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없는 세계, 인문학. 천부적인 재질 즉 천재가 자기 안에 없으면 현현되지 않는 교착의 학문. 슬럼프에는 자살충동까지 불러일으켜 고독사로 이끄는 무서운 주범. 그러나 학문과 예술의 가장 정확한 접점, 역사로서의 증인, 무엇보다 젊은이들에게는 자신의 꿈에 무한히 기투할 수 있는 세계. 불가에서 스님들이 중생의 회향을 목적으로 하듯이 문학의 도는 눈이 멀어버린 자, 즉 세상을 모르거나 자기 자신을 모르는 자들을 위한 정신개조에 그 뜻을 품고 있다. 비록 세계대공황이 역사상 최악의 불황을, 1퍼센트 클래스가 그 가세가 너무 강해져 시장이라는 배 자체가 기울어지는 초유의, 그러니까 집단괴멸상태의 앞에 선 우리들이지만, 우리는 문예의 힘, 이 아카데미즘과 예술이 빚어낸 전당, 언론보다도 강한 양심의 주춧돌(순문학)을 생활고에 시달리지만 고매한 선비와 같은 문인(지식인)들이 이끌어나가야 할 입론과 정립의 발로가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선사에 들어가기 전 이러한 연설이 적힌 쪽지를 노 승려에게 전달했다. 이미 눈썹이 희끗희끗한 그는 연륜이 들어 보이는 고요한 눈으로 나에게 미소를 보냈다. 제 딴에는 이를 가르침을 주십시오 혹은 진리라 무엇입니까?”하는 일종의 영광을 담은 편지로 생각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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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동불(金銅佛)은 푸근히 그러나 엄정히 앉아있었다. 왜 그런 느낌을 받았냐면,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면서도 눈은 날카로웠고, 편안히 앉아있으면서도 허리가 너무 꼿꼿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마치 음악의 이중창(二重唱)과 같은 오묘함의 법도를 느끼게 했다. 불상은 마치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중요한 것은 나에 믿음이 아니다. 나의 종교는 기독교와는 달리 믿음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다만 믿음에 대한 아라한들의 선례를 들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고 믿음의 차원은 자기의 영역에서 깊이 들어가는 것 하나로 족하다. 어찌 두 사람을 믿겠는가? 믿을 수 있는 자는 자기 자신뿐이니라. 만일 자신을 완전히 믿는다면, 너의 눈에 비치는 너의 반영인 삼라만상 역시 그 믿음의 당위성을 확보할 것이로다. 중요한 것은 불도이지 우상숭배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지 믿는 대상이 아니니라. 네가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움 자체이거나 너 자신일 뿐이며, 네가 사랑하는 여인 또한 그 여인에게서 너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니라. 보거라 준석아, 모든 것은 하나다. 일체에서 세계가 만드는 차이소들의 유비가 개시되는 것이니라. 삼라만상()이 어떤 의미()도 없으니(), 그것이 곧 무상성(無相性)이로다”. 나는 부처님의 말씀을(사실은 내가 생각하는 것을) 잘 새기어들었다. 무연한 세상, 무의미한 세상의 온갖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신경증적으로 보전하려는 현대인들, 서구인들의 정신적 자세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들은 사실 무상성의 법칙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단지 그들은 이 참혹한 사실을 마주보기 싫어서(태양을 정면으로 볼 때 눈이 멀어버리는 것처럼) 불가의 정직한 가르침을 애써 외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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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냄새가 가을의 방향을 타고 흘러들어와 내 코를 적셨다. 가을의 냄새는 언제나 그렇듯 쓸쓸하고 외롭고 약간 차갑다. 희색이다. 그리고 향의 냄새에서는 제사의 냄새, 죽음의 냄새가 난다. 이 두 가지가 겹쳐서 나는 조금은 경도된 자세에서 대오각성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불가의 가르침이 삶을 인류사고(人類思考)의 아이러니, 시대정신이라는 집단정신병, 심지어 고해로 보고 일소시키는 데에 평온함과 동시에 두려움을 느낀다. 오늘따라 이중창이 듣기 싫다. 그리고 심지어 나조차도 이중적 인격을 지닌 인간이 아닌가 하는 의구가 든다. 사회의 페르소나로서 기능적인 나와, 자신의 진정을 추구하는 순수자아로서의 나, 이 양가성의 기로에서 나는 무엇일까? 아마 이 전부일 것이다. 아마 이중나선으로 양자가 혼합된 것이다. 하지만 차이가 한낱 미망이라는 불가의 가르침에 위배하여 좀더 분열되어 모순된 인격을 살아가는 내가 있다면? 그것을 극한까지 밀고 나간다면? 이는 단지 바보에 불과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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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선가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분명히 들리지만 믿을 수 없고, 그렇다고 들리지 않는다고 부정하며 거짓말을 할 수도 없어서, 나는 들리는 것 같다고 세상에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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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들로 이루어져 왠지 쓸쓸한 온도를 풍기는, 낮은 지형의 뒷산들이 병풍처럼 굽이 보는 가운데, 아파트 단지들의 행렬이 저지대에 드문드문 형성되어 있다. 드높은 곳에서 푸른 빛깔로 유영하는 하늘의 빛깔은, 미적거리는 저온과 함께 휘몰아치는 바람에 의해 한층 그 투명함이 지상으로까지 전달되었다. 내게는 이러한 전경이 아련하게만 느껴졌다. 바야흐로 가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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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의 창에는 지긋한 관록을 심어주는 바랜 햇살이 어느 찰나에 비스듬히 투과한다. 희색과 하얀색이 전체적으로 섞여 둔탁한 일곱 가지 무지개의 나뉨이, 어떤 반영의 그림자를 그리듯 기내에 쓸쓸한 수채화를 소묘한다. 이러한 인식은 빛바랜 과거의 연상과 같은 것이다. 마치 플라이미드 필름으로 나의 과거사를 찍어, 현상해 널어놓은 갈색 사진을 자조하여 바라보는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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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순간들, 시공이 연계되는 임계점의 연쇄는 알 수 없게 관조하는 초연한 순간들을 의식 안에서 빚어낸다. 풍경과 풍경의 이음새가 형용할 수 없는 정신현상, 이를테면 반추가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이어지고 감수성의 떨림이 일정한 이미지로 설계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건 자연적인 현상에 다름없다. 최소한 나의 지각에 있어서는 부지불식간 스스로 그러하다.

