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과 회복 -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을 위한 정의
주디스 루이스 허먼 지음, 김정아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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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참전한 군인들의 넋을 기리고 그들의 용기와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해 기념비를 세우고 추모 공간을 만든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평범한 일상을 누리던 누군가의 아들과 남편과 아버지들이 참혹한 전쟁터에 끌려가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피해자이다. 그들의 희생과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우리는 사적으로 공적으로 그들을 추모한다. 한편 강간 피해자를 위한 기념비가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만약 이 질문에 대하여 제일 먼저 든 생각이 '과연 그런 것이 필요하기는 한가?'였다면 당신은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성폭력 생존자들에 대한 무지와 수동적이고 방관자적인 태도는 성폭력 가해자들에 대한 일종의 무언의 지지이다. 성폭력 생존자들이 침묵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공동체가 강간 문화를 묵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해자만 트라우마를 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공동체가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사건을 비가시화하거나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심지어 사건의 내용만을 자극적으로 소비하는 경우 생존자들 회복을 불가능하게 한다. 생존자들은 공동체에서 분리된다. 강간은 사회적 사건이다. 강간 사건의 처리 방식은 공동체 정의와 관련된 사회문제인 것이다.


미국 미니애폴리스공원에는 '성폭행 생존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미니애폴리스에 거주하는 공동체 조직가인 세라 슈퍼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녀는 전 남자친구로부터 끔찍한 성폭행을 당했다. 가해자는 12년 징역형을 받았다. 그녀는 사법 시스템 안에서 피해자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법의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정의가 구현되었다고 느끼기 힘들었는데 그것은 공동체가 성폭행을 다루는 방법에 기인했다. 가해자의 부모는 아들이 기소당하게 되었으니 평소 아들이 훌륭한 인격을 가졌다고 증언해 주는 공동체의 지지를 기대했다. 가해자 부모가 이런저런 아들 구하기 활동을 펼치는 동안 그녀는 그들로부터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는데 이러한 것은 삭제당했다는 느낌을 주었다고 한다. 강간 사건 몇 주 뒤, 그녀는 이 범죄 사건의 피해자가 본인임을 언론에 밝히기로 했는데 자신의 지인 중에 자기 언론 활동에 응답해 주는 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


저자 주디스 루이스 허먼은 하버드대학 의과대학 정신의학과 교수이며 트라우마 치료 및 연구 분야의 세계적 거장으로 손꼽힌다. 이 책 『진실과 회복』은 허먼의 '트라우마 연구' 3부작 중 대미를 장식하는 역작으로 트라우마 회복에 필요한 마지막 요소로서 사회적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트라우마 회복은 공동체 차원의 진실 인정과 정의 바로 세우기가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이 책은 생존자들 중 여성과 아동 대상 폭력의 생존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생존자들을 택한 이유는 우선 이런 폭력은 인권 침해 중에서도 세계적으로 가장 흔하고 가장 오래된 인권 침해이기 때문이고 저자가 의료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이러한 생존자들과 가장 많이 작업해 왔기 때문이다. 책 2부에는 저자가 아동기 성 학대, 성폭행, 성매매, 성희롱, 가정 폭력 생존자 여성 스물여섯 명, 남성 네 명으로부터 수집한 증언을 증언을 토대로 정의의 비전을 논의한다. 여기서 염두 해야 할 점은 저자도 책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증언자들은 생존자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1세 미만이나 최근에 폭행을 당한 사람은 인터뷰에서 제외했다. 이 제보자들은 회복의 시간을 보낸 뒤 '정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성찰한 시간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권력>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이론인 '정의는 권력의 사회적 조직화에 의지한다'를 설명한다. 2부 <정의의 비전>은 제보자들의 증언으로부터 그려낸 정의의 비전을 상세히 설명한다. 3부 <치유>는 정의가 피해자를 치유할 뿐 아니라 가해자와 사회 전반을 치유할 수 있는 논의를 펼친다.



