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 캐드펠 수사 시리즈 1
엘리스 피터스 지음, 최인석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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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계의 명작, 캐드펠 수사 시리즈가 30년 만에 개정되어 나오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는 세계적인 추리소설 작가인 엘리스 피터슨이 중세 수도원을 배경으로 쓴 역사 추리소설이다. 저자는 18년이라는 집필 기간 동안 총 21권을 썼고, 영국의 ITV 방송국은 <캐드펠>이라는 제목의 TV 드라마 시리즈로 1994년부터 1998년까지 방영했다. 영국 배우 데릭 재코비(Derek Jacobi)가 캐드펠 수사 역을 맡았다. 국내에서는 북하우스 출판사에서 2003년도에 출간하였고, 원작 시리즈의 완간을 기념해 같은 출판사에서 30년 만에 전면 개정판이 나왔다. 현재 5권까지 출간되었고, 앞으로 21권까지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작가와 작품의 명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작가 엘리스 피터슨은 전설적인 추리소설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움베르토 에코도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고 현재 한국 소설을 이끌어가고 있는 정세랑 작가도 이 시리즈를 자신 있게 추천하고 있다.  



매력 넘치는 주인공, 캐드펠 수사


시리즈물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매력적인 캐릭터 설정이 필수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21권짜리 캐드펠 수사 시리즈를 이끌어갈 주인공인 캐드펠 수사는 어떤 사람인가. 

캐드펠 수사는 전통 있는 웨일스 가문 출신으로 지금은 영국 슈루즈베리의 성 바오로 수도원 정원에서 온갖 허브들을 키우면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지만 젊었을 때는 십자군이었고, 바다에서 10년 동안 이슬람 해적선을 격파하는 선장이기도 했다. 전투와 모험이 가득한 삶 속에서 여러 여자들과 교제를 만끽하기도 했다. 세상의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그는 넓은 시야와 예리한 판단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평의회 시간에서는 똑바로 앉은 자세로 잠자는 법도 터득했고, 졸다가 받은 질문에도 꼭 들어맞는 답변을 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   





1권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


캐드펠 시리즈 첫 번째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의 구판 제목은  『성녀의 유골』이다. 평화로운 5월의 어느 봄날, 평화로왔던 성 바오로 수도원의 대회의실은 성인의 유골을 모셔 수도원의 명성을 높이자는 욕망으로 들끓는다. 적당한 성인을 물색하다가 위니프리드 성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고, 이윽고 성 바오로 수도원은 귀더린의 성녀 위니프리드의 유골을 수도원에 안치하여 수호성인으로 모시자고 의견이 모아진다. 그리고 이 임무는 바로 주인공 캐드펠 수사에게 부여된다. 웨일스와 잉글랜드 혼혈로 180 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잘생긴 얼굴, 귀족적이고 우아한 몸가짐을 가진 50세의 로버트 부수도원장(초미남...)과 캐드펠 수사를 포함하여 총 네 명의 수사들은 성녀의 유골을 가져오기 위해 귀더린으로 떠난다. 이 여정에서 수사들은 귀더린 주민들의 거센 반발을 맞닥뜨린다. 그리고 반대하는 이들을 대표했던 리샤르트 영주가 화살을 맞아 살해된 채로 풀밭에서 발견된다. 자 영주는 누가 죽였고 왜 죽었을까.