   이윽고 산 밑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필라멘트들의 노란 행렬이 양쪽에서 가차 없이 다가오며 어둠 속에서 긴장을 형성할 때, 아직까지도 마모되지 않는 시간의 사슬을 알아차린다. 기억과 기억이 이어져 있는 것, 그것은 한 개인의 역사성으로서의 시간성이, 현재로서의 뚜렷한 지적 인식 없이 한없이 흘러가, 꼭 한 가닥 가느다란 희망도 좌절도 없는 초연한 가운데서, 주체할 수 없는 삶의 통시성으로서의(혹은 과정으로서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러한 바를 소급이라고 부르면 소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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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철이 역사(驛社)를 떠나 행군하고 있는 모습이 아랑곳하다. 그러나 버스는 순식간에 그 기계적인 율동을 흘려보내고, 또다시 시골풍광으로 들어간다. 아스팔트의 끝물에 서있는 인공적인 울타리들 안에 펼쳐진 도랑과 석간수(石間水), 수맥의 힘을 받은 기다란 수풀이며 이들의 모습을 희 번득거리게 하는 유난한 가을햇빛과 이 주위를 뛰노는 아이들의 일상적인 느림 같은 것이 창가에 비친다. 나는 서글프기도 했다가 이내 자신의 삶이 매우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나는 나의 청춘을 양주에서 불사른 것과 이곳에서 보낸 지난 칠년이 부질없지만 그럼에도 유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격적으로 문인으로 살아가마고 다짐한지 딱 그만큼이 흘렀다. 무진하게 살아온 세월이 덧없는 인생 속으로 미끄러져 청운을 지향하는 것은 사라져버렸지만, 그럼에도 예도(藝道)의 층위로서 글쓰기에 스며든 대의의 칼날은 더욱 시퍼레졌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 자기가 보는 세계가 진정 감수성의 영역인 것이다. 고결함의 영역은 굳이 표현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어떻게든 타자로서 뻗어나가지 않고 온전한 동일자로서, 즉 존재자 안에 본질과 현상이 일치하는 향기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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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연변풍경을 바라보던 나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양주 방방곡곡 버스로 돌아다니면서 나는 이 공간 저 공간 속에 감겨있는 좋은 추억이며 악몽과 같은 기억들이 유령처럼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양주는 내 청년시절 그 자체였다. 나는 열아홉의 끝 무렵부터 스물여섯의 가을이 다가오기까지 양주에 내 꿈이며 고고한 사유며 혁혁한 사상이며 내 마음을 전부 주었다. 여기는 내 인생에 있어 가장 눈부신 시절이 아로새겨져 있는 곳이다. 전세계에서 이 좁은 지역인 양주, 가난한 사람들의 땅이 내겐 끔찍한 제2의 고향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내 생에 있어 한 지역에 이토록 오래 머문 전례는 있지 않다. 비록 내가 여기에서 개좆같은 일들을 겪고 말 많은 마을노인네들이 정신병자라고 낙인찍기도 하며 갖가지 우여곡절과 고통의 나락의 연쇄가 운무처럼 흔들거리고 있을지언정, 나는 이 비애의 땅을 사랑한다. 여기서 보낸 칠년이 내겐 청년의 대의의 목적을 향한 발걸음과 같은 것이고, 그 열정의 종횡무진을 나는 아직도 뜨겁게 기억한다. 하필 이곳은 찬란한 도심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프롤레타리아의 땅을 사랑한다. 임꺽정의 영()이 산 위에서 굽어보는 이 소박한 지역을 오래도록 뿌리 깊게 증오하다가, 이제야 나는 양주라는 대자연의 이름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언제까지 내가 여기 머물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미래에 그 어떤 지역에서도 나는 이와 같은 안위를 얻기는 힘들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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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서도 밝혔듯이 스무 살에 양주에 망명 와서(아버지가 주식에 집 한 채를 축내 의정부에서 쫓기듯 왔으니 망명 아닌 무엇인가)부터 나는 정식으로 운필하기 시작했다. 펜과 a4용지에 미친 듯이 자신의 생각을 썼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 내용들이었는데, 어디까지나 지금 쓰는 글들도 우스워 부끄러울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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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에 내 이성과 감수성을 담고자 하는 시도는 슬프게 아름다웠다. 그것은 눈부신 젊음의 지적 폭발이었다. 커피를 마시고 느끼던 언어가 의식 속에서 폭발하며, 하루라도 아포리즘을 끄적거리고 잠들 수 없었던 밤들. 세월의 풍파 속에 나는 이상의 [날개]에서 고립되고 무능한 룸펜지식인의 자화상을 내 안에 반영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는 부모 밑에 기생하며 대학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철학한다, 문학한다는 소리나 하며 어머니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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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의식의 지적 비약이 현현의 형식으로 아로새겨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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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한 번만이라도 날자, 날자 꾸나”,를 외치고 싶었다. 멈출 수 없는 자의식적 욕망은 언제나 그렇듯 노벨문학상의 허영을 상기시킨다. 문인이란 그런 것이다. 언제나 노벨문학상을 염두 해둔다. 이 상을 탄다는 건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의 중심으로 비끄러매는 것이니 당선자는 무인으로서의 영웅이라는 차원이 아닌 문인으로서의 영웅 즉 지독하게 인문학중심주의 사회인 조선에서 발로한 인문학적 정초는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지식인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문열과 고은이 무너졌고, 그다음에는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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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방 햇살이 찌부러진다. 버스는 천천히 달리다가 이윽고 지장사 입구에서 멈춰 섰다. 터벅터벅 버스계단을 내려왔다. 향나무와 밤나무 그리고 소나무가 옹기종기 있는 가운데 새들은 갸르르르, 하며 울음소리를 낸다. 아스팔트 오르막길 양쪽에는 그러한 나무의 모임이 있고, 생각보다 내 돼지 같은 몸무게로 이곳을 올라가기는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나는 불교를 믿는다. 신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불교의 사상만큼 진()에 가까운 것은 없다. 만일 내가 산으로 내려간 스님이라면, 희비도 없을 것이고, 꿈조차 꾸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다면, 더 이상의 존재에 대한 의문은 없을 것이다. 다시 한 번 햇살은 나를 강하게 친다. 마치 수타면을 만드는 요리사가 면을 치듯 매섭다. 석가의 얼굴을 뵈고 싶다. 이 산사에서 내 마음은 시나브로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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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석이 규칙적으로 군데군데 놓여 져 있어 왠지 고풍스러운 느낌을 준다. 포석은 대리석 재질이었다. 나는 포석을 밟고 걸으며 지난하고 질곡이 많았던 풍파의 세월을 정겹게 바라보았다. 단순히 회의나 자조에 젖어 응시하는 게 아니고 이것들이 내 삶의 소중한 일부 인 듯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해서 인생이란 끊임없는 사회에서의 기투다. 그리고 우리는 가정이 또 나의 작은 사회라는 걸 좌시하는데 가정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사회의 전범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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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탁의 구슬프면서도 담연한 소리가 들린다. , , , 그야말로 무의 소리다. 우울증에 걸린 이후로 나 역시 평생 무상에 관심을 두고 살았다. 나 역시 산을 사랑했다. 그것이 절과 이어지게 된 인연이었다. 나는 절에서 내 자신을 발견했다. 이 향내, 스님들의 몸가짐과 인격, 비인(非人)적이지만 그런 이유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곳은 신의 성역 이전에 인간의 성역과도 같은 곳이다. 그리고 나는 살이 찐 동양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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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면이 있는 스님이 오셨어요?, 그간 무고하셨습니까?”고 물어 , 오랜 만이예요하고 대답했다. 이 스님은 나이가 어린 나를 두고 까닭 없는 존댓말을 썼다. 하기사 태어난 날의 차이가 무엇이 그리 중요하겠는가. 운명에 의해 먼저 탄생할 사람은 탄생해서 부모가 되고, 운명에 의해 후자로서 자식은 태어나는 게 지상의 법도이거늘. 나이에 귀천을 따지는 것만큼 세속적이 것은 없다. 난 그런 연유로 유교를 싫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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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은 드시지요, 하고 입구의 길을 터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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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세트 - 전5권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 자본세트를 읽고 제 나름대로 제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제국주의가 물러나고 평등한 세상이 오길 원합니다.

