 회사에 언니란 건 없다고!"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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