내가 느낀 1권의 주요 재미는 사건 자체를 풀어가는 것보다는 당시 유럽의 기독교와 수도원 이야기, 여러 인물들에 대한 묘사, 당대 사람들이 중시했던 가치 등에서 나왔다. 민족별 특징, 신분별로 각자 다른 욕망, 성직자라는 직업에 대한 묘사들은 주로 건조하고 압축적인 서술로만 접해왔던 중세 시대에 대한 빈약한 앎이 조금은 두터워지고 생생해졌다.  어떤 사람들은 캐드펠 시리즈는 현대 추리 소설에 비해 사건 추리 과정이 전형적이고 허를 찌르는 반전이 부족하다고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중세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이라는 것에 호기심을 느꼈기에 만족하면서 읽었다. 교양과 재미를 동시에 원하는 나같은 독자라면 이 책 캐드펠 수사 시리즈를 아주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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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파의 시간 - mRNA로 세상을 바꾼 커털린 커리코의 삶과 과학
커털린 커리코 지음, 조은영 옮김 / 까치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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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비범한 한 소녀가 있다. 떡잎부터 다르다. 푸주한인 아버지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돼지를 잡는다. 돼지의 배를 가르고 배 속에 손을 넣어 내장을 퍼내고 척추를 따라 몸을 절반으로 가른다. 이 소녀는 사랑하는 아버지가 열두 살에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한 도축 기술을 활용해 어느 창조물의 복잡한 내부 지형이 펼쳐지는 광경을 넋을 잃고 지켜본다. 소녀는 어려서부터 주변 어디에서나 과학을 배웠고 처음부터 학교와 배움을 좋아했다. 소녀는 전쟁 직후 어려운 시기에 헝가리 어느 작은 소도시에 태어났다. 어려운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누군가 부탁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어려서부터 일을 한다. 소녀는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면서 공부도 한다. 공산주의 사회 체계와 시대가 주는 시련으로 인해 재능과 꿈을 펼칠 기회를 제약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 소녀는 자라서 세상을 역병에서 구해낼 기적을 기어코 만들어낸다. 기적의 정체는 mRNA이고 소녀의 이름은 바로 커털린 커리코이다. 커리코는 202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고 '코로나19 팬데믹으로부터 인류를 구한 여성과학자'라는 제목으로 전 세계 무수히 많은 매체의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한편 순조롭게 노벨상을 받았다면 이런 감동적인 책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또 그녀의 얼굴이 조국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벽화로 그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불굴의 투지'를 이럴 때 쓰는 것이구나 하고 배우게 된다. 저자가 노벨 생리학상을 받았을 당시 많은 보도 기사에 '고독했던 40년', '추방 위협에 강등까지', '대학에서 쫓겨났지만... 집념의 연구로' 이런 수식어들이 붙었었다. 저자는 정말로 순수한 열정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오로지 연구에만 전념한다. '인류 지식 가장 바깥쪽 경계까지 걸어간 다음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내디뎌 문턱을 넘고 경계를 돌파해 새로운 발견'(p245) 하는 순간에도 샴페인을 따기는커녕 평소대로 일을 하고 또 일을 한다. 물론 과학자로서 강렬한 기쁨을 맛본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고 연구는 연구다. 성과를 뽐내고 타이틀 가지는 세속적인 영예에 전혀 관심이 없는 저자는 오로지 성실하고 묵묵하게 연구에 매진할 뿐이다. 그래서인가... 저자는 학계의 아웃사이더가 되기에 이른다. 인간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익숙한 광경들은 과학계도 관찰된다. 세속적인 주류의 가치는 언제나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 말이다. 최고의 영예를 누리는 동료 과학자들은 연구를 지원할 보조금과 안락한 삶 등 원하는 것을 가진다. 과학자로서의 호기심을 잃은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저자는 학계가 오로지 DNA만 열중하고 RNA는 골칫덩어리 취급할 때도 불안정성이 곧 RNA의 핵심임을 알고 불굴의 의지로 연구를 지속한다. 정부 보조금과 연구비가 끊기고 동료들이 무시하고 승진에서 누락되고 심지어 소속된 기관에서 내쫓기다시피 해도 오로지 연구하고 또 연구한다. 연구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감내하는 저자가 걸어왔던 길은 성인의 삶과 비슷하다고까지 느껴졌다. 고되고 더딘 실험과 연구를 반복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이 책의 초반에 나왔던 저자의 어린 시절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아무리 고되고 지루하더라도 해야 한다고 판단되면 그냥 하는 것. 그것이 가족을 위한 사랑에서 비롯된 가사일이든 진리 탐구의 열정에서 비롯된 실험이든 말이다.