- CIA 요원에게 암살당한 마하트마 간디

 

3년 동안 운동권에 투신해왔다. 경찰을 한나라당의 개로 생각하고 FTA에 강하게 반대하여, 양주·의정부 일대의 FTA천수막을 모두 가위로 잘라 버렸으며, 미국의 제국주의를 막고자 의지와 열정을 굳게 다짐했다. 이번에 진보통합신당의 당원으로 가입할 예정이다. 나는 옳지 않은 것, 내가 지금까지 그릇되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에 대해서 강한 반기를 들었던 건 유년 시절에까지 소급된다. 나는 교정에서 집합해서 애국가를 부르는 게 극우의 극렬이라 생각했다. 포퍼와 엘빈 토플러를 진심으로 경멸한다. 나는 절충주의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투사라 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단지 투쟁, 히틀러가 감옥에서 나의 투쟁을 미친 듯이 써내려갔듯이 사회주의의 대의는 마르크스/레닌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신념(이념)으로 이 이데올로기를 극단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본디 분노와 투쟁은 다르다. 투쟁은 어리석은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 상류계층과 국수주의에(나는 히틀러와 같은 국가사회주의자가 아니다) 반대하며, 약자, 가령 노약자와 어린이, 정신병자, 프롤레타리아, 룸펜 프롤레타리아, 소비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논리학의 변증법을 정초해야 하는 일종의 테제를 지향해야 하는 일들, 비록 내가 관점 의존성에 함몰되어 있다손 치더라도 나는 결백하다. 내 의식지평은 언제나 빈곤한 자들을 위해 희생할 용의가 있다. 내가 전태일처럼 노동자들을 위해 분신자살을 할 수 없다는 명제를 옹호한다 하더라도, 분명 나는 평생 변증법적 유물론에 투신할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나는 쁘띠부르주아를 먼저 잡아먹을 것이고, 그 다음에 상위1%에게 크나큰 타격을 입히겠다. 바로 언론과 민주화의 자주성에 입각해서 말이다. 가장 중요한 건 글로벌적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아니라 분배다. 이 나라, 대한민국은 통일이 시급한 것이 아니라(이명박 이 추잡한 인간은 통일세 제도를 폐지하라!, 북한은 한국이 아니다. 그 나라는 사회주의 나라가 아니라 전체주의 나라다. 북한은 전혀 남한과 연루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북한을 신경조차 쓰지 않아야 마땅할 당위성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 복지제도의 확충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 정신병자를 뉴욕 주처럼 본인의 허락 하에 입원시켜야 하며, 그 가외는 납치와 인신매매에 다름 아니다. 약자 또한 선택의 권리가 있다. 선택은 강자의 소유물이 아니다. 왜 우리 프롤레타리아들은 단결하지 못하는가. 왜 대규모 파업과 월가시위 같은 헤겔적 전체적인 정열이 없는가. 촛불시위는 시위도 아니다. 괴담에 이끌린 모순성의 시위가 과연 시위의 정합적 체계를 지니고 있을지 의문이 든다. 우리는 좀더 뭉쳐야 한다. [시민단체·인권위원회·야당·소비자위원회·신념 있는 고위관료]들이 뭉쳐야 한다. 만인의 프롤테라리아는 단결해야 한다. 또한 외람된 말이지만 나는 출판업계와 제약시장을 지키겠다. 제네릭 약물은 인민을 위해 허용되어야 한다. 대학병원 약값이 얼마인지 당신은 경험해 보았는가? 한국 재벌그룹이 생산하는 제네릭 약물이 미래이다. 서민은 좀더 값싼 가격에 약을 처방받을 권리가 있다. 이를테면 릴리는 정신분열증 약 자이프렉사를 개발한 후 16년을 고가에 팔아왔다. 개발비용은 얼마 들지 않는다. 리피토도 마찬가지다. 제약회사는 모든 사업 제분야중 최고의 황금시장으로 각광받고 있다. 대한민국은 진보해야 한다. 우리는 절대 미국과 유럽, 일본에게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겠다. 출판시장도 마찬가지다. FTA가 성사된다면 모든 번역 책은 1.5배의 가격상승을 맞는다. 우리는 결코 미국의 학자와 작가들에게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겠다. 그렇다고 나를 국수주의자로 폄하하지 마라. 현재 책값은 너무나도 비싸다. 음반도 마찬가지다. 근데 더 오른다는 말이다. 내가 양약과 책의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는 건 몰도덕적인 행위가 아니다. 나를 비윤리형이상학자라 괄시해도 나는 예수처럼 피를 흘리고 죽겠다. 대한민국 서민은 값싼 제네릭 약물과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은 책을 값싸게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저작권이라는 것은 부르주아의 인민에 대한 기만이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돈을 챙긴다. 한미FTA는 소고기, 자동차, 오토바이, 모든 전자기기, 담배연초, 시가, 궐련, 식품 등만의 관세를 완전 철폐하는 것만 허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시민의 삶은 부유해지고 윤택해진다. 비단 나라 발전도 중요하지만, 지금 내수 시장은 정신줄을 놓고 있다. 왜 미국에는 질 좋은 자동차를 팔아먹으면서 한국에는 쓰레기같은 자동차를 비싼 가격에 판매하고 수입차를 규제하는가? 내수시장의 발전을 위해서 부분적인 FTA의 체결이 필요하긴 하다. 예컨대 책이나 약물은 우리가 수출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위에 예시한 물건들은 수출하니,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관세장벽을 치고 현대자동차를 팔아먹으면, 최대 시장인 미국이 한국의 모럴을 뭐라고 여기겠는가? 무릇 오고 가는 게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런 이유로 나는 완전히 편협한 투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나는 제네릭 약물 시장과 출판시장을 지키고 싶다. 시민들이 적은 봉급을 받는 대신 값싸게 식료품을 사는 세상을 원한다. 나는 프롤레타리아가 생활의 풍파에 시달리지 않고 부유하고 윤택한 생을 누리길 원한다

그렇다면 그 기술적 접근, 방법론에는 어떤 게 있을까?