우리는 보통 '독재'라는 단어를 들으면 독재자 또는 소수의 권력 집단이 대다수 사람들을 대상으로 무한한 권력을 부당하거나 잔인하게 사용하는 것 정도로 생각한다. 독재는 계몽주의적 개념들인 '자유', '평등', '인권', '법치' 등과 대립항이다. 이 책에서는 '독재'가 '정의'의 대립항이기도 하다는 논의를 전개한다. 독재 사회는 강압적 통제의 수법들을 사용하여 종속 집단을 복종시킨다. 이 통제 수법들은 독재는 전쟁과 통지의 공개 영역에서도 친밀한 관계의 비공개 영역에서든 비슷한 양상을 띈다. 폭력은 아주 빈번할 필요도 없고 한 번 사용할 때 확실하게 사용하면 된다. 폭력의 피해자들은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는 신호인 '공포'와 더불어 사회적 감정인 '수치'까지 느끼게 된다. 지배자는 몇 사람을 대상으로 본보기식 폭력을 휘두르면 나머지 사람들은 독재의 규칙을 따라 사는 사람들인 '방관자'가 되기 쉽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부당한 사건들 앞에 "머 세상일이 머 원래 그렇지"라고 자조하는 사람들은 이미 방관자가 된 이들이다. 폭력의 생존자들에게 방관자들의 공모와 침묵이 더 큰 배신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즉 우리가 피해자가 되면 친구들, 친척들, 이웃들의 무관심과 공모가 직접 당한 피해보다 더 큰 상처가 되어 돌아온다는 말이다. 독재의 규칙도 공동체의 암묵적인 허락과 동의에서만 가능하다. 즉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역할이 중요하다. 생존자 정의의 제1원칙은 공동체가 피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비가시화되고 암묵적으로 용인해온 각종 폭력을 공동체가 인정해야만 정의가 설 수 있다.



우리 안에 너무나도 깊이 박혀 있는 억압 체계들의 해체,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무의식의 세계로 녹아든 억압 체계들을 낯설게 보고 불편하게 만들고 의식의 영역으로 끄집어 내는 것.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새로운 체계들을 창안하는 것. 이 유토피아적이고 추상적인 선언이 이 책 『진실과 회복』에서는 다양한 증언자들의 목소리로 구체화된다. 저자는 철학, 사회과학, 역사, 법, 심리학의 성과물을 통해 트라우마는 사회문제이며 결국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함을 설명한다. 우리 모두는 개개인의 단위로 또는 가족 단위로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생존 게임'에 참전 중이다. 이 책은 주로 젠더 폭력에 중심을 두고 있지만 이 책이 전하는 정의와 회복에 대한 통찰력은 사회 전반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공개적 인정을 통해 생존자들을 예우하는 것이 정의라고 한다면 이는 흔히 생각하는 정의 개념과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러한 인정이야말로 생존자 정의 실현에 필수적이다. 생존자들에게는 이러한 인정이 큰 의미가 있다. 공동체와의 깨진 관계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중략)



기념비는 우리 사회가 누구를 예우하고 누구를 존중하는지를 말해주는, 오래가는 공개 선언이다. 더 많은 경우에는 누락을 통해 누가 치욕당하고 무시당해야 하는지, 누가 안 보여야 하는지를 알려주기도 한다. (중략) - P22

성폭행 기념비도 마찬가지다. 이런 기념물은 생존자들의 권리를 공개적으로 옹호하고 남성 우월주의에 말해지지 않은 특권 의식들에 도전한다. 은폐되어 있던 잘못들의 공개적 인정은 평등한 정의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여러모로 표상한다. - P23

피해자가 분노를 느끼느냐는 그가 당한 피해에 공동체가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전적으로 좌우된다. - P60

‘독재의 규칙에 따라 살아가는 그들에게 무슨 방법으로 변화의 동기를 부여하겠는가, 그들보다 높은 사람(남자)의 권위에 의지해 단호하게 명령하는 방법 이외에는 없지 않겠는가‘ (중략)

‘그 남자에게 변화의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은 그의 부친이나 남자 상사나 남자 목사밖에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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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사랑한 예술가
조성준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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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예술가 25명이 등장합니다. 그들 대부분은 이 낯선 세상과 불화하며 흔들렸습니다. 때론 세상은 그들을 오해하고 손가락질했습니다. 하지만 기어코 본인이 해야 할 일을 완수했습니다.

