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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파의 시간 - mRNA로 세상을 바꾼 커털린 커리코의 삶과 과학
커털린 커리코 지음, 조은영 옮김 / 까치 / 2024년 7월
평점 :

여기 비범한 한 소녀가 있다. 떡잎부터 다르다. 푸주한인 아버지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돼지를 잡는다. 돼지의 배를 가르고 배 속에 손을 넣어 내장을 퍼내고 척추를 따라 몸을 절반으로 가른다. 이 소녀는 사랑하는 아버지가 열두 살에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한 도축 기술을 활용해 어느 창조물의 복잡한 내부 지형이 펼쳐지는 광경을 넋을 잃고 지켜본다. 소녀는 어려서부터 주변 어디에서나 과학을 배웠고 처음부터 학교와 배움을 좋아했다. 소녀는 전쟁 직후 어려운 시기에 헝가리 어느 작은 소도시에 태어났다. 어려운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누군가 부탁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어려서부터 일을 한다. 소녀는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면서 공부도 한다. 공산주의 사회 체계와 시대가 주는 시련으로 인해 재능과 꿈을 펼칠 기회를 제약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 소녀는 자라서 세상을 역병에서 구해낼 기적을 기어코 만들어낸다. 기적의 정체는 mRNA이고 소녀의 이름은 바로 커털린 커리코이다. 커리코는 202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고 '코로나19 팬데믹으로부터 인류를 구한 여성과학자'라는 제목으로 전 세계 무수히 많은 매체의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한편 순조롭게 노벨상을 받았다면 이런 감동적인 책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또 그녀의 얼굴이 조국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벽화로 그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불굴의 투지'를 이럴 때 쓰는 것이구나 하고 배우게 된다. 저자가 노벨 생리학상을 받았을 당시 많은 보도 기사에 '고독했던 40년', '추방 위협에 강등까지', '대학에서 쫓겨났지만... 집념의 연구로' 이런 수식어들이 붙었었다. 저자는 정말로 순수한 열정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오로지 연구에만 전념한다. '인류 지식 가장 바깥쪽 경계까지 걸어간 다음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내디뎌 문턱을 넘고 경계를 돌파해 새로운 발견'(p245) 하는 순간에도 샴페인을 따기는커녕 평소대로 일을 하고 또 일을 한다. 물론 과학자로서 강렬한 기쁨을 맛본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고 연구는 연구다. 성과를 뽐내고 타이틀 가지는 세속적인 영예에 전혀 관심이 없는 저자는 오로지 성실하고 묵묵하게 연구에 매진할 뿐이다. 그래서인가... 저자는 학계의 아웃사이더가 되기에 이른다. 인간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익숙한 광경들은 과학계도 관찰된다. 세속적인 주류의 가치는 언제나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 말이다. 최고의 영예를 누리는 동료 과학자들은 연구를 지원할 보조금과 안락한 삶 등 원하는 것을 가진다. 과학자로서의 호기심을 잃은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저자는 학계가 오로지 DNA만 열중하고 RNA는 골칫덩어리 취급할 때도 불안정성이 곧 RNA의 핵심임을 알고 불굴의 의지로 연구를 지속한다. 정부 보조금과 연구비가 끊기고 동료들이 무시하고 승진에서 누락되고 심지어 소속된 기관에서 내쫓기다시피 해도 오로지 연구하고 또 연구한다. 연구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감내하는 저자가 걸어왔던 길은 성인의 삶과 비슷하다고까지 느껴졌다. 고되고 더딘 실험과 연구를 반복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이 책의 초반에 나왔던 저자의 어린 시절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아무리 고되고 지루하더라도 해야 한다고 판단되면 그냥 하는 것. 그것이 가족을 위한 사랑에서 비롯된 가사일이든 진리 탐구의 열정에서 비롯된 실험이든 말이다.
이 책을 옮긴 조은영 번역가는 역자 후기에서 이 책이 조금만 더 늦게 좋았을 뻔했다고 말한다. 왜냐면 이 책은 저자가 응당 누렸어야 할 명예와 칭송이 제대로 묘사되지 않기 때문이다.(한편 그것을 받았다고 해도 저자는 자랑할 사람이 아니긴 하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가 타임 100 서밋에서 연설하는 장면이 등장하고 에필로그에서는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기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전하는 용기의 말을 전하며 끝을 맺는다. 저자는 이 책이 나온 뒤인 202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다. 정말로 아쉽다. 이 책은 첫 문장부터 빠져들어 읽었다. 이 책은 불굴의 의지로 온갖 역경을 돌파한 어느 한 여성과학자의 회고록이다. 유년 시절에 대한 부분은 전쟁 이후 공산주의 체제 아래 헝가리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역사소설처럼 읽었다.(회고록이 이렇게 재밌다니. 소설처럼 술술 읽힌다. 문장의 호흡이 짧고 불필요한 묘사가 전혀 없다. 딱 필요한 지점에는 깊고 단단한 통찰이 기다린다. 그리고 중간중간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지점도 등장한다.) 유년 시절을 지나 청년기에 돌입하면 본격적으로 과학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기서부터는 대중 교양 과학서로써 독자들에게 지식을 전달한다. 그리고 여성이자 엄마이자 연구자이자 직장인이자 수많은 정체성과 역할을 수행하는 한 인간의 삶이 그려진다. 그리고 인류를 위기에서 구하는 발견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이런 기적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지... 깊은 깨달음과 경이로움, 숭고함, 경외심을 안겨 준다. 한 마디로 이 책은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읽기 경험을 선사했다.
*출판사 제공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