자본주의, 결국 자본은 모든 분야를 점령했다. 돈 없이는 한 걸음은 떼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종국 이런 사회병폐는 너무나도 비참한 결과를 낳았다. 거리 노숙자(이들도 똑같은 우리의 종족이다. 왜 평등의 원칙 아래 세워진 나라 아래서 같은 인간으로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강력범죄(돈 없는 사람이 저지르는 게 이런 단순 범죄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게 누구인가? 쁘띠 부르주아와 부르주아·엘리트 계층에게 단순범죄가 가당키나 한가, 사실 사드가 범죄자인지 사드를 가둔 왕가와 귀족들이 범죄자인지 진지하게 검토해봐야 할 것이다. 누가 정녕 자연의 본질을 그르쳤는가!), 어린여성의 창녀화(이런 난세일수록 여성은 결국 자신의 여성성을 물화로 지향시킨다, 왜 고귀한 형이상학적 어머니 여성의 개념을 자본주의의 회로에 강제로 집어넣는가, 이렇게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결국 스스로 그러함, 인간종족을 파멸시키려는 이미 통제력을 잃어버린 미친 자본의 힘이다.), 지하철 방송에서 들리는 좌파사범이라는 단어(과연 누가 진짜 사범인가!), 정말로 약이라는 용어가 의심되는 자본의 가장 큰 황금시장 현대서구약과 의료시스템(분자구조식 합성약은 일시성에 귀착될 뿐이다. 건강은 공짜로 얻어지는 손쉬운 것이 아니다. 건강도 진지한 노력과 강함보다 더 절실한 부드러움이 필요하다. 히포크라테스의 참뜻은 자본의 창출이 아니었다. 만약 모든 약의 가격을 0원으로 항구적으로 동결시킨다손 하더라도, 그러니까 거줘 주더라도 내 몸의 시스템을 교란시키는 한심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돈에 굶주린 그리스도와 그의 추종자들, 초심을 잃은 아카데미즘(내가 제일 싫어하는 자들은 학자, 의사, 변호사들이다. 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건 권위이며 가장 더러운 곳이 학계이다. 배운 자들이 못 배운 같은 인간을 억압하고 배척하라고 배운 것인가? 진정한 선비는 결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는다. 그런 게 바로 자신과 이론을 일치시키지 못하는 깊이 없는시정잡배들이다), 무조건 FTA를 반대하고 늘어지는 지식인과 문단(자기들의 돈줄인 출판업의 붕괴를 심히 염려하고 있다. 이들은 인문학서를 터무니없는 가격에 소비력이 없는 가난한 선비들에게 팔아치우는 사기꾼들이다. 잡서는 잡서대로 대량으로 제로에서 현금처럼 찍어내어 무지한 소비자들을 서점에서 정가로 팔아치우며, 출판일과 가격의 비약을 비례시키는 고전적인 상술을 아직도 유지한다. 한국출판업계는 대쇄신해야한다. 무릇 배운 자들이 더 지독한 법이다. 이들은 선동을 수단으로 자신의 권위를 더블, 트리플로 불리려고 한다), 서민을 위한 정치가 아닌 돈을 위한 정치(신념의 정치가는 전면 공무화 되었다), 거품과 사기투자로 가득 찬 닷컴재벌의 부조리, 수수료와 이자로 돈을 버는 금융체제(수수료를 0원으로 동결시키지 않는다면 시민들이 나서서 짓밟을 것이다), 천박한 복사멜로디와 리드미컬과 거지같은 가사로 팔아재끼는 천박한 연예인대중음악계, adverstiment의 무한계열(왜 미디어에 이를 끼워 팔기 하는가? 한국처럼 끼워 팔기 adverstiment가 판치는 나라가 없다. 사실상 파는 것도 아닌 강제보기이다, 하나의 저급정치, 소비자고문이다.), 룸펜프롤레타리아의 범람, 투기에 미친 쁘띠부르주아(이들로 인해 부동산에 거품이 낀다. 이런 사회의 기생충들은 전부 발본색원하여 박멸해야 한다), 사실상 하는 일 없이 돈만 챙기고 있는 공무원(왜 회사라는 정글에서 도피하여 편하게 돈을 챙기는가, 서민들이 타는 버스비용을 왜 계속 인상하는가, 버스기사들은 담합을 못하게 서민들한테 무력으로 털려야 한다), 부패의 똥냄새가 진동하는 법조계(너희들은 인간을 심판할 권리가 없다. 인간은 신만이 심판할 수 있는 것이다. 감히 인민을 심판하려 드는가.), 10만원 미만으로 민족주의라는 연막표상을 이용해 착취하는 한국군무부’, 과연 우리가 이 나라를 지킬 필요가 있을까? 우리에게 주권도 주지 않는 이 나라를 북한에서 지켜야 할 의미 같은 게 처음부터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진정으로 부르주아와 엘리트 계층을 영멸시키는 실질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방법론은 무엇인가? 일단 자본주의 시스템은 정교한 먹이사슬이다. 정글에서 가장 큰 상위층, 즉 절대부르주아부터 잡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다. 좀더 손쉬운 먹이부터 찾아야 더 강한 Very very powerful peoples를 말 그대로 산 채로 잡아먹을 수있는 일 아니겠는가? 자본의 맹점은 결국 자연의 합법칙성의 하부구조라는 것이다. 배가 물 없이 뜰 수 있겠는가? 자본가일수록 그 자본의 향연에 취해 인간 자체는 더 약한 법이다.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어야 한다. 일단 공략해야할 건 널널한 자영업자와 출판업계, 의학계, 법조계 등 말하자면 쁘띠부르주계층이다. 이 분야들을 공시적으로 괴멸시키는 공통분모가 보이는가? 