『당신이 사랑한 예술가』 조성준 지음, 작가정신(2024)



지은이 조성준은 2014년부터 매일경제 신문사 편집부에서 근무했고 온라인 뉴스 플랫폼에서 ‘죽은 예술가의 사회’를 연재했다. 『당신이 사랑한 예술가』는 시대를 풍미한 천재 예술가 25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권력에 맞선 건축가 김중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시네마 천국으로 떠난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책에서는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유명 건축가, 화가, 만화가, 가수, 배우, 작곡가, 지휘자, 영화감독 등 25인의 삶과 예술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예술가 중 상당수는 반골이다. 그들은 규칙에 의문을 제기하고, 균열을 낸다. 이들에게 세상이란 혁신해야 하는 과제다. 하지만 어떤 예술가는 동시대의 공기를 힘껏 들이마시면서 낙관적으로 미래를 그리기도 한다. 백남준이 그랬다.

121페이지, <백남준>





살다 보면 깨닫는다. 사람에게서 위로를 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나는 너에게서 너는 나에게서. 어떤 사람들은 자연으로 간다. 어떤 사람들은 물질에 빠진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술에서 위로를 구하기도 한다. 한편 우리를 위로했던 예술가에 대하여 우리는 얼마나 알까? 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들의 그림과 건축과 연기와 노래는 사랑했으면서 그들의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김중업


현대 건축의 아버지인 르코르뷔지에의 제자였던 건축가 김중업은 삼일빌딩과 함께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곧 추락했다. 그는 건축가인 동시에 지식인으로 마포 와우 아파트 붕괴를 비롯해 정부 도시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소신 발언의 대가로 그는 정부 눈밖에 났고 반체제 인사로 몰려 1971년에는 추방당했다. 김중업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 완성되는 걸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했다.





히스 레저


스타의 요절은 대중의 상상력을 부채질한다.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히스 레저의 연기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그런 히스 레저가 세상을 갑자기 떠나자 세상은 그의 연기와 죽음을 연관시켰다. 그러나 히스 레저의 사인은 자살도 마약도 아니었다.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린 그는 수면제, 진통제, 진정제 등 독한 약을 한 번에 삼켰다가 약물 과다 복용 부작용으로 사망한 것이다. 반짝이던 스타는 더 발견해야 할 것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한편 그의 장례식은 히스 레저가 좋아했던 해변에서 열렸는데 그를 사랑했던 가족들과 친구들은 슬퍼했지만 울지 않았다고 한다. 웃고 춤추고 장기자랑하고 물장구치며 아름다운 배우이자 사랑받던 사람을 떠나보냈다.







마릴린 먼로


마릴린 먼로는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먼로에 대한 전기나 영화가 많이 나왔는데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먼로가 책을 사랑했고 배운 것은 행동하려 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먼로의 서재에는 제임스 조이스, 알베르 카뮈, 니코스 카잔차키스, 토마스 만, 도스토옙스키, 마르셀 프루스트, 에밀 졸라 등의 작품이 수두룩했다. 먼로는 시도 썼고 그가 생전에 했던 인터뷰에는 삶에 대한 섬세한 통찰력을 느낄 수 있었다. 먼로는 핵실험 반대 단체 회원으로 활동했고, 흑인 인권 운동을 후원했고, 쿠바의 좌파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를 지지했다.







로빈 윌리엄스


로빈 윌리엄스는 1990년대 전성기를 보낸 뒤 2000년대부터 연기폭을 넓히려 했다. 그런데 세상은 로빈 윌리엄스는 진지한 영화를 찍으면 안 어울린다며 손가락질했고, 코미디 영화를 찍으면 식상하다고 조롱을 했다고 한다. 한국인이 사랑했던 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할리우드에서 그런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그의 부고를 듣기 전까지 몰랐다. 그는 우울증을 겪었고 60살을 넘기고 나선 치매까지 왔다고 한다. 세상을 등지기 열흘 전 자기의 품에 딸을 품은 사진을 SNS에 올렸고 며칠 뒤 그는 떠났다.










『당신이 사랑한 예술가』는 각각의 예술가의 삶과 업적을 5페이지 내외의 길지 않은 분량으로 소개한다. 25명 예술가의 삶을 당시의 사회-정치적 맥락과 함께 소개하고 있어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내 기억 속에는 여전히 생생한 그 인물들의 빛났던 이름 뒤에 응당 따라붙었을 고통과 상실을 이번 책을 통해 조용히 엿들을 수 있었다. 






