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과 회복 -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을 위한 정의
주디스 루이스 허먼 지음, 김정아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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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참전한 군인들의 넋을 기리고 그들의 용기와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해 기념비를 세우고 추모 공간을 만든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평범한 일상을 누리던 누군가의 아들과 남편과 아버지들이 참혹한 전쟁터에 끌려가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피해자이다. 그들의 희생과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우리는 사적으로 공적으로 그들을 추모한다. 한편 강간 피해자를 위한 기념비가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만약 이 질문에 대하여 제일 먼저 든 생각이 '과연 그런 것이 필요하기는 한가?'였다면 당신은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성폭력 생존자들에 대한 무지와 수동적이고 방관자적인 태도는 성폭력 가해자들에 대한 일종의 무언의 지지이다. 성폭력 생존자들이 침묵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공동체가 강간 문화를 묵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해자만 트라우마를 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공동체가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사건을 비가시화하거나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심지어 사건의 내용만을 자극적으로 소비하는 경우 생존자들 회복을 불가능하게 한다. 생존자들은 공동체에서 분리된다. 강간은 사회적 사건이다. 강간 사건의 처리 방식은 공동체 정의와 관련된 사회문제인 것이다.


미국 미니애폴리스공원에는 '성폭행 생존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미니애폴리스에 거주하는 공동체 조직가인 세라 슈퍼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녀는 전 남자친구로부터 끔찍한 성폭행을 당했다. 가해자는 12년 징역형을 받았다. 그녀는 사법 시스템 안에서 피해자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법의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정의가 구현되었다고 느끼기 힘들었는데 그것은 공동체가 성폭행을 다루는 방법에 기인했다. 가해자의 부모는 아들이 기소당하게 되었으니 평소 아들이 훌륭한 인격을 가졌다고 증언해 주는 공동체의 지지를 기대했다. 가해자 부모가 이런저런 아들 구하기 활동을 펼치는 동안 그녀는 그들로부터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는데 이러한 것은 삭제당했다는 느낌을 주었다고 한다. 강간 사건 몇 주 뒤, 그녀는 이 범죄 사건의 피해자가 본인임을 언론에 밝히기로 했는데 자신의 지인 중에 자기 언론 활동에 응답해 주는 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


저자 주디스 루이스 허먼은 하버드대학 의과대학 정신의학과 교수이며 트라우마 치료 및 연구 분야의 세계적 거장으로 손꼽힌다. 이 책 『진실과 회복』은 허먼의 '트라우마 연구' 3부작 중 대미를 장식하는 역작으로 트라우마 회복에 필요한 마지막 요소로서 사회적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트라우마 회복은 공동체 차원의 진실 인정과 정의 바로 세우기가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이 책은 생존자들 중 여성과 아동 대상 폭력의 생존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생존자들을 택한 이유는 우선 이런 폭력은 인권 침해 중에서도 세계적으로 가장 흔하고 가장 오래된 인권 침해이기 때문이고 저자가 의료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이러한 생존자들과 가장 많이 작업해 왔기 때문이다. 책 2부에는 저자가 아동기 성 학대, 성폭행, 성매매, 성희롱, 가정 폭력 생존자 여성 스물여섯 명, 남성 네 명으로부터 수집한 증언을 증언을 토대로 정의의 비전을 논의한다. 여기서 염두 해야 할 점은 저자도 책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증언자들은 생존자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1세 미만이나 최근에 폭행을 당한 사람은 인터뷰에서 제외했다. 이 제보자들은 회복의 시간을 보낸 뒤 '정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성찰한 시간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권력>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이론인 '정의는 권력의 사회적 조직화에 의지한다'를 설명한다. 2부 <정의의 비전>은 제보자들의 증언으로부터 그려낸 정의의 비전을 상세히 설명한다. 3부 <치유>는 정의가 피해자를 치유할 뿐 아니라 가해자와 사회 전반을 치유할 수 있는 논의를 펼친다.