오직 하나다. ‘지갑을 열지 않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처음에는 지갑을 열지 않는 자가 더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 더 나아가 글로벌이 어려우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프롤레타리아다. 하지만 중요한 건 시간이다. 프롤레타리아들이 은행에서 전부 돈을 빼서 자택 개인금고에 보관한다. 어디서든 신용카드를 써서 업체에서 탈세를 못하도록 막아라. 신념을 위해서 좀 좋은 금고를 사라. 그리고 이런 행태가 지속되면 분명 빈집털이범, 더 나아가 대놓고 털 것이다. 여기에도 좌파의 신념을 적용시켜야 한다. 진짜 좌파는 고상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연인이다. 자택털이범에게 자연의 법칙을 일깨워줘라. 그들에게 자연을 감득시켜라. 말하자면 귀한 손님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금고와 가족 전체를 보안전산망으로 연결하라. 자다가 금고에 신호가 오면, 금고를 여는 시점까지 임박해서 준비해놓은 박달나무로 두개골을 부셔버려라. 무릇 귀한 손님일수록 더 대접이 융숭해야 하는 법. 주택에 주거자가 있는 상태에서 가택무단침입, 강도죄, 더 나아가 살인미수가 성립된다. 주머니에 칼을 숨겨놓은 것까지 확인하면 대가리를 달걀 부셔 버리듯 방망이로 죽여도(!) 된다. 이때 사람 안 잡으면 언제 사람 잡아보는 융숭한 경험을 해보겠는가? 정당방위는 이러라고 있는 것이다. 가족과 말을 맞춰서 살인미수로 몰아 아예 그 프롤레타리아 피 빨아먹는 범죄자를 진짜 산 채로 죽이는 것도 좌파적 신념의 좋은 발현일 것이다. 만약 무기소지하지 않았다고 하면 증거를 만들어라. 준비해놓은 칼을 손에 쥐어줘라. 손수건으로 전부 본인의 지문을 세척하고 그 악한의 지문을 잔뜩 묻힌 채로. 살인자로 몰아서 객사시켜라. 만약 자신이 높은 위치에 있다면 도청기를 발목 안에 장치시켜라. 스파이로 모는 것이다. 좌파지식인이라면 이런 식으로 부르주아의 미행을, 동지로 말미암은 2차 미행으로 비스 무리한 방법으로 제거시키는 방도도 유추해볼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권모술수에서는 오직 한 가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웬만하면 혼자서 깨끗하게 처리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 믿을 자는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정도 용기를 가지려면 수사관의 직감을 능가하는 지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소매치기, 소매치기를 가장 잘 대접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머니에 쥐덫을 준비해놓는 것이다. 남의 물건에 손 댄 자는 그 손모가지가 날아가도 명분이 없는 것이다. 이참에 서민을 기만하는 지하철 소매치기를 인민 보는 앞에서 버젓이 대접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인민재판은 시행되어야 한다. 쥐덫이면 거의 손모가지가 천천히 잘린다고 봐도 된다. 고대율법을 따르는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말이다. 이것이 자연 아닌가? 소매치기 놈들은 대부분 능글능글한 어린애들 아니면 프로들이다. 대부분 단체로 행동한다. 이들을 다 엮어서 감방에 처넣어라. 평생 젊은 인생을 그곳에서 썩게 확실히 보내줘라. 아예 지하철 내에서 인민재판으로서, 하나의 심급의 층위로서 발굽으로 서민들이 나서서 그 쥐덫으로 손모가지가 날아간 놈의 얼굴을 짓밟아 평생 괴물로 살게 만들어도 싸다. 그러면 그 동료는 복수는커녕 겁먹어 내뺄 것이다. 이미 치안과실의 죄가 국가에게 있으니 직접 몸소 행위자들이 심판하는 노력까지 보였으며, 좌파지식인과 투사들이 차후 충분히 대변해줄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자. 이들은 내가 말하려고 했던 핵심사상에서 비스듬히 외회하고 있다. 사실 제일 중요한 것은 주지하디시피 지갑을 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에게 있어 가장 큰 폭력이다. 인간이 업자들에게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자비인 것이다. 따라서 업계의 줄도산’, 피라미드식 자본주의의 하부구조가 와해되는 자본순환의 초토화’. 아무리 감언이설로 설득시키려 해도 우직하게 지갑을 열지 않는 그 노둔함. ‘요는 지갑이다. 결코 열리지 않는 지갑, 난공불락과 같은 지갑봉쇄의 미학. 모종의 루카치적 절제의 미학(나는 루카치가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미학을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그를 높이 산다. 아니 사실상 그는 모든 걸 망라했다!). 만인의 무소비의 단결, 이 전무후무함. 이를테면 밖에 나가 에스프레소를 마시지 마라.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커피점의 거품을 즉자적으로 괴멸시켜라. 책을 사지 마라. 출판업계는 줄도산의 앞에서 귀한 학술서들을 97%에 내놓을 것이다. 이게 자본의 법칙이다. 부르주아의 가장 큰 돈줄이며 의사라는 사기꾼들이 수발드는 의료계를 부정하라. 의료계를 ZERO로 만들어야 부르주아의 심장을 찌를 수 있을 것이다. 대학병원의 줄도산, 가장 중요한 건 줄도산법칙이다.