이 책을 옮긴 조은영 번역가는 역자 후기에서 이 책이 조금만 더 늦게 좋았을 뻔했다고 말한다. 왜냐면 이 책은 저자가 응당 누렸어야 할 명예와 칭송이 제대로 묘사되지 않기 때문이다.(한편 그것을 받았다고 해도 저자는 자랑할 사람이 아니긴 하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가 타임 100 서밋에서 연설하는 장면이 등장하고 에필로그에서는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기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전하는 용기의 말을 전하며 끝을 맺는다. 저자는 이 책이 나온 뒤인 202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다. 정말로 아쉽다. 이 책은 첫 문장부터 빠져들어 읽었다. 이 책은 불굴의 의지로 온갖 역경을 돌파한 어느 한 여성과학자의 회고록이다. 유년 시절에 대한 부분은 전쟁 이후 공산주의 체제 아래 헝가리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역사소설처럼 읽었다.(회고록이 이렇게 재밌다니. 소설처럼 술술 읽힌다. 문장의 호흡이 짧고 불필요한 묘사가 전혀 없다. 딱 필요한 지점에는 깊고 단단한 통찰이 기다린다. 그리고 중간중간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지점도 등장한다.) 유년 시절을 지나 청년기에 돌입하면 본격적으로 과학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기서부터는 대중 교양 과학서로써 독자들에게 지식을 전달한다. 그리고 여성이자 엄마이자 연구자이자 직장인이자 수많은 정체성과 역할을 수행하는 한 인간의 삶이 그려진다. 그리고 인류를 위기에서 구하는 발견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이런 기적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지... 깊은 깨달음과 경이로움, 숭고함, 경외심을 안겨 준다. 한 마디로 이 책은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읽기 경험을 선사했다.



*출판사 제공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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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행위 - 문학 노트 오에 컬렉션 3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상민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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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양심'이라 일컬어졌던 오에 겐자부로는 1935년 1월 31일 일본 에히메현 기타군 우치코초 오세 마을에서 유서 깊은 무사 집안의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나 2023년 향년 88세로 별세했다. 오에 겐자부로가 열 살이 되던 해 전쟁이 끝났고 일본은 패전국이 되었다. 이른 나이부터 전쟁과 군국주의 참혹함과 실상을 깨달은 그는 성장하여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던 실천적 지식인이 되었다. 그의 관심은 일본 사회 문제에 한정되지 않았고 국내외 정치 이슈를 포함하여 장애, 종교, 인류 구원 등의 주제로 나아갔다. 그가 40세였던 1976년에는 독재에 항거하던 김지하 시인의 석방을 호소하며 지식인들과 48시간 단식투쟁을 했던 것이나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59세 때 일왕이 주는 문화 훈장을 거부한 일화는 유명하다. 일본이 한국에 충분히 사죄하지 않았다고 했으며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주장에 대해서는 "일본이 침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며 비판하는 등 친한파 인사였다.

작가로서의 오에 겐자부로는 도쿄대 불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1958년 단편 「사육」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최연소 수상하면서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했다. 대학생 때 데뷔하여 스타 작가가 되어 직업 작가로서 평생 동안 그는 장편소설 33작품, 중단편 66작품을 비롯하여 논픽션, 에세이, 평론, 극본 등 여러 장르를 아우른 작가로 활동했다. 이 책 『쓰는 행위』에서는 평생을 '쓰는 행위' 특히 소설을 쓰는 행위에 대해 구도적 자세로 임한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창작론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중견작가로서 문단 내 지위를 확고히 해 가던 오에 겐자부로가 39세 때 발표한 소설 창작론으로 오에 컬렉션의 세 번째 책이다. 『쓰는 행위』는 1974년 『문학 노트』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나왔다가 이후 『오에 겐자부로 동시대 논집』 전 10권 중 제7권 『쓰는 행위』로 1981년 다시 출간된 것이다. 『쓰는 행위』는 작가의 사후 2023년 신장판으로 새롭게 나올 정도로 대표적인 소설론이라고 한다. 오에의 소설론과 작가론의 정수가 담긴 이 책은 국내에서는 21세기문화원이 오에 켤렉션(전 5권)으로 간행했다.

