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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요새 - 사유의 미로를 통과하는 읽기의 모험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3년 8월
평점 :
사유의 미로를 통과하는 읽기의 모험
올해 여름 교양인 출판사에서 출간된 <생각의 요새>는 고명섭 기자님의 네 번째 서평집이다. 그간 서평집으로는 <지식의 발견>(그린비, 2005), <담론의 발견>(한길사, 2006) , <즐거운 지식>(사계절, 2011)을 먼저 선보였고 중간중간에 평전, 시집, 철학 대담집 등도 출간하였다. <담론의 발견>은 철학박사 강유원과 함께 '2008년 학술출판 평론, 학술상' 출판 평론 부분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고명섭 기자님의 역작이라 일컬어지는 <니체 극장>(김영사, 2012), <하이데거 극장 1, 2> (한길사, 2022)을 펴냈다. <니체 극장>과 <하이데거 극장>은 일반 독자들은 선뜻 도전하여 읽기 어려운 니체와 하이데거라는 서양 철학사의 걸출한 두 인물의 내면과 사상을 깊이 있게 탐사하였는데 독자뿐만 아니라 강단의 교수들에게도 극찬을 받았다.
어려운 책을 읽는 기술
다카나 아키노리 <어려운 책을 읽는 기술, 바다출판사(2017) >에서 책의 유형을 구분하는 방법 중 하나로 '등산형' 책과 '하이킹형' 책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등산형 책의 대표적 유형으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를 들고 있는데 이러한 유형은 개념을 하나하나 쌓아 올리며 첫 쪽부터 차근차근 이해하면서 읽어나가야 한다. 반면 하이킹형 책은 쌓아 올리는 식이 아닌 다양한 새로운 개념과 논리를 연이어 서술해 가는 유형이다. 하이킹이라는 명칭대로 어느 산의 정상에 도달하는 것보다는 그 과정에서 경치를 즐기는 것에 주안을 둔다고 할 수 있다. 하이킹형 책의 대표적 예로 데리다의 <유한책임회사> 아감벤의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을 들고 있다. 물론 나와 같은 일반 독자에게 등산형 책, 하이킹형 책 모두 어렵긴 매한가지다. 이때 좋은 서평을 만난다면 어려운 책을 헤쳐나가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좋은 서평에는 저자에 대한 배경지식, 그 책이 전달하는 핵심 개념과 사상, 그 책이 가지는 의의 등이 명료하게 담겨 있다. 서평을 만나기 전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책의 존재를 알게 되고 새로운 의문들, 개념들, 사상들, 주장들을 접하게 된다. 고명섭 기자님의 서평은 내겐 일종의 지도와 같아서 내가 등산을 하거나 하이킹을 할 때 항상 길잡이가 된다.
마비된 자아에서 빠져나오기
<탈합치>_프랑수아 줄리앙
'탈합치(De-coincidence)'란 인간 삶의 근본적 작동방식을 '합치(coincidence)'에서 이탈(de)함'으로 이해하는, 줄리앙 자신이 창안한 개념이다. (p27)
이런 탈합치는 인간 실존에서도 발견된다. (중략) "탈합치는 자신과 자신의 일치, 자신에 대한 자기적응에 균열을 냄으로써 '자아'마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집을 떠나는 것은 바깥에 서기, 곧 실존하기를 가로막는 기존의 자기적응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해 탈합치를 실행하는 것이야말로 관성대로 살지 않고 진정으로 실존하는 삶을 사는 길이다. "우리가 환경, 집단, 군집에 퍼져 있는 암묵적인 합의의 결속에서 풀려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존의 요청을 포기하는 셈이다." 낡은 것과 결별하는 창조적인 삶을 살려면 탈합치의 실존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p28~29)
신유물론, 급진 생태학적 상상력
<신유물론 입문>_문규민
신유물론(neo-materialism)은 21세기 철학 최전선을 밀고 나가는 새로운 철학 이론이다.(중략)
신유물론의 '새로움'을 명확히 보려면 종래의 유물론과 대비해 보는 것이 좋다. 고대 이래 유물론은 물질이 자기 내부의 힘과 역량 없이 외부의 영향을 받아 작용하고 변화한다는 가정을 공통 토대로 삼는다. 이 유물론의 눈에 비친 물질은 수동적이고 무력하며 비창조적이다. 신유물론은 과거 유물론의 이런 가정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물질의 작용과 변화는 외부에서 오는 영향만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물질이 자신의 역량을 능동적으로 발휘함으로써 작용과 변화를 일으킨다고 보는 것이다. 능동성과 창조성이야말로 신유물론이 주시하는 물질의 새로운 특성이다. (p86~87)
이렇게 개념을 확장하면 행위자는 인간을 넘어 모든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은 "도구나 자원의 저장고가 아니라 얇은 행위자들이 우글거리는 사물들의 서식지"가 된다. 인간과 사물이 동종의 행위자로서 세계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p88)
신유물론의 이런 사유는 '포스트휴머니즘'의 사유로도 이어진다. (중략) 동시에 포스트휴머니즘은 "탈인류중심주의"를 뜻하기도 한다. 인간을 특권적 지위에 놓은 근대 존재론을 해체하여 사물과 인간의 지위를 평등화하는 것이다. (중략) 탈인류중심주의가 가정하는 것은 인간과 비인간을 존재론적으로 동일 차원에 놓음으로써,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근대의 인간중심주의 존재론을 넘어서자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신유물론은 급진적인 생태학적 상상력을 품은 새로운 윤리학으로 등장한다.(p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