사실상 결론이다. ‘만인이 담합하여 지갑을 열지 않는 것’, 이것이 코다의 핵심 시너지다. 나는 외친다. ‘만인이여, 자본주의라는 외계에 이끌리지 말고 당신들의 지갑을 봉쇄하라!. 프롤레타리아의 힘을 보여줘라, 단결하라!’. 중국에서는 1자녀 원칙이 있어서 장남이 아니면 대부분 10살 이전에 대농가의 평생 착취의 수레바퀴에서 살며, 필리핀에서는 태어나자마자 평생 폐물쓰레기 산에서 그것들을 줍다가 인생을 마친다. 브라질과 멕시코에서는 단순범죄로 떠돌다가 교도소에서 일생을 마치는 인민이 대다수이다. 아직도 정의란 게 살아있는가? 신이 과연 존재하는가? 최소한 인간을 위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자연의 신만이 엄격하게 잔존할 뿐. 신이라는 관념은 프롤레타리아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정의라는 건 이 부패로 만연한 세상을 더 큰 힘으로 잡을 데에만 성립할 수 있다. 마틴 루터킹과 간디는 평화를 제창했지만 CIA요원에게 목숨을 잃었다. 이제 더 이상 평화라는 단순한 유언비어에 속아서는 안 된다. 불편부당한 현실은 우리가 직접 무소비라는 냉혹한 칼을 들을 때에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절대 지갑을 열어서는 안 된다. 부르주아들이 원하는 짓을 하면 안 된다. 단 한 푼도 쓰지 마라. 그리고 나서 천천히 모든 재화의 비용이 폭락하는 걸 바라봐라. 그걸 즐겨라. 너희들의 손으로 세상을 심판하라. 메시아라는 건 없다. 인간이 꼰 매듭은 인간 스스로만이 풀 수 있는 법이다. 너 자신을 너로 말미암아 구원하라. 냉정한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고 이용하라. 진정한 자비를 보여줘라. 佛法을 에피파니하라.

