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연변풍경을 바라보던 나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양주 방방곡곡 버스로 돌아다니면서 나는 이 공간 저 공간 속에 감겨있는 좋은 추억이며 악몽과 같은 기억들이 유령처럼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양주는 내 청년시절 그 자체였다. 나는 열아홉의 끝 무렵부터 스물여섯의 가을이 다가오기까지 양주에 내 꿈이며 고고한 사유며 혁혁한 사상이며 내 마음을 전부 주었다. 여기는 내 인생에 있어 가장 눈부신 시절이 아로새겨져 있는 곳이다. 전세계에서 이 좁은 지역인 양주, 가난한 사람들의 땅이 내겐 끔찍한 제2의 고향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내 생에 있어 한 지역에 이토록 오래 머문 전례는 있지 않다. 비록 내가 여기에서 개좆같은 일들을 겪고 말 많은 마을노인네들이 정신병자라고 낙인찍기도 하며 갖가지 우여곡절과 고통의 나락의 연쇄가 운무처럼 흔들거리고 있을지언정, 나는 이 비애의 땅을 사랑한다. 여기서 보낸 칠년이 내겐 청년의 대의의 목적을 향한 발걸음과 같은 것이고, 그 열정의 종횡무진을 나는 아직도 뜨겁게 기억한다. 하필 이곳은 찬란한 도심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프롤레타리아의 땅을 사랑한다. 임꺽정의 영(靈)이 산 위에서 굽어보는 이 소박한 지역을 오래도록 뿌리 깊게 증오하다가, 이제야 나는 양주라는 대자연의 이름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언제까지 내가 여기 머물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미래에 그 어떤 지역에서도 나는 이와 같은 안위를 얻기는 힘들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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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밝혔듯이 스무 살에 양주에 망명 와서(아버지가 주식에 집 한 채를 축내 의정부에서 쫓기듯 왔으니 망명 아닌 무엇인가)부터 나는 정식으로 운필하기 시작했다. 펜과 a4용지에 미친 듯이 자신의 생각을 썼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 내용들이었는데, 어디까지나 지금 쓰는 글들도 우스워 부끄러울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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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내 이성과 감수성을 담고자 하는 시도는 슬프게 아름다웠다. 그것은 눈부신 젊음의 지적 폭발이었다. 커피를 마시고 느끼던 언어가 의식 속에서 폭발하며, 하루라도 아포리즘을 끄적거리고 잠들 수 없었던 밤들. 세월의 풍파 속에 나는 이상의 [날개]에서 고립되고 무능한 룸펜지식인의 자화상을 내 안에 반영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는 부모 밑에 기생하며 대학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철학한다, 문학한다는 소리나 하며 어머니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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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식의 지적 비약이 현현의 형식으로 아로새겨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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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만이라도 날자, 날자 꾸나”,를 외치고 싶었다. 멈출 수 없는 자의식적 욕망은 언제나 그렇듯 노벨문학상의 허영을 상기시킨다. 문인이란 그런 것이다. 언제나 노벨문학상을 염두 해둔다. 이 상을 탄다는 건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의 중심으로 비끄러매는 것이니 당선자는 무인으로서의 영웅이라는 차원이 아닌 문인으로서의 영웅 즉 지독하게 인문학중심주의 사회인 조선에서 발로한 인문학적 정초는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지식인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문열과 고은이 무너졌고, 그다음에는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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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 햇살이 찌부러진다. 버스는 천천히 달리다가 이윽고 지장사 입구에서 멈춰 섰다. 터벅터벅 버스계단을 내려왔다. 향나무와 밤나무 그리고 소나무가 옹기종기 있는 가운데 새들은 갸르르르, 하며 울음소리를 낸다. 아스팔트 오르막길 양쪽에는 그러한 나무의 모임이 있고, 생각보다 내 돼지 같은 몸무게로 이곳을 올라가기는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나는 불교를 믿는다. 신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불교의 사상만큼 진(眞)에 가까운 것은 없다. 만일 내가 산으로 내려간 스님이라면, 희비도 없을 것이고, 꿈조차 꾸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다면, 더 이상의 존재에 대한 의문은 없을 것이다. 다시 한 번 햇살은 나를 강하게 친다. 마치 수타면을 만드는 요리사가 면을 치듯 매섭다. 석가의 얼굴을 뵈고 싶다. 이 산사에서 내 마음은 시나브로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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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이 규칙적으로 군데군데 놓여 져 있어 왠지 고풍스러운 느낌을 준다. 포석은 대리석 재질이었다. 나는 포석을 밟고 걸으며 지난하고 질곡이 많았던 풍파의 세월을 정겹게 바라보았다. 단순히 회의나 자조에 젖어 응시하는 게 아니고 이것들이 내 삶의 소중한 일부 인 듯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해서 인생이란 끊임없는 사회에서의 기투다. 그리고 우리는 가정이 또 나의 작은 사회라는 걸 좌시하는데 가정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사회의 전범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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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의 구슬프면서도 담연한 소리가 들린다. 텅, 텅, 텅, 그야말로 무의 소리다. 우울증에 걸린 이후로 나 역시 평생 무상에 관심을 두고 살았다. 나 역시 산을 사랑했다. 그것이 절과 이어지게 된 인연이었다. 나는 절에서 내 자신을 발견했다. 이 향내, 스님들의 몸가짐과 인격, 비인(非人)적이지만 그런 이유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곳은 신의 성역 이전에 인간의 성역과도 같은 곳이다. 그리고 나는 살이 찐 동양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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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이 있는 스님이 “오셨어요?, 그간 무고하셨습니까?”고 물어 “네, 오랜 만이예요”하고 대답했다. 이 스님은 나이가 어린 나를 두고 까닭 없는 존댓말을 썼다. 하기사 태어난 날의 차이가 무엇이 그리 중요하겠는가. 운명에 의해 먼저 탄생할 사람은 탄생해서 부모가 되고, 운명에 의해 후자로서 자식은 태어나는 게 지상의 법도이거늘. 나이에 귀천을 따지는 것만큼 세속적이 것은 없다. 난 그런 연유로 유교를 싫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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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드시지요, 하고 입구의 길을 터줬다.