『쓰는 행위』는 오에 겐자부로 자신이 실제 소설을 쓸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쓰기에 대해 설명한다. 스스로의 내부 분석부터 출발하여 시점, 문제, 시간, 고쳐쓰기 등에 대하여 이야기하는데 이 책의 발간사를 오에 컬렉션 간행 위원회는 『쓰는 행위』라는 책이 '일종의 임상 보고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다'(p8)고 말한다.


제1장 「작가가 소설을 쓰려 한다」는 작가라고 하는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영역에 발을 내디딘' 사람이 소설을 쓰려 할 때 직면하게 되는 막연하고 불안한 상황에 대한 설명이다. 오에 겐자부로가 말하는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치열하게 고뇌하는 사람이다. 인류 역사 최초로 유일한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전통에 기대지도 않고 이전에 존재했던 지적 모험가들의 업적에도 눈길을 주지 않고 오로지 자기의 혼자의 힘으로 소설이라는 가공의 세계에 무언가를 표현해야 한다.

제2장 「말과 문체, 눈과 관조」는 소설을 쓸 때 작가를 괴롭히는 방해물, 즉 문체의 선택과 '눈'의 도입에 관한 내용이다. 오에 겐자부로에 따르면 '소설 진행을 시작할 즈음, 즉 미궁의 입구에서 흡사 괴물처럼 작가를 때려눕히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곤란은 문체의 문제이다'라고 말한다. '문체'라는 단어는 각양각색 제멋대로 쓰이고 있는 문학 용어이다. 틀에 박힌 가짜 문체와 진짜 문체를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작가가 지금 쓰고 있는 소설에 딱 들어맞는 문체를 찾는 방법은 "문장을 쓰고는 파기하고, 새롭게 문장을 쓰고는 다시 한번 파기하는 시행착오를 끝없이 반복하는" 것뿐이라 말한다. 그가 말하는 '눈'이란 시점의 설정을 뜻하는 것이다. 소설을 쓸 때 작가는 자신의 글을 위해 상상력을 동원하여 특정 시점을 선별하는 고생을 해야 한다.

제3장 「표현의 물질화와 표현된 인간의 자립」에서는 '언어의 광물 표본을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땅속 깊은 곳, 어두운 곳에 묻혀 있는 광맥 전체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애쓰고 있는'(p89) 창작자의 고통을 말한다. 이 장에서는 '이미지의 물질화', '소설 속 인간' 등과 같은 오에 겐자부로의 독자적인 용어를 만날 수 있다. 제4장 「작가에게 이의를 제기하다」에서는 자기 부정 없이는 제대로 된 소설을 쓸 수 없음을 강조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의 제기를 통해 고정 관념과 편견에 맞서 싸우고 소설을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제5장 「표현되는 말의 창세기」는 소설의 표현 수단인 언어를 다루고 있다. '소설의 언어는 논문이나 정보의 언어와 달리 단순히 지각에 의한 인식으로만 수용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p167) 오에 겐자부로는 소설의 언어를 '주문이 많은 요리점(미야자와 켄지의 단편 소설)'과 같다고 말한다. 독자인 우리는 소설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상상력을 풀가동하여 작가가 만든 구조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어야 한다. 제6장 「지움으로써 쓰다」는 퇴고에 관한 내용이다. '방금 쓴 소설을 대폭 삭제한다는 것은 마치 자식의 팔을 도끼로 베어버리는 것과 같은 작업'(p183)이라고 말할 정도로 퇴고는 어려운 과정이다.