예술가 중 상당수는 반골이다. 그들은 규칙에 의문을 제기하고, 균열을 낸다. 이들에게 세상이란 혁신해야 하는 과제다. 하지만 어떤 예술가는 동시대의 공기를 힘껏 들이마시면서 낙관적으로 미래를 그리기도 한다. 백남준이 그랬다. - P121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 오히려 반대다. 기쁨은 금방 휘발하고, 지겨운 과제는 산더미다. 그래서 희극인은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오아시스다. 팍팍하고 서걱서걱한 삶 속에서도 우린 코미디를 보며 잠시나마 걱정을 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희극인의 삶도 희극일 것이라 오해한다. 휴양지에 사는 사람들이 마냥 행복하리라 착각하듯 말이다. 당연히 희극인도 비극과 싸우며 산다. 그럼에도 그들은 웃어야 하고 웃겨야 한다. 코미디 배우들은 속으로 운다.
그래서 그들은 종종 우울하다. 늙은 희극인의 얼굴은 유독 애잔하게 다가온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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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 - 비움의 길, 다스림의 길 이용주의 고전 강독 2
이용주 지음 / 이학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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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누가 썼는지도 정확히 모르고 수수께끼로 가득 찬 오천 자 남짓한 길이의 『노자』는 지난 2500여 년 동안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많은 사상가와 문필가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왜 『노자』를 읽어야 하는 것일까? 사는 것이 짐이고 고통이기 때문이다. 내 삶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고 내 머릿속에 가득 찬 것은 내 생각이 아닌데 내 것인처럼 집착하고 일희일비한다. 그래서 『노자』를 펼친다.

『노자』
세속의 문명적 가치관에 도전하는
해방과 치유의 메시지

『노자 도덕경』의 후서에서 저자 이용주 선생님은 『노자』는 세속의 문명적 가치관에 도전하는 해방과 치유의 메시지를 전한다고 말한다. 현대인인 내가 『노자』를 읽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후기 산업사회 말기에 살아가는 현대인은 신 대신 '물질'을 숭배하고 살아간다. 대단한 착각 속에서 내 것이라 여겨지는 나의 '자아'는 내가 원한다고 착각하는 온갖 것을 욕망하면서 죽을 때까지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애쓴다. 동시에 무의미에 시달리면서. 저자는 『노자』는 현대인에게 삶의 의미를 다시 묻게 하는 강력한 해방과 치유의 힘을 가진다. 여기서 눈여겨볼 만한 것은 이 힘이 대단히 현실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온갖 자기 위로-위안 산업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에 치유의 종류도 분별하여 선택해야 한다. 『노자』 읽기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88페이지- 노자가 우리에게 권유하는 바람직한 삶의 태도는 어느 선에서 ‘멈추는’ 것이다. 과도함을 알고 멈추는 것이 노자가 가르치는 지혜[明]의 핵심이다. 스스로 과도함을 알고 멈출 줄 알면 위험하지 않다. 적절한 선을 넘어 마구 달려가면 위태롭다[殆].

저자는 초학자라면 『노자』를 제1장부터 제81장까지 원본의 순서에 따라 독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선 순서대로 읽어가면서 나름의 논리와 흐름을 발견하고 어느 정도 독서가 진행이 되었다면 그다음에는 『노자』를 주제별로 읽어가는 것이 좋다. 저자는 총 81장인 『노자』의 주제를 크게 넷으로 나눈다. 이 네 주제는 수십 개의 소주제로 나뉜다.

제1주제 : 도론
제2주제 : 덕론
제3주제 : 수행론(치신론)
제4주제 : 정치론(치국론)
책 후서에 보면 각 대주제에 해당하는 수십 개의 소주제를 정리한 표가 실려 있다. 이 표를 정리해 놓고 읽으면 매우 큰 도움이 된다

노자 사상의 핵심,
자신의 선입견과 세상의 편견을 벗어던지자

노자 사상의 핵심은 자신의 선입견과 세상의 편견을 벗기는 것이다. 성인은 언어, 개념, 관념의 세계에 사로잡히지 않고 무엇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공로로 돌리지 않는다. 처음부터 내 것이라거나 나를 떠났다거나, 내가 버림받았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이 없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마음을 완전히 비운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노자』의 성인은 도를 체득한 사람이다. 마음에 가득한 허기심을 버리고 소박한 삶에 만족하는 삶이 도를 실천하는 삶이다.