당신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당신 자신뿐이다.

단결, 프롤레타리아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단결이라는 내재적 일의성이다.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프롤레타리아 美石 박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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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월드북 88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정소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고 오마주 형식으로 적습니다.

열차를 인식하는 의식의 의식, 그것이 자아(ego)이다.

- 사르트르 문예작품 구토중에서

가 나 자신에게 자신 있고’ ‘정당하다고 여겨질 때’, 그러니까 자기에 대한 확신이 서는 지점에서 [대타존재로서의 실존]을 구성하리라. 여기에 대해 말하자면 나의 스승 사르트르부터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철학사상에서 세 가지 기법을 사용한다. [즉자], [대자], [대타]. 지극히 헤겔적인 기법이다. “즉자는 사물(아주 깊이 있는 대명사이니 유의해주시길.)의 무의식성과 사물 자체를 말함과 동시에 인간존재에게 이용당하거나, 깨어난 지식인이 아닌 남에게 억압받는 모자란 인간의 상태를 말한다. ‘비반상적이고 선택권이 없고’, ‘무의미하고 그냥 물활론적인 개념이다. 이에 반해 대자란 영문법의 자동사에서 만 떼어놓고 생각해보자. 자동사는 자기 자체가 기능을 하면서도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란 반성적이고 자유의지가 엄존하며, 대오각성의 인간, 요해하는 인간임과 더불어 노에마를 다루는 노에시스가 있는 인간이다. 각론을 모아 총론을 만드는 작용을 하는 것, 지해를 생성할 수 있는 인간이다. 이에 반해 대타는 타동사를 합성하면 된다. 타동사는 보어에 의존한다. 타인이나 타자他者에게 의지하는 습성이 있음이니, 이야말로 전체지에 가까운 연대주의적, 사회주의적인 것, 따라서 변증법적 유물론이 나타내는 세계지혜의 휴머니즘에 가까울 것이다. 사유를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언어도 있지만, 언어(유희)철학적인 저자로 말미암아 언어에서 언어로 연원하는 글쓰기가 있다. 선형적인 논변은 무한분할의 연속을 가져오고, 본디 사유가 아무리 설왕설래한들 담아내는 그릇은 제한적이니 사상가로서는 철학적 글쓰기에 파생의 유기적인 연결성을 부여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자신의 사변을 논리로써 담아낼 때에, 우리는 한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가령 글쓰기는 모두가 한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그것이 초심에서부터의 불이탈적인 철학적 글쓰기이고, 파생의 파생이라는 계열로 침잠하는 재인적 계기가 아닌 외화적인 계기, 각각의 다채로운 노에마(대상, 관념, 과정, 본질, 기억으로서의=사물과 유사한 독일어 현대철학의 최근류 개념이다, 즉 지시되는 대상)가 노에시스(지향하는 작용)에 의해 돌연 언어연쇄로 풀이되는 것, 따라서 우리는 의식의 의식이 만일 자아라는 사르트르적 개념을 선이해로 점철·상정한다면, 이 철학적 글쓰기, 부정과 비판으로부터 야기된(경외로부터 말미암은 게 아닌) 이 글쓰기를 모범적인 전범으로 밀어붙일 칸트적 당위를 재개할 수 있으리라. 바로 거기에 불을 지펴야 한다. 사르트르의 철학을 철학소설이라고 알튀세는 말했다. 반면 어떤 엄격한 교사는 사르트르의 철학이 언어유희의 극점에 다다랐다고 칭송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동전의 양면을 판단해야 하는가? 과연 사유에서 비롯되는 글쓰기가 아닌, 논변적 글쓰기에서 비롯되는 언어판단을 우리가 표상의 기점으로 확보해야 할 개시적인 열정을 거기에 밀어 넣을 수 있을까? 여기에 로크적 변별이 개입된다. 사물의 음영을,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포착하는 일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사르트르식 글쓰기의 일장일단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사르트르는 자신이 쓴 글을 수정도 안 하고 한 번 작성하면 다시는 읽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각성제를 송두리째 복용하고 미친 듯이 언어의 극단에 이르려는 언어모험의 철학자라해도 무변한 사실이자 정론에 가까우리라. 우리는 그를 신뢰할 수 있을까? 그가 자신의 사상을 진실 되게 존중하지 않았다는 점이 진짜라면, 또한 그의 사생활이 추잡한 인간으로 평판이 나 있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그의 사상은 깊지도 않고 그저 언어의 돌림과 폭발적인 공전에만 신경 쓰는 점이 없지 않은바 주지하다시피 그를 기교의 철학자라고 판단해야 하는 근거가 있을 수 있겠는가? 여기 한 가지 이야기가 있다. 사르트르가 방탕하게 생활하다가 마지막에는 파산에 이르러 노벨문학상 거절에 대한 걸 파기하고 다시 노벨위원회에 100만 달러(지금 시세로 환원해서)를 요청했다는 소문. 그가 메를로-퐁티나 카뮈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들과의 대화보다는 여자들과의 농담을 즐겼다는 소문. 철학자라는 사람이 매일 마다 엄청난 양의 위스키를 마셨다는 것, 스탈린 치하에서 망명해온 스탈린 정체政體 비판 작가 이반 데니소비치를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밀어 붙여 역사의 가지성의 오류를 범했다는 점, 20세기 지성의 최고봉이라는 수사가 붙어있음에도 불타는 난봉꾼이자 진실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 예를 들어 보자. “카뮈와 함께 옳기보다는 나와 함께 틀리는 게 더 좋을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진정 진과 오를 구분하지 못하고 공과 사에 통일성이 없는 추잡한 인간에 불과한가? 나는 그의 철학서적 존재와 무변증법적 이성비판이 위대한 철학책이라는 데 이견이 없음을, 학계에서 정론적으로 판단된 바를 비틀기는 싫다. 나는 따지기 좋아하는 투사의 기질이 있지만, 사르트르가 변증법적 유물론의 거장이라는 점에서, 나는 그를 비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존재와 무는 얼마나 광채로 넘치는 소설인가. 주석과 원전까지 단다면 a5크기의 책이 1800페이지는 족히 될 것이다. 변증법적 이성비판도 그의 방대한 체계를 보여준다. a5용지에 2300페이지라니, 어떻게 이렇게 일관된 철학체계를 이렇게 장대한 데이터로 풀어쓸 수 있는가? 더군다나 프랑스의 지적 전통인 철학서의 문학적 기법까지 활용해서 말이다. 또한 그의 첫 저서 구토는 얼마나 혁명적인가? 역사 이례 그런 소설이 있기나 했던 것일까? 그런 아방가르드성을 가진 소설은 지금은 찾기 쉬워도, 그 당시에서는 획기적이고 소설 자체만으로도 매우 훌륭한 작품성을 가지고 있다. 美石, 사르트르만 수년을 연구한 사람이다. 다른 우물을 팠을지언정 사르트르를 대학에서는 아니지만 엄연히 독자적으로 전공했다고 자긍과 자부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사르트르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헤겔, 키에르키고르, 베르그송, 후설, 하이데거 등을 묘파해야 한다. 최소한 현상학과 존재론의 표면까지는 접근해야 사르트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각설하자면, 사르트르라는 인간은 어찌하여 존재의 본질을 관통하는 언어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을까? 거기에 어떤 합목적성이나 개연성이 엄존하는 걸까? 사르트르는 거인인가 얼간이인가? 이 이분법의 양자택일에서 나는 이율배반을 일으켜야 할 것인가 배리를 강림시켜야 할 것인가? 나 또한 사르트르의 전통을 이어받아 사유보다는 언어를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일단 흰 종이가 있으면 아무 생각이 없어서 계속해서 미친 듯이 써내려갈 수 있다. 이 점이 내가 사르트르와 통시적인 연루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내가 탐구해왔던 건 언제나 그렇듯 실존주의였다. 실존주의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었다. 인간존재의 실존, 즉 현존재의 현전, 대자적 동태로 닦달음치는 심층적인 구조성의 본질적 열정!