『쓰는 행위』는 작고 가벼운 책이지만 읽기가 쉽지 않았다. 그간 읽기와 쓰기에 대한 책들을 몇 권 읽어왔지만 이 책은 그 책들과 달랐다. 책을 읽는 내내 광활한 우주를 탐험하는 기분이었고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영혼의 심연을 들여다본 것 같았다. 물론 어느 한 분야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들의 세계를 고작 며칠 투자해서 이해하겠다는 것은 과한 욕심이다. 나는 오에 겐자부로라는 아시아의 지성이자 일본의 대문호가 어떻게 소설을 썼는지 소설가로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본 것에 가깝다. 모든 작가가 오에 겐자부로처럼 치열하게 고뇌하며 글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또 진정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뇌하는 작가가 기울이는 노력이 언제나 성공적으로 우리에게 전달되지도 않을 것이다. 독자인 우리가 문학 속에서 감동과 충격을 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작가들의 헌신과 노고가 있었을까. 작가가 활자로 만들어낸 세계와 사회 속에서 독자인 우리는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다. 『쓰는 행위』를 읽으면서 오에 겐자부로와 같이 구도자의 태도로 소설을 쓴 작가들을 더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그래서 방금 쓴 몇 페이지를 다시 읽고, 수정하고, 다시 쓰는 것은 진정 겹겹이 쌓인 심리적 짐을 짊어지고 가는 노역이다. (중략)

나는 더 이상 형체가 없어진 문체의 껍데기에 나 자신에 대한 개념을 채워 넣을 뿐인 자동인형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 P91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오직 한 사람의 작가로서 소설을 쓰기 위해 나 스스로를 작가라는 직업 특유의(다른 일과 비교해 특별히 뛰어나다는 의미가 아니라) 카오스를 향해 채찍질할 때 겪는 일에 관한 것이다. (중략)

작가라는 직업 특유의 경험을 통한 다양한 과거 인식과 새로운 발견을 꼼꼼히 검토하여 지낼 수 있는 꽤 긴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시간을 통과하며 마주한 일들을 관찰하여 기록해 두고자 한다. - P13

실제로 작가는 대단한 준비의 축적과 확고한 기반에서 서서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이것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비극적인 점인데, 작가는 이런 상태에서 여전히 몸에 맞지 않는 과분한 야망을 품은 채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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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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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매일매일』은 백수린 소설가가 <경향신문>에 책과 빵을 소재로 연재한 짧은 글들을 수정하고 보완하여 묶은 책이다. 2020년에 첫 출간되었고 이번 책은 개정판이다. 소설가 백수린은 2011년 이후 등단 이후 『여름의 빌라』, 『눈부신 안부』, 『친애하고, 친애하는』,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등 여러 소설과 산문을 썼고 아고타 크리스토프, 마그리트 뒤라스, 아니 에르노, 프랑수아즈 사강 등의 소설을 번역했다. 현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백수린 소설가는 어떤 책들을 읽어왔을까.



백수린 작가는 고등학생 때부터 베이킹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 책에는 읽고 쓰는 것을 사랑한 만큼이나 빵 굽기도 좋아한 작가가 '빵'과 '책'을 매개로 삶과 글을 살펴본 것들을 모아 우리에게 건넨다. 작가는 빵 굽기와 소설 쓰기를 '똑 닮은 작업'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나의 한계를 알지 못한 채 하고 싶은 마음이 흘러넘쳐 시작했으나 남들이 능숙해지도록 혼자 여전히 서툴고 쩔쩔매는 일. 남들 앞에 선보여야 할 때면 자신감이 없지만 결과물이 어떻든 그만둘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게 소설 쓰기와 베이킹은 어쩌면 똑 닮은 작업'(p24)이기 때문이다.