우리는 보통 '독재'라는 단어를 들으면 독재자 또는 소수의 권력 집단이 대다수 사람들을 대상으로 무한한 권력을 부당하거나 잔인하게 사용하는 것 정도로 생각한다. 독재는 계몽주의적 개념들인 '자유', '평등', '인권', '법치' 등과 대립항이다. 이 책에서는 '독재'가 '정의'의 대립항이기도 하다는 논의를 전개한다. 독재 사회는 강압적 통제의 수법들을 사용하여 종속 집단을 복종시킨다. 이 통제 수법들은 독재는 전쟁과 통지의 공개 영역에서도 친밀한 관계의 비공개 영역에서든 비슷한 양상을 띈다. 폭력은 아주 빈번할 필요도 없고 한 번 사용할 때 확실하게 사용하면 된다. 폭력의 피해자들은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는 신호인 '공포'와 더불어 사회적 감정인 '수치'까지 느끼게 된다. 지배자는 몇 사람을 대상으로 본보기식 폭력을 휘두르면 나머지 사람들은 독재의 규칙을 따라 사는 사람들인 '방관자'가 되기 쉽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부당한 사건들 앞에 "머 세상일이 머 원래 그렇지"라고 자조하는 사람들은 이미 방관자가 된 이들이다. 폭력의 생존자들에게 방관자들의 공모와 침묵이 더 큰 배신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즉 우리가 피해자가 되면 친구들, 친척들, 이웃들의 무관심과 공모가 직접 당한 피해보다 더 큰 상처가 되어 돌아온다는 말이다. 독재의 규칙도 공동체의 암묵적인 허락과 동의에서만 가능하다. 즉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역할이 중요하다. 생존자 정의의 제1원칙은 공동체가 피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비가시화되고 암묵적으로 용인해온 각종 폭력을 공동체가 인정해야만 정의가 설 수 있다.



우리 안에 너무나도 깊이 박혀 있는 억압 체계들의 해체,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무의식의 세계로 녹아든 억압 체계들을 낯설게 보고 불편하게 만들고 의식의 영역으로 끄집어 내는 것.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새로운 체계들을 창안하는 것. 이 유토피아적이고 추상적인 선언이 이 책 『진실과 회복』에서는 다양한 증언자들의 목소리로 구체화된다. 저자는 철학, 사회과학, 역사, 법, 심리학의 성과물을 통해 트라우마는 사회문제이며 결국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함을 설명한다. 우리 모두는 개개인의 단위로 또는 가족 단위로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생존 게임'에 참전 중이다. 이 책은 주로 젠더 폭력에 중심을 두고 있지만 이 책이 전하는 정의와 회복에 대한 통찰력은 사회 전반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공개적 인정을 통해 생존자들을 예우하는 것이 정의라고 한다면 이는 흔히 생각하는 정의 개념과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러한 인정이야말로 생존자 정의 실현에 필수적이다. 생존자들에게는 이러한 인정이 큰 의미가 있다. 공동체와의 깨진 관계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중략)



기념비는 우리 사회가 누구를 예우하고 누구를 존중하는지를 말해주는, 오래가는 공개 선언이다. 더 많은 경우에는 누락을 통해 누가 치욕당하고 무시당해야 하는지, 누가 안 보여야 하는지를 알려주기도 한다. (중략) - P22

성폭행 기념비도 마찬가지다. 이런 기념물은 생존자들의 권리를 공개적으로 옹호하고 남성 우월주의에 말해지지 않은 특권 의식들에 도전한다. 은폐되어 있던 잘못들의 공개적 인정은 평등한 정의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여러모로 표상한다. - P23

피해자가 분노를 느끼느냐는 그가 당한 피해에 공동체가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전적으로 좌우된다. - P60

‘독재의 규칙에 따라 살아가는 그들에게 무슨 방법으로 변화의 동기를 부여하겠는가, 그들보다 높은 사람(남자)의 권위에 의지해 단호하게 명령하는 방법 이외에는 없지 않겠는가‘ (중략)

‘그 남자에게 변화의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은 그의 부친이나 남자 상사나 남자 목사밖에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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