글은 비판에서 시작되었지만 나는 그의 긍정적인 면만을 보려고 한다. 그의 언어적인 천재성 말이다. 또 하이데가가 자신의 존재론을 실존주의가 아니라고 상정했듯 나 역시 실존주의의 교황은 사르트르 한 사람 이외에 그 어떤 지식인도 자격을 가질 수 없다고 한다. 단순히 피투성에, 이를테면 현상계의 유동에 무너져버리는 소인배가 아닌 군자로서의, 과거와 현재를 분쇄하고 미래를 향한 열정적인 기투! 우리가 존속(존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미래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한다. 미래라는 3차원적인 시간성의 막단에서 우리는 총체적인 일단을 구비해야 하는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에서는 희망을 인류 최고의 가치로 정립한다. 우리는 지금 미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 짧고 예술 영원하다고 하지만, 현대의학으로 인간은 정상적인 정신상태로, 가령 학자로 치자면 100살까지 자신의 저술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다. 수의적 확률론의 퍼스펙티브로 보아도 우리는 분명 사고사로 죽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인간은 그리 쉽게 죽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 정말 질기기도 질기다는 걸 난 경험을 통해서 안다. 로크처럼.

난 아직도 변증법적 유물론이 여명기에 들어서있다고 확신하거니와 이 거대한 지적 전통은 우리의 투쟁으로, 또 그 후학의 투쟁으로 계급의 순환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마지막에는 모두를 평등하게 만듦을 우리는 목격할 것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사르트르가 극좌파의 대부로서 學史에서 한 획을 그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는 사실상 변증법적 유물론의 제창자였다.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읽어봐라. 여기에는 극한의 휴머니즘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평등과 자주성, 자유와 원활한 재화의 분배라고 부른다.

나는 내 삶에서 사르트르 스승님을 결단코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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