『다정한 매일매일』에서는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존 치버의 『기괴한 라디오』, 마틴 슐레스케의 『가문비나무의 노래』와 같은 소설을 읽고 쓴 글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기시 마사히코의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페터 볼레벤의 『나무수업』, 이한승의 『솔직한 식품』 등과 같이 사회학, 원예 지침서, 식품 교양서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에 대한 글들도 포함되어 있다. 백수린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작가와 같은 책을 읽은 경우에는 반가운 마음이 들고 작가가 읽은 책 중 아직 읽지 않은 책이 있다면 전부 다 챙겨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이 책은 작가의 바람처럼 다정하다. 삶의 불가해하고 고통스러움을 들여다보지만 그 속에서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는다. 작가의 생각들은 담담한 글을 통해 전달되어 우리를 위로한다.




*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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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바다 암실문고
파스칼 키냐르 지음, 백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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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최근이었다. 올해 5월 즈음 신간 소식에 소개된 파스칼 키냐르의 책 『성적인 밤』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호기심에 검색해 보았더니 파스칼 키냐르는 작가들의 작가라고 불리는 사람이라고 한다. 파스칼 키냐르는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흠모하는 소설가였다. 파스칼 키냐르는 1948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언어학자와 음악가들을 배출했는데 이러한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5개 국어를 습득하고 다양한 악기를 연주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심하게 앓았던 두 차례의 자폐증, 68혁명의, 실존주의 구조주의 철학 등은 그의 작품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으며,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소설에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사랑 바다』에서는 17세기 예술가들의 기구한 삶이 펼쳐진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엔 작가가 기존에 창조했던 인물들도 등장한다. 예술가들은 예술은 사랑하는 만큼 인간의 육체와 감각이 빚어내는 열정도 사랑한다. 상대방을 자체를 욕망하는 것인지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상대방을 욕망하는 것인지 구분이 모호할 때도 있지만 어쨌든 욕망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파스칼 키냐르의 글은 탐미적이라고 하는데 사랑에 대해 쓴 부분에선 특히 더 아름다운 그의 문체가 돋보였다. 한편 『사랑 바다』를 소개할 땐 등장인물이 누구였는데 그들이 어떤 일들을 겪었고 등의 서사를 풀어 놓아야겠다는 생각은 굳이 들지 않는다. 나는 튈린이 왜 떠났는지 이유가 크게 궁금하지는 않았다. 인간은 맞는지 틀렸는지 영영 알 수 없는 온갖 이유로 무슨 행동이든 할 수 있는 존재이니까. 









파스칼 키냐르의 『사랑 바다』는 소설이지만 시처럼 읽힌다. 글을 읽다가 페르난도 페소아의 『불안의 서』가 떠올랐다. 나를 페소아의 글을 읽을 때는 점점 어둑어둑해지는 늦은 오후의 심상을 받는다. 『사랑 바다』는 나중에 어떤 심상이었다고 말하게 될까? 한편 최근 사서 읽고 있는 책 중 토마스 포스터의 『교수처럼 문학 읽기』가 있다. 이 책에서는 보통의 독자들이 소설을 읽을 때는 작품의 감정적 차원에서 반응하는 반면 문학 교수들은 물론 감정적인 차원에서도 반영하지만 대게 다른 요소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다고 설명한다. 이 작품의 감정적인 효과는 어디서 오는지. 등장인물들은 누구와 비슷한지. 이러한 장면을 전에 본 적이 있는지 등등. 교수들은 상징적 의미를 고려하고 작품 속에서 드러난 은유와 비유를 유추한다. 또한 패턴을 의식하며 책을 읽는다고 한다. 저자인 토마스 포스터 교수는 평범한 우리 독자도 교수처럼 읽을 수 있도록 훈련시키고자 하는데... 『사랑 바다』에서는 이 훈련법을 적용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어느 날 삶은 옷을 벗는다"(p441)라고 말했고 나는 이 문장에 반응했다. "세상은 깊고 밤은 거대하다"(p441)라고 말했을 때 나는 이미 한밤이었다.  



*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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