노자는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기존의 질서 자체가 근거 없는 편견에 불과하며,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든 교체 가능한 인위적 질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 37페이지- 『노자』를 읽는 작업은 우리의 인식에 채워진 족쇄를 걷어내고, 존재의 자연본성(본질)에 뿌리내린 진정한 가치를 찾아나가는 여정에 참여하는 일이다.

🔸 533페이지-문명적 활동성이 지구를 파괴하고, 자연을 망가뜨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신경증과 불안증 환자를 양산해내고, 분노 살인자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가? 바쁘지만 불안한 세상, 정신없이 공허한 세상을 만드는 게 기여한 것은 아닌지 이제는 많은 사람이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노자는 세상의 가치와 달리 무위와 무사를 추구하는 통치나, 무미를 추구하는 요리사를 최고의 도를 이해하는 사람으로 칭찬한다. 통치자 개인의 자의적인 의도를 따르는 행동이 아니라 민심과 민의에 순응하는 통치, 달고 짜고 매운 화려한 맛을 추구하기보다는 재료의 본연의 맛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요리사가 진짜 요리사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모든 구절이 정확하고 상세한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해석되어 있는 것이다. 『노자』는 지명이나 인명 같은 고유명사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포리즘으로 가득 찬 『노자』를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 그냥 읽고 해석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이 난해하고 신비스러운 시의 형식을 가진 『노자』를 읽고자 한다면 누군가의 해석을 통할 수 밖에 없다. 이 책 『노자 도덕경』은 여러 판본을 비교 검토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해설하고 있다. 각 장은 모든 구절에 대한 설명 → 각 장이 가진 핵심 주제 및 시사점으로 전개된다. 동양 고전의 전문가인 저자 이용주 선생님의 번역과 해설은 상세하고 깊지만 편안하게 읽힌다. 『노자』를 읽어갈 때로는 높은 산을 올라야 하고 때로는 구불구불한 숲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 책은 『노자』 라는 산을 오르는 데 있어 최고의 길잡이가 되어준다.


#노자도덕경 #이용주 #이학사 #서평단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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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요새 - 사유의 미로를 통과하는 읽기의 모험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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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미로를 통과하는 읽기의 모험




올해 여름 교양인 출판사에서 출간된 <생각의 요새>는 고명섭 기자님의 네 번째 서평집이다. 그간 서평집으로는 <지식의 발견>(그린비, 2005), <담론의 발견>(한길사, 2006) , <즐거운 지식>(사계절, 2011)을 먼저 선보였고 중간중간에 평전, 시집, 철학 대담집 등도 출간하였다. <담론의 발견>은 철학박사 강유원과 함께 '2008년 학술출판 평론, 학술상' 출판 평론 부분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고명섭 기자님의 역작이라 일컬어지는 <니체 극장>(김영사, 2012), <하이데거 극장 1, 2> (한길사, 2022)을 펴냈다. <니체 극장>과 <하이데거 극장>은 일반 독자들은 선뜻 도전하여 읽기 어려운 니체와 하이데거라는 서양 철학사의 걸출한 두 인물의 내면과 사상을 깊이 있게 탐사하였는데 독자뿐만 아니라 강단의 교수들에게도 극찬을 받았다.






어려운 책을 읽는 기술


다카나 아키노리 <어려운 책을 읽는 기술, 바다출판사(2017) >에서 책의 유형을 구분하는 방법 중 하나로 '등산형' 책과 '하이킹형' 책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등산형 책의 대표적 유형으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를 들고 있는데 이러한 유형은 개념을 하나하나 쌓아 올리며 첫 쪽부터 차근차근 이해하면서 읽어나가야 한다. 반면 하이킹형 책은 쌓아 올리는 식이 아닌 다양한 새로운 개념과 논리를 연이어 서술해 가는 유형이다. 하이킹이라는 명칭대로 어느 산의 정상에 도달하는 것보다는 그 과정에서 경치를 즐기는 것에 주안을 둔다고 할 수 있다. 하이킹형 책의 대표적 예로 데리다의 <유한책임회사> 아감벤의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을 들고 있다. 물론 나와 같은 일반 독자에게 등산형 책, 하이킹형 책 모두 어렵긴 매한가지다. 이때 좋은 서평을 만난다면 어려운 책을 헤쳐나가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좋은 서평에는 저자에 대한 배경지식, 그 책이 전달하는 핵심 개념과 사상, 그 책이 가지는 의의 등이 명료하게 담겨 있다. 서평을 만나기 전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책의 존재를 알게 되고 새로운 의문들, 개념들, 사상들, 주장들을 접하게 된다. 고명섭 기자님의 서평은 내겐 일종의 지도와 같아서 내가 등산을 하거나 하이킹을 할 때 항상 길잡이가 된다.




마비된 자아에서 빠져나오기

<탈합치>_프랑수아 줄리앙

'탈합치(De-coincidence)'란 인간 삶의 근본적 작동방식을 '합치(coincidence)'에서 이탈(de)함'으로 이해하는, 줄리앙 자신이 창안한 개념이다. (p27)

이런 탈합치는 인간 실존에서도 발견된다. (중략) "탈합치는 자신과 자신의 일치, 자신에 대한 자기적응에 균열을 냄으로써 '자아'마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집을 떠나는 것은 바깥에 서기, 곧 실존하기를 가로막는 기존의 자기적응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해 탈합치를 실행하는 것이야말로 관성대로 살지 않고 진정으로 실존하는 삶을 사는 길이다. "우리가 환경, 집단, 군집에 퍼져 있는 암묵적인 합의의 결속에서 풀려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존의 요청을 포기하는 셈이다." 낡은 것과 결별하는 창조적인 삶을 살려면 탈합치의 실존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p28~29)


신유물론, 급진 생태학적 상상력

<신유물론 입문>_문규민

신유물론(neo-materialism)은 21세기 철학 최전선을 밀고 나가는 새로운 철학 이론이다.(중략)

신유물론의 '새로움'을 명확히 보려면 종래의 유물론과 대비해 보는 것이 좋다. 고대 이래 유물론은 물질이 자기 내부의 힘과 역량 없이 외부의 영향을 받아 작용하고 변화한다는 가정을 공통 토대로 삼는다. 이 유물론의 눈에 비친 물질은 수동적이고 무력하며 비창조적이다. 신유물론은 과거 유물론의 이런 가정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물질의 작용과 변화는 외부에서 오는 영향만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물질이 자신의 역량을 능동적으로 발휘함으로써 작용과 변화를 일으킨다고 보는 것이다. 능동성과 창조성이야말로 신유물론이 주시하는 물질의 새로운 특성이다. (p86~87)

이렇게 개념을 확장하면 행위자는 인간을 넘어 모든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은 "도구나 자원의 저장고가 아니라 얇은 행위자들이 우글거리는 사물들의 서식지"가 된다. 인간과 사물이 동종의 행위자로서 세계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p88)

신유물론의 이런 사유는 '포스트휴머니즘'의 사유로도 이어진다. (중략) 동시에 포스트휴머니즘은 "탈인류중심주의"를 뜻하기도 한다. 인간을 특권적 지위에 놓은 근대 존재론을 해체하여 사물과 인간의 지위를 평등화하는 것이다. (중략) 탈인류중심주의가 가정하는 것은 인간과 비인간을 존재론적으로 동일 차원에 놓음으로써,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근대의 인간중심주의 존재론을 넘어서자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신유물론은 급진적인 생태학적 상상력을 품은 새로운 윤리학으로 등장한다.(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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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어진 시대 1 - 원자시대의 시작과 상대성이론의 탄생 혁신과 잡종의 과학사 2
남영 지음 / 궁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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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반기는 상대론과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으로 아름답게 휘어지고, 양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의 무게로 처참하게 휘어진 시대였다."
<휘어진 시대 1, 1부 여명 P.26~27 >



이 책 <휘어진 시대>는 한양대학교 창의융합교육원 남영 교수가 그의 입소문 난 인기 강좌 '혁신과 잡종의 과학사'라는 수업을 바탕으로 탄생한 책이다. 남영 교수는 먼저 해당 강의 내용을 담아 <태양을 멈춘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첫 번째 책을 펴냈고 이번 <휘어진 시대>는 두 번째에 해당된다. <태양을 멈춘 사람들>은 지동설 혁명을 통해 과학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무엇이 과학인지 일종의 과학 자체의 개론을 다룬다면 이번 <휘어진 시대>는 여러 물리학 덕후들을 설레게 만드는 20세기 전반 과학사를 다룬다. 20세기 전반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그리고 원자물리학이 자리를 잡던 시기이다. 한편 이 책은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현대원자이론 자체가 주인공이 아니다. 그것을 만든 사람들과 그들의 시대가 주인공인 이야기이다. 과학이론에 대하여는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답에 도달하는 과정과 난관과 고민을 공감하는데 필요한 정도의 적절한 수준으로 다룬다.

<휘어진 시대> 1~3권 구성

<휘어진 시대>는 총 3권으로 구성된 대작으로 총 6부의 이야기로 정리되어 있다.

(1권) 1896~1919년. 고전역학의 시대가 끝나고 양자와 방사능, 원자와 상대성이 전면에 부상한 시기. 주요 과학자들로는 퀴리 부부, 톰슨과 러더퍼드, 플랑크, 아인슈타인 등이 있다.

(2권) 1920년대와 1930년대. 저자가 설명하는 1920년대는 새로운 과학이 만개한 시대이고 1930년대는 그 과학낙원이 붕괴한 시기이다. 양자역학의 대두라 거대한 충격이 주인공인 시기이다. 1900~1930년의 단 한 세대의 기간을 지나면서 과학은 더 이상 일반인이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형이상학적인 개념들로 가득 차게 된다.

(3권) 1권과 2권의 결과물.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시간들의 짧은 정리로 긴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고 한다. 이 시기는 가장 순수한 과학자들의 열정적 연구가 가장 끔찍한 결과물로 종합되며 대전쟁이 종결된다. 그리고 이 야합과 몰락의 시기 대재앙 이후의 세상은 더 이상 전과 같지 않고 그렇게 바뀐 세계는 오늘날 우리의 삶으로 이어진다.

​남영 교수는 20년 넘게 과학의 역사와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가르쳤는데 많은 학생들이 과학 자체를 오해하고 있음을 절실히 느껴왔다. 학생들과 일반인들에게 과학자란 어떤 이미지인가. 위인전 속 박제된 과학자들? SF 영화에 나오는 미치광이 과학자들? 남영 교수는 대부분 사람들이 중등교육과정 이후 사회생활에서는 과학자들도 결국 인간임을 배우게 되는 기회가 적은 것을 안타까워한다.



"과학자는 선하거나 약하지 않다. 과학이 선하거나 악하다"

<휘어진 시대 1, 저자의 말 중>



남영 교수가 학생들에게 전한 이 메시지는 <휘어진 시대>를 통해 독자에게도 전달된다. 이 책의 배경인 20세기 전반기는 인류사에 일찍이 없었던 속도로 극소수 과학자들에 의해 빠르고 아름다운 과학의 발전이 전개되었다. 이 아름다운 과학의 발전은 동시에 인류사적 비극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이 책은 수십 년간의 과학의 지적 모험과 야합을 다룬 글로 각 과학자들의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얽힌다. 그간 알아왔던 과학자들은 위인전 속 탈인간화된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세속에서 관심사는 크게 다를지언정 비슷한 번뇌와 좌절을 견뎌온 인간으로 다가오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의 빛남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과학자들의 업적보다는 그들이 답에 도달하는 과정과 난관과 고민들을 다루고 싶었다고 강조한다.



1권의 마지막은 물리학에 대한 경외감과 때에 따라 기묘한 행복감(저자의 표현)까지 선사하는 일반상대성이론의 본격적 등장을 예고하며 끝난다. 만유인력을 넘어선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뉴턴역학을 붕괴시킨다. 뉴턴역학과 특수상대론, 민코프스키의 다차원 기하학, 마흐의 비판정신, 괴팅겐의 수학적 도구들이 어우러져 탄생한 이 놀라운 이론은 휘어진 우주, 별빛이 휘는 세상에 우리를 데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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